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융의 이야기

깨달음은

통융 2022. 1. 16. 12:37

* 깨달음이 무엇입니까?

반갑습니다. 대자비사 주지 통융입니다.

오늘 대화할 '주제가 깨달음이 무엇입니까?'라는 내용입니다.

깨달음은 온전한 자비 실천의 삶입니다. 물론 자비희사로서의 행하되 행함이 없이 할 뿐입니다.

깨달은 자를 구별하는 방법입니다.

왜 그런지는 차차 알아보겠습니다.

 

사실 깨달음은 각자가 알아차리는 체험인데 이것을 설명한다는 것은 뱀에다가 발을 그리는 실수를 범하는 것인 줄을 잘 앎니다.

더군다나 완전한 깨달음을 갖지 못한 자가 깨달음을 이야기 하려니 더욱 송구합니다.

다만 소승도 불법을 공부하는 수행자로서 소승이 경험하고 아는 것 만큼

함께 토론한다는 생각으로 이야기를 나눠 보고자 합니다.

 

깨달음에도 수준이 있고 여러 차제의 과정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경전이나 논서에서 구분하여 설명들을 하고 있는데

소승도 그러한 것들을 참고하여 깨달음의 단계를 설명 할 때는 3문으로 설명을 합니다.

3문을  체와 상과 용으로 구분해서 체공(體空). 상연(相緣),용실( 用實)으로 설명을 합니다.

대승불교의 관점에서 유식이나 여래장 천태 화엄사상 등에서 설명하고 있는 깨달음을 이론의 접근이 아닌

실제적 선불교의 작용(알아차림)인 수행 방법으로 설명해 보고자 합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는 연기적 작용성(연기소생)이 불성이며 고정된 실체가 없이 늘 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우리의 일상성(평상심)의 삶 속에 나타나 있는 그대로이며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원융무애하고 자비롭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기작용성을 알아차리는 것이 깨달음이며 그 것을 체험하는 것이 수행이라 하겠습니다.

 

첫째는 모든 진리의 실체는 공(空)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두번째는 현상에 나타나는 모든 실상들이 연기(緣起)적 현상임을 알아차리고

세번째는 각각의 쓰임으로 평상심(平常心)인 중도(中道)적 삶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은 각각 구분해서 설명은 하지만 큰 하나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체 속에 연기와 중도가 있고, 연기도 공과 중도가 들어있고, 중도역시 그렇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깨달음을 얻으려 할까요,- 깨달음의 목적이 되겠지요?

어려운 말로 - 이고득락(離苦得樂)과 자비희사(慈悲喜捨)입니다.

괴로움을 벗어나 안심과 평화을 얻고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공이니, 연기니 중도니 하는 말을 처음 듣는 분들도 있겠지만 이 셋은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를 설명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단어들입니다.

앞으로 깨달음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니 어렵게 생각할 것은 없습니다.

 

 

오늘은 깨달음의 입문이라 할 수 있는 첫번째 단계인 실체인 공(空)에 대한 체험과 함께 알아차림의 이야기를 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

 

불교가 어럽다. 깨달음이 어럽다고 하는 이유가

제가 지금 말한 것 처럼 어려운 단어를 많이 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전문 용어를 쓰지않으려고 하고, 풀어서 말씀 드리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누가 저에게

'깨달음이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내가 부처님처럼 시무여외인을 하고 금강권 수인을 한다

부처님이 말씀으로 법문을 하신 것이 아니라  중도의 참 진리를 직접 보여주신 선입니다. 

 

--- 어렵고 힘든자들아 다 내게로 와서 이 법문을 듣고 깨달아 평화를 얻으라는 뜻인 시무외인 손 법문입니다.

진리를 굳게 믿고 따르면 진리가 너희를 평화롭게 하리라.... 금강권인은 이런 뜻입니다.

오직 진리를 믿고 이 진리를 등불삼아서 너 스스로 깨달아 평화로워지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이미 선적인 법문(即作用)을 하셨던 것이지요.---------

 

여러분은 이 진리의 뜻을

..... 알아차렸습니까?

깨달음은 "진리를 알아차리고 쓰는 것입니다" 하면 될 것을 왜 어려운 문제를 내느냐고 할 수 있습니다만

깨달음은 설명으로 답을 드릴 수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제가 깨달음을 보여드린 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제 손만 봤지요,,,,

나는 깨달음을 보여드렸는데.....

 

비유를 들자면

달밤에 달이 무엇입니까? 라고 하길레 손가락으로 달을 가르켰는데

가리킨 달은 보지 않고 내 손가락을 본 격이지요.

 

만약 눈밝은 사람이 있다면 손을 보지 않고 깨달음을 알아차리겠지요.

 

 

우리는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라고 깨달음을 알고 싶어서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스스로 깨닫지 않고는 알 수가 없습니다.

깨닫지 않고는 깨달은 후의 생각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다만 각자의 식견 만큼 이해 할 뿐입니다.

