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회 및 행사 법문

무술년 3월법문

통융 2018. 3. 18. 20:54


緣起法에 대해서 지난 달에 설명했다.

"연기를 보는 자는 법(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


불교는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를 가지고 우리가 공부하고 수행해서 열반락을 얻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러면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았을가?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에서 '사성제'와 '십이연기'를 깨치시고 '중도'를 선언하셨다.

고 이것을 '사성제'로 '체계화'하여 '사념처 위빠사나'로써 '수행'을 '실천'하게 했다.... 청정도론

뒷날 불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계,정,혜로 구분하여 수행 방법을 구체화 시켰다.

부처님의 최초 설법이 '콘단냐'에게 설하신 '사성제'이고, 마지막 제자인 '수밧타'에게도 '사제·팔정도'를 강조했으며, 유언으로도 “모든 조건 지워진 것은 '무상'하다. 방일하지 말고 '해탈'을 이룰 때까지 '정진'하라.”고 하셨다. 이 때 조건 지워진 것은 '오온·십이연기'의 '사성제' 중 ‘고’ ‘집’이고, '해탈'을 이룰 때까지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는 것은 ‘멸’ ‘도’로 '위빠사나 수행'이다.


* 법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아보자.

붓다가 보리수 밑에서 깨달은 진리의 내용은 연기의 법인데,

그는 이 연기의 입장에서 인생의 실상을 제행무상인, 제법무아인, 일체개고, (열반적정)의 三法印(무상,고,무아)으로 설명하였다.

諸行無常은 시간적으로 현상의 일체가 끊임없이 생성 및 발전한다는 것을 말하며,

諸法無我는 공간적으로 현상의 일체는 독립적인 자아를 지니지 않는다는 것이며,

涅槃寂靜은 본래 체계의 진실한 모습을 알게되면, 열반이란 말은 우리 마음 가운데서 번뇌를 끈 멸진정의 경지를 말하며, 적정이란 너도 나도 하나가 되어 고뇌가 없는 자유로운 상태를 의미한다.

一切皆苦 인간이 무상(), 무아() 깨닫지 못하고 영생() 집착하여 로써 온갖 고통 빠져 있음 이르는 .

첫째 가장 분명하고 일반적인 형태의 괴로움(苦苦性.고고성), 둘째 조건 지어진 상태에서 오는 괴로움, 즉 불만족(行苦性.행고성), 셋째 변화로 인해서 오는 괴로움(壞庫性.괴고성)이 그것이다 (장부 33. Samyutta Jambukhadaka-sutta).

더하면 4법이 된다.


이러한 법의 실체를 알게되면 4가지의 성스러운 도제(苦集滅道)의 조건과 일어남과 결과를 알게 된다.

결국 부처님도 연기법을 통해 사성제를 알아차렸고 그러한 4성제를 이해하고 <고,집,멸,도성제> 부처님이 깨닫고 가르친 최초의 법문이다.


*사성제(四聖諦) 또는 사제(四諦)라고 성스러운 진리라고 한다.

괴로움을 아는 자는 또한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 그리고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을 안다 ." (상응부 437).

 *‘고’는 생로병사의 괴로움, 중생들에게는 남(生)과 늙음(老), 병듦(病), 죽음(死)이 괴로움이다.

사랑하지만 헤어져야 하는 괴로움(愛別離苦:애별리고),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괴로움(怨憎會苦:원증회고),

얻고자 한 것을 얻지 못한 괴로움(求不得苦:구불득고),

자기에게 집착하는 괴로움(五取蘊苦:오취온고)도 있다. 이를 인생의 여덟 가지 괴로움(人生八苦:인생팔고)라고 한다.

그 외에도 수많은 괴로움과 불안함, 걱정이 있다. 아비담마에서는 89가지의 마음을 설명하고 있다. 108번뇌라고도 한다.


*‘집’은 ‘고’의 원인이 되는 번뇌의 모임,괴로움의 원인이라는 진리다.

