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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

통융 2014. 12. 9. 17:17

 

 

 

 

 

땅 끝

 

 

돌아 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거
내 얼마나 좋은가
              -歸性(귀성)-


긴 여행동안
너는 생각을
참 많이도 갈았구나.
            -강 자갈/주변인과시 03'가을-

                        <땅 끝 마을의 풍경>

날씨가 심상찮다.
땅 끝 가는 길은 어둠이 내리고 간간이 세워져 있는 표지판에 의지해 차는 일정한 어둠의 공간을 열고 초행길인 땅끝 마을로 달리고 있다.

어둠은 가끔 숙연할 때가 있다.

이 우주의 공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고 무한한 우주의 한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공간착시현상에 시공간을 넘나들게 하기도 한다.
달리는 차안에는 온갖 살림살이가 다 실려있다. 침실 작업실 식당 생활공간으로 꾸며진 움직이는 집이다. 그러다보니 이동 할 때는 시속 60KM정도의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면서 여간 조심스레 운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이렇게 큰 정원에서 살고 있다니.
                             -남도 여행 中에-

길은
하루종일 플라타너스를 업고
해를 따라 걷는다.
                                -길-

    <제주도의 웅솔 / 연필스케치 채색 30*50>


진도와 우항리의 공용 발자국을 둘러보고 해남 땅 끝 마을로 방향을 잡고 있다.
보길도를 둘러볼 예정으로 반겨주는 이는 없지만 새로운 곳을 만난다는 가슴 두근거림으로 마음은 분주했다.
땅 끝 왠지 끝이라는 단어의 의미에서 신비스러움 아니면 아련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진도에서 오후4시에 출발 곧장 달려왔는데도 밤 `0시가 넘어서야 땅 끝 마을에 도착했다.
전남 해남군 송지면 갈두리 땅 끝 마을이라고 해서 조용하고 조그마한 어촌쯤으로 기대 했으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휘황한 네온 빛과 요란한 숙박시설들의 조명으로 대낮같이 밝은 화려한 도회지의 어느 유흥가를 방불케 했다.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븐 날이고 내일은 공휴일이라서 그럴까? 많은 사람들이 조그마한 어촌 마을에 북적대고 있었다.
마을을 들어오면서 제일먼저 보였던 것이 마을 뒷산에 돌고래의 형상을 본 따서 만든 초현대식 전망대였다. 전망대는 화려하게 조명을 받고 어두운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
시간이 늦은 탓에 통관 의례(입장료 징수)도 없이 바로 차를 몰고 전망대로 올랐다. 전망대에는 레스토랑과 찻집이 있었지만 모두 문을 잠근 뒤라서 사람들이 없었다. 혼자서 여기저가 기웃거리며 구경을 하고 다시 마을로 내려왔다. 많은 여관과 민박시설들의 불빛이 유혹하고 있었지만 나에겐 상관없는 곳이다.
길 떠나면서 나름 데로 철칙을 몇 가지 세워서 다닌다.
첫째 숙박은 돈을 주는데는 이용하지 않고 가급적 차에서 잘 것. 둘째 식사도 돈을 주고 사먹지 않고 직접만들어서 해결할 것. 셋째는 입장료를 내고 공원이나 시설물을 이용하지 않으며, 도로는 통행료를 내지 않는 곳으로 다닌다는 철칙을 세웠다. 물론 부득이한 경우는 제외되겠지만 그 동안은 잘 지켜오고 있다.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고 선착장에 가서 내일 보길도 가는 배 시간과 삯을 확인했다.
배 출항 시간은 아침 7시,8시20분,11시에 있었고 배 삯은 편도가 일반 6700원 이었다. 확인을 하고 이젠 하루 밤을 지낼 자리를 찾아 주차를 해야 한다.
차를 세우는 곳은 명당을 골라서 세워야 편하게 하룻밤을 지낼 수 있다.
명당이란 차를 세워서 북쪽이 막혀 있어야하고 조용한 곳은 물론 차량이나 사람의 통행이 없는 곳이어야 하며 남쪽 즉 앞쪽은 넓게 트여 있어야 한다.
그런 명당? 자리를 찾기가 쉽지는 않지만 어쩌든 마을을 몇 바퀴 돌아서 겨우 마을귀퉁이 바닷가 도로에다 차를 세웠다.
날씨가 계속 좋지 않더니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차에 불을 피워야 할 만큼 춥지는 않을 것 같아서 그냥 옷을 많이 껴입고 잠을 청했다.
바람에 밀려오는 파도 소리가 점점 멀어질 때까지 땅끝 마을은 나그네의 밤을 지켜주고 있었다.

