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기관>의 행의 체계는 일체법을 마음에 간직하고 그러한 것으로서의 <마음>을 관경으로 하여 닦는 <관심>의 행일 것인데, 그 다음에는 마음을 관해 갈 때의 방법이 명확하게 되어야 한다. 교리의 영역을 표시해보이는 교설이 이른바 십관(十觀)-십승관법(十乘觀法)에 대한 교설이니 그것을 통하여 우리는 일체법, 마음의 관찰이 어떠한 형태로 추진되는가를 알 수 있다. 우선 그 교설의 개략을 말한다면 관심은 ① 관부사의경(觀不思議境) ② 기자비심(起慈費心) ③ 교안지관(巧安止觀) ④ 파법편(破法遍) ⑤ 식통색(識通塞) ⑥ 수도품(修道品) ⑦ 대치조도(對治助道) ⑧ 지차위(知次位) ⑨ 능안인(能安忍) ⑩ 무법애(無法愛) 란 여러 항목으로 정리하여 보이는 방법에 따라 추진되어야 할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위에 든 십법이 십승관법이라 일컬어지는 것이고, 이 10가지 관법의 방법을 앞서 말한 10가지 경의 하나하나의 관찰에 적용하여 관법이 수행되어 나가는 것이다. 이하 십승관법을 하나하나 보아 나가기로 한다.
관부사의경-이것은 <부사의경을 관하는 관법>이다. 그러므로 그 명칭이 관법의 방법을 직접 전해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관하는 경에 따라 그 이름이 주어진 관법이다. 그런데 그것은 <부(가)사의경>을 관하는 관법이기 때문에, 이관법은 그 밖에 다른 어는 관법보다도 중요시되는 것이다. 사실대사의 교학체계에 있어서 그것은 그러한 대처(對處)를 받고 있다. 이 관법을 닦으므로 하여 깨달음의 완성에 직접 연계(連繫)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부(가)사의경>의 <부(가)사의경>란 <사의(思議)할 수 없다>는 뜻이니 따라서 위없는 완전한 경, 사의ㆍ분별을 초월한 경, 곧 완전한 깨달음의 경계라는 것이 <부(가)사의경>의 뜻이다. 『 사의의 경은 지금의 지관이 관할 바가 아니다. 』(摩訶止觀)
지혜로서는 낮은, 이것 저것 천착(穿鑿)하는 분별에 의해 관득되는 경계는 아니다. 여기서는<관불가사의경>이라 이름하고 <불가사의경>을 포착하는 관법의 방법은 실은 마하지관의 해당부분의 설명에서 분명히 알아 볼 수 있는 것처럼 명언(明言)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점을 둘러싼 해석이 일치하지 않다. 물론 아주 크게 어긋나는 해석이 나올 듯한 논술은 없었고 해당부분의 설명을 읽어 나가면 좋을 것이다. 그러한 태도로 읽어서 얻어지는 결론은 어느 특정의 이름을 들어 그 방법을 특징 짓는 것은 도리어 해당부분의 설명의 이해를 좁히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한 뜻에서 극히 단순하게 <부사의경을 관하는 관법>이라고 해두는 것이 이 관법의 내적 구조를 나타내는데 가장 적합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관법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어떤 종류의 해석에서는 <사구추검(四句推儉)> 또 어떤 종류의 해석에서는 <일심삼관(一心三觀)>이라 해석되어 있다. 이들 해석은 다같이 옳다고 해서 좋을 것이다. 그렇게 해석하여 어색하지 않은 기술(記述)이 해당부분의 설명 가운데 보이므로 어느 한쪽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관법의 방법을 <사구추검>이니 <일심삼관> 이니 단정해버리면 그 기술의 취의(趣意)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되는 것이다. 천태대사에게 있어서 <관부사의경> 이 세워진 것은 제법의 실상구명 곧 실상인 불가사의경을 관득하는 것을 제쳐놓고 따로이 종교적 실천의 목적은 있을 수 없으므로 그 일을 향해 전심해서 노력할 것을 요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해 좋을 것이다. 그 때문에 대사에게 있어서는 실상의 경은 여러 가지로 설해 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일념삼천설(一念三千說)>과 *<원융삼제설(圓融三제說)>에 의해 표시되는 경계이다. 이렇게 일념삼천설로 표시되는 경계를 포착해야 할 것을 설명한 부분에서는<일심삼관>의 교설이 거의 대응(對應) 되는 것으로 설해있다. 그러므로 <관부사의경> 에 해당되는 관버의 방법은 <사구추검> <일심삼관>의 두 가지가 다 좋다. 어느 한쪽으로 단정해버리면 전체의 의취가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또 사의를 초월한 경으로서의 실상이 그 밖의 표현으로 나타내지면, 그것을 포착할 방법으로 사구추검ㆍ일심삼관을 상정(想定)하지 않는 편이 차라리 제약 받지 않고 그 방법을 제시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부사의경>을 포착하는 능관(能觀)의 법을 사구추검이나 일심삼관이나 일방적으로 결정짓는 것은 문제가 없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감히 단정적(斷定的)으로는 말하지 않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부사의경을 관하는 관법>이라고 해두는 편이 이관법의 방법적 태도를 표시하는데 알 맞는다고 생각되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또한 일념삼천ㆍ삼제원융ㆍ사구추검ㆍ일심삼관 등 여러 교설은 대사의 교학사상의 내용을 전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따로이 알아보기로 한다.