集(집)이란 ‘불러 모으다’라는 뜻입니다. samudaya를 번역한 것입니다. 삶의 실상이 괴로움인 원인은 욕망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渴愛(갈애)라고도 한다. 愛(애)란 애착을 말하며 세 가지가 있다. 오감과 관련된 것으로

慾愛(욕애)- 色聲香味觸(색성향미촉-모양,소리,냄새,맛,감촉)과 관련된 욕망, 또는 食慾(식욕), 性慾(성욕), 재물욕, 명예욕, 수면욕 등

有愛(유애)는 끝없이 생존해 있고자 하는 욕망이며,

無有愛(무유애)는 허무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

중생들이 無明(무명), 진리를 제대로 모르고 있기 때문에 갈애가 있다.


* ‘멸’은 번뇌를 없앤 깨달음의 경계, 괴로움의 원인을 없애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진리다.

滅(멸)이란 소멸을 뜻하며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괴로움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열반이라고 부르며 불교의 궁극적 목표다.

열반에는 有餘(유여)열반과 무여열반이 있다.

현생에서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마음의 괴로움은 완전히 사라질 수 있지만 육체가 늙고 병드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육체적 괴로움마저 사라진 상태를 무여열반이고. 무여열반은 진리를 완전히 깨달아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괴로움이 완전히 사라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괴로움의 원인이 욕망이므로 그것을 없애야 한다. 그런데 그 욕망의 원인이 무명이니 진리를 깨달아야만 욕망을 제거하여 열반에 이를 수 있다.


*‘도’는 그 깨달음의 경계에 도달한 수행을 이른다. 道(도)는 깨달음,열반에 도달하는 길 또는 방법이다.

이 방법에 대해서 수 많은 경전들이 설명을 해놓았다. 대표적인 방법이 八正道(팔정도), 六波羅蜜(육바라밀)이다.


이것이 불교의 핵심인 4성제이며 이러한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공부해서 스스로 깨닫는 것이 불교의 수행이며 이득이다.

높은 산에  금은보화가 가득 있는 것을 알고 그 산을 오르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알아도 본인이 직접 산행을 해서

보물을 취하지 않고는 그림의 떡이다.

결국 부처가 되는 길은 어느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다.


*불자라면 다 알고 있는 불법승 (붓다,담마,상카)를 三寶를 알아보자.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는 세 가지 다함없는 보배로운 귀의의 대상이다.

삼대三大(삼요三要)본체, 현상, 작용으로도 나타낼 수 있다.

먼저 불佛은 세존이신 석가모니 여래,즉 불성을 말하며 불법의 體에 속하고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며

법法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경經과 율律을 가리키며, 불성이 나타남을 말하며 불법의 相을 말하며 원만보신 노사나불이며

승僧은 승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불법의 쓰임인 用을 말한다. 천백억 화신 석가모니불이다.

승僧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깨우친 이들로 능히 일체 모든 이를 고통에서 구제하는 이들로서

성문사과의 네 지위에 이르거나 혹은 성문사과에 이르게 될 이들을 승가로 존경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삼보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작용해야 만이 삼보라 할 수 있으며 불법인 것이다.



* 이러한 불법이 부처님 당시와 초기 불교에서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보자.

불교의 부처님 당시의 초기 불교는 아비담마,청정도론 등의 론,경,률 삼장이 있다.

경전들은 아비담마,숫타니파타 등의 아함부가 있다.

그 담마들을 수행하는 방법을 설한 것들이 청정도론이 있다.

수행방법에는 사마타적  수행 어떤 표상을 취해서 집중하는 수행으로 멈춤을 통한 선정수행이다.

그 표상을 버리고 심관 즉 직관으로 집중하는 수행이 위빠사나 수행이 있다.

이 둘은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데 止觀 수행이다. 보조국사는 지관쌍수라 했다. 쌍차싸조다. 

간화선에서 행하는 화두참선을 보면

사마타의 표상을 취하는 것은 화두를 들고 참구하는 것과 같고, 화두를 의심하는 것은 위빠사나적인 명상에 속하는 수행으로

참선적인 수행이 된다.


*우리는 불교를 왜 믿습니까?

離苦得樂이다. 내가 괘로움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얻는것, 즉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이다.

무엇이 이고득락인가?

*상락아정(常樂我淨) 범어는 nitya-sukha-ātman-śubha, 팔리어는 nicca-sukha-atta-subha이다.

열반사덕(涅槃四德), 법신사덕(法身四德)이라고도 하며, 줄여서 사덕(四德)이라고도 한다.

열반과 법신은 네 가지 덕성을 갖추었다.

첫째는 영원하여 변하지 않는 상(常), --- 제행무상.