예전에 달에 가보지 않았을 때는 달에 대한 여러가지 상상으로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막상 달을 정복하고 나니 의심이 없어지듯이 깨달음도 그와 같다는 말입니다.

내가 직접 체험하지 않고는 아무리 이렇다 저렇다,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하는 것은 자기 식대로 이해일 뿐입니다.

 

 

깨달음은 스스로 체험을 통해 작용하는 불성을 알아차림하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인 설명을 가지고 이해 해 봅시다.

 

예를 들어 여기 사과가 하나 있습니다.

이 사과의 맛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직접 먹어봐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대가 이 사과의 맛을 알았습니까?

아니지요, 앞에서 진리는 생각이나 말이 아니라 직접 행하는 것을 작용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우리는 습관, 혹은 분별심인 생각이 행동보다 앞 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어 보면 맛을 알지'라고 합니다.

그러다고 생각으로는 실제 맛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냥 사과를 먹어보면 됩니다.

 

제가 또 질문을 합니다.

사과의 맛이 어떻습니까?

역시 생각을 먼저 앞 세웁니다. 사과의 맛은 시다, 달다, 새콤 달콤하다느니 여러 가지 자신이 느끼는 맛을 설명하겠지요.

자신이 맛을 알아차린 것이라 해서요.

 

그런데 그대가 사가의 맛을 아무리 상세하게 설명해도 나는 사과의 맛을 100%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나도 그대처럼 100%의 사과 맛을 알 수 있을까요?

 

그렇지요. 사과를 내게 먹게 해야겠지요.

그런데 또 말이 앞서네요.

말이 필요없지요

직접 나에게 사과를 먹도록 집어주면 되지요.

 

내가 직접 먹어면 그대가 먹은 사과의 맛이랑 내가 먹은 사과의 맛이랑 같겠지요.

물론 각자 느끼는 맛은 다를 수 있지만 사과의 맛은 똑같이 알아차린다는 것입니다.

 

모든 진리의 깨달음은 이와 같습니다.

관점인 인식의 전환(생각)이 직접적으로 체험(견성-직지인심)하게 되면 더 이상 후퇴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고정관념을 부수고 진리의 실체(연기작용성=불성)을 체험하여 인식을 바꿔버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물은 맛이 없다고 생각 했는데 바닷물을 먹어 보면서 짜다는 것을 체험하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직접 체험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즉 스스로 인식 전환의 체험하지 않는 것은 지식으로 이해 할 뿐이지 진리 그 자체가 되지는 못합니다.

깨달음이란 것도 이와 같아서 말로 설명하는 것은 방편일 뿐이지 진실 그 자체는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문자나 언어로는 진실을 밝힐 수 없어서

불입문자(不立文字), 혹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고 말을 합니다.

 

박수를 친다. 다 같이 박수를 쳐 보십시요.

 

무엇이 이 소리를 만들었습니까?

 

지금 알아차렸습니까?

 

만약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마음으로 깨어 있다면

지금 제가 한 질문에 답을 하셨을 겁입니다.

 

답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생각이  어딘가에 머물고 집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음과 같은 분별들이 일어납니다.

1, 이 소리는 당연히 내가 만들었다고 합니다.

막연하게 나라고 하면 나를 무엇을 가지고 나라고 합니까?

양 손이 만들었다고 합시다. 양손이 스스로 소리는 못내겠지요.

그럼 내 의지가 만들었다고요.

의지는 내 마음이고 생각인데 그럼 손을 그냥두고 생각이나 의지로 손뼉을 칠 수 있습니까?

손뼉이 쳐 집니까?

 

그럼 도대체 무엇이 이 소리를 낼까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하는데

생각으로 답을 찾으려고 하면 할 수 록 답은 멀어집니다.

왜냐면 생각으로는 소리를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진짜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인 이 순간들을 놓치고, 

생각인 관념으로 과거나 미래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나가 버린 과거나 오지도 않을 미래의 시간에 현재의 시간을 빼앗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나가 버린 과거나 오지도 않을 미래의 시간에 현재의 시간을 빼앗기지 말고

오직 , 숨 쉬고 살아있는 이 순간을 알아차리는  것.

이것이 깨달음의 공부고 수행입니다.

 

깨달음이란 뭔가를 많이 배우고 어떤 경지를 통과해서 얻는 거창 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앎과 수행은 당연히 있어야 겠지만

오직, 지금 여기서(now here)에 살고 있는 리얼리티(reality),

내 삶을 100% 알아차리고 쓰는 삶이 깨달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지금 여기에서 알아차림과 행동을 동시에 나타내 보십시요.

바로 지금 여기서 알아차림, 관념이 아닌 현실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냥 한번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손뼉을 쳐 보십시요.

이렇게요.소뼉을 친다......

어떤 설명이나 이론이 소리를 만든 것이 아니고

그냥 .... 손뼉을 치면서 .....

이렇게 날 뿐 입니다.

 

그럼 어떻게 답을 해야 겠습니까?

