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승이 말하면
마조일할의 내용은 법의 실체와 실용을 직접 체험하는 화두이다.
마조와 백장이 불자를 가지고 문답을 나눈 내용은 제법실상을 직접 체험 하는 것이라면
마조의 할은 백장이 실체를 체험하는 것이고
백장의 이야기에 황벽이 혀를 쑥 내민 것은 법의 실용을 보인 것이다.
모두가 있는 그대로 할 뿐! 이다.
마조가 질문하는 들오리는 체와 용을 동시에 알아차리는 화두다.
백장이 법을 따르지 못하니 들오리가 되지 못하고 '들오리 입니다'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마조가 다시 한번 실용을 묻는다. '어디로 날아갔느냐? '
이에 백장이 또 뜻을 살피지 못하니 "저 쪽으로 날아갔습니가/" 라고 설명한다.
마조가 답답하여
멍청하게 말에 끄달려 다니는 황벽에게 정신차리라고 법의 체용을 체험하게 황벽의 코를 비튼다.
백장이 코가 아파서 "아야! 아야! "한다.
백장은 법을 직접 체험하면서도 알지 못해 괴로움만 있다.
드디어 백장이 스승의 깊은 가르침을 깨닫고 나니 괴로움이 가신다.
마조가 법문을 하기 위해 법석에 올라 자리에 앉자마자
백장이 곧 일어나서 좌복을 거두고는 밖으로 나가버린다.
그러자 마조선사도 척 알아차리고 법석에서 내려와 방장실로 돌아갔다.
'설법으로 깨달음을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스승님!
이것이 깨어 있는 실제의 법입니다......
기러기는 이렇게 날아가는 것을.....'.
부처님이 꽃든 소식이요. 가섭의 답한 미소다.
마조의 할이 백장의 방으로 나아가고 다시 임제의 할로 돌아 온다.
이러한 이치를 언설로 법담을 나눈 이야기를
아래의 여러 내용을 통해 살펴 본다.
1.
홍주 백장산 회해대지선사(마조에게서 법을 받다)
백장이 다시 마조를 참례하니, 마조가 선상 모서리에서 불자(拂子)를 집어서 보였다.
백장이 말했다.
“오직 이것뿐입니까? 다시 달리 있습니까?(只遮箇更別有)”
마조가 이에 (본래 있던 자리에) 갖다 놓으며 말했다.
“그대라면 이후에 무엇으로 사람을 위하겠는가?”
백장이 곧 불자를 집어서 보였다.
마조가 말했다.
“오직 이것뿐인가? 다시 달리 있는가?”
백장이 불자를 제자리에 갖다 놓고 곧 시중하고 섰다.
이에 마조가 악! 하였다.
후에 단신(檀信)이 대웅산(大雄山)에 머물기를 청하였는데, 바위산이 끝없이 드높았기에 백장(百丈)이라고 불렀다.
하루는 백장이 대중에게 말했다.
“불법은 적은 일이 아니다. 노승은 예전에 마대사에게 일갈(一喝)을 입고서 곧장 삼일동안 귀가 멀고 눈이 캄캄하였다.”
황벽이 듣고서 자신도 모르게 혀를 토하였다.
洪州百丈山懷海大智禪師。(嗣馬祖)再參馬祖。祖於禪床角。取拂子示之。師曰。只遮箇更別有。祖乃放舊處曰。你已後將什麼為人。師卻取拂子示之。祖曰。只遮箇更別有。師以拂子掛安舊處方侍立。祖叱之。後檀信請住大雄山。巖巒峻極。故號之百丈。一日師謂眾曰。佛法不是小事。老僧昔日被馬大師一喝。直得三日耳聾眼黑。黃蘗聞舉。不覺吐舌。
이 화두의 핵심은 두 분이 똑같이 대기와 대용을 펼쳤음에도 백장스님은 어째서 마조대사의 일갈을 먹어야 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나아가 삼일을 귀가 먹고, 이 얘기를 전해들은 황벽스님은 무심결에 혀를 토하였는데, 어째서인가? 이는 곧 저 세 분이 저마다 어떤 경지에 서 있었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세 분은 같은 자리에 있었는가? 아니면 서로 다른 공부가 있었는가?
이것을 분명하게 꿰뚫으면 어찌 달을 보고 웃어 제치고 석양을 마주하지 않을 것인가?