둘째는 고통이 없는 안락한 낙(樂), ---- 일체개고

셋째는 진실한 자아로서 아(我), ---- 제법무아

넷째는 번뇌의 더러움으로부터 벗어난 정(淨)이다. -열반적정

-- 이러한 모든 것이 어디에서 비롯된다 .... 한 마음이다.


결국 불교는 모든 존재의 생성원인(삼법인=연기법)을 바르게 알고 그러함 속에서 살고 있는 내가

스스로 공부하고 수행하여(계,정,혜) 참된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즉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마음들을 철저하게  알아차리고

어떤 대상에게 구속되어 소원을 빌고 해 주십시요가 아니라

외부에 있는 형상의 부처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대상을 정하고 주종의 관게로 살지 말아야 한다.

언제까지 외부에 신이 나를 구원해 줄 것이라는 착각을 하면 안된다.

그 신이나 부처님은 내 안에서 온전히 살아 있고 그 신성을 깨워내어 귀의하라.


* 부처님의 법을 예경하고 공부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불교의 수행이란 궁극적으로 깨달음을 얻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근본적인 실천은 계(), (), ()의 삼학(三學)

,계율과 선정과 지혜의 세가지 수련을 그 기본원리로 하고 있고 초기 불교인 남방불교의 수행과 북방 불교의 수행방법 등의

내용은 다음 시간에 알아보자.

불교수행의 기본 덕목. 삼학(三學)을 계,정,혜 라고한다.

계율을 잘 지키고, --- 일상생활 속에 지켜야 하는 자발적인 도덕 규법들로 제가신자들이 받아 지니는 오계(五戒)를 위시한 십선계(十善戒), 팔재계(八齋戒) , 계율들을 통해 절도 있는 생활을 습관화 시켜 나감으로서 마음속에 들끓고 있는 헛된 욕망을 제어하여 건강과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① 목숨을 빼앗는 것(살생하는 것), ② 남이 주지 않은 것을 취하는 것, ③ 간음하는 것(승려의 경우는 여하간의 성행위, 일반인의 경우는 간통과 같이 사회적으로 정한 규율을 어기는 것 등으로 해석됨), ④ 거짓을 말하는 것, ⑤ 술이나 마약에 취하는 것, ⑥ 정오 후에 음식을 먹는 것, ⑦ 세속적인 오락에 빠지는 것, ⑧ 장식물로 몸을 치장하고 향수를 쓰는 것, ⑨ 사치스럽고 높은 침대에서 잠을 자는 것, ⑩ 금이나 은을 취하는 것 등이다.

재가 신도들은 10가지 중 앞의 5가지 계율[五戒 pañca-sila]을 항상 지켜야 한다.


선정(禪定)의 수련,-- 좌선(坐禪)과 같은 정신집중의 수행을 의미하는 것. 본래 선정은 인도의 전통적인 수행방법인 요가의 일종으로 삼매(三昧)라고도 하는데, 호흡과 자세를 가다듬고 의식을 한곳으로 통일 시키는 수련법. 산란한 마음이나 동요된 마음, 분노 따위를 제어하여 마음속에 지혜를 일으킬 터전을 마련.

중국의 선종(禪宗)에서는 이와 같은 선정수행을 특히 중요시 했다. 수행을 말한다. 9차제정의 수행, 참선,염불, 기도,사경,주문 등


지혜의 완성을 뜻함.-사물의 이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기르는 수행으로, 우리의 몸이나 감각등에 대해 덧없고 괴로우며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관찰하고 연기의 이치를 깊이 탐구하는 것.

우리들은 이와 같은 지혜의 수행을 통해 진리를 통찰하게 되면 마음속에 아무런 두려움이나 걸림이 없는 열반을 성취.


이 삼학은 초기 불교에서 강조된 것으로 이것이 근본이 되어 대승불교에서는 6바라밀과 10바라밀의 수행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는 지계와 선정, 그리고 지혜를 구체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남방에서 주로 수행하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대승 불교권에서 하는 참선, 염불, 주력 등이 있다.

 


* 삼학을 잘 닦으려면 가장먼저 연기법을 이해해야하고 <12연기법 무명,행,식, 명색,육입,촉,수,애,취,유,생,노사>

8정도를 닦아야 한다. 정견,정사유,.정어,정사,정명,정정진,정념,정정


대표적인 것이 8정도라고 한다.

