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의 특징
중국의 작은 부처님으로 지칭되는 천태 지의대사님은 부처님 일대(一代)의 가르침을 분류하는 오시교판(五時敎判)에서 법화경이야말로 부처님께서 이 땅에 출현하신 참 뜻(本懷)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경전이라고 판정하셨습니다. 또한 법화경은 오늘날까지도 화엄경과 함께 최고의 대승경전으로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널리 신봉되고 있습니다.
법화경의 구체적인 내용과 사상에 앞서 여기서는 우선 경의 특색을 간단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법화경이 모든 경전 가운데 가장 널리 독송되고 많은 주석서가 씌어진 이유로는 다음의 일곱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 법화경은 6번 번역되어 3종이 현존한다하여 육역삼존(六譯三存)이라고 하며, 이 중에서도 구마라집(鳩摩羅什)삼장(三藏, 경, 율, 논의 3장에 통달하신 분을 삼장법사라고 하며, 이를 줄여서 삼장이라 합니다.)이 번역한 묘법연화경이 가장 널리 유통되고 있습니다. 구마라집삼장의 묘법연화경은 자신이 읽거나 남이 읽는 소리만 들어도 깊은 감명을 주기 때문입니다.
묘법연화경은 문장이 미려(美麗)할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내용까지도 풍성하고 독자를 감동시키는 문구들이 많이 실려있어 독송(讀誦)시에 리듬이 경쾌하고 독송자로 하여금 종교적인 법열(法悅)의 세계로 빠져들게 합니다. 구마라집삼장의 번역술은 번역을 위해서 세상에 오신 듯 빼어난 서술력과 탁월한 번역능력이 있었기에 묘법연화경이 특히 감명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유통되고 있는 한글 법화경도 모두 구마라집삼장의 묘법연화경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번역된 것이며 그 중에서도 석묘찬 스님의 한글본이 독송에 가장 좋은 것 같습니다. 물론 너무 한글화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으나 독송시의 리듬은 가장 뛰어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두 번째, 법화경에서는 수지, 독, 송, 해설, 서사를 하거나 부처님의 법신사리(法身舍利)처럼 제단에 모시고 공양하면 크나 큰 공덕이 있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법화경 경전 그대로가 진리일 뿐 아니라 곧 부처님(法身)이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공양이란 법화경의 경권을 법신사리로서 불단(佛壇)에 모시고 향과 꽃 등으로써 공양하고 예배, 찬탄(讚歎)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법화행자는 집에 법화경을 모시고 매일 독송, 서사 및 창제를 생활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 즉 신앙활동이 일상생활화 되어 있다는 점은 여타 경전을 소의를 하는 불교신자들과는 다른 점이며, 이러한 신행의 생활화가 더욱 바람직한 종교형태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물론 경전수지의 공덕은 반야경에서도 강조되고 있지만 반야경은 공관(空觀)을 바탕으로 한 억겁(億劫)수행의 난행도(難行道)로 법화경에서의 경전수지 공덕과는 그 뜻이 다른 것으로 보입니다.
세 번째, 법화경에서는 법화칠유(法華七喩)를 비롯한 다양한 비유를 통해서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부처님의 자비사상(慈悲思想)이 폭넓게 교설(敎說)되어 있고, 부처님께서 중생을 구제하는 자비스럽고 교묘(巧妙)한 방법이 한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법화경의 비유품(譬喩品)에서는 부처님의 대자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今此三界 皆是我有 其中衆生 悉是吾子
而今此處 多諸患難 唯我一人 能爲救護"
"지금 이 삼계는 모두가 나의 것이며, 그 안에 살고있는 중생은 모두가 나의 자식인데,
이제 여기 이리도 고난이 많아 오직 나 혼자만이 그들을 구하고 지켜줄 수 있노라."
이 외에도 법화경에는 궁자의 비유(窮者喩), 양의의 비유(醫子喩) 등과 같이 부처님의 대자비를 보여주는 내용이 많이 설시(說示)되어 있습니다.