 

설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냥 말없이 이렇게 ...손뼉을 치면 됩니다.

알아차림과 행동이 동시에 나타난 것입니다.

 

다시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손뼉을 치면서 ..... 이 소리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그렇지요. 바로 그것이 깨어있는 지금 입니다.

생각하고 말하고, 느끼고 분별하는 마음이 아니라

그냥 바로 일어나는 작용과 하나되는 것이 '진리의 실체'를 알아차린 것입니다.

 

진리의 실체가 나의 本性이고, 一念인 한 마음이고 중도라 합니다.

 

그래서 깨달음이란 말로 설명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질문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어디에도 머르지 않는 마음으로 머문다.'고 하면서 이 세상은 한 찰나도 고정된 실체가 없고 늘 변한다.

그래서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깨달은 '연기법인 중도'의 진리라고 합니다.

 

즉 깨달음이란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 마음으로 머무는 것'  행하되 행한다는 생각이 없는 것 '응무소주 이생기심'.

쉽게 말하면 지금 순간 순간을 과거의 생각이나 미래의 생각에 끄달리지 말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알아차린다는 뜻입니다.

이런 中道의 삶(깨달음의 삶)이 되면 마음이 평화롭고 내 이웃을 나와 같이 사랑하는 마음이 되어 행복하게 됩니다.

 

* 참된 깨달음을 얻은 수행자는 언행이 일치합니다.

탐욕이 살아졌기 때문에 욕심이 없고 無我이기 때문에 늘 평화롭습니다.

연기실상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존경스럽고 자비로워서 늘 가까이 하고 싶습니다.

 

왜 그런 마음이 생기냐 하면

 이 세상의 참 진리는 한 순간도 머물지 않고 변하다는 사실입니다. 고정된 실체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고정된 절대적인 진리를 찾는데 그런 진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즉 이 세상은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혼자서 독립된 존재, 혹은 유일한 존재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영원한 진리가 있다면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이 영원한 진리 일 수 있습니다.

매 순간순간 적절한 진리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서로서로 연결되어 존재하기 때문에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모두가 또 다른 나이기 때문에 모든 존재를 내 몸같이 자비하게 됩니다.  

참 깨달음의 행동 안에는 모두가 분별없는 부처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늘 평화롭습니다.

그래서 이고득락 자비희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오늘 제가 말씀드린 내용을 이해 한다면 비로소 깨달음에 입문하는 것으로 공에 대한 체험을 한 것입니다.

 

분별심을 내려놓고 늘 깨어있으면 마음이 평안해 집니다.

생각이 명료해 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비로워집니다.

 

시무외인을 하면서 끝을 맺는다.

 

 

 

 

- 2안-

 

* 깨달음이 무엇입니까?

반갑습니다. 대자비사 주지 통융입니다.

오늘 대화할 주제가 깨달음이 무엇입니까?라는 내용입니다.

 

누가 저에게

'깨달음이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내가 시무외인 수인을 했다.

 

제가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법우님은 지금 어디에 살고 계십니까? ...법우는- 깨닫고자 함께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랬더니

'대전 중리동에 살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일반적인 대답은 됩니다만

깨달음에 답은 아닙니다.

왜 그런지 천천히 알아보겠습니다.

 

 

그래서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그대는 지금 배가 고프면 어떻게 합니까?

밥을 먹어야 합니다.

지금 잠이오면 어떻게 합니까?

잠을 자야합니다.

아주 분명하게 답을 했습니다.

.

물론 완벽한 깨달음의 답은 아닙니다만

그렇게 다른 생각 없이 바로 알아차리는 것이 1차적인 깨달음, 즉 위빠사나라고 할 수 있고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알아차림과 동시에 행동이 따르는 것이 진짜 깨달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위의 질문을 가지고 한 번 깨달음을 구체적으로 알아봅시다.

 

먼저 지금 어디에 살고 계십니까?라고 질문할

그때 뭐라고 했지요 ..... 저는 대전 중리동에 살고 있습니다.

이 답을 잘 생각해 봅시다.

나는 지금 여기에 있는데 과거에 중리동에 살았다는 생각을 이야기한 것 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진짜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인 이 순간들을 놓치고 과거나 미래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나가 버린 과거나 오지도 않을 미래의 시간에 현재의 시간을 빼앗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나가 버린 과거나 오지도 않을 미래의 시간에 현재의 시간을 빼앗기지 말고

오직 , 숨 쉬고 살아있는 이 순간을  알아차리게 하는 것이 깨달음의 공부고 수행입니다.

 

깨달음이란 뭔가를 많이 배우고 어떤 경지를 통과해서 얻는 거창 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앎과 수행은 당연히 있어야 겠지만

오직, 지금 여기서(now here)에 살고 있는 리얼리티(reality),

내 삶을 100% 알아차리고 쓰는 삶이 깨달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질문을 지금 당신은 어디에서 살고 있습니까?

