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지관을 관하는 방법을 교시하는 기본적인 교설인 <십승관법>의 교설에 의하면 정수지관은 <관부사의경>을 행함에 그칠 것이지만 다시 그 기본형식까지 구명(구명)하여 말한다면 앞서 관부사의경의 해설에서 말해둔 바와 같이 일심삼관ㆍ사구추검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들의 관법이야말로 모든 사물의 실상을 포착하려고 한다면 우선 수행하지 않으면 안되는 관법의 기본이고 따라서 그것은 <실상>의 관득에 필요한 실천적 절차-방법을 집약적으로 제시한 것이라 말해 좋을 것이다. 이들의 관법에 관해서는 관부사의경의 항목뿐 아니라 다른 여러 대문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설명되어 있는데 그것도 이들 관법이 지니고 있는 중요성 때문일 것이다. 특히 <일심삼관>은 매우 잘 정비된 구성을 가지고 설명되어 있다. <사구추검>에 관해서는 <일념삼천설>을 이야기할 때 말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일심삼관만을 소개하기로 한다. 혹(惑) 곧 번뇌의 대치(對治)-일심삼관의 조직 곧 그것이 지니고 있는 실천적 과제와 수습방법을 알려면 우선 일심삼관의 <삼관>을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삼관이란 종가입공관ㆍ종공입가관ㆍ중도제일의관 세 가지 관법을 말하는 것인데 관법으로서의 그 구조적 성격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은 각기 혹-번뇌의 대치와 실상의 경(境)의 관득(觀得)과를 실천적 과제로서 성립되는 관법이라고 하겠다. 더욱이 이 두 과제는 각기 유기적으로 불가분으로 연결되어 있다. 번뇌의 대치가 곧 진리 - 실상의 관득에 직결되는 형태로 유기적 관련 아래 단단히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심삼관의 구조를 알고자 한다면 아무래도 이 두가지 측면으로 올바르게 이해하여 두어야 한다. 우선 번뇌대치의 면부터 보아나가기로 한다. 번뇌는 천태종에서는 견사(見思)ㆍ진사(塵沙)ㆍ무명(無明)의 세 혹으로 유별하여 이해된다. 이들 세 가지 번뇌와 삼관과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면 첫째의 종가입공관은 견사의 혹을, 다음의 종공입가관은 진사의 혹을, 마지막의 중도제일의 관은 무명의 혹을 각각 대치하는 관계에 있다. 그리하여 이들 삼관에 의한 삼혹의 대치가 실상의 경(공ㆍ가ㆍ중)의 관득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삼혹의 내면적 특징을 극히 간단하게 알아보기로 한다. 처음의 <견사의 혹>이란 <견혹(見惑)>과 <사혹(思惑)>두 가지로 나누어 해석되는 혹이다. 견혹이란 진실의 도리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에 현혹되는데서 생기는 혹이다. 『견혹은 본체(本體)에 붙어 생기면서 도리어 본체를 방해한다. 불꽃이 허공에 의지하면서 도리어 허공을 동란(動亂)하는 것처럼, 꿈이 수면으로 말미암으면서 도리어 꿈이 잠을 혼미하게 함과 같다. 꿈이 만약 그치지 않으면 잠은 깨지 못하는 것처럼 이 혹이 제거되지 않으면 본체는 나타나지 못한다. 그런데 견은 곧 이(理)를 본다. 견은 실로 혹이 아니다. 이(理)를 볼 때는 능히 이 혹을 끊는다. 해(解)에 따라 명(名)을 얻는다. 이것을 이름하여 견혹(見惑)이라 한다.』(摩訶止觀)
여기에 보는 바와 같이 실상의 <이(理)>를 잘못 보고 빠지는 미혹이 이 견혹이라는 것이다. 실상의 <이(理)>란 이 경우 『성(性)ㆍ상(相)이 다같이 공인 것은 이것을 총상(總相)의 종가입공관으로 하는 것이다. 』(摩訶止觀)
라고 한 대문으로 짐작컨대 존재하는 것에는 실체가 없다. 곧 공이라는 것이니 따라서 견혹이란 공으로 포착되어야 할 실상의 이를 올바르게 알지 못하고 존재하는 것이 실체적(實體的)인 것이라고 잘못 이해하는 혹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선 십사(十使))로 제시(提示)된다. 아견(我見)ㆍ변견(邊見)ㆍ사견(邪見)ㆍ계취견(戒取見)ㆍ견취견(見取見)ㆍ탐(貪)ㆍ진(瞋)ㆍ치(癡)ㆍ만(慢)ㆍ의(疑)의 십사(十使)가 그 기본을 이룬다. 더욱이 이들 열 가지는 미혹한 중생이 머물러 있는 세 가지 세계 곧 욕계ㆍ색계ㆍ무색계 가운데 있어서 여러 가지로 나타나 결국은 88사(使)를 헤아리게 된다고 한다. 