네 번째, 웅대한 불신론(佛身論)이 전개되는데, 2,500여년 전 인도에서 출생하신 부처님은 중생구제를 위한 자비의 방편으로 몸을 나투신 것일 뿐, 법신(法身)으로서 본래의 부처님은 비생(非生)에서 생(生)을, 비멸(非滅)에서 멸(滅)을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즉, 법신은 시작이 없는(無始) 아득한 옛날부터 현재는 물론 끝없는 영겁(永劫)의 미래(無終)까지 영원히 존재하면서 설법하고 있다는 `구원실성(久遠實成)`이 설해지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법화경의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서는 이 세상에 출현하신 부처님을 가야성 인근에서 성도(成道)하셨다는 뜻의 가야근성(伽耶近城)의 부처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붓다가야에서 성불하신 부처님은 팔십세의 나이로 쿠시나가라에서 입멸하셨지만 이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생명을 보이신 방편신(方便身, 迹佛)일뿐, 실은 무한한 과거에 성불하신 구원실성(久遠實成)의 부처님(本佛)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수명(壽命)은 무량(無量)하다는 것입니다. 즉 법화경은 역사적 인격으로서의 부처님이 불법을 펴기 위한 방편신이며 부처님의 법신은 영원하다는 신앙의 요체를 설하고 있습니다.
이 부처님의 법신은 영원하다는 말씀은 우리 법화행자들에게 큰 용기를 주시는 말씀이며, 우리의 각오를 새롭게 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부처님의 수명이 영원하심은 우리의 생명도 영원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법화경의 화성유품(化城喩品)에서 밝히신 사바세계(娑婆世界)의 중생들과의 구원(久遠)의 인연(因緣) 때문에 여러 보살님들과 함께 우리의 곁에서 대자비한 마음으로 우리들이 불신(佛身)을 속히 성취하도록 항상 이끌어주심을 알고, 모처럼 맞이한 좋은 인연이 헛되지 않도록 또한 영겁토록 계속되는 윤회에서 벗어나고 또한 악도(惡道)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불법 수행을 게을리 해서는 안되겠다는 각오를 하게 됩니다.
다섯 번째, 일승(一乘)의 교설(敎說)이 강조(强調)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을 성불(成佛)로 인도하는 일승의 가르침만이 있을 뿐, 이승(二乘)도 없고 삼승(三乘)도 없습니다.
일승이란 "하나의 탈 것"이라는 뜻이나, 삼승에 상대되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삼승이란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의 셋을 말합니다. 인간에게는 능력(根機)의 차이가 있으므로 그 근기의 차이에 따라 부처님은 방편설법으로 가르침을 설하셨으므로 가르침도 각 각 다르다고 보는 것이 삼승교(三乘敎)의 입장입니다. 즉 삼승교는 인간에게는 근기의 차이가 있다는 견해에 입각한 것이고, 이에 대하여 일승이란, 가르침은 오직 하나라고 하는 의미인 것이며, 모든 사람을 성불에 이끄는 것이 부처님의 출세(出世)의 본회(本懷, 근본목적)이므로 오직 성불의 가르침만이 있다고 하는 견해입니다.
대승의 가르침이란 바로 중생성불의 가르침이고 성불이외에 아라한(阿羅漢)이나 연각이 되는 가르침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도 최후에는 성불을 지향하는 것이므로 대승 이외에 성문승이나 연각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화경 오백제자수기품(五百弟子授記品)에서는
"안으로는 비밀히 보살의 행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성문이라 행세를 하며,
소승의 가르침 원하며 생사에 얽혔어도 실제로는 대승을 가지고 온 세상을 깨끗하고도 맑게 하려는 뜻"
이라고 설하여 부처님의 제자인 성문(聲聞)들은 실제로는 보살행을 하고 있으나 근기가 낮은 중생들의 구제를 위하여 방편으로 성문행을 하고 있음을 설하고 있습니다. 즉, 성문의 행이 그대로 보살행(菩薩行)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문이나 연각의 행을 부정하지 않고 그것을 긍정한 상태에서 궁극의 목적인 성불의 행으로 인도해 가는 것이 이 일승의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성불의 행을 설하는 보살승 중에도 성문승이나 연각승을 배척하고 그들은 성불할 능력이 없다고 단정하는 대승불교도도 있습니다. 전술한 삼승교 중에서 보살승의 입장이 바로 그것인데 성문, 연각의 이승(二乘)의 작불(作佛)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승(二乘)을 소승(小乘) 또는 대승(大乘)의 패종(敗種)이라고 폄하(貶下)하였습니다.