라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에 대한 온갖 질문이 사실은

지금 내가 하는 이 질문에 모두 포함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지금 여기에서 숨 쉬면서 제 앞에서 질문하고 앉아있는 법우님은 어디에서 살고 있습니까? 라는 질문이지요.

바로 여기(now here)에 살고 있는 리얼리티(reality), 관념이 아닌 현실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답을 해야 겠습니까?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라는 식의 어떤 말이나 행동을 보여야 겠지요.

이해가 갑니니까?

 

다은 질문을 봅시다.

지금 배가 고프면 어떻게 합니까?

밥을 먹어야 합니다. 라고 답을 했습니다.

당장 밥을 먹던지 배고픔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야 겠지요.

그래서 밥을 먹어야 합니다. 라고 답은 말은 맞는 말인데

말로 한다고 배가 불러지지는 않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겠습니까?

직접 밥을 찾아먹는 것이 정답이겠지요. 이것은 행동입니다.

즉 깨달음이라는 것은 지금을 알아차리는 것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작용, 즉 행동하는 것 까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바른 알아차림은 행동이 자동적으로 수반 됩니다.

 

자칫 알아차림만으로 깨달음이라 착각하는 사람은 언행이 일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 사람은 수행을 많이 하고 깨달았다고 하는데 행동은 전혀 아닌 것 같은데' 라고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삶은 현실인 reality이지 과거나 미래가 아닙니다.

과거나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 생각일 뿐이고 현실은 깨어있는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나 미래의 생각에 집착해서 아까운 지금의 삶을 허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지금을 알아치리고 사는 삶을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박수를 친다. 다같이 박수를 쳐 보십시요.

 

무엇이 이 소리를 만들었습니까?

 

지금 알아차렸습니까?

만약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마음으로 깨어 있다면 지금 제가 한 질문에 답을 하셨을 겁입니다.

 

답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생각이 지금 이 아닌 어디엔가 머물고 집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1, 이 소리는 당연히 내가 만들었다고 합니다. 막연하게 나라고 하면 나를 무엇을 가지고 나라고 합니까?

양 손이 만들었다고 합시다. 양손이 스스로 소리는 못내겠지요.

그럼 내 의지가 만들었다고요.

의지는 내 마음이고 생각인데 그럼 손을 그냥두고 생각이나 의지로 손뼉을 쳐햐지 해 보십시요.

손뼉이 쳐 집니까?

 

그럼 도대체 무엇이 이 소리를 낼까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하는데

생각으로 답을 찾으려고 하면 할 수록 답은 멀어집니다.

왜냐면 생각으로는 소리를 만들 수 없습니다.

 

알아차림과 행동이 동시에 나타내 보십시요.

그냥 한번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손뼉을 쳐 보십시요.

이렇게요.소뼉을 친다......

어떤 설명이나 이론이 소리를 만든 것이 아니고

그냥 .... 손뼉을 치면서 .....

이렇게 날뿐 입니다.

 

 

그냥 설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냥 말없이 이렇게 ...손뼉을 치면 됩니다.

알아차림과 행동이 동시에 나타난 것입니다.

 

다시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손뼉을 치면서 ..... 이 소리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그렇지요. 바로 그것이 깨어있는 지금 입니다.

생각하고 말하고 느끼고 분별하는 마음이 아니라 그냥 바로 일어나는 작용과 하나되는 것이 '진리의 실체'를 알아차린 것입니다.

 

진리의 실체가 나의 本性이고, 一念인 한 마음이고 중도라 합니다.

 

그래서 깨달음이란 말로 설명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질문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어디에도 머르지 않는 마음으로 머문다.'고 하면서 이 세상은 한 찰나도 고정된 실체가 없고 늘 변한다.

그래서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깨달은 '연기법인 중도'의 진리라고 합니다.

 

즉 깨달음이란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 마음으로 머무는 것' 행하되 행한다는 생각이 없는것인데 '응무소주 이생기심'.

 

쉽게 말하면 지금 순간순간을 과거의 생각이나 미래의 생각에 끄달리지 말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알아차린다는 뜻입니다.

이런 中道의 삶(깨달음의 삶)이 되면 마음이 평화롭고 내 이웃을 나와 같이 사랑하는 마음이 되어 행복하게 됩니다.

 

 

 

물론 깨달음의 차이는 있습니다만 이러한 상태를 깨달은자, 부처라고 합니다.

 

 

 

참된 깨달음을 얻은 수행자는 언행이 일치합니다.

탐욕이 살아졌기 때문에 욕심이 없고 無我이기 때문에 늘 평화롭습니다.

연기실상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존경스럽고 자비로워서 늘 가까이 하고 싶습니다.

 

 

모든 진리의 깨달음은 이와 같습니다.

스스로 체험하지 않는 것은 지식으로 이해 할 뿐이지 진리 그 자체가 되지는 못합니다.