기자비심-이것은 <진정발심(眞正發心)>이라는 것이다. 진정발심이란 이미 깊이 일념삼천ㆍ삼제원융 등의 사의를 끊어 실상의 극처(極處)를 다 알았으면 미혹의 한가운데 빠져 악을 자행하고 있는 보통사람들(중생)에 대하여 자기처럼 진실에 접촉해 주기를 바라는 생각을 품게 되는데, 이 소원에 인도되어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여기 말하는 <자비의 마음을 일으켜라> 하는 것의 실천적 요청이다. 그런데 <자비심을 일으킨다> 하는 경우의 자비심이란 <고를 뽑고 낙을 주는 것>을 지향하는 의지(意志)라는 성격을 가지고,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의 네 구절로 되어 있는 이른바 <사홍서원(四弘誓願)>으로 발동한다. 이 서원은 오늘날 우리가 다 가까이 하고 있는 것인데 대사에게 있어서 자비심의 내용으로 명확하게 정해지고, 이 정신에 따라 미혹해 있는 중생의 교도(敎導)가 절대 필요한 실천적 태도로서 요구되는 것이다. 또한 앞서의 정형화(定型化)한 사홍서원은 생각건대 스승 혜사에게서 어느 정도 정리된 것을 대사가 계승하여 그러한 것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네 구절로 정리하기는 이미 초기의 저술인 차제선문 가운데 나타나 있다.
교안지관-『 선교안심(善巧安心)이란 지관으로서 법성(法性)에 잘 안주하는 것이다. 위로 깊이 부사의경의 연오(淵奧) 미밀(微密)함에 이르고, 널리 자비를 굴려 항개(항蓋)함이 이와 같으니 모름지기 행하여 원을 채울 것이다. 행은 곧 지관이다······. 근원에 돌아가고 근본에 돌아가서 법계가 한 가지 적연(寂然)하다. 이것을 이름하여 지(止)라 한다. 이와 같이 지일 때 상래(上來)의 일체 유전(流轉)이 다 그친다. 관이란, 무명의 마음이 위는 법성과 같고 또한 본래 공이요, 아래는 일체의 망상 선악과 같아 다 허공과 같아 둘이 없고 구별이 없다고 관하는 것이다. 』(摩訶止觀) 이렇게 말해 있는 것과 같이 이 관법의 방법은 다시 한 번 진리의 세계로서의 법성에 마음을 기울여서 <근원으로 돌아가고 근본으로 돌아가> 법성을 올바르게 관해서 <법계가 통랑(洞朗)하여 모든 것이 다 크게 분명해지게 하는>실천적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음입계경에 비의(比擬)하여 주어지는 교안지관-선교안심의 설명을 보건대 총(總)ㆍ별(別) 두 가지 교안지관이 세워지고 자세한 설명이 펼쳐져 있는데, 앞서 지적한 그것이 지니는 행의 기본적 태도가 확인되면 그런 자세한 설명의 부분에서까지 손을 펴지 않더라도 그것만으로 좋을 것이다. 아무튼 다시 한 번 법성에 마음을 기울여서 그 본원(本源)을 완전히 구명하고 아울러 남들도 불도에 눈뜨게 하여 진실의 길을 묻도록 인도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 여기 말하는 <교안지관> 곧 선교안심이다.