선(禪)에서 불자(拂子)를 세우고 내려놓은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평소에 마조대사는 여러 대중에게 법문을 하면서 때로는 불자를 들어 보이고 때로는 내려놓는 모습을 보였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마침내 백장스님 또한 그것을 쓸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두 분이 똑같이 불자를 들어보이고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묻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 저 불자(拂子)인가?
사전적으로 불자의 용도는 말 그대로 먼지털이로 쓰거나 파리나 모기의 접근을 막는데 있는 물건이다. 막대기 한쪽에 말총을 묶은 것으로 후대에 가서는 흔히 선사들이 법상에서 그것을 들고서 법문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저 마조선사나 백장스님이 들고 있는 불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불자인가?
당시에 백장스님은 저 불자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었다고 하겠다. 이는 곧 마조선사의 법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마조선사께서 평소에 불자를 가지고 법문을 하시는데, 이것이 전부일까? 아니면 다른 깨달음이 또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당시에 백장스님은 어떤 공부를 짓고 있기에 거기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을까? 이것을 알려면 먼저 그 이전의 자취를 더듬어보아야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일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일화
백장이 마조를 시중하며 산을 유람하던 차에, 들오리가 날아서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마조가 말했다.
“이것이 무엇인가?”
“들오리입니다.”
“어디로 가는가?”
“날아갔습니다.”
마대사가 백장의 코를 잡아 비틀었다.
백장이 고통스러워하며 소리를 질렀다.
“아야, 아야!”
마조가 말했다.
“날아갔다고 또 말해봐라.”
백장은 여기에서 계오(契悟: 깨달음에 계합하다)하였다.
百丈侍馬祖遊山次。見野鴨飛過。祖曰。是甚麼。師曰。野鴨子。曰甚麼處去也。師曰。飛過去也。祖搊師鼻頭。師負痛失聲曰。阿耶耶。阿耶耶。祖曰又道飛過去也。師於此契悟。 (또는 ‘丈於言下有省’이라고 하였다.)
당시 백장스님은 마대사께서 법석에 오르기를 기다리며 여러 대중들과 함게 좌복을 깔고 앉아있었다. 그런데 막상 마대사께서 법석에 올라 자리에 앉자마자 곧 일어나서 좌복을 거두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러자 마조선사도 법석에서 내려와 방장실로 돌아갔다.
왜 백장스님은 좌복을 거두었을까?
어제 비틀린 코가 다시 아파왔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옛 사람은 게송하였다.
들오리여, 들오리여, 감도 없고 옴도 없으며
날아가고 날아와도 본래 가고 머무름이 없다.
홀연히 (마조가) 코를 잡는 것을 살핀다면
산하대지가 전체를 드러내리라. (태평 고)
野鴨野鴨無來無去。飛去飛來本無去住。
忽然把住鼻頭看。大地山河全體露。(太平古)。
또한 노래하였다.
심등(心燈: 마음의 등불)을 건네주지 못하고
조인(祖印: 조사의 도장)을 또한 전하기 어렵다.
들오리가 날아감이여
코를 비틀어 뚫었다. (횡천 공)
心燈不可付。祖印亦難傳。
野鴨飛過去。搊得鼻頭穿。(橫川珙)。
둘째 일화
마조가 하루는 법당(堂)에 올라 법문을 하려는데, 백장이 면전에서 자리를 거두고 나갔다. 마대사는 곧 자리에서 내려갔다.
馬祖一日陞堂。百丈收卻面前席。祖便下座。
송나라 시대의 분양(汾陽)스님은 수산(首山)선사에게 물었다.
“백장이 좌복을 말고서 나간 뜻이 무엇입니까?”
“용수불개전체현(龍袖拂開全體現).”
“모르겠습니다. 선사의 뜻은 어떠합니까?”
“상왕(象王)이 가는 곳에 여우의 자취가 끊긴다.”
분양스님은 여기에서 살피는 것이 있었다.
절을 하고 일어나서는 말했다.
“만고벽담(萬古碧潭)의 공계월(空界月)을
두세 차례 건져보고서야 비로소 알았네.”
師問首山。百丈卷席。意旨如何。山云。龍袖拂開全體現。師云。未審師意如何。山云。象王行處絕狐蹤。師因此有省。拜起曰。萬古碧潭空界月。再三撈摝始應知。
참고로 ‘용수불개전체현(龍袖拂開全體現)’에 대해서 한국의 두 큰스님의 번역을 소개한다.
용수불개전체현(龍袖拂開全體現)이요
수미도탁반공중(須彌倒卓半空中)이로다.