이처럼 소승이 비난을 받는 이유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근본 목적이 바로 성불에 있는데 소승교도들은 이를 포기하고 일신의 안락(安樂)만을 추구하여 열반(涅槃)을 최고의 경지로 함으로서 결과적으로는 중생 누구에게나 있는 불성(佛性)의 개발을 가로막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승의 작불을 인정하고 일체개성(一切皆成)을 설하는 일승교의 입장에서 보면 삼승교는 모든 중생을 성불로 유인하기 위한 방편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이 성불할 수 있는 근거를 밝히는 일승교야 말로 진실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법화경 방편품에 설하는 `삼승방편(三乘方便) 일승진실(一乘眞實)`이라는 가르침은 이와 같은 의미의 대승인 것입니다. 같은 대승이라 해도 성문이나 연각을 배척하는 대승과 이 이승을 안으로 포용하는 대승과의 두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후자가 바로 일승인 것입니다.
일승은 `모든 사람은 성불이 가능하다.`고 설하는 가르침이므로 인간의 본질은 평등하다고 하는 인식에 입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사성평등(四姓平等)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사상으로 훗날 열반경(涅槃經) 등의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 즉, 일체의 중생은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는 사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법화경에는 불성(佛性)이란 말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성불할 수 있다.`고 하는 사상은 실유불성(悉有佛性)과 같은 사상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태 지의대사님은 법화경을 열반경과 동열로 본 것입니다.
여섯째로 법화경에는 성불은 어렵지 않다고 하는 사상이 있습니다. 법화경의 상불경보살품(常不輕菩薩品)에는 상불경보살이 일체중생을 예배하고 <그대들은 모두 보살도를 행하여 마땅히 부처가 되리라.>고 설하고 있으며, 또한 `이 경을 듣는 사람은 곧 불도를 이루리라`고도 설하고 있습니다. 다시 방편품(方便品)에는 불탑이나 불상을 만들며, 혹은 불탑과 불상에 예배하는 것 등으로도 불도를 이루는 사람이 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어린애들이 장난으로 모래를 쌓아 불탑을 만든 것만으로도 혹은 불탑에 들어가서 `나무불(南無佛)`하고 염불하는 것만으로도 불도를 성취할 수가 있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信)에 의하여 성불하는 것을 나타낸 것이며, 불탑(佛塔)신앙(信仰)과 관계가 깊습니다. 그래서 엄격한 수행(難行道)에 의하지 않더라도 믿음(부처님의 무한한 자비와 공덕)에 의지하여 성불할 수 있음을 나타낸 것이며, 법화경의 현저한 특색의 하나라 할 수 있는 일승은 이와 같은 성불의 인식에 바탕하여 주장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즉신성불(卽身成佛)과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불국토를 건설하자는 사상으로 바로 연결됩니다. 즉신성불이란 범부중생의 몸으로서 불신(佛身)을 성취할 수 있다는 사상으로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서방 극락정토가 아닌 바로 이 사바세계에서 부처를 이루자는 사상입니다. 또한 이를 위해서는 이 사바세계를 상락아정의 불국토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법화경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의 게송(偈頌)에는
"중생들은 큰 불이 나서 겁이 다한 줄로 보지만
내가 있는 이 불국토는 안온하여 하늘과 인간들이 가득하며,
동산과 수풀과 여러 건물들은 여러 가지 보배로 장엄 되고,
보배나무에는 꽃과 열매가 무성하고
그곳에서 중생들은 즐겁게 노니는데,
여러 하늘들은 북을 치며 항상 여러 가지 재주와 음악을 연주하며
만다라의 꽃을 비처럼 내려 부처님과 대중들에게 흩으니라.
