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불교

바른 앎을 알아차리는 참 말씀(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통융 2022. 11. 22. 09:48

바른 앎을 알아차리는 참 말씀(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반야는 연기법에서 연기작용의 실체인 공()의 진리를 바르게 알아차림하는 것이다. 공은 연기법

 

성불(性佛)은 무엇을 성취한다거나 얻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얻고 버리는 것은 이미 분별심이며 너와 나를 구분하는 이원론적 사고이다.

성불은 본래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견불성(見佛性)이다.

 

나타난 그대로 있는 그대로가 완전함이며 그것이 바른 앎이다.

다만 각자의 분별심인 알음알(괴로움과 번뇌)이만 내지 않는다면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 하고

번뇌(煩惱)즉 보리(菩提)이다. 일념이 삼천이고 삼제가 원융하여 즉견여래이다.

 

* 똑 바른 앎이 무엇입니까?<반야심경은 무엇입니까?>

손으로 하늘에 둥그런 꼴을 그린다.

혹은 손뼉을 친다.

(선문(禪門)의 해석으로 실재의 공에 대한 진리를 일어난 그대로 보여주는 연기작용성(緣起作用性)의 실지실견(悉知實見)의 법문이다).

 

만약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의 진리를 확실히 이해하여 깨닫고 있다면

지금의 선문답에 알아차림의 답이 나와야 한다.

그렇다면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는다.

 

하지만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다음과 같은 반심경의 언어적 설명(언설,법문,심경)이 필요하게 되는 내용이다.

 

<금강반야바라밀경>에서도 제1법회인유분이서 부처님이 금강반야바라밀의 진리를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부처님이 가사와 바루를 하고 차제로 걸식을 하여 공양을 드시고 발우를 씻고 손과 발을 닦고 자리에 앉아 명상에 드신다..... 이것이 그냥 진리이다. 평상심시도인 것이다.)

수보리가 알듯 하지만 확실히 알고 있지 않다.

희유하십니다로 부처님의 법문을 생각한다, 희유한 것이 아니라 알아차렸습니다. 분명하십니다’. 등의 답일 때 수보리가 바른 진리를 깨닫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해공(解空) 제일의 수보리라는 말이 아직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진리를 체험하지 못한 것을 증명한다.

그래서 부처님에게 진공(眞空)을 깨달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다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혹자는 수보리는 알고 있지만 대중을 위해서 질문을 한다고 한다)

그에 대한 설명이 <금강반야바라밀경>이며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의 내용이다.

 

금강경은 수보리에게 설명한 법문이라면

반야심경은 (광본에서) 장로 사리자가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거룩한 이 관자재보살마하살에게 여쭈었다.

"만약 참되게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선남자 선여인으로서)이 깊고 깊은 바른 앎을 알아차리려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려는 이는 )마땅히 어떻게 닦아 배워야 합니까?"

이렇게 묻자 관자재보살은 장로 사리자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으로서 깊고 깊은 바른 앎을 알아차리려면 마땅히 이렇게 살펴라.

이에 사리불이 

 

* 어떻게 해야 합니까?(왜 그렇습니까?) 설명을 하는 것이 <반야심경>의 내용이다.

스스로 걸림이 없는 내(깨달은 자)가 바른 알아차림()을 할 때에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몸과 마음으로 일어나는 5가지의 쌓임(모든 것)은 한 순간도 머물지 않고 바뀐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앎으로 (照見五蘊皆空度 조견오온개공도)

모든(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괴로움에서 벗어난다.(一切苦厄 도일체고액) ..... 반야의 지혜를 요약하여 설명한 중심 내용이다.. 조견은 색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16계로 전부로 본다. 들어보고 맛보고,냄새 맛아보고,  느껴보고, 생각해 보고 등

 

<금강반야바라밀경>에서 말하면 제1법회인유분과 제2선현기청분, 3대승정종분,

4묘행무주분, 5여리실견분 까지의 내용이다. 실지실견하여 보여주신 부처님의 행동과

대승법의 무주와 무상과 보시 반야밀의 핵심을 설명하고 있다.> 

 

사리자여, 나타나 있는 것은 빈 것과 다르지 않고 빈 것도 나타나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우리가 현상적으로 보이는 모든 것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가짜임을 설명하고 있다. 왜냐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연기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한 순간도 머물지 않고 변한다는 사실이다. 이 세상에는 어떠한 것도 도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이 참 진리이다.)

 

나타나 있는 것이 빈 것이고 빈 것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色卽是空 空卽是色 색불이공 공불이색)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 일어나는 것, 안다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受想行識 亦復如是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여, 나타나 있는 모든 것들(()은 연기법으로 모든 것은 한 순간도 머물지 않고 변하며 또한 서로 이어져 있어 너와 내가 나눌 수 없는 큰 하나)은 텅 비어 있다.(舍利子 是諸法空相 사리자 시제법공상)

 

하지만 빈 것들은 자세히 알아차리고 보면 나타난다고도 할 수 없고 없어졌다고도 할 수 없으며 더했다고도 덜했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불생불면 불구부정 부증불감 )

 

나타나는 것과 없어지는 것,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 더하는 것과 빼는 것이 있지 않음을 안다.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불생불면 불구부정 부증불감 )

 

<나타난 것들과 같이 모두가 하나인데 다만 나타난 쓰임이 다르게 나투는 것일 뿐 나눔은 본래 있지 않다는 것이다. 분별지로서 보니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부감이 있으나>

 

그런고로 빈 가운데는 무엇이 있다고 할 수 없듯이 일으키는 생각, 일어나는 것, 알음알이로 일으키는 마음 5가지의 무더기도 역시 비어 있으면서 있고 있으면서도 비어있다.(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

 

그러므로 한 순간에 서로 만나 나타나 사라지는 것 가운데는 머무는(보여지는) 빛이 없고 느낌과 빛에 의해 나타난 것을 있다고 알는 것, 그러한 알음알이를 나타내 쓰는 것, 생각을 분별하는 것들도 모두가 없으며.

