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형상 자체가 우상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신통이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마음이 우상입니다.
깨달음을 갖은 부처님의 보이는 불상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마음(부처의 본성)을 보는 것이다.
우리의 어리석음과 무지가 바로 우상
부산 영주암 회주 정관 스님
오늘 법문의 주제는 우상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불교를 우상 숭배의 종교라고 하는데, 과연 어떤 것이 우상인지를 정확히 알게 되면 결코 그런 말을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우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물건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만약 어떤 물건을 보고 우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물건을 적재적소에 쓸 수 없기 때문에 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물건을 지혜롭게 쓸 줄 안다면 우상이 아니라 소중하고 귀한 물건입니다. 그렇다면 우상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어리석음과 무지가 우상입니다. 밖으로 따로 우상을 찾을 수 없습니다.
남의 말만 믿고 따르는 것이 우상입니다. 남의 판단에만 의지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눈치 없이 구는 것이 우상입니다.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나의 말만 주장하는 것이 큰 우상입니다. 우상은 객관적인 물건이 아닙니다. 우상은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그래서 무형의 우상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상 타파가 곧 불교의 지혜입니다.
그렇다면 사찰에 모신 불상은 어떻습니까. 당연히 우상이 아닙니다. 형체가 없는 마음의 법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깊은 뜻을 모르는 사람들은 불상을 우상이라고 말합니다. 마음이 있으면 형상이 있게 되고 또 형상이 있으면 마음이 따르게 됩니다. ‘형상 따로 마음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명호를 염송하면 부처님의 덕행이 마음 가득 들어옵니다. 불상을 향해 간절히 기도하면 우리 마음에 내재돼 있는 불성이 깨어납니다.
불상 그 자체를 믿고 받드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는 수천 년을 이어 오는 민족의 역사입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 불국사 석굴암 부처님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불교적 가치를 유네스코가 인정한 것입니다. 유네스코가 신비로운 마음의 진리와 우상을 구별하지도 못하고 등록한 것은 결코 아닐 겁니다.
같은 물이지만 보살이 마시면 자비가 되고 어머니가 마시면 젖이 되고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됩니다. 같은 불상을 보면서 기독교인들은 우상으로 보지만 우리 불자들은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와 내 안의 불성을 봅니다.
그런 까닭에 우상은 밖으로의 외형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자기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지 않고 끊임없이 생겼다 사라지는 온갖 생각들. 이런 생멸법이 우상입니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끌려가지 않고 자기 생각을 자유자재로 하는 큰 지혜를 우상타파라고 합니다. 우상은 반드시 타파해야 합니다. 꼭 타파해야 합니다. 우상 타파가 곧 불교의 지혜입니다.
불상은 마음 법의 형상화
오물이 방에 있으면 그 냄새가 화근이지만 농사짓는 밭에 가면 퇴비로서 대환영입니다. 영어책이 아무리 좋은 책이라 해도 영어 학자에게만 좋은 책이지 영어를 못하는 저에게는 영어책이 아무 쓸모가 없는 우상중의 우상입니다. 이렇게 천지만물은 쓰는 사람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 물건에 매어 살면 우상이지만 그 물건을 잘 활용하면 지혜입니다.
중생의 자성(自性)은 본래부터 밝게 깨어 있습니다. 어느 때부터가 아니고 ‘본래부터, 하늘 땅 이전부터’입니다. 다른 말로 불성(佛性), 혹은 자성불(自性佛)이라고 합니다. 불성의 위신력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 맑고 밝습니다. 자성불은 시방 법계 항상 가득합니다. 불변이고 불멸입니다. 자성불의 진공묘유의 법은 산하대지에 현진광(現眞光)입니다. 과거의 빛도 아니고, 미래의 빛도 아닌 현재의 빛입니다. 자성불이 천상천하(天上天下)에 유아독존(唯我獨尊)이지, 다른 무엇이 유아독존이 아닙니다. 자성불은 본래부터 유아독존입니다.
자성불 공덕의 빛이 항상 비치고 시방법계에 가득하다 해도 자성불 공덕은 어떤 형체가 없습니다. 색깔이 없고 모양이 없습니다. 뚜렷한 모양이 없는 것이지요.