깨달음이란 것도 이와 같아서 말로 설명하는 것은 방편일 뿐이지 진실 그자체는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문자나 언어로는 진실을 밝힐 수 없어서 불입문자(不立文字), 혹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고 말을 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세상의 참 진리는 한 순간도 머물지 않고 변하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존재는 찰나찰나 생과 멸을 동시에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절대적인 진리를 찾는데 그런 진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매 순간순간 적절한 진리만 있을 뿐입니다.

 

깨달음도 여러 단계와 수준으로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는데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오늘 제가 말씀드린 내용을 이해 한다면 비로소 깨달음에 입문하는 것입니다.

 

 

분별심을 내려놓고 늘 깨어있으면 마음이 평안해 집니다.

생각이 명료해 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비로워집니다.

 

시무외인을 하면서 끝을 맺는다.

 

 

<깨달음의 설명을 간략하게 했습니다.

이런 설명으로는 깨달음의 실체를 지식으로 이해 할 뿐이지 직접 체함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런 진리의 교학적인 설명은 저보다 훨씬 잘 하시는 분들도 많고

요즘은 SNS(Social Network Service)을 통해 마음만 먹으면 다양한 정보와 지식을 알고 싶은 데로 습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식만 가지고는 실질적인 삶의 체험인 깨달음을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론적인 설명이 아닌 제 나름데로 수행을 통해 체험하고 느낀 것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눠 보고자합니다.

물론 저도 아직은 수행자의 입장이니 만큼 함께 공부하는 도반으로 이해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세상은 모두가 하나의 그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연기법) 이것을 이해 못하고 자꾸 나는 내가 있어, 나는 잘났다 내 뜻데로 할거야 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괴로움이 생김니다.(일체개고)

그리고 모든 존재는 한 순간도 머물지 않고 변하다는 사실입니다. (제행무상)

그래서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법이무아)

 

이것을 확실히 알아차리는 것.

우리가 늘 찾아 헤메는 이데아 이상이라는 세계는 어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순간 그대의 마음에 따라 늘 변할 뿐입니다.

 

 

-3안-

 

. * 깨달음이 무엇입니까?

반갑습니다. 대자비사 주지 통융입니다.

오늘 대화할 주제가 깨달음이 무엇입니까?라는 내용입니다.

 

누가 저에게

'깨달음이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내가 시무외인 수인을 했다.

 

봤습니까!

 

* .

 

알아 차렸습니까?

 

*뭘요?

깨달음이라는 것을 요.

 

*아니 손바닥만 보이는 데요.

 

하나만 봤습니다.(손이라는 상에 집착하는 분별 마음이다.)

나는 손바닥을 보인 것이 아니라 진리를 그대에게 온 몸으로 보였습니다.

이 속에는 내 마음이 들어있습니다.

 

*어떤 마음요?

그대가 나에게 질문한 답이요.

다시 말해 깨달음이 뭔지을 알아차리게 하는 법문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대는 보이는 손만 봤지 그 속에 숨어 있는 나의 진실을 보지 못 했습니다.

즉 그대 마음과 내 마음이 같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대는 결과만 본 것이지 행동 이전인 (깨달음)의 본 마음을 보지 못 했습니다.

 

제가 손을 들어오린 것은 깨달음의 진리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즉 방편이라는 말이지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달을 보게 하기 위한 수단인데

우리는 달을 보지 않고 수단인 손가락만 본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손을 들어 올린 것은 진리를 가리키기 위한 수단입니다.

이 방편 법문이 부처님이 쓰신 수인인데 <시무외인(施無畏印)이라고 합니다.

- 반대편은 여원(與願)=시무여원인 ...

부처님이 중생의 모든 두려움을 없애고 위안을 주고자 할 때 쓰신 손으로 보이신 법문, 인장이라는 뜻으로 手印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손의 모양이 중요한게 아닙니다.

그 속에 숨겨진 진리를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생들아! 그대 마음이 불안하고 괴로우면 이 법 (연기실상인 중도의 이치를 보이는 이 법문을 )바로 깨닫게 되면 그대는 모든 두려움과 괴로움이 소멸될 것이다" 라고 하신 禪적인 법문으로 봐야 합니다.

결국 부처님이 말로 할수 없는 진리를 방편인 수인을 통해 가르쳐준 것입니다.

 

부처님 불상을 보면 여러 가지 손 모양들의 수인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진리를 가르쳐 주기 위한 다양한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 비유하자면 야구선수 중에 포수가 투수에게 손으로 싸인을 주고받는 것과 비슷한 뜻입니다.

말 없이 몇 가지 싸인으로 서로 주고받는 마음의 진실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선불교에서 말하는 공안이며 화두를 부처님이 직접 쓰셨다는 이야기 입니다.

 

선사들이 주장자를 들거나, 구지선사가 손가락하나 들어 올리는 것, 대표적인 조주의 자 화두가 모두 이와 같은 진리의 말 없는 법문입니다.

그 속에는 질문과 답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이러한 법문, 즉 대상을 관하여 참구하고 알아차리는 것이 간화선이고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부처님의 싸인을 금방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부처님이 자세하게 중생들의 근기에 맞춰서 대기설법(對機說法)을 하신 것을 모은 것이 팔만대장경이 되겠지요.