견혹(見惑))이란 아견 이하의 10사를 기본으로 하여 성립되는 88사의 번뇌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이 견혹을 포착하는 방법은 *유부(有部)의 학계(學系) 중에서 고려되어 온 번뇌론(번뇌론)을 대사는 자신의 체계 가운데 넣어서 제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다음 사혹이란 <사장(事障)>으로 특징 지워지는 혹을 말하는 것인데 세상의 사물을 사려하여 생기는 집착이다. 대사는 이 번뇌를 탐ㆍ진ㆍ치ㆍ만(慢)보다 극단적으로는 탐ㆍ진ㆍ치 삼독의 번뇌라고 한다. 또한 이 탐ㆍ진ㆍ치ㆍ만도 견혹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들 중생이 머물러 있는 삼계 가운데 있어서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결국 *81품(品)이 있다고 한다. 이 사혹도 앞의 견혹과 같이 유부의 학계의 번뇌론을 본받아서 정리된 것이다. 아무튼 <견사>의 혹이라 유가 아닌 이 현상세계를 유인 것으로 포착하는 유에 대한 집착, 한마디로 말하여 <취상(取相)>인 것이다. 다음 <진사(塵沙)>의 혹은 단적으로 말하여 공무(空無)에의 집착이라고 말해 좋은 것이다. 그것의 이러한 성격은 <진사>를 대치하는 관법으로서 종공입가관의 내적 성격을 설명하기 위한 아래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 입가(入假)의 뜻은 저절로 오직 공에서 가에 들어감이다. 저절로 공도 공이 아님을 알고 공을 깨뜨려 가에 들어감이다. 』(摩訶止觀)
모든 것이 공이라고 보는 태도가 부정되어야 한다는 언명(言明)가운데 공무(空無)에의 집착으로서의 진사의 혹의 구조적 성격이 암시되어 있다. 유라고 생각되는 모든 것이 실은 그렇지 않아 결코 실체적 존재가 아님이 알려지기는 했지마는 이번에는 그 반대로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고 일방적으로 보는 생각이 강해지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이런 태도는 공무에의 편집(偏執)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태도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티끌이나 모래처럼 한량없이 많은 차별의 상으로 나타나는 현실의, 이 현상하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포착하는 눈을 잃어버린다. 그렇게 되면 현실 한가운데 깊이 잠입하여 괴로워하고 미혹해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려는 교화활동의 싹마저 잘리게 될 것이다. 공무에 빠져서 다양한 현실세계의 모든 상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눈을 잃어버려서 교화활동을 바랄 수 없게 하는 장애 그것이 진사의 혹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마지막 무명의 혹이란, 지(知)가 가장 깊은 곳에서 생기는 혹 곧 가장 엄밀한 의미로 말하는 <지(知)의 장애> <무지>를 말한다. 이 번뇌는 대사에게 있어서는 근본 되는 번뇌로 생각된 것인데 이러한 포착방법은 불교에서 공통한 자세이니 대사도 그러한 해석에 따른 것이었다. 다만 무지의 의미 내용에 있어서는 그의 독자적인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그렇게 되는 것은 관법 특히 삼관과 관련지어 지혜의 문제가 고구(考究)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사 자신의 설명을 소개해 두자. 『 이제 무명을 관하건대 이러하다. 이관(二觀;從假入空觀ㆍ從空入假觀)의 지(智)를 관하는 것은 저 혹(惑, 有에의 집착, 공무에의 집착)을 깨뜨림에 있어서는 이것을 이름하여 지라 하지마는 이제 중도에 따른다면 지가 도리어 혹으로 되고 이 혹은 중지(中智)의 사람의 장애가 된다. 그러므로 지장(智障)이라고 한다. 』(摩訶止觀)
현상하는 이 세계는 실유(實有)가 아니라고 알아보는 지혜 그것은 그것대로 훌륭히 지혜라 일컬어져 마땅하다. 또 현상하는 이 세계의 다양한 존재를 그 물건에 따라 포착하는 지혜, 이것도 그대로 지혜라 불러 마땅하다. 그러나 그것들을 <중도> 에 따라서 바라보면 반드시 완전한 것이 잘못되고 도리어 한편에 치우친 내적구조를 가진 것이다. 그러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두 가지 지가 지혜임을 계속 주장한다면 극단에 떨어져서 실상의 극처(極處)는 포착하기는 고사하고 반대로 은폐되어 버린다. 이러한 상태는 지혜가 지혜일 수 없게 된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공을 보는 지혜 가를 보는 지혜 가를 보는 지혜가 동시에 극단에 빠진 상태, 이것이 대사가 말하는 <무지><무명>인 것이다. 