곤룡포(袞龍袍) 소매를 떨치니 전체가 드러나고
수미산이 반공중에 거꾸로 꽂힘이로다. (성철스님 번역)
용수불개전체현(龍袖拂開全體現)이요
수미도탁반공중(須彌倒卓半空中)이로다.
임금이 용상에 올라 소매를 잡아 여는데 전체가 드러남이요.
수미산이 반 허공중에 거꾸로 꽂힘이로다. (진제스님 번역)
여기에 대해 나라면 이렇게 번역하겠다.
용이 소매를 떨치고 (문을 활짝) 열어 제치니 전체가 드러나고
수미산은 절반쯤 공중에 거꾸로 서 있다.
龍袖拂開全體現 須彌倒卓半空中
만약 당시에 백장스님이 좌복을 거두고서 나간 뜻을 알고자 한다면 이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만약 이 두 일화를 깊이 살피지 않았다면, 어찌 저 마대사의 일갈을 만나기가 쉬울 것인가?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백장스님은 물었다.
“오직 이것뿐입니까? 다시 달리 있습니까?(只遮箇更別有)”
참고로『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지만 다른 여러 어록에서는 다르게 적고 있다.
곧 ‘즉차용이차용(即此用離此用)’이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그대로 번역하면, ‘이것에 즉한 작용입니까? 이것을 떠난 작용입니까?’이다.
이는 곧 ‘마대사의 극칙은 결국 이 안에 있습니까? 아니면 이밖에 또 다른 것이 있습니까?’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이에 마조대사께서는 돌연히 일갈(一喝)을 하였다. 그 소리는 곧장 백장스님의 골수에 까지 파고들어서 삼일을 귀가 멀 정도였다. 마치 산 정상에서 벼락소리를 듣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백장스님에게는 날벼락이 아닐 수 없는 일이다. 설령 그 소리가 모기소리만큼 작다고 해도 그만한 사람에게는 천둥소리처럼 들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겠다. 이미 마조대사가 보인 것과 똑같은 작용을 펼쳐 보이는 역량이 있었음에도 어째서 다시 귀가 막히는 일이 생기게 되었을까?
여기에서 묻고 싶다. 당시에 백장스님은 저 ‘노파소암’의 두 늙은이의 경계 밖에 서 있었는가? 아니면 그 안에 있었는가?
결국 마조대사께서 일갈을 한 뜻이 어디에 있으며 백장스님은 어째서 삼일을 귀가 먹었을까?
옛 사람은 게송하였다.
마조가 친히 고불심(古佛心)을 전했는데
해선백장(海禪百丈)은 지음(知音)이었다.
당시 일갈에 삼일을 귀먹었으니
보는 것도 없고 듣는 것도 없음으로 곧 지금에 이르렀다. (지혜 청)
馬祖親傳古佛心。海禪百丈是知音。
當時一喝聾三日。無見無聞直至今。(智海清)。
끝으로 한 구절 적는다.
삼일을 귀가 먹음이여
조계의 파도물결과 비슷해서는
무한평인(無限平人)이 육지에 침몰하리라.
한 소리가 허공을 울리고 천지를 채우니
듣는 자는 모조리 멸문이다.
<고림선원에서 취산 합장>
2.
說 話 |
그런즉 당초에 백장이, 마조가 불자를 세우고 불자를 거는 곳에서 그 뜻을
깊이 얻었다면 파정과 방행 외에 도모한 것이 무엇이었던가? 백장이 이미
그러지 못했으므로 마조가 곧 위세를 다하여 한 번 할을 하였으니, 분명히
알괘라. "달 속의 계수나무를 찍어내면 맑은 광채가 한층 더할 것이라〔斫
却用中柱淸光應更多〕"한 소식이리라.
그런즉 백장과 황벽은 모두가 마조의 한 할〔一喝〕을 직접 이어 받았는데
무슨 까닭으로 황벽은 "만일 마조의 대를 이으면 뒷날 저의 자손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을까? 이는 다른 까닭이 아니라 다만 대용만을 밝혀 얻
었기 때문이다.
만일 마조의 한 할을 직접 이어받지 않았다면 어찌 대기대용(大機大用)이
라 했겠는가? 그러므로 백장은 다만 대기를 얻어서 다시 대용을 요하지 않
았고, 황벽은 다만 대용을 얻어서 다시 대기를 요하지 않았다고 하리라.