이 대장경은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한 보물지도와 같다고 생각하시면 되니다.

이런 설명은 깨달음에 도달하도록 하는 안내 지도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보물을 찾는 지도에는 보물이 없습니다.

단지 보물을 찾도록 길을 안내한 수단이고 방편인데 자칫 보물지도를 보물인냥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지도가 있어야 보물을 찾을 수는 있겠지만 방편은 어디까지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목적에 도달하면 수단은 필요가 없습니다.

 

부처님도 강을 건너는 뗏목을 비유하셨지요.

강을 건넜으면 뗏목을 두고 가는것이지 뗏목을 등에 메고 가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셨어요.

 

 

다시말해서 제가 이렇게 손을 든 것은 뗏목이고,,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고, 경전의 방편 법문과 같다는 것이고

그 진실인 진리, 깨달음은 말로 할 수 없는 알아차림에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하나의 법을 알아차렸다고 모든 진리를 깨달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깨달음에도 수준이 있습니다.

수다함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혹은 성문 연각 보살 부처라 던가. 여러 가지 차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승경전의 대표적인 법화경에서는 부처님이 방편과 일승불을 연꽃으로 비유해서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연꽃이 불교의 대표적인 꽃이고 모든 법의 비유로 사용되는 이유가 있기도 합니다.

 

--- 우리가 합장을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합니다.

자타가 하나 되어 일시에 성불한다.

더 깊은 뜻은 손이 연꽃입니다. 두 손 안에 연씨인 진리가 내 손 안에 있습니다.

현장법사의 서유기에서 손오송이 아무리 뛰어봐도 내 손 안에 있다는 말이 여기에 있습니다.

손오공은 원숭이로 의인화 되어 나오지만 사실은 공()의 진를 깨달아 현장스님이 사용하는 것이 손에 공도리를 쓴다는 것입니다

 

사실 연꽃은 처음 봉우리에는 연씨를 품고 있다가 꽃을 화려하게 피우고 연실만 남는데 이러한 과정이 깨달음의 과정과 흡사하여 비유를 한 것입니다.

이 합장은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합장은 이 진리를 나와 그대가 피워서 보리도를 함께 깨달아 봅시다라는 뜻입니다. ----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깨달음이 무엇입니까? 라고 할 때

내가 손을 든 소식을 알아차렸다면 즉 공()의 이치를 깨달은 것은

진리의 실체(實體)를 알아차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연기(緣起)법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이제사 깨달음의 길에 들어와서 첫발을 딛는 것과 같습니다.

수행 단계인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 중에 무색계(無色界)의 공무변처(空無邊處)에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작이 있어 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른 깨달음의 시작이면 바로 전체가 됨을 이해하게 됩니다.

법성원융(法性圓融)하다는 뜻을요.

(이러한 논리는 깨달음을 직접 바른체험을 할 때 알아차리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는 지식으로 이해할 뿐입니다.)

그래서 의상조사의 <법성계>에서 초발심시 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 시작하는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라고 하지요.

 

초기불교수행 이론을 공부하신 분들은 들어 보셨겠지만  사마타 (미얀마 등의 남방 수행은 위빠사나와 함께 설명합니다)수행의 단계를 욕계,색계,무색계로 나누지요.

감각의 세계인 6욕계(欲界 kāma-loka), 비물질적인 마음의 4색계(色界 rūpa-loka)와 물질과 마음을 벗어난 4무색계(無色界, arupa-loka)가 있는데

그 중에 무색계인 공무변처(空無邊處공간의 무한함 식무변처(識無邊處사고의 무한함 무소유처(無所有處비존재의 무한함 비상비비상처(非相非非相處意識도 아니고 의식이 아닌 것도 아님의 무한함)가 있다고 하지요.

 

간화선에서 화두를 타파하면 최초로 개오(開悟)하는 단계인데 깨달음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칫 이러한 단계를 깨달았다고 한 소식했다고 멈추거나 막행막식하는 우를 범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경계해야할 일입니다.

 

참된 깨달음을 얻은 수행자는 언행이 일치합니다.

탐욕이 살아졌기 때문에 욕심이 없고 無我이기 때문에 늘 평화롭습니다.

연기실상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존경스럽고 자비로워서 늘 가까이 하고 싶습니다.

 

----불교 수행의 종류나 수행 단계를 다양하게 설명되고 있습니다만 저는 깨달음의 단계를 크게 3단계 문으로 구분해서 설명을 합니다..

 

숭산 스님은 체상용의 3개의 영역을 올바른 상황 situation,올바른 관계 relation,올바른 실천 function으로 구분하는 것을

소승은 3단계 관문(觀門)으로 간략하게 설명해 보고자 합니다.