번뇌가 삼관과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고구(考究)되기에 이른 결과 이처럼 <무명>은 극단에 빠진 공ㆍ가를 포착하는 지혜라 해석되기에 이른 것이다. 진리의 개현(開顯)-위에서 말한 그런 혹의 대치는 이제 행자로 하여금 제법의 구극상(究極相;실상ㆍ진리)의 관득으로 인도해간다. 그 진리의 경계를 삼관과의 관계로 말하면 공ㆍ가ㆍ중으로 포착되는 것으로서 이른바 삼제이다. 그런데 삼제의 관득은 지혜와 관계없이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관계를 좀더 자세히 말한다면 진실상의 관득은 지혜와 불가분으로 연결시키는 관법, 다른 말로 하면 지혜를 속에 지니고 있는 관법의 수습에 의해 비로소 가능한 관계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대사에게 있어서는 지혜의 문제가 실상의 관득을 둘러싼 문제의 영역에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혜의 여러 측면이 구명되어야 하는데 그 전에 대사에게 있어서 지혜와 관법과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으로 해석되었는가를 알아보자. 이 점에 대해서는《법화현의》의 다음과 같은 설명을 보면 좋을 것이다.
『 행은 진취(進趣)에 이름하는 것이지마는 지가 아니고는 나아가지 않는다. 지해(智解)의 행을 인도하는 것은 경이 아니면 올바르지 못하다. 지목(智目)ㆍ행족(行足)으로 청량지(淸凉池)에 도달한다. 그리고 해는 곧 행의 근본이니 행은 능히 지를 성취한다. 그러므로 행이 충만해야 지가 원만하다. 』 『 실상의 경은 불타ㆍ천인의 소작(所作)이 아니라 본래 스스로 있는 것이요 이제 맞게 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맨 처음에 있다. 이에 미혹하기 때문에 혹을 일으키고 이를 이해하기 때문에 지가 생긴다. 지는 행의 근본이다. 지목(智目)으로 인하여 행족을 일으킨다. 눈(目)ㆍ발(足)과 및 경의 삼법(三法)을 승(乘)으로 하고 이 승을타고 청량지에 들어가 여러 위(位)에 오른다. 』(法華玄義)
수행자를 깨달음의 경지로 인도하는 것은 바로 행(실천)이다. 그러한 의미로 행은 <진취(進趣)>라고 이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행만으로는 깨달음의 완성을 바랄 수 없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방향 없는 걸음으로 인도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대사가 <암증(暗證)의 선사(禪師)>라고 부른 사람은 바로 이러한 부류의 사람이다. 그러므로 행에는 올바른 방향의 제시가 필요하다. 이 방향제시에는 이 현상세계를 있는 그래도 포착해 보여야 한다.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지혜>가 바로 그것이다. <이(理)에 미혹>하는 상태 <혹>에 가려진 상태인데, 그 <혹>을 떨쳐버리고 <이>를 볼 수 있게 하는 것은 <지>다. 이 <지혜>에 올바른 방향이 주어져서 수행자의 나아갈 목표가 분명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지혜>만으로는 물론 깨달음의 경계에 들어갈 수 없다. <지혜>에 일방적으로 의존하려고 하는 사람은 이른바 진리의 관념적 이해자로 머무를 것이다. 대사는 그러한 점을 잘 알아보고서 그런 종류의 사람을 <송문(誦文)하는 법사>라 하여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인간은 말할 것도 없이 불타도 그것에 의해 불타일 수 있는 <실상의 경>을 <지혜>에 의해 알게 되는 것임에 틀림없지마는,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히 포착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실상>을 실천적ㆍ체험적으로 완전히 포착하지 않으면 안 것이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지혜>가 <행>에 뒷받침되어야 한다. <행>에 뒷받침되어야만 비로소 <지혜>가 부동(不動)의 것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로 <행>과 <지>와는 불가분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이상적이다. 