계,정,혜의 삼학을 잘 닦아야 한다.

정견과 정사유는 지혜의 견처이고

정어,정명,정사는 계를 지킴이고

정정진,정념,정정은 선정으로 수행을 말한다.


자신이 수행을 통해서 도를 이루고 나서 상구보리하화중생하거나

바라밀 행을 통해 자신의 업장을 닦아가는 방법 6바라밀 보시,지계,인욕,지계,선정,지혜

계율을 잘 지키면서 수행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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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불교의 교학적인 공부를 해 봤다.

 지금부터는 실질적인 수행방법과 불법의 쓰임을 알아보자.


내가 청정법신 부처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이다.

내 안에 부처님에게 귀의하고 스스로 가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왜 내가 부처인가?

왜 내가 부처님의 가피를 얻을 수 있는가?


죽비를 처 보인다.

소리가 어디에서 나느냐?


모두가 작용성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어떤 특정 대상이 만들지 않는다.

그렇듯이 이 세상은 모두가 인연되어 있는 ------연기의 작용성이다.

어느것이라 해도 맞지 않다.

찰라에 생하고 찰라에 멸한다.

단지 인연되어 나타났다가 소멸하는 것이다.---제행무상, 空性인 불법의 실체를 알아차림.


누가 소리를 만드느냐?

전지전능한 능력.... 실지실견 바로 알아차리는 것이 누구인가?.

그러면 지금 이 소리를 알아차리는 것이 누구인가?

나다.

그 나라는 것이 누구인가?

전지전능한 존재 부처이다.-------------   제법무아인 실상이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부처인지를 모른다.

왜 그러냐 하면 깨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깨어 있다는 것은 중생의 마음인 분별심을 내지 않는 순간을 말한다.

순간이 깨어 있고 알아차림하고 있는 순간이다.

다시 말해서 과거의 것에 집착하거나 미래를 걱정하며 상상하는 분별신을 내지 않는 것이다.

결국 오직 지금의 순간에 100%로 일 때 깨어 있음이다.


그러면 부처는 무엇인가.

부처는 특정한 본재가 있다 없다.

고정된 존재는 없다. 다만 인연되어 나타날 때 찰라적 나타남이다.---- 실지실견 즉견여래.

즉 다시 말해서 공한 것 같은데 나타나고 나타나 것 같은데 공한 것이다.


촛불을 보면서 촛불이 없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나타나고 소멸한다.

모든 형상 있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이와 같다.

 

오직 매 순간순간 비어있으면서도 작용성으로 나타나는 것이 부처라고 이름을 부친다.

그 부터는 몸이기도 하고 마음이기도 하고

내가 나무를 보면 나무가 되고 산을 보면 산이된다.

실지실견이라 한다.

즉견여래라 한다.------------ 실상을 파악하는 지혜다.


그러면 어떻게 그 전지전능한 존재 부처로 우리가 살 수 있을까?

분별하는 내 마음만 내지 않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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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삶에서 가장 큰 문제가 생사의 문제이다.

이웃 종교는 죽어서 영생하는 것이 목적이라 한다.

하지만 불교 수행은 금생의 열반과 사후의 열반을 동시에 얻는다.


영생도 열반도 누가 하느냐?

내가 한다.

그 내가 무엇인지를 모르는데 어떻게 영생하는지 극락 가는지를 알 수 있을까?


먼저 내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내 몸은 영원히 살 수 없는데 어떻게 영생과 극락이 가능한지?

그렇다면 내 영혼이  영생한다는 말인데 그 영혼이라는 것. 

열심히 믿고 귀의하는  心意識을 대표하는 그 마음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신에게 귀의하겠다는 그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자?

몸과 마음으로 구성되어 있는 내가 누구인지를 확실히 알면

그대가 생각하는 신에게 영생을 보장 받는다는 그 영생을 알게 될 것이다.

즉 그 영생이라는 막연한 환상에서 깨어나게 된다.


이 세상에는 내가 중심이 되어 있다.

영생과 지옥 극락은 모두가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가정하에서 그러한 생각이 생기고 욕심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그 나라는 존재 그 몸과 마음을 확철히 알아보라는 것이다.


그러한 나의 존재를 알아보는 것이

그 진리는 누가 만든 것도 아니다.