나의 정토는 이처럼 무너지지 않는데도 중생들은 불타 없어진다고 보며,
근심과 두려움에 많은 고뇌 가득하니, 많은 죄 짊어진 중생들은 악업의 인연으로
아승기 겁 지내도록 불ㆍ법ㆍ승의 삼보(三寶)의 이름도 못 듣노라.
그러나 공덕을 닦아 부드럽고 순수한 마음 가진 사람들은
모두 내 몸이 여기 있어 가르침을 설하고 있는 것 볼 수 있느니라."
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상락아정의 세계를 서방의 극락정토와 같은 다른 세계에서 찾지 말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바세계를 상락아정의 불국토로 건설하자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로 가장 중요한 것은 법화경은 말세의 중생을 위하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이라는 것입니다.
법화경을 세심히 읽어보면 부처님께서 이 법화경을 설하신 목적이 두 가지 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적문의 일불승(一佛乘) 또는 이승작불(二乘作佛)로 나타나는 부처님 재세(在世)시의 제자들을 위한 가르침입니다. 즉, 부처님께서 40여년간 설하신 가르침의 결론으로서 지금까지 설하신 가르침 전체를 정리하여 마무리하기 위해 설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의 그리고 근본적인 목적은 바로 말세가 되어 세상이 혼란해진 때의 많은 인간을 위해 설하신 것으로 여기에 법화경의 귀중함이 있는 것입니다. 법화경의 곳곳에 서 오탁악세(五濁惡世)나 후오백세(後五百世)에 어떻게 신행해야 할 것인가를 설하시고 있으며, 말세에 중생들의 성불을 위한 서원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세에 사는 우리로서는 어떠한 경전보다는 바로 이 법화경에 귀의하여 부처님의 가르침(勅命)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상은 법화경에 대하여 상세히 알아보기 전에 개략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여러 서적에서 언급되고 있는 법화경의 특색을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나 어쨌든 이와 같은 특색을 가진 경전은 실로 희유한 것이며 예부터 법화경이 존중되고, 중요시되었던 것은 이와 같이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중국의 작은 부처님으로 지칭되는 천태 지의대사님은 부처님 일대(一代)의 가르침을 분류하는 오시교판(五時敎判)에서 법화경이야말로 부처님께서 이 땅에 출현하신 참 뜻(本懷)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경전이라고 판정하셨습니다. 또한 법화경은 오늘날까지도 화엄경과 함께 최고의 대승경전으로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널리 신봉되고 있습니다. 법화경의 구체적인 내용과 사상에 앞서 여기서는 우선 경의 특색을 간단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법화경이 모든 경전 가운데 가장 널리 독송되고 많은 주석서가 씌어진 이유로는 다음의 일곱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 법화경은 6번 번역되어 3종이 현존한다하여 육역삼존(六譯三存)이라고 하며, 이 중에서도 구마라집(鳩摩羅什)삼장(三藏, 경, 율, 논의 3장에 통달하신 분을 삼장법사라고 하며, 이를 줄여서 삼장이라 합니다.)이 번역한 묘법연화경이 가장 널리 유통되고 있습니다. 구마라집삼장의 묘법연화경은 자신이 읽거나 남이 읽는 소리만 들어도 깊은 감명을 주기 때문입니다.