삼관도 바로 그러한 의미로 <지혜>와 완전히 결합되어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혜, 보다 구체적으로는 삼관에 대응하는 지혜란 어떤 것으로 제시되는가? <일체지(一切智)><도종지(道種智)><일체종지(一切種智)>라 일컬어지는 삼지(三智)가 지혜의 기본이다. 일체지는 모든 사물의 공임을, 도종지는 그것이 가임을 일체종지는 그것이 중임을 완전히 포착하는 지혜로서 공ㆍ가ㆍ중 세 가지 진리에 관련되는 것으로 성격지어지는 것인데 이러한 내적 성격을 가진 삼지(三智)는 대사가 생각해 낸 지혜인 것이다. 이 세 가지 지혜는 물론 앞에서 말한 행과 지혜와의 관계를 충족시켜 주는 것이고 따라서 당연히 삼관과 대응하는 관계에 선다. 일체지는 종가입공관과 다음의 도종지는 종공입가관과 그리고 일체종지는 중도제일의관과 대응하여 공ㆍ가ㆍ중 세 가지 진리에 관련되므로 그것을 완전히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이상 지혜에 관하여 말해왔거니와 이제부터는 지혜를 수반(隨伴)하여 실상의 경의 관득에 직접 길을 여는 것으로서의 종가입공관ㆍ종공입가관ㆍ중도제일의관 세 가지 관의 구조를 알아보기로 한다. 자연적 자아(自我)의 상 아래에서 살고 행동하고 있는 보통 사람은 우리를 둘러싸고 현상하는 이 세계를 유인 것, 실체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파악방법이 아니라 바로 편견이요 그것임은 앞에서 말한 바인데 이 혹도 또한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종가입공관에 의해 대치되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로 종가입공관은 우리의 상식적인 관찰ㆍ포착에 엄격한 반성을 촉구하는 관법이라고 말해 좋을 것이다. 그런데 종가입공관의 개시(開示)로 보여주는 이 세계의 진실한 모습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그것은 일체의 집착을 거부하는 실체(實體)가 없는 공(空)인 것이다. 종가입공관, <가에서부터 공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실천의 추이(推移)를 교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로 종가입공관은 유에 집착하는 우리들의 상식적인 생각을 깨뜨리고 실체를 보유하지 않는, 공인 모든 사물의 의의를 나타내게 하는 관법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현상하는 이 세계를 실유 아닌 것으로 이해하는 실천적 태도는 그 정도에서 머물러 버리면 우리의 인식주관(認識主觀)에 접촉할 수 있는 것으로서 지금 존재하고 있는 일체법의 그러한 면의 의의를 포착할 수는 없다. 일체법은 실체가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알아볼 수 있는 것으로서 결코 완전한 무인 것은 아니고 또한 다른 것과 구별되어 스스로의 개별성을 주장하여 마지않는 것이다. 그러한 일체법의 존재도 알아보아야 하는데 공무의 면에서 제법의 존재가 포착되면 그러한 측면이 간과되는 결과로 되어버릴 것이다. 이 때의 제법의 그러한 관찰방법은 분명히 하나의 편견에 빠진 모습이다. 앞의 종가입공관은 이런 편견이 도달하는 위험성을 내포시키고 있는 것인데 제법의 이러한 관찰은 틀림없이 미혹이다. 이 미혹이 앞에서 말한 진사의 혹이라는 번뇌이고 따라서 그 혹은 대치되어야 하고 그 대치를 스스로의 과제로 하는 관법이 종공입가관임은 또한 이미 지적한 바와 같다. 공무에의 편집을 대치하여 존재하는 것을 그 모습대로 포착하기 위한 종공입가관을 통한 노력은 당연히 거기에 일체법이 결코 완전한 무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인식주관에 접촉할 수 있는 것임을 분명히 말해준다. 대사 자신의 표현으로 말하면 <무주(無主)이면서 생한다> 또는 <상(像)은 곧 가에 비유한다>고 한 표현으로 보여준 제법의 존재이다. <주인이 없다(無主)> 곧 실체적 존재는 아니라 하더라도 거기에 생겨나 있는 것이고, 제각기 다른 것과는 달라 스스로의 고유한 존재를 주장할 수 있는 것 곧 제각기 <상>을 가지고 있다는 존재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공으로부터 가로 들어간다>고 할 때의 <가>라 위와 같은 제법의 존재를 말하는 것인데 이러한 것도 제법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그 면도 올바르게 포착해야 한다. 