보통으로는 잡아낼 수 없는 도(道)가 있으니, 대기 안에 대용이 있고 대용
안에 대기가 있느니라. 만일 그렇다면 꿈엔들 백장이나 황벽을 볼 수 있으
랴? 이러한 시절에 이르러서는 옛사람도 단지 살인도(殺人刀)와 활인검(活
人劒)만을 말씀하셨다.
분양(汾陽)의 송에서 "들었던 것 내던지고 제자리로 돌아가 서 있으니〔擧
放却歸本位〕……"라고 함은 불자를 세우거나 불자를 놓는 것이 위세를 다한
한 할을 직접 이어받지 않은 것이 없다는 뜻이다.
진정(眞淨)의 송에서 "돌연한 한 할에〔突然一喝〕"에서부터 "황벽의 얼굴
에 트였네〔黃蘗面〕"까지는 황벽이 대용을 얻은 경지를 읊은 것이다.
장산(蔣山)의 송에서 "사자의 위엄으로 되던질 줄 안다〔師子神威資返擲〕"
함은 사자의 되던지는 결단을 얻었다는 뜻이요, "백 번 불린 순금도〔百鍊眞
金〕……"라 한 것은 마조의 할 밑에서는 백 번 불린 순금도 반드시 빛을 잃
어야 한다는 뜻이며, "있는가, 있는가?〔有麽有麽〕"라고 한 것은 백장 같은
이가 있는가 하는 뜻이요, "돌(咄)"은 설사 있다 한들 무엇에 쓰겠는가 함이
니, 위산(潙산)과 앙산(仰山)의 문답은 설화〔話〕에서 이미 인용해 넣었다.
"창도(唱道)"에서 도(道)는 도(導)라야 하니, 법리(法理)를 부창(敷唱)하여
뭇 중생들을 깨우쳐 이끈다는 뜻이다.
설두(雪竇)의 염에서 "지금에도 가닥을 벌리는 이는〔如今列其派〕"에서부
터 "적도다〔極少〕"까지는 뒤에 "잘 불린 정금은 빛이 변하는 일이 없느니라
〔大治精金應無變色〕"라고 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분주(汾州)의 염은 금일(今日)의 깨닫는 문을 인정치 않은 것이다.
석문(石門)의 착어는 모름지기 신훈〔今日〕을 기다려서 깨달아야 한다는
뜻이요,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을〔我伊麽道〕……"이라 함은 석문에게 도리어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동림(東林)의 "분주나 석문은……어떻게 면하리요〔汾州石門爭免〕……"
라 함은 금시와 본분이 모두가 소경이란 뜻이요, "도대체 이 세 노장이 깨닫기
나 하였던가?〔只這三箇老還曾悟也無〕"에서 셋은 분주와 석문과 백장을 가르
킨다. "조상이 똑똑치 못해서 재앙이 자손에게 미쳤다〔祖禰不了殃及兒孫〕"
고 한 것에서 '조상'은 백장이니, 똑똑치 못했기 때문에 재앙이 자손인 분주와
석주에게까지 미쳤다는 것이다.
장로(長蘆)의 뜻은 격식〔條章〕에 전혀 구애받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천동(天童)의 소참(小參)은 문장에 뜻이 드러났다.
용문(龍門)의 상당에서 "웅봉 외로운 봉우리에〔雄峯孤頂〕"에서부터 "참 종
지를 편다〔播眞宗〕"까지는 백장이 사흘 동안 귀가 먹은 경지요, "전부터 땀
흘린 말〔從前汙馬〕……"이라 함은 설두의 그러한 말로 인하여 백장이 사흘
동안 귀가 먹은 공이 더욱 드러났다는 뜻이다.
불안(佛眼)의 상당에서 "나 용문이 불을 치고〔龍門打鼓〕"에서부터 "구름처
럼 모여들었다〔雲集〕"까지는 당시의 상황이요, "승당(僧堂)이 불전(佛殿)을
삼켰고〔僧堂橫呑佛殿……"라 함은 부사의(不思議)한 도리요, "하늘은 높고 땅
은 두터우며〔天高地厚〕……"라 함은 평상시의 일이다.
"비록〔直饒〕……"이라 함은 희유(希有)하고 기이한 경지요, "방에 돌아가서
……" 같을 수 있으랴〔爭似歸堂〕"라 함은 평상시의 본분사(本分事)이다.
그렇다면 "3일 동안 귀가 먹었다"고 한 것은 공연히 새 가닥을 뻗은 것이라는
뜻이다.