파법편(破法遍)-교안지관이 요구하는 실천적 태도에 따라 노력해 보아야 아직 미혹에서 자유롭게 되지 못하고 진실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도 물론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사태가 생기는 이유는 진실을 올바르게 보는 눈을 흐리게 하는 미혹의 마음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깨뜨려 없애는데 전력을 다해야 하는데 그러한 목적을 위해 준비되어야 하는 것이 여기 말하는 <파법편>인 것이다. 『 위로 선교에 안심하면 정혜(定慧)가 개발되어 다시 깨뜨려지지 않는다. 만약 아직 상응(相應)하지 않을 때에는 바로 정이 있는 혜로써 모조리 그것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파(破)라 한다. 』(摩訶止觀)
<법을 깨뜨림>이 요구되기에 이른 이유를 대사는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법을 깨뜨리는 것>은 대사에게 있어서는 극히 중요시 되었다. 그러한 사정은 이 항목의 설명에 매우 많은 지면이 주어지고 있음으로써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파법> 추진의 구체적 방법은 앞서 관부사의경 관법으로 그 명칭만을 소개한 일심삼관이다. 다만 여기서의 설명은 앞에서의 경우와는 달라서 역점(力點)을 두는 데가 다르다. 불교에 있어서의 진리의 관득이라는 일-특히 대사의 경우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으나-은 일반적으로 말하여 지득(知得)되는 진리와 진리의 지득을 방해하는 요인으로서의 번뇌와의 교착(交錯) 관계 가운데서 고구(考究)되어야 할 성질의 문제라 말하여 좋을 것이다. 진리의 파악에는 방해가 되는 번뇌의 대치(對治)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요청되는데, 번뇌의 대치는 그것만으로 독립되는 작업이 아니고 그 대치가 동시에 진리의 개현(開顯)에 이어지는 구조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진리의 득지(得知)와 번뇌의 대치(對治)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런데 관부사의경 아래 일심삼관이 논란되는 경우에는 실은 음입계경이 있어야 할 위치 내지 가치 곧 제법의 실상-진리의 내적 구조의 진술에 역점이 놓여 있음에 대하여 여기서는 대치되어야 할 번뇌에 중점이 놓여져서 논란이 추진된다. 전자의 방향으로는 나중에 말하게 되는 것처럼 공(空)ㆍ가(假)ㆍ중(中) 원융삼제의 관득을 가능하게 할 것으로서의 일심삼관이 한편 파법편의 항목 아래에서는 견사(見思)ㆍ진사(塵沙)ㆍ무명(無明)의 세 혹(惑)의 대치와 그것을 통하여 삼제의 관득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서 일삼삼관이 설시(說示)되는 것이다. 진리의 파악을 방해하는 것으로서의 미혹-편벽된 집착을 삼혹(三惑)으로 명시하고 그 대치 없이는 결코 바랄 수 없는 실상을 아는 길의 내적 구조를 가르치면서 그들 삼혹의 대치를 철저하게 요구하고, 또한 그 방법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파법>이란 항목에서 목표로 삼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로 <법을 널리 깨뜨린다>는 실천적 태도는 바로 삼혹에 의거하여 이루어지는 삼혹의 대치라고 한다. <삼관>이란 <종가입공관ㆍ종공입가관ㆍ중도정관ㆍ(中道正觀, 中道第-我觀>의 세 관을 말하는 것이고, <삼혹>이란 견사ㆍ진사ㆍ무명의 세 혹을 말하는 것이데 이에 대해서는 다시 한 항목을 베풀어 해설할 예정이므로 여기서는 그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식통색(識通塞)-편벽된 집착을 버리도록 노력하기를 요구하는 이른바 <파법>을 돌파하면 아무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진리를 백일하에서 올바르게 포착할 수 있는 경기가 원칙적으로는 열려져야 할 것이지만, 모두가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때에는 자기의 수행진도(進度), 진전하지 않고 정체해 있게 된 이유를 겸허하게 반성해 보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 『 위의 파법편은 정히 통하여 무생(無生)에 들어갈 것이다. 만약 들어가지 못하면 정히 득실(得失)을 찾을 것이다. 반드시 시비에 정체되어 도무지 해를 얻지 못할 것이다. 』(摩訶止觀)