그리하여 <종공입가관>은 제법의 존재의 관득이란 면에서 그것이 어디까지나 비실체적(非實體的)인 존재이면서 항상 스스로의 고유성을 다른 것과 어긋나게 주장할 수 있는 존재임을 가르쳐주는 관법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종공입가관>에는 또 하나 그냥 지나쳐버려서는 안될 중요한 실천적인 성격이 부여되어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성격이란 종교적 인격 가운데서 가장 바람직한 것이 보살의 탄생을 인도하는 그 관법에 갖추어져 있는 실천적 성격이다. 종가입공관처럼 공에 들어가기만 해서는 천차만별의 각각 다른 개성의 존재를 간과하기 쉽다. 그러한 제법의 포착방법 아래서는 생사의 괴로움의 한 가운데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상태는 올바르게 알아볼 수 없다. 그래서는 종교적 실천자로서 충족된 모습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미혹의 한 가운데 빠져서 진실을 알아보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진실에 가까이 하게 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 진정한 종교자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미혹한 사람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종교적 실천자가 보살이라는 존재인데 이러한 존재에로 자신을 접근시켜가려고 할 때에는 미혹 번뇌하는 개개인의 모습이 뚜렷이 포착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지 <공에 들어가는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고 차별로써 거기에 있는 하나하나의 존재가 정확하게 구명되어야 한다. <종공가입관>이야말로 바로 이러한 종교적 과제에 응하는 관법인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 관법을 통하여 비로소 제법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병의 상태도 알 수 있고 그것을 치료할 방법도 생각해낼 수 있게 된다. 스스로 그 병을 극복하게 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한 대사 자신의 설명을 알아보자. 『 보살은 종가입공하여 스스로 결박을 깨뜨리므로 범인(凡人)과 같지 않다. 종공입가하여 남의 결박을 깨뜨려주면 이승(二乘)과 같지 않다. 유에 처하여도 물들지 않고 법안(法眼)으로써 약을 알고 자비로써 병에 머무른다. 널리 사랑하여 한량이 없고 거듭 구원하여 싫증내지 않고 심용(心用)이 자재하다·····. 만약 공에 머무르면 곧 중생에 있어서도 오래도록 이익이 없다. 뜻이 이타(利他)에 있음이 곧 입가의 뜻이다. 』(摩訶止觀)
유의 한가운데 있으면서 그것에 물드는 일없이 마음이 자재하여 미혹한 중생을 구원하고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길이 종공입가관을 통해 열려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종공입가관은 보살의 탄생을 가능하게 하는 실천적 근거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 인간의 지혜는 이제까지의 종가입공ㆍ종공입가 두 관을 닦고 나서도 완전히 열리지 않은 측면을 지니고 있다. 대사는 <중도정관(中道正觀)>을 설명하는 가운데 그 관법(觀法)의 특징을, 『 다만 이 몸에 있어서 두 혹을 깨뜨리고 중도에 들어간다. 』(摩訶止觀)
고 설명하였는데 이 성격의 규정은 바로 그러한 인간의 지혜의 내적 특징을 교시하는 것이다. 위의 인용문 가운데 보이는 <두 혹>이란 말할 것도 없이 앞의 두 관을 수행하고 나서 얻어지는 공을 보는 지혜, 가를 보는 지혜 가운데 잠재해 있는 집착하는 마음이다. 공을 보는 지혜, 가를 보는 지혜가 각기 스스로의 완전성을 자랑해 꺼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장 집착하는 마음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런 집착하는 마음은 번뇌 중의 번뇌 곧 <무명>이다. 그렇다면 이 집착하는 마음은 당연히 대치되어야 한다. 그러한 과제를 짊어지고 있는 관법이 이른바 <중도정관>인 것이다. 공에 집착하는 마음과 가에 집착하는 마음, 다시 말해서 이 세계는 공무인 것이라고 단정하는 마음과 반대로 이 세계는 항상 유로서의 존재를 가지는 것이라고 단정하는 마음과가 대치되면 거기에 공이면서 공이 아닌 또 가이면서 가가 아닌 존재가, 더 단순하게 말하면 공이면서 가인 것으로서의 구체적으로 하나인 존재가 드러날 것이다.