장산(蔣山)의 거화(擧話)는 대용직절(大用直截) 14)만을 밝힌 것이다. 대용으
로 딱 끊기만 하면 다시 무슨 대기를 찾으랴? 비록 위세를 다하여 한 번 할을
했으나 역시 이 경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때려 준다〔和聲便打〕"함은 "이것에 의해 활용할
것인가, 이것을 떠나 활용할 것인가?" 에 당하여 힘을 다해 붙들어 일으킨다는
뜻이요, "뒤를 따라가서 할을 하리라〔隨後與喝〕"함은 "그 어찌 마조의 경지
가 아니랴" 함이며, "마조와……보았는가?〔還見馬祖〕"함은 "어디서 찾을 수
있으랴" 함이다.
운문(雲門)의 "백장이 할 소리에〔百丈被喝〕"에서부터 "3일 동안 귀가 먹었
다〔三日耳聾〕"까지는 대기를 얻은 것이요, "황벽은 그 일을 듣자 자기도 모르
는 결에 혀를 빼었다〔黃蘗不覺吐舌〕"함은 대용을 얻은 것이다.
"백장도 처음에는 그가 마조의 법을 잇는다고 여겼다〔百丈疑其承嗣馬祖〕"
함은 황벽이 한결같이 마조의 한 할을 이을까 걱정했던 것인데, 나중에 황벽이
임제에게 예순 방망이를 때리니, 이는 대용을 실천한 것인즉 백장의 숨통을 틔
워 준 것이다.
"임제도〔臨濟〕……"라고 함은 "임제가 시중(示衆)하되, '내가 선사(先師)에
게……이라 하니, 다시 한 방망이 때렸는데, 이는 쑥대불자〔蒿枝拂子〕였다'고
하였다" 고 하였다. 그런즉 마조 · 백장 · 황벽 · 임제가 활용한 곳이 같지 않으
니, 청원(淸源)이나 석두(石頭)의 자자손손(子子孫孫)이 오직 존귀인(尊貴人)
쪽의 일만을 밝힌 것과는 다르다. 이것이 이른바 잡화포(雜貨鋪)이다.
"조계의 물결이〔曺溪波浪〕……"라고 함은 천 파도 만 물결이 모두가 같지는
않으나 모두가 조계의 물이란 뜻이다.
백운(白雲)의 염은 다만 마조의 위엄을 다한 한 할을 밝혔을 뿐이다.
3.
* 아래의 내용은 어느 카페에서 발취한 것인데
아직 참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참고로 올린다.
벽암록 碧嚴錄]下
제73칙
마조의 백가지 모두 틀림(馬祖百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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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垂示수시]
垂示云.
夫說法者. 無說無示.
其聽法者. 無聞無得.
說旣無說無示. 爭如不說.
聽旣無聞無得. 爭如不聽.
而無說又無聽. 卻較些子.
只如今諸人.
聽山僧在這裏說. 作麽生免得此過.
具透關眼者.
試擧看.
설법하는 자는 말도 없고 보여줌도 없으며,
법을 듣는 자는 들음도 없고 얻음도 없다.
설법을 함에 말함도 없고 보여줌도 없으나
어찌 설법하지 않은 것과 같겠으며,
법문을 들음에 들음도 없고 얻음도 없으나
어찌 듣지 않은 것과 같겠는가?
말함도 없고 들음도 없으니
그래도 조금은 나은 편이다.
지금 여러분의 경우는
산승이 여기에서 말하는 것을 듣고
어떻게 하여야 이 허물을 면할 수 있을까?
관문을 뚫을 수 있는
안목을 갖춘 자는 거량해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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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칙]
擧.
僧問馬大師, 離四句絶百非,
請師直指某甲西來意.
馬師云. 我今日勞倦.
不能爲汝說, 問取智藏去.
僧問智藏.
藏云, 何不問和尙.
僧云, 和尙敎來問.
藏云, 我今日頭痛,
不能爲汝說, 問取海兄去.
僧問海兄.
海云, 我到這裏不會.
僧擧似馬大師.
馬師云, 藏頭白 海頭黑.
거론하다.(擧.)
어떤 스님이 마조스님에게 물었다.
“사구(四句)를 여의고 백비(百非)를 떠나서,
스님께서는 저에게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을
곧바로 가르쳐주십시오.”
(僧問馬大師, 離四句絶百非,
請師直指某甲西來意.)
- 어디에서 이 화두를 얻어왔으며
어디에서 이런 말을 들었을까?
“내, 오늘 피곤하여
그대에게 말해줄 수 없으니,
지장(智藏)스님에게 물어보게나.”
