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불교/통융스님의 반야심경 해석

28. 우리말 반야심경 - <본문>덕산스님의 점심과 색즉시공 공즉시색-3

통융 2022. 7. 30. 17:45

28. 우리말 반야심경 - 본문덕산 스님이 점심과 색즉시공 공즉시색-3

 

 

세간에서 공이니 색이니 하는 모든 법을 분별하는 것이 교학(敎學)이라면

출세간인 선()에서는 공이니 색이니 설명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타낸다.

 

연기작용은 무엇이 어디에 있다. 없다가 아니라

오직 지금 보면 볼 뿐, 들으면 들을 뿐, 하면 할 뿐이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가지고

교학 적인 이론과 선불교의 깨달음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를

 

중국 당대 금강경 해석에 최고라는

덕산 스님이 일화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의 핵심인 공도리(空道理)에 대해서

<금강경> 18일체동관분 마지막 구절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과거의 마음에도 머물 수 없고 현재의 마음에도

머물 수 없고 미래의 마음에도 머물 수 없다.

 

이 글귀가 공의 도리를 대표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인데

지식으로 이해만 하는 덕산 스님이 살림살이가 들통나는 이야기다.

 

덕산 스님은 당대에 금강경 해석에

최고의 밝은 자임을 자처하고 있을 때

 

남쪽 지방에서는 법을 문자를 세우지도 않고

마음으로 전하며 (不立文字 敎外別傳) 곧바로 부처님 법을 깨닫는(直指人心 見性成佛)다는

 

선소식을 듣고 그런 외도들을 혼을 내주겠다며

스님이 직접 죽간(竹簡)에 쓴 금강경 해석(金剛經 靑龍 疏)을 짊어지고 남쪽으로 떠난다.

 

길을 떠나 예주 땅에 이르러 점심때가 되니 배가 고팠다.

마침 길가에 떡을 파는 노파가 있어 다가갔다.

 

등에 바랑을 지고 오는 스님을 보고

노파가 바랑 속에 무엇이 있냐고 물었다.

스님은 자신이 직접 금강경을 해설한 '청룡소초'라고 했다.

그러자 노파가 "공부를 많이 하신 스님 같은데 제가 스님께

 

금강경에 관해서 물어 볼 테이니 대답을 하시면 떡을 그냥 대접하고,

만약 답을 못하시면 오늘 떡은 팔지 않겠다"라고 했다.

 

이에 덕산 스님은 금강경 내용이라면

나를 따라갈 사람이 없는데

 

감히 떡파는 노파가 금강경 내용에 관해서 묻는다고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래도 배가 고프니 어쩌겠나.

 

노파가 "금강경에 이르기를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이라

 

어느 곳에도 마음에 점을 찍을 수 없다는데

스님은 어느 마음에 점심(點心)을 찍겠습니까?"

 

이론적으론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고

그렇다고 현재라는 것도 멈추지 않고 변하기 때문에

 

내 마음을 어디에도 점을 찍을 수 없다'라고 하면 되지만

그런 설명이 아닌 실제 공한 도리를 보여달라는 선문답인데.

 

다시 말해 조견 오온 개공도할 때

그대는 지금 무엇을 조견하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이며

 

색불이공 공불이색하며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알아차리고 있느냐는 뜻이기도 하다.

 

덕산스님은 이론은 밝았으나 실제로 이 연기작용의 공한 도리를

체험해 보지 못했으니 눈앞이 깜깜할 수 밖에.

 

천하제일이라는 주금강도 <금강경>의 핵심인 공도리의

실제 공함에 머물지 못해 낭패를 당한 스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만약 그대가 이 상황이라면 어떻게 점심을 찍어야

노파에게 떡을 대접받을까?

 

배가 고팠던 스님은 체면이 구겨진 채 떡도 못 먹고

노파에게 쫓겨나듯이 선지식이 있는 곳을 물어 곧장 갔다.

 

 

그래도 다행히 눈 밝은 용담 선사를 만나 금강의 이치를 깨달았으니

떡파는 노파가 관음보살이 아니었겠나.

 

스님은 평생을 바쳐 애지중지하고 다닌

금강경 해석 죽편을 불살라 버리면서 한마디 한다.

 

'저는 금일 이후로는 천하의 노화상들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겠다.'라고 하면서

 

불법의 심오한 도리를 다 밝힌다 해도

머리카락 하나를 허공에 날리는 것과 같으며

 

세상의 모든 진리를 다 안다 해도

물 한 방울을 큰 계곡에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참선요지>에 보면 벌 한 마리가 방안에서 밖을 나가려고 창호지 문에 붙어

날갯짓을 열심히 하는 것을 보고

 

신찬스님이 경전을 매일 열심히 읽고 있는

스승인 계현스님 들으라고

 

텅 빈 문으로는 나가지 않고(空門不肯出)

창문에 가서 부딪치니 너무 어리석다(投窓也大痴)

 

백 년을 낡은 종이 뚫어보아야(百年鑽故紙)

언제나 깨칠 날을 기약하리오(何日出頭時)’라고 하지 않던가.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자각(自覺)하지 못하고서는 천백번을 외우고 써도 한낱 이해하는데 그친다.

 

색과 공을 지식으로 이해한다고 그대 오온이 공할 수 없고

오온이 공함을 자각 못 하면 아뇩다랴삼략 삼보리는 공염불이다.

 

바라밀 법화행을 억지 춘향 격으로 선업을 닦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도 다행이라며 수 겁 생을 기약한다면야.

 

덕산이여! 지식으로 머리 굴리지 말고 지금 있는 그대로 바로 조견하면

어찌 배가 고픈 마음이 공도리인지를 모르는가.

 

그대는 지금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데

그대 공한 마음을 어디에 점을 찍을 수가 없으니.

 

만약 배고픔 전부가 된다면

앞뒤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대로가 자비심인데....

 

그때야 노파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점심을 차리고 융숭히 공양을 받을 것이네.

 

혹자는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고 불법은 작용성에 있으니

노파의 질문에 답은 '그냥 떡을 집어 먹으면 되지요.'라고 말한다.

 

덕산이 주린 배는 채울 수는 있어도 도둑놈이 된다.

불법은 자기 생각과 행동을 막행막식하는 것이 아니다.

 

더러는 조금 깨달았다고 하면서 요상한 행동을 하고

걸림이 없다고 하는데 천만에 만부당하다.

 

그대 행동은 대가를 보상해야 하는 업을 짓고 있는 중생인데

무슨 이무소득(以無所得)의 부처의 행인가.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불법은 진실하면서도 자유롭다.

 

 심무가애(心無罫碍)라 어디에도 걸림이 없다.

그러면서 결과는 자비롭고 있는 그대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