만약 그대들 신이 만들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대들은 그 신이 만든 진리를 바로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 진리는 무엇인가 하면 창조법이다.

그대들이 신이 창조했다니 창조법으로 설명을 하겠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은 말씀으로 있으라 하니 생겨났다.

말씀과 대상이 있으라는 조건과일어남이 있어야 창조가 일어난다.

말씀 자체로는 창조가 나타나지 않는다. 꽃,물,바람 등등 대상이 있다.

즉 다시말해서 하나님도 없는것에서 창조는 만들 수 없다. 

어떤 존건과 그 조건을 이어주는 과정이 있고 그 결과가 존재로 나타는 것이다.

그냥 나타난다. 있다. 있으라 해서는 말만 있을 뿐이다.

어떤 대상이 존재할 때 새로운 것이 창조 되는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는 창조의 원리이다.

 그 창조의 원리가 연기실상의 연기법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조건의 인이 서로 만나서 작용이 일어나고 연결되고 그 결과로 결과가 나타난다.

분명하게 논리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

바른 조건,바른 과정과 바른 결과가 있어야 한다.


우리 몸은 지수하풍의 연기작용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다.

생사가 우리 인간에게는 가장 큰 문제인데

연기법을 바로 알면 생사가 특별히 의미가 없다.

우리는 한 순간도 생사를 행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

우리 몸에 세포가 100조개나 있다고 한다.

1분에 50만개씩 생겨나고 죽는다고 한다.

그러한 물질의 변화가 몸의 생사다.


마음은 몸이 없으면 스스로 작용하지 못한다.

마음 작용에 대해서 한 예를 들어보자.


창조의 원리에 대해서 알아보자.


내가 바닥을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난다.

이 소리는 누가 창조한 것인가?

내가 했느냐?

내가 어떻게 하느냐?

내 의지로 한다고. 그렇다며면 손을 묶어 놓고 의지로 손뼉을 친다고 생각해도 소리가 나느냐?


나라는 존재실상을 확실히 알지 못하고는 나라는 단어를 쓸 수가 없다.

그렇다면 좀더 구체적으로 손이 하느냐.

그렇지도 않다. 손이, 바닥이 하느냐?

그들 스스로 작용하지 못한다.

허공에 손을 쳐도 소리가 나느냐?


무엇이 소리를 나게 하느냐?

신이 했느냐?

그렇다면 그 신은 어떻게 했느냐?

...........

만약 손으로 바닥을 친다면 그대가 한 것인데 어떻게 신이 한 것이냐?

..............


그 신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허공에 있는데 당신이 가만히 있는데 손으로 바닦을 쳐서 소리나게 해 주십시요 하면

소리가 나느냐?

.......................

그렇다면 신이 그대이고 그대가 신이 아니냐?

............

.그대 신도 그대에게 창조는 그렇게 일어난다는 것을 알려줬다.

다만 그대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더 신에게 귀를 귀울이고 더 신에게 가까이 접근하고 신을 온전히 영접한다면

그대는 신의 말씀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

그러한 원리를 설명하는것이 경전이고 바이블이다.

그 설명으로는 아무리 애원하고 빌어도 소리는 나지 않는다.

오직 지금 그대가 손으로 바닥을 쳐야만이 창조가 일어날 것이고

그러한 역사는 신의 권능 혹은 가피라는 말씀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보자.


손이 바닥을 쳐서 소리가 난 것은  분명히 없었던 것이 나타났기 때문에 창조이다.

두 손이 서로 마주쳐서 소리가 나듯이 손과 바닥의 조건인 (緣=因)이 부디치니기(起=緣) 소리(果)가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은 모든 창조는 이러한 진리로 생성되고 인연이 다하면 소멸한다.

소리가 금방 사라졌듯이.....

나타남을 생이라하고 없어지는 것을  멸이라한다.

그래서 이 세상은 모두가 인연법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소멸한다.

모든 사물은 성주괴공하고

생명있는것은 생로병사하고

마음이나 색계, 무색계는 생주이멸한다고 표현을 한다.


불교는 부처님이 이러한 법을 깨닫고 우리에게 가르쳐준 진리를 공부하고 각자가 스스로

깨달아 참 진리에 머무는 것이 불교이다. 

그래서 불교의 법은 무엇입니까?

연기실상이며 그러한 법을 불법이다. 인연법이다. 용수보살의 중론 이후로는 이후로는 중도법이라 하기도 한다.