(馬師云. 我今日勞倦.
不能爲汝說, 問取智藏去.)
- 뒤로 세 걸음 물러서야지.
빗나간 줄도 모르는구나.
몸은 숨겼지만 그림자가 노출되었다.
이 늙은이가 남에게 잘도 떠맡겨버렸구나.
스님이 지장스님에게 물으니,
(僧問智藏.)
- 저놈을 한 번 내질러야 한다.
빗나간 줄도 모른다.
지장스님은 말하였다.
“왜 큰스님에게 묻지 않았느냐?”
(藏云, 何不問和尙.)
- 풀 속에 꼬리를 태운
(사람으로 둔갑한 신통력이 있는)
호랑이가 나왔구나.
무슨 말하느냐.
자승자박이군. 죽기가 십상이군.
“스님에게 물어보라고 하였습니다.”
(僧云, 和尙敎來問.)
- (제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처분을 받는군.
앞에 쏜 화살은 그래도 가볍지만
뒤에 쏜 화살은 깊이 박혔다.
“나는 오늘 골머리가 아파서
그대에게 말할 수 없으니
회해(懷海) 사형에게 묻도록 하게.”
(藏云, 我今日頭痛, 不能爲汝說, 問取海兄去.)
- 84명의 선지식답다.
하나같이 같은 병을 앓는구나.
스님이 화해스님에게 여쭙자,
(僧問海兄.)
- 다른 사람에게 떠맡겨버렸구나.
도적의 장물(贓物)을 껴안고
억울하다고 울부짖는다.
회해스님은 말하였다.
“나도 그것은 모른다.”
(海云, 我到這裏不會.)
- 마음으로 헤아리려 하질 않는구나.
따라서 천고 만고에 캄캄케 되었구나.
스님이 이를
마조스님에게 말씀드리자
(僧擧似馬大師.)
- 스님이 그래도 조금은 눈이 트였구나.
마조스님은 말하였다.
“지장스님의 머리는 희고,
회해스님의 머리는 검다.”
(馬師云, 藏頭白 海頭黑.)
- 나라 안에서는 천자의 칙령이며,
변방 밖에서는 장수의 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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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이 공안은
산승이 지난날 성도(成都)에 있으면서
진각(眞覺)스님을 참방하여 물었던 것이다.
진각스님은
“마조스님이 처음 한 대답만 보아도
자연히 단박에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말해보라,
저 스님은 알고서 물었을까
모르고서 물었을까?
이 물음이 심오하다 하겠다.
“사구(四句)를 여읜다”는 것은
‘유’, ‘무’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님(非有非無)’과
‘유도 아님마저도 아니다[非非有]’는 것이다.
이 사구를 여의면
오만가지의 잘못된 생각[百非]이 끊긴다.
그저 말로써
이러쿵저러쿵 하면
화두(話頭)를 모르고 핵심을 찾아볼 수 없다.
만일 산승이었다면
마조스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좌구(坐具)를 펴고 세 번 절하고서
어떻게 말하는가를 보았을 것이다.
만일 내가 당시에 마조스님이었다면
스님이 찾아와
“사구를 여의고 백비를 끊고서,
스님께서는 저에게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을
곧바로 가르쳐주십시오”라고 물었을 때,
등줄기를
방망이로 갈겨 내쫓아내고서
깨달았는가 않았는가를 살펴봤을 것이다.
마조스님은
오로지 그에게 말을 해 주었기 때문에,
이 스님이 서로 마주하고도 몰라보고
다시 지장스님에게 물었던 것이다.
이는 마조스님이 찾아온 자를
잘 분별할 줄 몰랐기 때문이라 하겠다.
스님이 어리석게도 지장스님에게 달려가자,
지장스님은 말하였다.
“왜 마조스님에게 묻질 않았더냐?”
“스님이
당신을 찾아가서 물으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조금만 살펴보고
내질러 몸을 비꼈더라면
결코 부질없는 짓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장스님이
“나는 오늘 머리가 아파서
그대에게 말할 수 없으니,
회해 사형에게 가서 묻도록 하게”라고 하니,
스님은 또다시
회해 사형을 찾아가 물었고,
회해사형은
“그것은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말해보라,
무엇 때문에
한 사람은 머리가 아프다 하였고,
한 사람은 모른다고 말하였을까?
결국은 무엇일까?
스님이 다시 되돌아와
이 일을 마조스님에게 말씀드리자,
마조스님은
“지장의 머리는 희고,
회해의 머리는 검다네”라고 하였다.