 

몸이 가지고 있는 6가지 눈, , , , , 뜻의 뿌리로 보고, 듣고, 냄새 맛고, 맛을 알고, 감촉과 같은 일으킴도 없다. 나타나 보여지는 것들은 가짜이듯 뜻으로 안다고 하는 알음알리들은 모두가 거짓이니라.(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

 

알지 못하는 것도 없으며 역시 알지못하는 것이 없다는 것도 또한 늙고 죽음도 역시 늙고 죽음의 없어짐도 없느니라.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심지어, 게다가) 무노사 역무노사진

 

그래서 괴로움과 괴로움의 시작도 없고 그 시작과 없어짐도 없다. 역시 얻을 것도 얻지 못할 것도 없다.(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以無所得故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이무소득고)

 

그러므로 깨달음이란 바르게 앎에 의지하기 때문에 어떤 마음에 걸림이나 두려움과 뒤바뀐 꿈 같은 착각이 일어나지 않고 (菩提薩陀 依般若波羅密多 故心無加碍 無加碍故 無有恐怖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고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모든 괴로움과 아픔을 넘어서 오직 즐거움만 있는 곳에 도달한다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모든 때에 나투는 깨달은 자는 오직 지금 이 세가지의 바른 앎과 바른 알아차림 바르게 쓰는 완전한 함께 나눔하는 삶을 살게 되느니라.(三世諸佛依般若波羅密多 故得阿縟 多羅三漠 三菩提 삼세제불의반야바라밀다 고득아뇩 다라삼먁 삼보리)

 

그러므로 이 참 알아차리게 하는 가르침은 가장 크게 믿는 말씀이고 분명한 옳은 말씀이고 그 어떤 말로 나눠서 할 수 없는 참 말임을 알아야 한다. (故知般若波羅密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계정혜의 법을 바로 앎이며 4성와 8정도를  바르게 앎이며 중도실용을 바르게 씀이다.

 

이 참 말을 바르게 믿고 나투면 모든 괴로움이 없어지고 참되어 거짓이 없나니 이것을  직관, 염불, 알아차림(말씀)으로 설명 한다면 (참된 주문이)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般若波羅密多呪 卽說呪曰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주즉설주왈하지 

지금 여기서 바로 알아차려라는 뜻이다.

 

즉문즉설이다.

 

주문은 그냥 주문인 것이다.

(짜장면 주문하면 짜장면이 나온다.)

 

오직 한 마음 있는 그대로 주고 받는 것....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을 3번 주문 했으니 

그대로 주문을 받고 내어 주면 된다.

 

'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로 크게 외워보라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 아제 모지 사바하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그냥 오롯이 살아있는 그것이 공한 반야의 진리다. 이것이 염불이다. 

 

오온이 공한 도가 되었으니 무상정등각의 한바탕 꿈이로구나.

 

소리하니 귀가 듣고 눈으로 보니 눈이 보고 앎을 알아차리니 마음이 알고 걸으면 몸이 알고

소리하는자 듣는자 아는자 모두가 분별없는 하나된 놈, 그놈이 주인공이다.

 

옆집 아제도 바라제도 승아제도 산천 초목 우주만상이 모두가 아제다.

그럴 때 시공간이 무너지고 오직 연기작용성만 남으니 그것이 공살이요 중도라 한다.

 

그 자체가 이근원통으로 소리와 마음과 뜻이 하나가 되어 오직

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로 태어난다.

 

 

그런데 이것을 뜻으로 해석 해 보자.

 

가세가세 어서가세 저 열반의 언덕으로?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우리 함께 피안으로 가자. 

 

그래서 우리 함께 괴로움에 벗어난 영원한 즐거움의 참살이로 춤추며 살자꾸나.(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3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반야심경은 공에 대한 설명이다. 공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 있지 안다. 오직 지금이 순간이 공이다. 그리고 그 공도리를 바르게 알고 슨이 중도인 아뇩다랴삼약삼붓다(무상,정등,정각)인 무주 보시이다.

 

그러니 '간다'라는 말은 머물지 않는 지금을 의미한다.

간라는 것은 지금 행동하는 실체(공)과 실용인 중도를 설명한다.

 

벌떡 일어나 한바탕 각설이 타령으로 무애춤을 춘다.

<얼시구 시구시구 들어간다. 작년애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

 

내 본래 마음으로 들어간다. 참 진리의 본성으로 들어간다. 

진리를 참 진리는 늘 지금 여기에서 나타나 있기에 영원하여 죽지도 않고 돌고 돌아온다는 뜻이다.

 

시작고 끝도 모두가 이것이 그것이고 그것이 이것이다.

있는 그대로 공한 모습이고 쓰는그대로가 아뇩다라삼약삼보리이네.

 

서서 걷는 그대도 한바탕 꿈이고 소리치는 아제아제바라아제도 한바탕 공이네

더 이상 무엇을 생각하고 뜻을 쫒으려고 하는가?

 

법계의 무애함을 설명한 원효의 무애행도 의상의 법성게도 여기서 나온다

 

우리가 바른 깨달음으로 삶을 살면 죽지도 않고 다시 태어나기에 늘 이웃을 배려하고

베풀며 덕()을 쌓는 참다운 인간으로 살아라! 하는 내용으로 해석된다.

 

가테가테 파라가테 파라상가테 보디 스바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 아제 모지 사바하.

이것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의 마지막 핵심인 중도실용의 깨달음을  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