그러면 영혼은 없습니까?

있다고도 없다고도 못한다.

지금 이 소리를 없다고 해야 되느냐?  있다고 해야 되느냐?


이 세상에 이치는 이와 같다.

생사도 이와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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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휴정승에 대한 이야기를 해 드리겠다.

唐나라 때 배휴(裵休)라는 불심이 깊고 학식이 뛰어난 유명한 정승이 있었습니다. 배휴에게는 배탁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두 형제는 태어날 때 쌍둥이로 등이 맞붙은 채 기형아로 태어나서 부모가 칼로 등을 갈라 약을 바르고 치료를 해서 키웠는데, 살이 많이 붙은 아이는 형이 되고 적게 붙은 아이는 동생이 되었다고 합니다.

배휴와 배탁 형제는 아이 때 부모가 형에게는 도(度)라고 부르고 동생은 탁(度)이라고 불렀는데, 비록 한자의 글자는 같지만 음이 달라서 형은 도(度:중국발음 ‘따오’)라 하여 법도를 의미하는 이름으로 불렀고, 동생은 탁(度:중국발음‘’뚜‘)이라 하여 헤아림을 의미하는 이름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배휴(裵休)는 형인 배도의 장성한 후에 불려진 이름입니다.

배휴와 배탁은 부모 복이 없어서인지 어려서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어 외삼촌한테 몸을 의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외삼촌 집에 탁발을 나왔던 도력이 높으신 한 스님께서 외삼촌과 말씀을 나누시는데 배휴가 지나치다가 우연히 문밖에서 자신의 이야기에 관한 대화가 나오는 것을 잠깐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스님께서 외삼촌에게 말씀하시기를

"저 아이는 웬 아이입니까?"

"나의 조카인데 부모가 없어 데리고 있습니다."

"저 아이를 내보내십시오."

"부모도 없는 아이를 어떻게 내 보냅니까?"

"내가 가만히 저 두 아이의 관상을 보아하니 저 아이들이 필시 거지상인데, 만약 이대로 계속 저 두 아이를 데리고 살면 저 아이들로 말미암아 세 집이 모두 가난해 질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저 아이들이 밥을 빌어먹는 거지가 되려면 우선 이 집부터 망해야 할 것이니 애당초 그런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아이를 내보내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스님이 돌아간 뒤 배휴가 외삼촌에게 말하기를

"외삼촌 저희는 어디로든지 나가야겠습니다." 라고 하자 외삼촌이 깜작 놀라며

"가기는 어디로 간다는 말이냐?" 하고 만류하였습니다.

그러자 배휴가 외삼촌에게

"아까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어차피 빌어먹어야 할 거지팔자라면 차라리 일찌감치 저희 스스로 나가서 빌어먹을 일이지 외삼촌까지 망하게 만들고 나갈 것이 뭐 있겠습니까, 아예 지금부터 빌어먹으러 가렵니다."

자꾸만 만류하는 외삼촌을 뿌리치고 집을 나온 형제는 얻어먹는 거지가 되어서 각자 사방으로 다니던 중, 배휴는 어느 절 목욕탕에 아주 진귀한 보배(부인삼대:婦人三帶)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혼자 생각하기를

‘이 좋은 보배를 누가 잃어 버렸나....’

하고 구걸해 먹는 거지처지에도 그 보물에 탐심을 내지 않고 임자를 찾아 주려고 보배 임자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보배는 어떤 물건인가 하면 그 고을에 3대독자를 둔 어머니가 있었는데 그 3대독자가 그 고을 자사(刺使: 지금의 도지사)한테 죽을죄를 지어, 그 어머니가 아들의 목숨을 구하고자 가산을 모두 팔아서 멀리 촉나라에까지 가서 이 <부인 삼대>라는 보물을 구해다가 자사에게 애걸을 하여 그 3대 독자를 살리려는, 참으로 애절한 사연이 있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그 3대독자의 모친이 절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행장을 수습하여 간다는 것이 워낙 바쁘게 서둘다 보니 귀중한 보물을 빠트리고 간 것이었다. 그리고 집에 가서 보니 <부인 삼대>가 없어진 것을 알고 허둥지둥 절 목욕탕에 와 보니 웬 거지가 목욕탕 앞에 서 있기에 혹시나 저 거지가 주워가지 않았을까 해서 물어보니,

"내가 주워서 챙겨 놓았는데 당신이 주인이면 가져가시오. 내가 그 보배를 지켜 준다고 여기 있었오." 라고 하는 것이었다.

