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 날 법설
오늘이 동지입니다.
흔히들 이번 동지는 애동지라고하지요.
동지는 양력으로 12월 21~22일 사이에 듭니다.
음력으로는 대부분 동짓달이 되는데 음력11월1일~10일 사이에 들면 애기동지라 하고
11일~20일 사이는 중동지 21일 이후는 노동지라 한다.
금년은 동지날이 음력 11월 5일 이기 때문에 애동지라고 한다.
애동지는 팥죽을 하지 않고 팥떡을 해서 먹는다고 하는데 왜 그런가를 보자.
중국 고사 <형초세시기>에 의하면 공공씨의 망나니 아들이 동짓날에 죽어서 역신이 되었다.
역신은 천연두 귀신이다. 그 아들이 평소에 팥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역신을 쫓아내기 위해서 동짓날에 팥죽을 쑤어 먹고 이곳 저곳 뿌리며 악귀를 쫓았다고 한다.
애동지에는 어린아이가 많이 죽고,
중동지에는 청,장년층이, 많이 죽고,
노동지에는 노인들이 많이 죽는다는 속설이 있다.
그렇다면 왜 애기동지에는 팥죽을 먹지않는지는 ?
아이들은 삼신할매가 돌봐주는데 팥죽을 쑤면 삼신할매도 귀신이라 아이들 근처에 오지 못해 아기들의 건강을 지켜줄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애기동지에는 아이들이 많이 죽는 속설을
믿었기 때문에 삼신할머니가 아이들을 잘 보살피시라고 팥죽을 안쑤어 먹었다고 한다.
동지에 대해서 알아보자.
태양의 황경(黃經)에 맞추어 1년을 15일 간격으로 1년을 12절기와 12중기로 나누어 보통 24절기라 하는데, 절기는 1달 중 월초에 해당하며, 중기는 월중에 해당한다.
태양이 지구에 영향을 주는 에너지의 차이라고 보면 되는데 1년 중에 크게 4절기인 동지 춘분 하지 추분으로 나누는데
동지는 음의 기운이 끝나고 양의 기운이 시작되는 날로 주역에 64괘 중에 지뢰 괘로 시작하여 춘분이 되면 음과 양이 같아지는 지천태 괘가 되면 차츰 음의 기운이 적어지면서 하지가 되면 모두 양의 기운인 건위천 괘에서 음의 기운이 시작되는 때이다. 차츰 양의 기운이 줄어들면서 추분이 되면 다시 천지비 괘로 양음이 같아지고 동지가 된다.
12개월을 지지인 자축인묘..... 나누는데
역경의 복괘(復卦)를 11월, 즉 자월(子月)이라 해서 동짓달부터 시작한 것도 동지와 양의 기운이 부활하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판단했고 동짓날에 천지신과 조상의 영을 제사하고 신하의 조하(朝賀)를 받고 군신의 연예(宴禮)를 받기도 하였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동짓날을 ‘아세(亞歲)’라 했고, 민간에서는 흔히 ‘작은 설’이라 하였다고 한다.
태양의 부활을 뜻하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설 다음 가는 작은 설의 대접을 받은 것이다.
중국 주(周)나라에서 동지를 설로 삼은 것도 이 날을 생명력과 광명의 부활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동지를 지나야 한 살 더 먹는다.’ 또는 ‘동지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말을 하고 있다.
우리 불교에서의 동지 불공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동지 불공은 민간의 세시 풍속과 불교 의식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풍습이라 할 수 있다.
음양오행설과 절기를 나누는 중국과 일본 한국에서 불교행사로 크게 의미를 두고 있다.
동짓날은 한 해의 기운을 끝내고 다음해의 새 기운이 시작되는 날이다.
이러한 날을 전후하여 기도불공 올리면 불보살님의 가피로 모든 액란들이 소멸되고 각 가정, 개인마다 원만 소원하는 일들이 충만하게 된다고 믿었다.
동지 불공에서는 한 해 동안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해의 소망을 기원하는 송구영신(送舊迎新)의 의미가 강조되어 신라와 고려에서는 동지를 전후하여 국가적 종교 행사인 ‘팔관회(八關會)’를 지냈는데, 이를 ‘중동팔관회(仲冬八關會)’라고 했다.