묘법연화경은 문장이 미려(美麗)할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내용까지도 풍성하고 독자를 감동시키는 문구들이 많이 실려있어 독송(讀誦)시에 리듬이 경쾌하고 독송자로 하여금 종교적인 법열(法悅)의 세계로 빠져들게 합니다. 구마라집삼장의 번역술은 번역을 위해서 세상에 오신 듯 빼어난 서술력과 탁월한 번역능력이 있었기에 묘법연화경이 특히 감명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유통되고 있는 한글 법화경도 모두 구마라집삼장의 묘법연화경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번역된 것이며 그 중에서도 석묘찬 스님의 한글본이 독송에 가장 좋은 것 같습니다. 물론 너무 한글화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으나 독송시의 리듬은 가장 뛰어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두 번째, 법화경에서는 수지, 독, 송, 해설, 서사를 하거나 부처님의 법신사리(法身舍利)처럼 제단에 모시고 공양하면 크나 큰 공덕이 있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법화경 경전 그대로가 진리일 뿐 아니라 곧 부처님(法身)이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공양이란 법화경의 경권을 법신사리로서 불단(佛壇)에 모시고 향과 꽃 등으로써 공양하고 예배, 찬탄(讚歎)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법화행자는 집에 법화경을 모시고 매일 독송, 서사 및 창제를 생활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 즉 신앙활동이 일상생활화 되어 있다는 점은 여타 경전을 소의를 하는 불교신자들과는 다른 점이며, 이러한 신행의 생활화가 더욱 바람직한 종교형태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물론 경전수지의 공덕은 반야경에서도 강조되고 있지만 반야경은 공관(空觀)을 바탕으로 한 억겁(億劫)수행의 난행도(難行道)로 법화경에서의 경전수지 공덕과는 그 뜻이 다른 것으로 보입니다.
세 번째, 법화경에서는 법화칠유(法華七喩)를 비롯한 다양한 비유를 통해서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부처님의 자비사상(慈悲思想)이 폭넓게 교설(敎說)되어 있고, 부처님께서 중생을 구제하는 자비스럽고 교묘(巧妙)한 방법이 한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법화경의 비유품(譬喩品)에서는 부처님의 대자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今此三界 皆是我有 其中衆生 悉是吾子
而今此處 多諸患難 唯我一人 能爲救護"
"지금 이 삼계는 모두가 나의 것이며, 그 안에 살고있는 중생은 모두가 나의 자식인데,
이제 여기 이리도 고난이 많아 오직 나 혼자만이 그들을 구하고 지켜줄 수 있노라."
이 외에도 법화경에는 궁자의 비유(窮者喩), 양의의 비유(醫子喩) 등과 같이 부처님의 대자비를 보여주는 내용이 많이 설시(說示)되어 있습니다.
네 번째, 웅대한 불신론(佛身論)이 전개되는데, 2,500여년 전 인도에서 출생하신 부처님은 중생구제를 위한 자비의 방편으로 몸을 나투신 것일 뿐, 법신(法身)으로서 본래의 부처님은 비생(非生)에서 생(生)을, 비멸(非滅)에서 멸(滅)을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즉, 법신은 시작이 없는(無始) 아득한 옛날부터 현재는 물론 끝없는 영겁(永劫)의 미래(無終)까지 영원히 존재하면서 설법하고 있다는 `구원실성(久遠實成)`이 설해지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법화경의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서는 이 세상에 출현하신 부처님을 가야성 인근에서 성도(成道)하셨다는 뜻의 가야근성(伽耶近城)의 부처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붓다가야에서 성불하신 부처님은 팔십세의 나이로 쿠시나가라에서 입멸하셨지만 이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생명을 보이신 방편신(方便身, 迹佛)일뿐, 실은 무한한 과거에 성불하신 구원실성(久遠實成)의 부처님(本佛)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수명(壽命)은 무량(無量)하다는 것입니다. 즉 법화경은 역사적 인격으로서의 부처님이 불법을 펴기 위한 방편신이며 부처님의 법신은 영원하다는 신앙의 요체를 설하고 있습니다.
이 부처님의 법신은 영원하다는 말씀은 우리 법화행자들에게 큰 용기를 주시는 말씀이며, 우리의 각오를 새롭게 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부처님의 수명이 영원하심은 우리의 생명도 영원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법화경의 화성유품(化城喩品)에서 밝히신 사바세계(娑婆世界)의 중생들과의 구원(久遠)의 인연(因緣) 때문에 여러 보살님들과 함께 우리의 곁에서 대자비한 마음으로 우리들이 불신(佛身)을 속히 성취하도록 항상 이끌어주심을 알고, 모처럼 맞이한 좋은 인연이 헛되지 않도록 또한 영겁토록 계속되는 윤회에서 벗어나고 또한 악도(惡道)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불법 수행을 게을리 해서는 안되겠다는 각오를 하게 됩니다.