빌어먹는 거지의 입장에서 그 보물을 가지고 가서 팔아가지고 자신의 생계를 꾸릴 생각을 하기보다는 도리어 그 보물을 지켜주기 위하여 기다렸다가 주인에게 돌려주어 그 여인은 거지 배휴 덕분에 보배를 가지고 가서 마침내 3대 독자를 살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배휴가 거지 생활을 하면서 어느 날 외삼촌 집에 들리니 마침 예전에 자신에게 거지팔자라고 하셨던 도인 스님이 오셨는데 배휴를 보더니, 깜작 놀라며 이번에는 배휴에게,

"얘야! 네가 정승이 되겠구나." 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배휴가 그 말을 듣고

"스님께서 언제는 제가 빌어먹겠다고 하더니 오늘은 정승이 되겠다고 하니 무슨 말씀입니까? 저를 놀리지 마십시오!" 라고 대꾸를 하였다. 그러자 스님께서

"흐음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지, 하지만 전날에는 너의 얼굴상을 봤고, 오늘은 너의 마음 상을 보았다. 네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지?"

하고 묻자 배휴가 보물을 주웠다가 돌려주어 사람을 살린 일을 이야기하니,

"그래서였구나!"

하고 수긍을 하였다. 그 후 참으로 그 도인 스님 말씀처럼 배휴는 삼공(三公)영의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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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력이 높으신 한 스님:

어느 곳에서는 이 스님을 일행(一行)선사라고 한 곳도 있지만 일행선사와는 생몰연대가 맞지 않는다. 일행선사는 생몰연대가 683~727년으로 이미 배휴가 세상에 나오기 전의 인물인데 아마 일행선사가 같은 당나라 때 스님이며 또한 일행선사가 관상과 풍수지리 및 음양오행의 역학에 정통하여 유명을 떨쳤던 스님이었기에 일행선사로 오해한 것이 아닌가 싶다.

삼공(三公) 영의정 :

국가의 대사를 맡아보는 최고의 관직으로서 태위(太尉),사공(司空),사도(司徒)를 말한다. 태위는 주로 군사, 사공은 주로 수리와 토목, 사도는 주로 민정 부문을 담당했는데, 그 명칭은 삼사(三司), 삼사(三師) 등으로 개칭되기도 했다

다음은 전등록에 실린 배휴에 관한 기록이다.

 

상국(相國) 배휴(裴休)는 하동(河東) 사람인데, 정승이 된 후 신안(新安)지방의 태수(太守)로 있을 때 황벽희운(黃岫希運) 스님을 만났다.

황벽선사는 처음에 황벽산에서 대중을 버리고 대안정사(大安精舍)로 들어가 노역하는 무리들과 섞여 숨어 살았다.

공이 절에 도착하여 벽화를 보다가 소임자에게 물었다.

"이것이 무슨 그림입니까?"

"고승의 진영(眞影) 입니다."

"진영은 볼 만한데 고승은 어디 있습니까?"

소임자가 대답을 못하자 상공이 다시 물었다.

"이곳에 선(禪) 닦는 사람은 없습니까?"

"요즘에 한 스님이 절에 들어와 막일을 하고 있는데

자못 선승같은 데가 있습니다."

상공이 모셔오라고 하여 스님이 이르자 보고는 매우 기뻐하며 말하였다.

"제가 마침 한 가지 물을 말이 있는데 스님네들이 말씀을 아끼시니,

대신 한말씀 해주십시오." 그러자 스님이 "물으십시오" 하니,

상공은 앞에서 다른 소임자에게 했던 질문을 똑같이 하였다.

"여기 모셔진 고승의 진영은 볼 만한데 고승들은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스님이 "배휴!" 하고 낭랑한 소리로 상공을 부르자 상공이

"예!" 하고 대답하는데 스님께서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시

"어디 있느냐?" 하였다.

공이 당장에 그 뜻을 깨닫고 마치 상투 속 구슬을 찾은듯

기뻐하며 말하였다.

"스님께선 진짜 선지식이십니다. 이렇게도 분명하게 법을 보여주시면서

어째서 이런데 숨어 계십니까?"

