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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열면 밝은세상으로 <무문관> 열어보기 12<무문관 제18칙> 동산삼근(洞山三斤)

통융 2022. 1. 2. 20:30

문 열 밝은세상으로 <무문관> 열어보기 12

<무문관 제18> 동산삼근(洞山三斤)

 

 

 

 

 

눈은 쓰레기 더미 위에도 하얗게 내려앉네.

 

 

 

<무문관 제18> 동산삼근(洞山三斤) 洞山和尚, 因僧問, 如何是佛. 山云, 麻三斤. 동산 화상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동산이 말했다.‘마 삼 근 

<무문> 突出麻三斤, 言親意更親. 來說是非者, 便是是非人. 갑자기 뱉은 마 삼 근, 말도 가깝지만 뜻은 더욱 가깝도다. 와서 말로 시비하는 자가, 바로 시비에 떨어진 사람이다.

<덧말> 온 대지를 하얗게 뒤덮어 버리는 눈을 보라. 높고 낮고 더럽고 깨끗하고 산이나 강이나 그 어디에도 분별하지 않고 걸림 없이 무시로 내리는 것이 제법실상(諸法實相)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以生基心)이라 머무는 바 없이 머물고 행함이 없이 행한다 했다. 관념(觀念)적 과거의 기억이나 생각의 분별이 아니라 지금 있는 그대로, 일어난 그대로 실제(實際)인 부처이며 성불이다.

노산(盧山) 귀종(歸宗)선사는 부처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그대가 부처다라고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본(1377)직지심경(直指心經)에 나오는 내용이다. 운문(雲門) 선사는 부처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마른 똥 막대기(乾屎厥건시걸)’라고 했고, 마조(馬祖)선사는 마음이 부처다(卽心是佛)’라고 했다. 수산(首山)스님은 신부가 당나귀를 타고 시어머니가 고삐를 끈다라고 했다.

왜 이처럼 부처가 뭐냐는 질문에 답이 각각 다른가. 일반적인 식견(識見)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깨어있는 선안(禪眼)으로 보면 우주 법계에 존재하는 것이 모두가 부처라는 말이다.

화엄경여래출현품에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고 세상을 보니 기이하고 기이하다 이렇게 모든 중생이 여래의 지혜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어리석은 미혹으로 이것을 보고 듣고도 알지를 못하는가?’라고 했다. 이 세상은 본래 불국토이고 부처 아닌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단지 중생들이 각자의 알음알이인 탐욕()과 화냄()과 어리석()은 무명이 앞을 가려 자신이 부처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무명업장으로 괴로워하는 중생들을 위해 참 진리의 법을 펴신 것이 불교다.

부처님이 깨달은 참 진리는 중도(中道)의 연기법(緣起法)이다. 이 법은 온 세상은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모두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일체가 부처라는 것이다. 즉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부처님이라 어떤 것 하나 소홀히 할 수가 없고 전체가 다 한 몸이요 평등하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가장 중요한 주제가 바로 자비희사(慈悲喜捨)인 나눔(布施)이다. 자신을 사랑하듯 일체중생을 내 몸같이 자비하여 나와 이웃이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동체대비(同體大悲)가 불교를 믿는 목적이다.

 

동산스님이 아마 삼마()로 만든 옷을 입으려고 할 때 어떤 스님이 부처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모양이다. 그러니 보이는 대로 있는 데로 그것이니 마가 세 근이라는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마음이 말과 뜻에 속고 있으니 어쩌겠나, 보고 듣고 만지면서 속고 속으면서 사는 중생 살이 끝내는 방법이 마 삼 근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에게 질문하겠다. 무엇이 부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