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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열면 밝은세상으로 <무문관> 열어보기 11<무문관 제43칙> 수산죽비(首山竹篦)

통융 2021. 10. 5. 22:21

문열면 밝은세상으로 <무문관> 열어보기 11

<무문관 제43> 수산죽비(首山竹篦)

 

 

진리의 말씀

 

 

달마는 면벽을 하고, 가섭은 웃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힌다.

 

 

 

<무문관 제43> 수산죽비(首山竹篦) 首山和尚, 拈竹篦示眾云, 汝等諸人, 若喚作竹篦則觸, 不喚作竹篦則背. 汝諸人, 且道. 喚作甚麼. 수산 화상이 죽비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고는 말했다. “너희들이 만약 죽비라고 부른다면 (법에) 저촉되는 것이고, 죽비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사물에) 어긋나는 것이다. 너희들은 한번 말해 보라. 무엇이라 부르겠느냐?” 

<무문> 拈起竹篦 行殺活令. 背觸交馳 佛祖乞命. ‘죽비를 들어 올려 죽이고 살리는 명령을 행하도다! 위배와 저촉이 번갈아 쫓으니 부처와 조사도 목숨을 비는구나!’

<덧말> 수산성념(首山省念:926-993)은 임제 선사의 선풍이 쇠퇴하기 시작하던 송나라 초기에 다시 임제종의 바람을 일으켜 세운 선사이다. 수산 스님에게 어느 때 한 승려가 부처란 무엇입니까?”하고 묻자 수산 스님께서 신부는 나귀 타고 시어머니는 고삐를 끄네!”라는 선문답이 유명하다. 이 세상에 부처가 아닌 것은 없다. 왜냐면 부처는 연기(緣起)적 작용(作用)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비를 무엇이라고 할 것이냐는 질문에 죽비는 부처이다라고 한다면 답이 될까? 관념적(觀念的)인 설명으로는 틀리지 않으나 죽비의 실제(實際)는 아니다. 나와 죽비인 주객(主客)이 둘로 나눠서 생각하는 것을 관념(觀念)이라고 하고. 주객을 둘로 나누지 않고 하나로 대상을 나타내거나 알아차리는 것은 실제(實際)라고 한다. 예를 들어 목이 마르면 어떻게 합니까?’ ‘물을 마셔야 합니다라고 답을 할 때 물을 마셔야 한다는 말로는 갈증을 해결할 수 없다. 말이 필요 없이 직접 물을 마시면 된다. 이렇듯 관념과 실제는 분명히 다르다. 우리의 매 순간순간 실제로 깨어서 살아야 하는데 자칫 말씀이 진리인 것처럼 생각한다. 말씀은 생각이나 행위의 수단 즉 설명은 될 수 있으나 실체은 아니다. 그래서 선문답은 말이나 문자로는 나타낼 수 없다고 해서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니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을 쓴다. 위의 공안도 수산 스님이 죽비를 들고 이것을 죽비라 해도 아니라 해도 틀린다. 그렇다면 이것의 실제가 무엇이냐는 것을 묻고 있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부를 것이냐? 무엇을 말(언어)해야 한다는 것에 속으면 안 된다. 죽비를 바라보면서 죽비 혹은 무엇이니, 또 뭐 같다느니 하면서 각자의 생각이나 분별로 하는 순간 죽비로 한 대 맞는다. 질문하는 사람의 말에 현혹 되지 말고 질문의 본체인 죽비, 즉 그 물건과 내가 하나 된 전부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공안을 알아차리는 것은 연기 실상을 깨닫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조건과 관계인 인연(因緣)의 과()로 이뤄져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은 찰나 생멸하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모든 것을 실지실견(悉知悉見)으로 실제를 바로 알차림이다.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소금은 짜고 설탕은 달다는 것을 바로 알고 쓰는 참 살이가 깨달은 삶이라고 하는 것이다.

 

혹자는 한국 선불교의 간화선 수행을 개인 해탈의 소승적인 수행으로 대승적인 6바라밀의 보살심이 없다고 지적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왜냐면 수십 년씩 수좌라며 좌복을 깔고 앉아 공양만 받고 산속에 은거하거나 혹여는 바르게 깨닫지 못한 증상만(增上慢)들이 막행막식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처님도 보리도량에서 지관(止觀)수행을 통해 제법이 공상(空相)과 연기(緣起)적 진리를 깨닫고 제법실상(諸法實相)의 대자비행을 했듯, 간화선 수행도 이러한 지관수행을 통해 깨달음의 단계를 거치면 일불승의 대승적 자비행이 확연해 지는 것이다. 즉 돈오(頓悟)의 진리는 모든 존재는 또 다른 이기 때문에 원융(圓融)한 중도실행을 하게 되며, 그 자체의 삶 모두가 바라밀행이 된다. 이러한 선()법을 직접 깨달아 보지 않고 보고 듣는 것만 가지고 폄하 하거나 6바라밀행이 중심인 대승 경전의 설명만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 대답해 보라! 걷고 있는 그대는 무엇이 그대를 걷게 하는가?

수산 스님의 죽비가 바로 나임을 참되게 알아차릴 때 이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 자비희사(慈悲喜捨)로 모든 중생을 유익하게 요익중생(饒益衆生)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