그리고 이때부터 제자의 예를 올리고 다시 황벽산에 머무시기를 청하였다.

상공은 조사의 심법을 훤히 깨치고 교학까지도 두루 꿰었으니,

제방 선사들은 모두 배상국은 황벽스님 문하에서 헛 나온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다. 「전등 (傳燈)」

 

그 후에 배휴는 황벽스님을 도와서 불교를 많이 외호하고 佛經에 序文도 지었다. 배휴의 지위가 한 나라의 정승이 되었으니 함께 등이 붙어 나온 그 동생을 생각하고 사방에 수소문을 해서 찾아도 동생의 행방은 묘연하였다. 어디로 갔는지 무엇을 하는지 내가 이렇게 정승 노릇을 하고 있으니 좀 도와주고 함께 잘 지내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하루는 황하강을 배를 타고 건너는 데 때마침 더운 여름이라, 배휴가 뱃사공을 보니 웃옷을 벗어부치고 노를 젓는 데 등허리를 살펴보니 자기 등허리와 같아서 동생이 아닌가 싶어 물었다.

"자네 이름이 무엇인가?

"배탁이올시다."

"그럼 네가 내 동생이 아닌가?"

"아, 그렇습니다."

"너는 내가 정승이 된 줄 몰랐냐?"

"알기는 벌써 알았습니다."

"그럼 왜 찾아오지 않았느냐?"

"아, 형님은 형님 복에 정승이 되어 잘 먹고 잘 지내지마는,

나야 형님 덕에 잘 지낼 것이 뭐 있겠습니까?"

하고는 형이 가자고 해도 따라 가지 않았는데, 형님은 형님 복에 잘 살지만 이렇게 넓은 산과 물을 벗 삼아 오가는 사람을 건네주며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형님의 三公地位보다 낫다고 여긴 것이다.

배휴는 전생에 많은 수행을 쌓고 나온 사람이고, 동생 배탁 역시도 말하는 것을 보면 세상의 부귀영화를 초개처럼 아는 참으로 고매한 마음을 지닌 멋을 아는 사람이었다.


* 배휴 [裴休, 791~864](우리나라 에서는 배휴의 생몰연대가 797~870년으로 되어 있지만 대만 홈피에는 배휴의 생몰 연대가 791년~864년으로 되어 있다.)

《신당서(新唐書)》 권107에 전기가 실려 있다. 전기에 따르면 맹주(孟州) 제원(濟源)에서 출생하였고, 자는 공미(公美)이다. 진사시험을 치러 현량방정(賢良方正)에 뽑힌 뒤 여러 관직을 거쳐 병부시랑영제도염철전운사, 중서문하평장사, 선무군절도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소의(昭義)·하동(河東) 등 여러 곳의 절도사로 일하였다. 74세에 죽고 태위(太尉)에 봉해졌다.

황벽스님의 법문을 전심법요(傳心法要)』 『완릉록(宛陵錄을 엮었다.


* 이 야기에서 우리는 생사의 문제를 학인 해보자.

죽은 영정을 보면 우리는 죽은 삶이 어딘가에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

영혼이 하늘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서  배휴가 그러한 것에 의문도 있어겠지만 그러한 확실한 이치를 깨우쳐 줄 사람이 있는지?

궁금한 것이다.

그런데 황벽이 배휴의 의심을 한방에 날려버린다.

배휴!

네!

그 답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대가 보고 있는 저 영정의 사진은 누구인가?

누가 보고 있느냐?

그 영정에 마음이 간다면 그 영정이 누구인가?

그대 가 바로 그 주인공일세.

연기실상에서 인연이디면 나타난다고 했지요.

그 영정과 배휴의 마음이 일심이 되는 그 존재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대답하는 그 자리에 있지 않느냐?

즉 모든 것은 내가 주인공이다라는 것을 깨우쳐 주는 법문입니다.


즉 생사가 둘이 아니라 과거에 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지금 내가 순간순간 존재하는 찰나가 전부라는 말이다.

그 순간이 부처의 성품이고 그것이 형상을 나타나면 부처의 몸이라 하고 그 것을 쓰임으로 나타날 때 보살행이라 한다.


오늘은 불법의 전반적인 대의에 대해서 알아보고  연기실상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확인해 봤다.

다음 시간에는 삼법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아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