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불교

법화경에서 반야의 공에 대한 이해

통융 2022. 3. 21. 15:19

법화경에서 10품인 법사품에서 수행을 수지(受持),독경(讀經), 송경(誦經), 서사(書寫), 해설(解說 )로 일반적으로 불교 공부를하는 방법입니다.

 

수지는 경전을 가지고 있는 것, 독경은 읽기만 해도, 송경은 읽어주는 것, 서사는 사경하는 것, 해설은 설명하는 것,

반야심경을 독송하는 하는 것도 이 중에 포함 되겠지요.

 

하지만 경전을 무조건 가지고 다니기만 해도, 외우기만 해도, 쓰기만 해도 성불한다는 것은 잘못 된 생각입니다.

물론 그러한 행위가 불법과 인연을 맺는 계기로 충분히 이해 됩니다만 오히여 잘 못 된 믿음과 수행을 하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경전이 만들어 지기 전에는 모든 불법을 암송하고 그것을 구전으로 전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경전을 전승하고 맥을 이어갈 수 있었고, 그 내용을 알고 수행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문맹이 많았고  인쇄기술과 재료가 없었을 때는 패엽경(다라(多羅, tala)나뭇잎)이 있듯이

경전 자체가 귀하고 누구나 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불법을 포교하는 수단으로 여러가지 방편을 강구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데서 읽어 주거나 또는 필사 즉 사경을 해서 여러 사람에게 나눠 주는

그런 행위 자체가 포교는 물론 자기 공부이면서 수행의 일환이기도 했겠지요.

 

그런데 요즘 같은 인쇄술의 발달로 수 많은 경전은 물론 모든 지식을 공유할 수 있는데

수지, 독경, 송경, 서사만을 고집하는 수행은 고려 해 볼 문제입니다.

 

물론 그러한 수행의 한 수단이나 방편으로 스스로 선택할 수는 있습니다.

모든 수행은 각자의 근기와 시절인연에 따라 만나고 선택할 수도 있겠지요.

 

예전에 기독교인들이 찬송가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거만한 모습들을 종종봤는데

요즘은 그런 것이 없어졌지요. 스스로 무지함을 깨달은 것이지요.

 

불경의 내용을 모르면서 무조건 외우는 것도 이와 같을 수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분들이 경전을 많이 외우는 것을 자랑하고, 또 초심자들은 그들을 부러워합니다.

 

자신이 읽고 외우는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말입니다.

부처님은 이러한 수행을 남의 집에 일하는 목동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일하는 목동이 주인집 양을 아무리 세고 도 세어봐야 자기 양은 한 마리도 없다는 비유이지요.

숫가락은 아무리 밥을 떠도 밥맛을 모르는 것과 같은 이치겠지요.

 

물론 내용을 몰라도 경전을 읽고 외우고 사경하는 그 자체가 수행이 될 수는 있습니다.

요즘말로 지금을 알아차림으로 모든 하는 행위에 집중하는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신라의 원효대사도 그렇고 근래 청하스님은 이것을 염불선으로 말씀을 하셨지요.

모두가 일심으로 마음을 집중하다 보면 삼매가 일어나고 스스로 본래의 자성을 알아차리는 수단의 수행이라고 설명합니다.

 

일종의 화두를 들고 있는 것과 같은 원리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수행의 원리나 이치를 충분히 알고

집중하는 수행일 때 가능하지

하지만 이렇게 염불수행을 스스로 행함을 알아차려야 남의 양을 세는 시행착오를 격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관무량수경에서 부처님이 아난과 위제희 보살에게 일상관 등 16가지 관법수행을 설명하는데 수행의 근기를 가진 수행이라고 분명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미타경에서 말하는 아미타불 3번만 불러도 서방정토극락에 간다는 칭명 염불도 같은 의미입니다.  

 

자신의 수행 노력으로 불도를 성취하는 자력과 여러 불보살님들의 위신력을 의지하여 불도를 성취한다는 타력신앙을 구분하여 설명하는데 불교수행은 철저히 자력이지 타력은 있을 수 없다.

 

외형적으로는 불보살님들의 가피를 얻어서 구원을 얻는 것 처럼 보이나 불교신앙은 철저한 자각각타이다. 