수행의 진전에 방해가 되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번뇌의 존재인데 그것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니므로 그때그때 곳에 따라 명확하게 구명해야 한다. 가령 어느 때 <공(空)을 관하는 지혜에 애착>하면 그것은 깨달음에의 길이 막혀버렸음을 뜻한다. 그럴 때에는 <사구(四句;推檢)로써 널리 깨뜨리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면 통달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십이인연의 교설대로 <무명>이 하는대로 몸을 내어맡길 때에는 깨달음에의 길은 막혀버리고(塞), 반대로 그것이 없어지면(##)통하게 된다. *<육폐(六蔽)가 마음을 가려 덮는> 상태는 막히는 것이고, 육도(六度)는 통하는 것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 또 견사ㆍ진사ㆍ무명의 세 혹은 바로 깨달음에의 길을 잠가버려 막는 것이고, 종가입공ㆍ종공입가ㆍ중도정관의 <일심삼관>은 그것을 깨드려서 깨달음을 얻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의 진전을 방해하는 것을 알아보고 깨달음에의 길을 방해하여 막는 것을 분명히 간파하여 그것을 깨뜨리고 그 길이 통하게 하는 노력이 여기서 말하는 <식통색>의 기본적인 실천적 태도다. 깨달음에의 길을 막는 것이 한 가지가 아닌 만큼 통하게 하는 방법도 또한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위에 말한 <막는 것> <통하게 하는 방법>은 하나의 표본으로 생각하여 좋을 것이고, 그 곳 그 때에 알맞은 방법에 따라 길을 막는 것을 제거해 가면 되는 것인데 그 방법은 또한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제까지 닦아서 경험한 관법을 신중히 철저하게 닦아서 막는 것을 깨뜨려 없애면 되는 것이다.
도품조적(道品調適)-마하지관에, 『 상래(上來)의 법을 깨뜨림을 두루하고 통색(通塞)을 안다고 하더라도 만약 도품(道品)을 조정(調停)하지 아니하면 어찌능히 빨리 진법(眞法)과 상응(相應)하랴. 』
하였다. 도품이란 37도품을 말하는 것이니 사념처(四念處)ㆍ사정근(四正勤)ㆍ사여의족(四如意足)ㆍ오근(五根)ㆍ오력(五力)ㆍ칠각지(七覺支)ㆍ팔정도(八正道)의 일곱 부류의 수행을 합한 행을 닦음을 말한다. 파법(破法)을 철저하게 해도 또 통색(通塞)을 식지(識知)하는 노력을 해보아도 정각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이 37도품을 잘 행하고 이에 의해 진법과 상응하도록 인도해 들이고자 하는 것이 <도품의 조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37도품이란 원래 일반적으로 소승법이라 생각되어온 것인데 무엇 때문에 이 시점에서 이 법의 수습이 요구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하여 천태대사는 그 나름대로의 해답을 말해 주는데, 한 가지 명쾌하지 않고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지마는 생각건대 다음에 말하는 이유로 하여 그 수습이 요구되기에 이르렀으리라 생각된다. 우선 <이것을 지녀야 할 소이(所以)는?>이란 설문(設問)을 하고 이에 대해, 『 도품은 유루(有漏)다. 유루는 곧잘 무루(無漏)의 방편으로 되지마는 방편이 곳을 잃으면 진리를 알기 어렵다. 술을 빚는 방법에서 알맞게 발효하게 하면 물이 변하여 술이 되지마는 누룩이 적당하게 뜨지 않았으면 제맛이 나지 아니함과 같다. 』(摩訶止觀)
하는 대답이 주어졌는데 그 이유의 설명은 다음과 같음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유루법 곧 완전하지 못한 법도 모자람이 없는 진실의 수행법의 방편으로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는 만큼 수습에 적합한 조건 아래에서 잘 닦는다면 행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진리에 상응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유루법이라는 것은 완전한 법으로 정비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도리어 범인(凡人)에게는 닦기 쉬운 면도 갖추고 있어서, 얼마만큼 완전한 수행법에 의거하여 수행해 보아야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도리어 이 단계에서 완전하지 못한 수행법에 따라 행을 힘쓰는 편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도 되는 것이다. 앞에서의 설명은 이러한 점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이렇게 해석하여 무방하다면 이 도품조적은 무루법을 닦아서 전진(前進)이 기대되지 않는 사람에게 대하여 방편의 행으로서의 소승의 선법(禪法)을 줌으로써 그 비약을 바라는 것이라 보아야 좋을 것이다. 이 단계에서의 소승의 선법의 수습을 요구하는 것은 결코 부자연스럽지 않다.