존재하는 것-현상하는 모든 존재는 지금까지 말해온 바와 같이 공으로서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어느 편이나 간에 거기에 있는 구체적으로 하나인 존재이다. 각자의 존재는 실체가 없고(空) 그러면서도 현재 거기에 그것으로서 있는(假)존재인 것이다. 대사의 표현에 따르면 공이면서 가인존재로서 그러한 존재를 스스로 통일하고 있는 존재(中)이다. <중도정관>이란 실상 파악의 관점에서 본다면 일체법이 바로 이러한 것임을 밝혀 주는 관법인 것이다.
일심삼관(一心三觀) - 삼관이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실천적 과제를 짊어지고 공ㆍ가ㆍ중으로서 모든 사물의 실상을 개시(開示)하여 보이는 관법인데, 이제까지의 설명에서 그치면 종각입공관ㆍ종공입가관ㆍ중도제일의관의ㆍ삼관은 마치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독립한 관법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도식적으로 표시하면
종가입공관 - 견사혹의 대치 - 공의 관득(觀得) 종공입가관 - 진사혹의 대치 - 가의 관득 중도제일의관 - 무명의 대치 - 중의 관득
이렇게 독립된 계열 아래 더욱이 선해(先行)하는 관법보다 다음에 계속되는 관법이 가치적으로 높다고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대사는 그렇게 해석할 것으로 보지 않았다. 삼관은 본래 일체적인 관계에 있어야 할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관득되는 일체법의 궁극적 존재로서 그렇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개설(槪說)해 온 바와 같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상으로 압축하여 포착해 보면, 공ㆍ가ㆍ중으로 포착되는 이외에 포착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것은 공ㆍ가ㆍ중이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격리된 관계에 있는 진리를 예상하고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거기에 있는 구체적이고 하나인 존재를 그 특징에 응해 간취(看取)하여 종합한 것이었다. 이들 삼제는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실상에 가까운 존재의 한 순시(瞬時)의 세 측면인 것이다. 따라서 일체법 - 현상하는 이 세계의 모든 존재를 그 실상 아래 가장 생생하고 올바르게 포착하고자 한다면 서로 관련되어 있는 그 세 측면을 한꺼번에 다 포착해야 한다.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포착하고자 할 때 앞의 삼관은 개별적 단계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대사는 이러한 사정을 <일심삼관>이라는 표현으로 교시한다. 모든 사물의 존재가 서로 관련되는 삼제로서 개시되는 것이라면 종가입공관ㆍ종공입가관ㆍ중도제일의관도 그것을 포착함에 있어서 동시적ㆍ일체적(一切的)으로 행해져야 하는 것이고, 이 세 가지는 스스로 일심에서 통일된 <일심삼관>으로서의 구조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공ㆍ가ㆍ중 삼제를 따로따로 유리된 관계에 있는 것으로 이해하여 그것을 순서를 따라 차례로 관득해 나가기를 요구하는 삼관의 형식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인데, 이 형식은 <차제삼관>이라 일컬어져서 <불차제삼관(不次第三觀)>의 형식인 <일체삼관>과 다르다는 것이다. 차제의 삼관은 삼관의 올바른 수행법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