유일신을 신앙하여 구원을 받는 주종의 관계와는 분명히 다르다.

 

불교의 타력신앙은 외형적인 불보살님의 형상을 보고 칭명하거나 발원을 하지만 그 불보살님이 내 안에 존재한다.

하지만 타 신앙의 신들은 저 하늘이나 어떤 곳에 있어서 내가 종으로 주인의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다.

 

과한 표현이지만 요즘 많은 애환동물을 키운다. 개는 자유의지 보다 주인의 의지에 따라 목에 줄을 묶고 따라 다닌다.

만약 주인에게 길들어지지 않는 개 거나, 자유 의지가 강한 개라면  목줄을 벗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주인에게 길드려진 개는 절대 집을 벗어날 수 없듯

강한 구속력을 갖는 신앙이나 사상에 세뇌된 인간들은 절대의 주군을 벗어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사상과 종교 대립으로 인한 가정불화와 국가간에 대립과 전쟁 테러 등이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는가.

 

각자의 삶은 각자의 선택의 몫이다.

어는 것이 옳고 틀린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를 뿐임을 인정하면 모두가 평화로워진다.

 

가피도 불교에서는 외부에서 어떤 불보살님들의 힘이나 권능을 얻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스스로 발현된다.

 

'관세음보살' 명호를 일심으로 간절히 부르며 기도한 덕분에 소원하던 일이 성취되었다면

모두가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라고 생각한다.

 

그 관세음보살님은 내가 간절함으로 관세음보살의 권능을 알아차리는 동체의 작용(연기작용)이 일어난다.

그 작용성이 불성이고 그 불성을 깨우니 내 스스로 원하는 일을 성취하게 하는 힘이 만들어 지는 것이다.  

 

이 한 마음작용은  우주의 에너지를 쓰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

그 창조의 힘을 마음이라 하고 화엄경에서 '하얀 도화지 위에 무엇 이든 그릴 수 있는 화가와 같다'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했다.

 

그런데 과연 그런 의미를 알고 염불을 하고 독경을 하는지는 스스로 점검해야 합니다.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수심결>에서 선정과 지혜를 새의 양 날개처럼 균형을 갖춰 수행하라고 말씀하셨고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禪是佛心 敎是佛語)이라고 <선가귀감>에서 서산대사께서 설명하고 있듯.

 

불교의 진리는 절대 이었지만 공부와 수행방법은 시절인연에 따라 적응하고 변화한 역사를 보아왔듯

SNS와 인공지능, 메타버스문화가 대세를 이루는 시대에 불교라는 최고급 진리가 어떻게 자리매김 해야 할까?

  

특히 한민족 고유신앙과 접목된 통불교라고 자부하는 한국불교는 우리사회에서 어떻게 자리잡고

어떻게 대중 속에 불교의 지혜와 자비인 참 진리, 

자기완성인 행복과 동체대비의 이웃과 나눔사상을 실천하고 포교할 것인가를 고심해야 한다.

 

그동안 한국불교가 시대에 적응하고 거듭나는 모습과 수행 가풍을 점검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한국 불교가 어떻게 수행경전의 내용인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고 전하고 있는지,

 

법화경에서 부처님이 약왕보살에게 말했다.

“약왕이여, 선남자, 선여인이 여래가 열반한 뒤 법화경을 설하려면

여래의 방에 들어가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 설해야 하느니라. 

여래의 방이란 모든 중생들에게 큰 자비의 마음을 내는 것이요,

여래의 옷이란 부드럽고 온화하고 인욕하는 마음이며,

여래의 자리란 모든 법이 공한 것을 아는 것이니라.

”<如來室者 一切衆生中 大慈悲心是 如來衣者 柔和忍辱心是 如來座者 一切法空是>

 

즉 연기작용의 진리를 바로 알아차리면 오온이 공한 것을 알고

너와 내가 둘이 아닌 하나이며 대비심이 생기고 함께 나눔하는 실천을 한다는 뜻이다.  

 

여래의 자리란 모든 법이 공한 것이라고 했다.

반야행을 설명한다. 반야심경의 진리인 반야의 지혜를 바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무아인 내가 공한 이치를 바로 알아차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