다섯 번째, 일승(一乘)의 교설(敎說)이 강조(强調)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을 성불(成佛)로 인도하는 일승의 가르침만이 있을 뿐, 이승(二乘)도 없고 삼승(三乘)도 없습니다.
일승이란 "하나의 탈 것"이라는 뜻이나, 삼승에 상대되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삼승이란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의 셋을 말합니다. 인간에게는 능력(根機)의 차이가 있으므로 그 근기의 차이에 따라 부처님은 방편설법으로 가르침을 설하셨으므로 가르침도 각 각 다르다고 보는 것이 삼승교(三乘敎)의 입장입니다.
즉 삼승교는 인간에게는 근기의 차이가 있다는 견해에 입각한 것이고, 이에 대하여 일승이란, 가르침은 오직 하나라고 하는 의미인 것이며, 모든 사람을 성불에 이끄는 것이 부처님의 출세(出世)의 본회(本懷, 근본목적)이므로 오직 성불의 가르침만이 있다고 하는 견해입니다.
대승의 가르침이란 바로 중생성불의 가르침이고 성불이외에 아라한(阿羅漢)이나 연각이 되는 가르침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도 최후에는 성불을 지향하는 것이므로 대승 이외에 성문승이나 연각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화경 오백제자수기품(五百弟子授記品)에서는
"안으로는 비밀히 보살의 행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성문이라 행세를 하며,
소승의 가르침 원하며 생사에 얽혔어도 실제로는 대승을 가지고 온 세상을 깨끗하고도 맑게 하려는 뜻"
이라고 설하여 부처님의 제자인 성문(聲聞)들은 실제로는 보살행을 하고 있으나 근기가 낮은 중생들의 구제를 위하여 방편으로 성문행을 하고 있음을 설하고 있습니다. 즉, 성문의 행이 그대로 보살행(菩薩行)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문이나 연각의 행을 부정하지 않고 그것을 긍정한 상태에서 궁극의 목적인 성불의 행으로 인도해 가는 것이 이 일승의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성불의 행을 설하는 보살승 중에도 성문승이나 연각승을 배척하고 그들은 성불할 능력이 없다고 단정하는 대승불교도도 있습니다. 전술한 삼승교 중에서 보살승의 입장이 바로 그것인데 성문, 연각의 이승(二乘)의 작불(作佛)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승(二乘)을 소승(小乘) 또는 대승(大乘)의 패종(敗種)이라고 폄하(貶下)하였습니다. 이처럼 소승이 비난을 받는 이유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근본 목적이 바로 성불에 있는데 소승교도들은 이를 포기하고 일신의 안락(安樂)만을 추구하여 열반(涅槃)을 최고의 경지로 함으로서 결과적으로는 중생 누구에게나 있는 불성(佛性)의 개발을 가로막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승의 작불을 인정하고 일체개성(一切皆成)을 설하는 일승교의 입장에서 보면 삼승교는 모든 중생을 성불로 유인하기 위한 방편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이 성불할 수 있는 근거를 밝히는 일승교야 말로 진실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법화경 방편품에 설하는 `삼승방편(三乘方便) 일승진실(一乘眞實)`이라는 가르침은 이와 같은 의미의 대승인 것입니다. 같은 대승이라 해도 성문이나 연각을 배척하는 대승과 이 이승을 안으로 포용하는 대승과의 두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후자가 바로 일승인 것입니다.
일승은 `모든 사람은 성불이 가능하다.`고 설하는 가르침이므로 인간의 본질은 평등하다고 하는 인식에 입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사성평등(四姓平等)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사상으로 훗날 열반경(涅槃經) 등의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 즉, 일체의 중생은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는 사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법화경에는 불성(佛性)이란 말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성불할 수 있다.`고 하는 사상은 실유불성(悉有佛性)과 같은 사상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태 지의대사님은 법화경을 열반경과 동열로 본 것입니다.