이를 알음알이로 헤아린다면
이는 돌아가면서
그 스님을 속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이는 서로가 떠맡겨버렸다”하고,
어떤 사람은
“세 사람 모두가 그의 물음을 알았었기에
답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이는 모두 눈먼 것이다.
이는 일시에
옛사람의 으뜸가는 제호에다가
독약을 부어넣은 격이다.
그러므로 마조스님은
“그대가 한입으로
서강의 물[西江水]을 다 마실 때 말해주리다”
고 하였는데,
이 공안과 한가지이다.
따라서
“지장스님의 머리는 희고,
회해스님의 머리는 검다”는 말을 알 수 있다면
바로 ‘서강의 물’의 화두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스님은 한 짐 가득한 어리석음을 짊어지고
편안하지 못한 데다가
세 큰스님까지 괴롭히면서
진흙과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했지만
끝내 스님은 깨닫지 못하였다.
비록 한결같이 이와 같이 하였지만
세 종사는
이 외통수[擔板漌]에게 감파를 당한 것이다.
요즈음 사람은
오로지 말만 가지고 따지며
“희다는 것은 밝음에 일치하고
검다는 것은 어둠에 일치한다”고 하여
천착하여 헤아릴 뿐,
옛사람의 한 구절이란
알음알이[意根]를 끊는 것임을 몰랐다.
이는 반드시
핵심[正脈]을 꿰뚫어야만이
온당함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맨 끝의 한 구절이
비로소 견고한 관문에 이르렀다”고 하였는데,
이는
요새가 되는 나루터를 꽉 틀어막아
성인도 범부도 지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 일을 논한다면
문 앞에서
한 자루 칼을 어루만지는 것과 같아서
머뭇거리기만 하면 목숨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또한
“비유하면 칼을 빼어
허공을 휘두르는 것과 같으니,
됐는지 안됐는지를 말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팔면이 영롱한 곳에서 알아야 할 것이다.
듣지 못하였느냐,
옛사람의 말을,
“이 깜깜한 먹통아!”
“여우 같은 정령아!”
“장님아!”
말해보라,
이는 일방 일갈(一棒一喝)과 같은 것일까,
아니면 다른 것일까?
천차만별이라 하나 한가지임을 알면
자연히 팔방에서 대적할 수 있게 된다.
“지장스님의 머리는 희고,
회해스님의 머리는 검다”는 말을 알고 싶은가?
나의 은사 오조(五祖)스님께서는
“봉후선생(封后先生 :
백성을 잘 다스리는 어르신네,
封은 風과 음이 통함)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설두스님의 송은 다음과 같다.
+++++++++++++++++++++++++++
[송]
藏頭白海頭黑.
明眼衲僧會不得.
馬駒踏殺天下人.
臨濟未是白拈賊.
離四句絶百非.
天上人間唯我知.
지장스님의 머리는 희고
회해스님의 머리는 검음이여,
눈 밝은 납승도 알 길이 없네.
망아지[馬駒]가 천하 사람을 짓밟으니
임제는 날강도가 아니었구나.
사구(四句)를 여의고
백비(百非)를 끊음이여.
천상 인간에 오직 나만이 아노라.
지장스님의 머리는 희고
회해스님의 머리는 검음이여,
(藏頭白海頭黑.)
- 반절은 닫히고 반절은 열렸구나.
한 번은 칭찬했다 한 번은 꾸짖었다 하는군.
금악기가 울리고 옥경쇠가 끝마무리를 짓는다.
눈 밝은 납승도 알 길이 없네.
(明眼衲僧會不得.)
- 다시 30년을 더 수행하라.
끝내 남에게 콧구멍을 뚫려버렸군.
산승(원오스님)은 턱이 떨어져 말을 못 하겠다.
망아지[馬駒]가 천하 사람을 짓밟으니
(馬駒踏殺天下人.)
- 총림 가운데
이 늙은이만이 이처럼 할 수 있다.
이 늙은이를 풀어줬다.
임제는 날강도가 아니었구나.
(臨濟未是白拈賊.)
- 문둥이가 짝을 이끌고 간다.
설령 뛰어난 솜씨가 있다 해도
사람에게 붙잡힐 것이다.
사구(四句)를 여의고
백비(百非)를 끊음이여.
(離四句絶百非.)
- 무슨 말 하느냐.
반드시 스스로 살펴보아라.
아버지[阿爺]와
애비[阿爹]는 같은 뜻이다.