자성불 공덕이 중생계에 가득하다 해도 어떤 형체가 없고 모양이 없고 색깔이 없으니 중생들은 믿지를 못합니다. 믿지를 못하니, 밝은 빛이 되지 못합니다. 믿음이 발심이 되고 안식이 되고 이적이 되고, 기적이 되고, 공덕의 빛이 됩니다. 믿지 않고 믿어지지 않으면 마치 방에 전깃불이 있어도 스위치를 켜지 않으면 밝아질 수 없음과 같습니다. 텔레비전 속에 아무리 좋은 내용이 가득해도 켜지 않으면 좋은 화면을 보지 못함과 같습니다. 모양도 없고, 색깔도 없고, 형상도 본래 없지만 자성불 마음의 위신력을 모양과 형상으로 만들고 화려하게 색을 칠해 법당에 모신 것이 등신불입니다. 자성불 마음을 지극히 모신 곳이 법당이지 우상을 모신 법당이 아닙니다. 신을 모신 법당이 아닙니다.
형상 속에는 우리들의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 불교는 마음을 모시고 마음을 섬기고 마음을 믿는 종교이지, 우상을 모시는 종교가 아닙니다. 우상을 타파하는 종교입니다. 우상을 타파해야지 우상을 왜 모시겠습니까. 마음 앞에 예경하고 기도하지 우상 앞에 예경하고 기도 드림이 아닙니다.
마음이 어찌 우상입니까. 마음이 어찌 미신입니까. 마음이 어찌 삿된 것입니까. 마음을 믿는 종교가 어찌 잘못된 것입니까. 마음을 섬기는 행위가 어찌 잘못된 행위입니까. 마음 실체를 증득하고자함이 어찌 어리석음입니까. 마음 실체 근원지를 달관하려는 수행이 어찌 잘못된 수행입니까. 마음 근원지를 깨닫고자 구도자가 가는 길이 어찌 잘못 가는 길이고 염세입니까. ‘마음 따로 신 따로’라고 주장하는 이원론이 우상입니다. ‘신이 마음이고 마음이 신’이라는 일원론은 우상이 아닙니다. 일체중생 모두에게는 마음이 먼저이지 신이 먼저가 아닙니다. 신이 먼저라고 보는 어리석은 견해가 우상입니다.
대자유자가 되고 대안식자가 되고 대해탈자가 되고 대평화자가 되고 대지혜자가 되고 대구도자가 되고자 할 때는 자기 마음 근원지를 증득해야 합니다. 자기 존재의 근원을 살펴야 합니다.
‘금강경’에서는 “만약 나를 형상으로 보려고 하거나 음성으로 구하고자하면 절대 부처님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양과 색깔, 형상, 듣기 좋은 음성에만 집착하고 치우치고 이끌려 다니면 진리를 볼 수 없습니다. 형상으로서의 부처님은 어디까지나 방편이지 ‘참’이 아니라는 법문입니다. 우상 타파의 법문입니다.
옛날 중국의 단하 스님은 “목불(木佛)은 불을 제도하지 못하고 철불(鐵佛)은 용광로를 제도하지 못하고 토불(土佛)은 물을 제도하지 못하고 석불(石佛)은 비바람을 제도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성불 만이 의지할 안식처
나무로 만든 부처님은 불에 넣으면 소각되어 없어지니 실망스럽고 허무합니다. 쇠로 만든 부처님은 용광로에 넣으면 녹아 없어지니 믿을 수 없어 허탈합니다. 흙으로 조성한 부처님은 물에 넣으면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니 별 것 아닙니다. 돌로 조각한 부처님은 비바람 앞에 견디지 못하고 마멸되니 세상에 영원한 것 없다는 무상의 진리 속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성불만이 영원하고 믿을 수 있는 부처님입니다. 우리의 의지할 바입니다. 영원한 안식처는 우리들 자성불입니다. 밖으로 나타난 형상불은 일시 방편이며 ‘참’이 아니며 거짓 방편이라는 단하 스님의 지혜로운 법문을 잘 음미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중생을 제도하실 때 그 근기에 맞게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상근기 중생은 형상과 모양, 색깔 이전 자기의 자성불 공덕을 바로 믿는 지혜가 충만하기 때문에 도량에 형상불이 있거나 없거나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중근기, 하근기 대중은 눈에 보이는 상대가 있어야 하고 형상이 있어야 합니다. 형상불이 있어야 그들은 제도가 됩니다.
우리 법당은 마음을 모신 법당이지 우상의 어리석음을 모신 곳이 아닙니다. 신을 모신 단견(短見)도 아닙니다. ‘신 따로 마음 따로’라는 이원론의 우상이 아닙니다. 신이 마음이고 마음이 신이라는 큰 지혜 일원론법입니다. 불교는 우상타파의 지혜입니다. 불교의 참선 공부가 곧 우상타파라 하겠습니다. 큰 지혜와 우상을 구분하지 못하고 ‘불교는 우상이다’고 단정을 짓는 일은 없기를 바라면서 법문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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