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불교/통융스님의 반야심경 해석

11. 우리말 반야심경 - <본문>에 들어가면서 1

통융 2022. 3. 25. 18:31

11. 우리말 반야심경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참된 말씀(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1

 

종교, 진리, 신앙, 수행 등을 통해 내가 자유로워지려고 하는데

오히려 구속된다면 잘 못 된 믿음이고 공부다.

 

참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라는 말처럼

참 진리는 절대 거짓이 없다.

 

불교의 진리는 무아(無我)의 진리, 반야(般若)의 지혜다.

이를 바로 알아차리고 깨닫는다면 나는 대자유인' 이 된다.

 

우리가 늘 외우는 <반야심경> 안에 그 진리가 모두 들어 있다.

관자재보살이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알아차리고 일체 괴로움을 벗어나듯

 

늘 반야의 지혜로 깨어 알아차리기를 노력하고 수행한 만큼 습관들이 변하고

삶에서 오는 탐욕과 화냄, 어리석음의 탐진치(貪嗔癡)가 줄어든다.

 

세상을 보는 안목과 직관력이 밝아져 원하는 일들이 이루어지고

보다 넉넉한 여유로움으로 이웃을 배려하고 나눔의 즐거움이 늘어난다.

 

먼저 <반야심경>의 본문을 경전 문구와는 다소 차이는 있으나

순우리말로 전체의 뜻을 살펴보도록 한다.

 

지혜 제일의 사리불이 대자비로 깨어 있는 관자재보살에게 질문한다.

어떻게 하면 반야의 지혜인 공()을 알아차릴 수 있겠습니까?

 

만약 부처님이 이런 반야의 진리인 공()이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어떤 답을 했을까?

 

부처님은 말없이 시무여원인(施無與願印)’의 손 법문을 해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선재 선재!’라 하시면서 법문을 이어갔을 것이다.

 

혜충국사에게 공()이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했다면 어떻게 답했을까?

말없이 허공에 둥그런 원(圓相)을 그렸을 것이다.’

 

임제선사(禪師)에게 공을 질문을 하자.

'할! '이라고 고함을 친다.

 

만약 소승에게 공()을 질문한다면

손뼉을 치면서 깍궁!’

 

관자재보살은 등각의 보살지에 오르긴 했으나 아직 완전한 묘각 구경지에 도달하지 못했고

질문한 사리불도 성문승인 아라한으로 지혜 제일이라고 하나 완전한 중도실용의 깨달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관자재보살이 반야의 지혜를 문자반야(文字般若)에 의지 해

관조반야(觀照般若)에 이르는 길을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실상반야(實相般若)인 중도의 깨달음을

다음과 같이 사리불에게 법문을 시작한다.

 

 

스스로 걸림이 없는 내(관자재보살)가 깊은 바른 깨달음(반야)을 알아차렸을 때

몸과 마음으로 된 5가지의 무더기(5)가 참 내가 아닌 무아(無我)임을 알아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5온은 보이는 내 몸()과 보이지 않는 마음들 느낌(),

생각(), 나타냄(), 알음알이 혹은 의식()을 말한다. )

 

이렇게 바른 깨달음은 지금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리는 것이며

확실하게 내가 공()인 무아(無我)임을 조견(照見)한다면 게임 끝이다.. <반야심경의 수행 목적>

 

즉 나타나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 것으로

부처님이 손을 들어 보이는 것, 선사가 허공에 원상을 그리는 것

 

모두가 공한 이치를 그대로 나타내 보이는 법문으로

선행학습 때 연기작용인 체상용의 설명 중에 체()에 대해 알아차림이다.

 

그래도 못 알아차리면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므로

()과 연기(緣氣) 중도(中道)에 대해서 차례로 설법을 이어간다.

 

사리자여, 보이는 것(色-나타난 것)과 보이지 않는 것(空-빈 것)은 다르지 않다.

나타남 속에 비어 있고 빔 속에 나타남이 있으니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 일어나는 것, 안다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사리자여, 나타난 모든 것들()은 텅 비어있으니(空)

나타남과 사라짐, 깨끗함과 더러움, 더함과 덜 함도 그러하다.

 

그런고로 보이지 않는다(空-빔)고 없다(無)고 할 수 없듯

느낌(), 생각(), 나타냄(), 알음알이()

몸에 6가지 눈, , , , , 뜻의 뿌리로

보고, 듣고, 냄새, , 감촉과 같은 일으킴도 그러하다.

 

나타나는 것(眼界)들과 알음알이들(意識界)도 비어있듯

안다거나 알지 못하거나, 늙고 죽음이 있다거나 없다는 것도 모두가 그러하다.

 

그래서 괴로움의 시작과 끝도(없어짐도) 없으며

얻을 것도 얻지 못할 것도 없다.

 

이러한 바른 진리를 알기에 어떤 마음에 걸림이나 두려움,

뒤바뀐 꿈같은 착각이 일어나지 않고

모든 괴로움과 아픔을 넘어서 오직 열반에 도달한다.(이고득락 상락아정)

 

그러므로 어느 때나 나투어 깨달은 자는(삼세부처)

오직 지금을 알아차려 바르게 쓰는 삶,

더불어 나눔하는 삶을 살게 되느니라.(연기법의 실체, 실상, 실용=중도, 상구보리 하화중생)

 

이 바른 알아차림의 가르침은 가장 크게 믿는 말씀이고 분명한 옳은 말씀이고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참말임을 알아야 한다.

 

이 참말을 바르게 믿고 따르면(나투면) 모든 괴로움이 없어지고

참되어 거짓이 없나니 이것을 말씀으로 설명한다면

 

바르고 참되게 앎으로 괴로움이 없어지며 영원한 즐거움의 참살이로 살자꾸나.

 

(여기서 잠깐 공()에 관한 이야기를 점검해 보고 가자.)

대승불교 사상의 체계를 세운 용수(龍樹, Nagarjuna)보살의 중론(中論)에서 공()에 대한 설명을 참고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