1인 체()는 진리의 본성품인 공()의 상태

2인 상()은 진리의 나타냄인 연기(緣起)되어 보이는 실상(實相)

3인 용()은 중도(中道)의 쓰임을 여래의 화현을 그대로 나타내는 평상심(平常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즉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성철스님의 인용구를 가지고고 설명해 보겠습니다.

, , 3으로 선문답의 구조를 찾아보면.

 

1인 체()는 산과 물의 실체를 말합니다.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다.

법의 실체는 모두가 공()한 것으로 무엇이라고 하면 어긋납니다.

즉 설명으로 산이 물이고 물이 산이다라고 할 뿐입니다.

 

2인 상()은 산과 물이 각각 어떻게 존재하는 것인가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두두 물물이 현현하는 대방광불 화엄(華嚴)의 세계입니다.

연기의 실상을 우리가 눈으로 나타내 보이는 현상인 것입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3인 용()은 각각의 쓰임에 있습니다. 묘법의 법화(法華)로 피어나는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각자의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산은 푸르고 강물은 흐른다

산은 산이 된 원인이 있고 그 산의 결과가 있게 됩니다.

산의 원인은 모든 지수화풍으로 만들어진 나무와 돌과 바위 물과 산들 온갖 자연이 어우러진 것이 산입니다.

그러한 산의 결과인 쓰임은 무엇인가? 나무가 자라고 새들이 살고 온갖 짐승들이 사는 곳이 산이다.

멀리서 산을 보면 산은 푸르다.’

 

강물은 어떠한가, 강물 또한 온갖 인연되어 만들어진 시냇물과 개울물 빗물 산물, 들물 들이 모여서 강물을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강물의 쓰임인 용()은 무엇인가. 강물은 흐르고 어떠한 곳이든 스며들고 담기고 늘 수평을 유지합니다.

그래서 쓰임의 단계인 실용(實用)의 답은 산은 푸르고 강물은 흐른다

이렇게 체상용의 3문을 바르게 알아차림을 할 때 법의 완전한 깨달음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인가? 라는 화두가 있습니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불법 혹은 진리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도 같은 것입니다.

질문을 받은 조주선사는 뜰 앞에 잣나무라고 했습니다.

명쾌한 답이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완전한 깨달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뜰 앞에 잣나무體相用 중에 에 해당 된 연기적 현상을 나타낸 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만약 로 답을 할 때는 할! 바닥을 치는 것 등이 답이 되겠으며,

의 작용은 쓰임이기에 달마가 서쪽에서 와우리에게 불법의 삶을 가르쳐준 것이 무엇이겠는가.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만약 차담(茶談)을 나누는 중이었다면 '차 한 잔을 드시게' 하면서 차를 한 잔 권해 차를 마시게 합니다.

조건 없이 쓰이는 평상심이 이며 불법의 중도(中道) 정등각(正等覺)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명상(瞑想)불교가 세계적 추세로 보급되고 있습니다.

이럴 때에 한국을 대표하는 간화선은 막연하게 어렵고 차원이 높다는 의구심(疑懼心)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다 쉽게 선문답의 구조를 이해하고 화두 수행에서 깨달음과 점검까지 이어져야 선풍(禪風)이 일어날 것이라 봅니다.

또한 한 소식에서 벗어나 3인 중도적 평상심의 삶, 즉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의 보리심을 목적으로 진화되어야 대중 속에 존경받는 불교가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사설이 길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비유나 설명이 좀 어려운가요.

설명하는 사람이 수준이 낮으면 자꾸 어려운 이야기를 빌려와서 괜히 어렵게 쓰게 됩니다.

결국 쉽게 설명하지 못한 다는 것은 '저도 아직 수준이 미흡합니다'라고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비록 부족하지만 저도 수행자이니 제가 아는 것 만큼 알려드리는 것이니 그렇게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해 안되고 제에 소견이 부복하다고 생각시면 언제든지 저희 대자비사로 찾아오셔서 좋은 가르침을 주시면더욱 감사하구요.

 

 

* 그러면 어떻게 봐야 진실(깨달음)을 바로 볼 수 있습니까?

 

부처님은 열반경에서 실지실견(悉知悉見)이라고 했습니다.

바로보고 바로안다.고 했습니다.

즉 정견(正見)이 되어야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대표적인 위빠사나 수행의 sait인 알아차림입니다.

한사티는 생각 념자 念자를 쓰는데 이것을 풀어쓰면 今이제금자와 마음 心자 입니다.

즉 지금 마음입니다.

분별하지 않는 마음을 챙긴다는 말로 마음챙김, 혹은 알아차림,일념(一念) 여시(如是) 깨달음, 한 소식, () 등으로 씁니다.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대상을 보면서 마음을 먼저 내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색수상행식인 오온(五蘊)을 나라고 하는데 그 중에서 ()은 몸이거나 대상이고 수상행식(受想行識)은 마음이라고 합니다.

()이 공함을 보면 마음인 수상행식(受想行識)은 절로 공하게 됩니다.

그런데 원리를 전도몽상(顚倒夢想) 하여 마음을 앞세우기 때문에 본질의 실체인 리얼리티를 놓치게 됩니다.