대치조개(對治助)-이것은 대치조도(助道)라고도 하는 수행의 한 단계인데, 이것은 요컨대 『 근기(根)가 노둔하여 차폐(遮)가 무거운 자는 근기가 노둔하기 때문에 곧 세 *해탈문을 열지 못하고 차폐가 무겁기 때문에 관심을 견파(牽破)한다. 이러한 뜻으로 하여 바야흐로 치도(治道)로써 차장(遮障)을 대파(對破)해야 할 것이다. 』(摩訶止觀)
라고 한 것처럼 지금까지의 수행과정에서 그처럼 엄격한 노력을 쌓아왔는데도 자신의 능력이 모자라고 또 그런 만큼 가로 막히는데가 많아서 진법(眞法)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에게 대해, 말하자면 보조적인 수행에 따르게 하고자 그 길을 열게 하려고 끼워 넣고 것이 이 대치조개인 것이다. 그런데 그 <조도는 한량없이>일률적으로 단정해서 이러한 것이 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가령 앞의 <통색(通塞)을 알다>한 단계에서 깨달음에의 길로서 교시된 <육바라밀>도 조도의 하나로 친다. 육도(六道)의 수습과 구도의 진행정도를 표시되는 바에 따라 소개해둔다. 간탐(?貪)의 마음의 생길 때에는 보시하는 마음으로, 파계에 대해서는 지계하는 태도를, 진에(瞋喪)의 마음이 생길 때에는 인욕을, 방일(放逸)· 해태(懈怠)한 마음이 생길 때에는 정진하는 태도를, 산란한 마음이 생길 때에는 선정을, 우치(愚癡)의 마음이 생길 때에는 지혜로 각각 대치해 나가야 한다고 한다. 요컨대 수행이 깊어져도 오히려 깨달음을 열지 못하는 사람은 그 만큼 능력적으로 우둔한 면을 많이 지니고 있다고 보지 않으면 안되고, 그런 만큼 행하기 어려운 본격적인 행법(行法)의 수습을 그러한 사람들에게 요구해 보아야 헛수고이고, 행하기에 비교적 쉬운 그런 뜻으로 도움이 될 행법을 수습시켜서 개오(開悟)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지차위(知次位)-수행이 진전되면 <마침내 잘못 생각하고,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 인간의 예사이다. 이래서는 수행의 올바른 성과는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그러한 일이 없도록 자기의 현재 수행상태를 올바르게 돌아보아 <진위(眞僞)>곧 진짜인가 가짜인가를 정확하게 판단하는 태도가 요구된다. 이러한 목적으로 시도되는 종교적 반성이 곧 이 <차위(次位)를 알라>는 항목으로 요구되는 실천적 태도다. 또한 이 종교적 반성에는 물론 여러 가지 태도가 예상된다. 교시(敎示)되는 것 한 가지를 소개한다면 가령<오회(五悔)>가 그것이다. 오회란 참회ㆍ권청(勸請)ㆍ수희ㆍ회향ㆍ발원이 그것인데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은 태도를 말한다. 첫째, 참회는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스스로의 행동에 대한 반성과 악행을 앞으로는 행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말한다. 다음 권청이란 <기구(祈求)>라 해도 좋은 태도인데 중생을 불쌍히 여기시는 불타의 자비심을 빌어 기대함을 말한다. 다음 수회란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기쁨을 기쁨으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법에 접해도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그 다음 회향이란 선(善)이 결여되어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어 주고 선이 없는 중생에게 보리를 얻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해 주는 태도를 말한다. 끝으로 발원이란 견고한 맹세를 세워서 대표적인 것은 사홍서원(四弘誓願)ㆍ*법장보살원(法藏菩薩願) 등인데 그러한 서원처럼 널리 사람들을 보리에 인도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지니기를 최촉(催促)하는 것이 서원이다. 아무튼 수행의 진행 정도를 정확하게 알아보고 자신은 물론 다른 모든 사람이 보리의 도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깊은 배려(配慮)를 가지도록 인도하는 것이 <차위를 알라>는 목표인 것이다.