여섯째로 법화경에는 성불은 어렵지 않다고 하는 사상이 있습니다. 법화경의 상불경보살품(常不輕菩薩品)에는 상불경보살이 일체중생을 예배하고 <그대들은 모두 보살도를 행하여 마땅히 부처가 되리라.>고 설하고 있으며, 또한 `이 경을 듣는 사람은 곧 불도를 이루리라`고도 설하고 있습니다. 다시 방편품(方便品)에는 불탑이나 불상을 만들며, 혹은 불탑과 불상에 예배하는 것 등으로도 불도를 이루는 사람이 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어린애들이 장난으로 모래를 쌓아 불탑을 만든 것만으로도 혹은 불탑에 들어가서 `나무불(南無佛)`하고 염불하는 것만으로도 불도를 성취할 수가 있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信)에 의하여 성불하는 것을 나타낸 것이며, 불탑(佛塔)신앙(信仰)과 관계가 깊습니다. 그래서 엄격한 수행(難行道)에 의하지 않더라도 믿음(부처님의 무한한 자비와 공덕)에 의지하여 성불할 수 있음을 나타낸 것이며, 법화경의 현저한 특색의 하나라 할 수 있는 일승은 이와 같은 성불의 인식에 바탕하여 주장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즉신성불(卽身成佛)과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불국토를 건설하자는 사상으로 바로 연결됩니다. 즉신성불이란 범부중생의 몸으로서 불신(佛身)을 성취할 수 있다는 사상으로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서방 극락정토가 아닌 바로 이 사바세계에서 부처를 이루자는 사상입니다. 또한 이를 위해서는 이 사바세계를 상락아정의 불국토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법화경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의 게송(偈頌)에는
"중생들은 큰 불이 나서 겁이 다한 줄로 보지만
내가 있는 이 불국토는 안온하여 하늘과 인간들이 가득하며,
동산과 수풀과 여러 건물들은 여러 가지 보배로 장엄 되고,
보배나무에는 꽃과 열매가 무성하고
그곳에서 중생들은 즐겁게 노니는데,
여러 하늘들은 북을 치며 항상 여러 가지 재주와 음악을 연주하며
만다라의 꽃을 비처럼 내려 부처님과 대중들에게 흩으니라.
나의 정토는 이처럼 무너지지 않는데도 중생들은 불타 없어진다고 보며,
근심과 두려움에 많은 고뇌 가득하니, 많은 죄 짊어진 중생들은 악업의 인연으로
아승기 겁 지내도록 불ㆍ법ㆍ승의 삼보(三寶)의 이름도 못 듣노라.
그러나 공덕을 닦아 부드럽고 순수한 마음 가진 사람들은
모두 내 몸이 여기 있어 가르침을 설하고 있는 것 볼 수 있느니라."
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상락아정의 세계를 서방의 극락정토와 같은 다른 세계에서 찾지 말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바세계를 상락아정의 불국토로 건설하자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로 가장 중요한 것은 법화경은 말세의 중생을 위하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이라는 것입니다.
법화경을 세심히 읽어보면 부처님께서 이 법화경을 설하신 목적이 두 가지 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적문의 일불승(一佛乘) 또는 이승작불(二乘作佛)로 나타나는 부처님 재세(在世)시의 제자들을 위한 가르침입니다. 즉, 부처님께서 40여년간 설하신 가르침의 결론으로서 지금까지 설하신 가르침 전체를 정리하여 마무리하기 위해 설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의 그리고 근본적인 목적은 바로 말세가 되어 세상이 혼란해진 때의 많은 인간을 위해 설하신 것으로 여기에 법화경의 귀중함이 있는 것입니다. 법화경의 곳곳에 서 오탁악세(五濁惡世)나 후오백세(後五百世)에 어떻게 신행해야 할 것인가를 설하시고 있으며, 말세에 중생들의 성불을 위한 서원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세에 사는 우리로서는 어떠한 경전보다는 바로 이 법화경에 귀의하여 부처님의 가르침(勅命)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상은 법화경에 대하여 상세히 알아보기 전에 개략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여러 서적에서 언급되고 있는 법화경의 특색을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나 어쨌든 이와 같은 특색을 가진 경전은 실로 희유한 것이며 예부터 법화경이 존중되고, 중요시되었던 것은 이와 같이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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