색은 연기실상으로 고정된 실체가 없습니다.

우리가 보는 대상은 매 순간 찰나찰나 생멸하는 허상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실상은 공한 것임을 이해하면 좀 더 쉽게 실체를 알아차림으로 체험 할 수 있습니다.

 

 

자 다시 한 번 질문을 하겠습니다.

부처님은 왜 이렇게 손을 들었습입니까?라고 질문을 할 때

만약 그대가 분별심이 없어진 마음( 텅 빈 마음)으로 나와 같은 마음이 되면

그대가 '손바닥을 들어 보일 것입니다.'

혹은 다른 행동을 하겠지요.

 

이렇게 설명을 하면 이해가 갈 것이다.

하지만 이해로는 그대가 깨달음을 얻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그대는 지금 그대 생각으로 보는 것이지 나와 하나가 되지 못 하기 때문에 진실을 보지 못 합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 즉 모든 대상과 하나 되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래서 설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거사님?

,

그렇게 알아차리는 것이 진리의 깨달음이고 알아차림입니다.

 

사과의 맛을 100% 앎은 직접 먹어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설명이 아닙니다.

직접 체험하는 것이고 상대에게 그대로 체험하고 하나되게 하는 것이 선문답(禪問答이고 위빠사나입니다.

 

 

손뼉을 치면서 ..... 이 소리는 어디서 났습니까?

 

오직 분별하려하지 말고 그냥 알차려보면 금방 답이 나옵니다.

만공스님이 통도사 백운암에서 새벽 종을 뎅~ 치면서 그냥 그 소리에 확 깨달았다고 하지요.

그래서 스승인 경봉 스님께 편지를 씁니다.

이제사 소금은 짜고 설탕은 단 것을 알았습니다. 라고요.

 

그냥 들을 뿐, 볼 뿐, 행할 뿐입니다.

깨달음은 과거나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닌 '지금 일어나는 작용성'입니다. 좀전에 사티인 념자를 설명했듯이요.

 

손을 들어 올리면서...... 이렇게요.

 

 

* 깨닫기 위해 수행 방법들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1, 내가 손을 들러올리면서 시무외인에서 금강권인(金剛拳印)으로 쥐어 보인다.

이 수인은 마음의 번뇌를 없애주는 상징적인 의미로 불법을 지키는 벼락,금강의 무기이기도 하다. 제석천왕이 신중탱화(神衆幀畫)에서는 중심이 되는 동진보살(童眞菩薩)이 반드시 금강저를 들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1, 같이 따라 해 봅니다.

시무외인을 하고 다시 금강권인을 하고 다시 손을 편다.

무엇이 손을 들고 주먹을 쥐고 하게 하는가?

 

 

 

2, 손뼉을 친다.

 

2, 다 같이 손뼉을 친다.

이 소리는 어디에서 납니까?

 

이것을 의심을 가지고 참구해 봅니다.

마음에 분별심을 없에고 늘 대상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깨달음이 무엇입니까 하니 이렇게 손을 들어 올렸습니다.

이렇게 손을 들어 올리는 것이 부처님의 수인이라고 했는데

스님은 왜 깨달음을 물었는데 손을 들어올리지? ......

주먹을 쥐었다 하는 것은 무엇이 하느냐교?

이 소리는 어디서 나는가?

 

이 공안을 완벽하게 알아차린다면 공()의 본질인 체()를 알아차리게 됩니다.

즉 깨달음에 입문한 것입니다.

역으로 공()이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 할 때 설명인 아닌 깨어있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답을 할 줄 아는 안목이 열린다는 뜻입니다.

 

이 질문에 답을 찾으신 분들은 저를 찾아오시면 차 한 잔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생각 할때는 내가 혹은 특정한 하나가 소리를 낸다고 알고 있는데 사실은

어떤 여러가지 조건들인 원인이 모여서 과정을 만들고 결과가 나타는 것입니다.

즉 내 의지가 손뼉을 쳐야겠다는 생각과 두 손과 무리적인 공기의 마찰과 파동이 있어야 소리가 나고 들을 수있는 것입니다. >

 

<지식은 채워가는 것이고 지혜는 비워나가는 것이라고 말하지요.

지혜로워지는 것은 채워진 지식을 비워낼 때 가능합니다.

가장 경이로운 것은 내가 우주 전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주의 모든 일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나는 나라는 존재에 갖혀 있습니다. 좀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뿐 나라는 존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깨달음이란 나라는 존재에서 벗어나 무아이며 우주가 되는 작업입니다.

 

손뼉을 치며 

지금 이 소리는 우주 전체를 진동하는 소리입니다.

이 행위는 우주의 모든 요소가 함께 작용하여 만들어내는 화모니입니다.

이러한 작용을 연기적 작용이라 합니다.

 

늘 깨어있으면

분별심을 내려놓으면 마음이 평안해 집니다. 생각이 명료해 집니다. 그리고 자비로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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