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불교/통융스님의 반야심경 해석

21. <반야심경> 시제에 관한 고찰

통융 2022. 3. 27. 11:21

<반야심경> 시점에 관하여... 삼세(三世)는 동시에 작용(作用)하며 변해 갈 뿐이다.

 

<반야심경>을 해석하면서 과거니 현재니 하면서 시제에 관하여 많이들 이견을 나눈다.

그 시점이 어떻게 작용하는 지를 살펴본다.

 

<광본반야심경>에서 관자재보살이 반야의 지혜(삼매)에 들어있는 것을 보고

사리불이 어떻게 하면 그러한 지혜를 증득할 수 있는지를 질문하면

 

관자재보살이 답을 하면서 반야심경의 본문(소본) 내용이 시작된다.

즉 관자재보살이 자신이 반야의 지혜를 얻었던 경험을

 

오온이 공한 것을 바로 알아차리면서 법의 진리를 깨달았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오온을 공한 이치를 설명하면서 시작된다.

 

모든 경전은 옛날에 쓰여 졌다.

하지만 경전을 펼쳐 보는 것은 늘 지금이다.

 

여시아문도 이와 같다.

내용은 과거의 시제이지만 알아치리는 시점은 늘 지금 현재이다.

 

모든 불법은 늘 지금 성성적적하게 살아있는 실제이지

과거나 미래에 있는 어떤 관념이나 생각이 아니다.

 

즉 불법은 늘 지금 여기서 일어난 있는 그대로가 불법이다.

어떤 과거의 시점, 미래의 시점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과거니 현재니 미래니 하는 것도 분석적으로

이해를 하기 위한 설명이지만 이 셋은 동시에 존재한다.

 

굳이 '존재한다'. '있다'.라는 시점을 설명한다면

연기작용(緣起作用)은 머물지 않고 변하기 때문에 모두가 과거일 뿐이다.

 

과거의 깨달음이 오늘의 깨어있음도 아니고 오늘 깨달았다고 미래에 열반에 드는 것도 아니다.

오직 지금 알아차리고 깨닫는 것이 연속하는 것이고 삼세는 늘 동시에 작용한다.

 

(승조의 <조론>에서 '물불천론'에서는 연속이나 이동하지 않는다는 설명은 수긍하나 불천의 이해를 확장해서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불교의 시공간은 존재하지 않는 공(空)한 작용이다.

공성(空性)을 알아차리는 것이 깨달음이며 그것을 실지로 쓰는 것이 중도이다.

 

공성은 연기적 작용성을 말하며

조건에 따라 나타나고 사라지는 찰나에 있는 것이다.

 

이 공성은 현재도 없고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이라고 한다.

 

오직 지금 여기서 깨어 있는 것으로 설명하나

물론 지금이라는 것도 설명이지 시점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진공묘유라는 표현을 쓴다.

행하되 행함이 없이 행한다는 금강경의 말씀도 이와 같다.

 

진리를 알아차리는 실례를 들어보자.

예를 들어 공(空)이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하면

 

답을 하는데

한 사람은 손뼉을 치고

어떤 사람은 공이란 이런 것이다고 설명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해가 부족하면 용수의 중론을 예를 들어 설명한다.

 

모두가 공을 이해하고 전달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실제하는 공의 참 진리를  바르게 전달하는 사람은 누구겠는가?

 

예를 하나 더 들어 보자.

설탕의 맛을 어떻냐고 질문할 때

 

먹어봐야 맛을 안다고 하는 사람

설탕을 직접 먹여주는 사람

설탕의 성분은 단맛이라는 것을 낸다며 장황하게 설명을 하는 사람

 

어느 사람이 가장 확실한 답을 하고 있는지는  금방 알 것이다.

당연히 직접 현재의 상황을 쓰는 사람이다.

 

이와 같이 진리는 오직 지금 깨어 있는 생생한 현실 작용만 있을 뿐

설명이나 이해가 아닌 살이 있는 우리의 삶이고 그 자체이다. 

 

그래서 참 스승, 선지식을 만나는 것이

가장 큰 행운이라는 말이 나온다.

 

불법이라고 해서 특별히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공이니 연기니, 깨달음이니 선이니 교니 하니까.

 

대단한 무엇이 있는 것 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러한 언어들은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수단이고 방편이다.

사람들의 근기에 따라 맞춰서 설명할려고 하다 보니 8만4천 법이 나온 것이지 사실은 한 법이다.

 

그러한 것을 다 몰라도 된다.

각자 근기에 따라 알면 된다.

 

오직 지금 내가 생생하게 깨어 살피는,

알아차리는 순간이 100%이면 그 사람은 깨달아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분별력과 직관력이 뛰어나고 이미 내가 우주임을 알기에

나와 이웃 보기을 자애와 나눔으로 충만한 사람이 된다.

 

부처님도 '자등명 법등명 자귀의 법귀의'라고하셨듯

내 안에 있는 법(연기법)을 등불로 삼아 수행하라고 했다.

 

다시말해 깨달은 진리가 바로 내가 숨 쉬고 있을 때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알아차리는 것(연기법)이라고 했듯

 

나의 몸과 마음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은 서로서로 인연되어 있고

한 순간도 멈춤이 없이 변하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 진리는 연기법이라는 하나의 이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연기법은 우리 삶의 전부이고 내가 늘 살아 있는 지금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우주에 존재하는 사람, 동물, 식물, 별, 해 등 모든 것은

이 법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고 함께 공유하여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진리의 법은 늘 지금 이 순간에 작용하며 살아 있는 실제이며

과거니 미래니 하는 것은 모두 관념인 생각일 뿐이다.  

 

그렇다고 지금 이 순간이라고 해서 과거나 미래 없이 존재하냐,

그렇지 않다. 삼세는 동시에 존재하며 변해 갈 뿐이다.

 

이것이 <반야심경>의 핵심 시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