차가 흔들리며 차창에 부딪치는 바람 소리에 잠을 깨어 보니 벌써 새벽6시가 넘었다. 차 밖은 아직 어두웠다. 바람이 몹시 불었다. 이런 날씨에 배가 출항할 수 있을까.
손 전화로 일기예보를 알아봤다.
바람이 4~5m의 높은 파도가 일겠다고 했다. 그래도...
서둘러 선식으로 아침식사를 해결하고 7시배를 탈려고 선착장엘 갔으나 역시 매표장구가 굳게 잠겨 있었다.


보길도 뱃길이 끊어졌다.
바다의 길은 바람이 만드나 보다.
                     -파랑주의보 -


길을 감추던 안개
내 발자국 소리에 놀라
조금씩 길을 내어놓는다.
                       -안개-


' 파랑주의보!
바다의 뱃길은 바람이 만드나 보다 .'
윤선도가 나를 거부한 것이다.
원망스러운 바람아!
바다 저 멀리 드문드문 섬들 사이로 아련하게 이어져 있을 것 같은 뱃길을 처다 보며 보길도의 환상을 바람에 날려보내며 접기로 했다.
출항하지 못한 배들이 부둣가에서 줄줄이 묶인 체 출렁거리며 길 떠나지 못한 나그네의 안타까운 마음을 함께 해 주는 것 같았다.

못내 아쉬운 발길이었지만 뒤로하고 땅 끝 탑을 둘러보기로 했다.
땅 끝 탑은 마을에서 해안선을 따라 20여분 도보로 간다고 안내 표시가 되어 있었다..
날씨는 결국 눈보라를 몰고 왔다.
소용돌이치며 바다 속으로 돌진하는 눈보라들 거친 숨소리를 내며 파도는 땅 끝으로 끝으로 돌진해 오고 땅 끝을 지키고선 해솔 들은 모진 눈보라에 송두리 체 몸을 맡기고 이리저리 휘몰 리면서도 의연하게 버티고 선 모습은 푸른 솔의 기상과 강인함을 느끼게 했다.

<땅 끝 마을 정상의 토말 비석>

한참 길을 갔으나 탑은 보이지 않고 사자봉(땅끝 산) 정상으로 향하고 있었다.
길을 잘 못 든 것이다. 정상에는 어제 밤에 올라 본 전망대가 있었고 그 아래쪽에
'土末'이라고 쓰여진 조그마한 비석이
흙의 끝....'太初에 땅이 생성되고 人類가 發生하였으며 한 겨레를 이루며 그 다음은 國家를 세웠으니 맨 위가 白頭山이며 맨 아래가 獅子峰이니라. 우리의 조상들이 이름하여 땅 끝 또는 土末이라고.....'이라는 글귀가 비문 뒤에 새겨져 있다.

<땅끝의 상징탑>

잠시 눈보라가 그치고 눈앞에 펼쳐지는 해남 앞 바다는
그야말로 조용한 아침의 섬나라에 온 것 같았다.
여기저기 바다에 몸을 반쯤 내어놓고 있는 섬들과 구름들 그 틈 사이로 언뜻 쏟아내는 햇살을 받아 바다의 살 갖은 비발디의 사계중 봄 선율을 펼쳐놓은 듯했다. 그 위로 달려가서 뒹굴고 싶을 만큼 따스해 보였다.
그것도 잠시 또다시 산 정상으로 눈보라가 거세게 휘몰아쳐 내렸다.

길을 오르면서 땅 끝 탑 가는 길 안내 표지판을 잘못 보았던 것 같아서 다시 산을 내려오니 바닷가 벼랑끝에 서있는 탑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게 크지 않는 4~5m의 사각뿔 모양을 한 땅의 끝을 상징한 탑이지만 나름 데로의 많은 의미를 않고 거센 비바람과 바다를 지켜보고 있었다. 토말(土末)비석보다는 큰 의미가 없어 보였지만 탑에는 손 광은 시인의 시가 새겨져 있었다. 더러 여행객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탑에다가 자신들이 다녀간 흔적을 담으려고 열심히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해남 땅 끝 마을에서 보길도 가는 뱃길의 바다>



끝이란 것은 또 다른 시작일 것이다.
그 끝을 찾아서 길을 나서는 많은 사람들이 맨발로
저 푸른 바다를 첨벙첨벙 걸어갔을 것이다.
이렇게 모진 눈보라 속에서도 거침없이 당당히 나아갔을 것이다.
그들은 결국 또 다른 끝을 만들고
그 위에 새로운 역사가 기록되었을 것이며
그 끝에서 또 다른 시작이 되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땅 끝 바다는 온통 화이트 크리스마스 축제로 아름다웠다.
이리저리 바람에 몰려다니는 눈보라들이 하얀 꽃가루를 바다 위에 뿌려주고 땅끝을 지키는 푸른 해솔 들도 하얀 눈들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고산 윤선도의 숨결은 결국 만지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지만 또 다시 시작의 길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남기고 쉼 없이 들려오는 해송의 파성(派聲)을 뒤로하며
땅끝 마을에서 다산(茶山)의 차향을 따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