능안인(能安忍)-이것은 <잘 참아서 도사(道事)를 이루리라.> 또 동하지 않고 물러서지 않는 견고한 실천적 태도를 말한다. 이제까지의 8항목에 나누어 보여준 실천적 태도를 각각 견지하고 준수해 나가면 노둔한 사람에게도 자연 <장애가 변하여 지혜가 열리는> 상태가 나타나기 시작할 것이다. 천태종 고유의 수행 추진의 정도를 나타내 보이는 행위(行位)에 비추어 말한다면 그 단계는 *오품제자위(五品弟子位)에 들어가는 직전이거나 또는 그 중의 초품(初品)에 들어간 단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상태는 하나의 함정이다. 거기까지 도달했다는 기분이 반대로 명리(名利)를 구하는 마음이나 번뇌를 유발하기 쉬운 것이다. 마음의 안팎을 물론하고 강약(强弱) 두 가지 유발(誘發)이 엄습하여 좌절로 끌어넣으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침내 모름지기 참아야 한다>하게 되는 것이다.
무법애(無法愛)-이것은 『위의 9가지 일을 행하여 안팎의 장애를 통과하면 바야흐로 진(眞)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들어가지 못하면 그것은 법애에 주착(住着)하여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摩訶止觀)
어떤 사람이라도 이제까지의 9가지 실천적 태도를 견지하여 그것들이 요구하는 요청사항을 충실하게 준수 실천해 나가면 대개는 깨달음을 열게 되어 열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데, 그래도 거기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법애>가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여기 말하는 법애란 실은 약간의 집착심이라 말해 좋을 것으로서 대사의 표현을 빈다면, 『 모래에 방해받는 것도 아니고 또 언덕에 가로막히는 것도 아니고 바람이 자서 전진도 후퇴도 할 수 없게 된 배 』(摩訶止觀)
와 같이 어느 쪽으로 끌려가는 것도 아니지마는 정지하여 전진하지 않는 따위의 집착심이다. 모든 집착심이 그치고 그러면서도 열반의 세계에 전진ㆍ전입(전입)이 되지 않는 최후의 장애가 이 법애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최후의 위치에 올라갔는데도 아직 남아 있는 장애라는 뜻으로 <정타(頂墮)>라고 일컫는다. 이러한 장애의 극복을 자기의 과제로 삼아서 성립되는 실천적 자세가 <법애를 없앤다>는 것의 내용을 이루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아온 열 가지로 유별(類別)되는 실천적 태도가 실은 십승관법의 기본인 것이다. 정수지관이란 이러한 십승관법의 심적자세를 앞에서 본 사종삼매의 형식에 따라 이것 또한 앞에서 개관한 10경의 관찰에 낱낱이 적용시켜 실수해 가는 행의 체계다. 그러한 의미로 정수지관의 체계는 극히 장대(壯大)하고 번쇄(煩鎖)한 체계를 가진 것이라고 말해 좋을 것이다. 그러한 이제까지의 서술과정에서 자주 지적해온 바와 같이 십승관법을 10경의 관찰에 모두 적용시켜 닦아나가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을 실천해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은 앞 단계의 관법을 다 닦았는데도 아직 깨달음을 열지 못한 사람이다. 그러한 뜻에서 누구든지 닦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고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만으로 깨달음이 열릴 것이다. 그런만큼 가장 중요한 관법은 말할 것도 없이 십승관법 중 첫 번째의 <관부사의경>이다. 이 관부사의경을 충분히 닦아서 모든 사물의 실상을 알면 벌써 그 다음의 9가지 수법은 반드시 닦지 않아도 좋다고 말할 수 있다. 대사의 십승관법에 관한 설명을 그대로 읽어나가면 그렇게 해석된다. 그렇기 때문에 십승관법의 수습과 그것을 닦는 사람의 소질, 능력(근기)관의 사이에 어떤 정해진 관계가 있다고 해석하는 *담연(湛然)과 같은 해석도 생길 수 있을 것이다. 그에 의하면 상근의 사람(가장 뛰어난 부류의 사람)은 관부사의경의 수습만으로, 중근의 사람(중 정도의 자질과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은 거기다가 다시 제2의 <기자비심> 이하 여섯 가지 관법의 수습에 의해, 그리고 하근의 사람(가장 소질과 능력이 열등한 사람)은 십승관법을 모두 닦아야만 비로소 모든 사물의 실상을 관득할 수 있다고 해석한다. 대사는 마하지관의 관계부분의 설명에 있어 결코 그렇게 명언(明言)한 대문은 없지마는 그 설명의 흐름으로 담연(湛然)과 같은 이해가 생겨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