천상 인간에 오직 나만이 아노라.
(天上人間唯我知.)
- ‘나’라는 말을 할 필요도 없다.
주장자를 빼앗아버렸다.
만일 사람이 없고 내가 없고
얻음도 없고 잃음도 없다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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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지장스님의 머리는 희고,
회해스님의 머리는 검다”고 하였는데,
말해보라, 무슨 뜻인가를.
천하의 납승들이
이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살펴보면
설두스님의 송은 매우 훌륭함을 알 수 있다.
“설령 이는
눈 밝은 납승이라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이 이치는
“신선비결(神仙秘訣)”로서,
부자 사이에도 서로 전수하지 못한다.
석가부처님이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말씀하시고,
최후에
오직 심인(心印)을 전수하셨는데,
이를 금강왕 보검(金剛王寶劍),
또는 정위(正位)라고 한다.
그러나 이 같은 말도
벌써 어쩔 수 없는 사정에
옛사람이 그 칼끝을 다소 노출시켜 버린 것이다.
이를 투철하게 체득한 자라면
종횡무진 관통하여 큰자재를 얻겠지만,
그렇지 못하고
여전히 깨치지 못한다면
말하면 할수록 더욱 멀어지기만 한다.
“망아지[馬駒]가 천하 사람을 짓밟으니”
라는 것은
서천(西天)의 반야다라(般若多羅)존자가
달마에게 예언한 말이다.
중국이 넓기는 하지만 따로이 길 없나니,
아손의 다리를 빌려가도록 하라.
금계(金鷄)가 한 알의 곡식을 머금고서
시방의 나한승에게 공양할 것이다.
또한 육조(六祖)스님은
회양스님에게 말하였다.
“이후 불법이 너에게 갈 것이며,
그 뒤에 한 망아지[馬駒]가 나와
천하 사람을 짓밟을 것이다.”
그후 강서(江西 : 馬祖)의 법제자[法嗣]들이
천하에 널리 퍼졌는데,
당시 그를 마조(馬祖)라 일컬었다.
이는 달마대사와 육조대사가
모두 일찍이 마조를 예언했던 바이며
그의 지략을 살펴보면 과연 남달랐다.
“지장스님의 머리는 희고
회해스님의 머리는 검다”고 말했을 뿐이지만
여기에서 천하 사람을
짓밟은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이 한 구절의 검다, 희다는 말은
모든 사람들이 되씹어도 부수지 못한다.
“임제는 날강도가 아니었다”는 것은,
임제스님이 하루는 대중법문을 하였다.
“붉은 고깃덩이(심장)에
한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있어,
항상 그대의 얼굴에서 출입한다.
이를 아직 깨닫지 못한 자는
살펴보고 살펴보라.”
때에 어떤 스님이 앞으로 나와 물었다.
“어떤 것이 무위진인입니까?”
임제스님이 선상(禪牀)에서 내려와
멱살을 잡고[搊] 말하였다.
“말해보라, 말해보라.”
스님이 아무 대답이 없자,
임제스님이 밀어제치면서 말하였다.
“무위진인이 무슨 마른 똥막대기냐!”
설봉스님이
그 뒤 이 소식을 듣고 말하였다.
“임제스님은 참으로 날강도와 같구나.”
설두스님이
임제스님이 한 행동을
마조스님의 기봉과 비교해 보았더니,
그는 임제스님보다도 더욱 심했으므로
그가 바로 날강도이며,
임제스님은
아직 날강도가 못 된다는 것이었다.
설두스님은
일시에 이(마조스님과 임제스님의 기봉)를
꿰뚫어 버리고
이 스님을 노래하여 말하였다.
“사구를 여의고 백비를 끊임이여,
천상 인간에 오직 나만이 아노라.”
귀신 굴 속에서 살림살이를 하지 말라.
옛사람은
“물음은 대답에 있고,
답변은 물음에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모두 기특한 말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사구를 여의고 백비를 끊을 수 있을까?
설두스님은 말하였다.
“이 일은 나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설령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알려고 해도 알지 못한다.
이미 혼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라면
그대들이 다시 와서 무엇을 구하려 하는가?
대위 진여(大潙眞如)는 이를 들어 말하였다.
“이 스님은 이처럼 묻고,
마조스님은 이처럼 답하였다.
사구를 여의고 백비가 끊겼는데,
지장스님과 회해 사형 모두가 몰랐었다."
알고 싶은가?
“망아지가 천하 사람을 짓밟는다’
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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