그리고 불교의 참 뜻이 자비와 나눔이고 이고득락의 차원에서 동짓날 팥죽을 해서 나눠먹고 특히 주위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눔을 통해 불법을 실천하는 기회를 갖는 것에도 의미가 있다.
요즘에는 각 사찰마다 동지 팥죽을 지역 주민들과 나눠 먹는 큰 행사들도 자비실천의 차원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의 동지 팥죽의 이야기를 보면
옛날 신라 시대의 이야기다.
젊은 선비가 살았는데, 사람은 참으로 진실하였으나, 집안이 궁핍하였다.
어느날 과객이 찾아와 하룻밤 묵어가고자 하여 쉬어가게 해주었더니, 다음날 새벽 길을 떠나기 앞서 그 과객은 선비에게 서로 친구가 되자고 하였습니다. 이후로 그 과객은 선비에게 종종 찾아와 내년에 벼를 심으라 하면 벼가 풍년이 들고, 고추를 심으라 하여 고추를 심으면 고추농사가 풍년이 되는 등, 수년간 많은 재산을 모으게 하여 그 선비를 부자로 만들어 주었다.
허나, 이상한 것이 그 과객은 늘 한밤중에 찾아와서는 날이 새기 전 닭이 울면 사라졌다. 주인인 선비는 재물은 남부러울 것 없이 많이 모았으나, 세월이 갈수록 몸이 계속 야위어가더니 마침내 몸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병색이 너무나 심하게 짙어지자, 그 선비는 어느 스님에게 여쭈어 보았는데, 스님께서는 그 과객에게 싫어하는 것이 무엇이냐? 고 물어보라 하였다.
시키는 대로 했더니 그 과객은 백마의 피를 가장 싫어한다고 하였다.
젊은 선비는 스님의 말씀을 새겨들은 이후로, 점점 그 과객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결국 선비는 자기 집의 백마를 잡아 온 집안 구석구석 백마의 피를 뿌렸더니 그동안 친절하던 과객이 도깨비로 변해 도망을 가면서 선비에게 저주를 퍼붓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그 선비는 건강이 다시 좋아졌다.
그런데 해마다 동짓날이면 이 과객이 잊지않고 찾아오는지라 젊은 선비가 스님께 해마다 백마를 잡아서 피를 바를 수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고 방도를 묻게 되었다.
스님께서는 그렇다면 팥물이 백마의 피와 빛깔이 같으니 백마의 피 대신 팥죽을 쑤어 그것을 집에 뿌리라고 하였다.
이것이 동짓날 팥죽을 끊이는 유래라 하기도 하다.
삼국지의 전략가 제갈량이 남만(베트남)을 평정하러 갔을 때 노수의 귀신들이 사람의 목을 원하는지라 밀가루로 사람의 머리 모양을 만들어서 제사를 지낸 것이 만두의 유래라는 이야기를 꺼내며, 자비정신이 넘치는 불교의 동지 이야기가 만두의 전설과 비슷한 점은 바로 불교의 불살생(不殺生) 자비 방생이 그 근원을 이루고 있다고 보는 견해를 밝히는 이도 있다.
선덕여왕은 신라 제 27대 임금으로 부처님에 대한 신심이 아주
돈독하여 국사를 돌보는 바쁜 중에서도 매일 조석으로 황룡사에 가서 예불 올리는 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 여왕이 예불을 드리러 가는 도중에 난데없이 어떤 남자가 여왕의 행차에 뛰어들어 소란을 피우기에 여왕은 시종을 시켜 그 남자에게 연유를 물어보았다.
그러자 소란을 피운 남자가 말하기를, "소인은 지귀(志鬼)라고 하는데 평소부터 여왕님을 남몰래 연모하고 있었다. 그래서 늘 여왕님의 예불 행차를 몰래 지켜보기 여러날이었다." 하는 것이었다.
여왕이 재차 묻기를, "행차를 늘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이냐?" 하니 지귀가, "예, 그러하옵니다. 하오나 오늘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여왕마마께 제 연모하는 마음을 하소연하려고 행차에 뛰어든 것입니다."
원래 자비로운 품성의 소유자인 선덕여왕은 그를 참으로 가엽게 생각하여 황룡사까지 동행하게 하였다. 이윽고 황룡사에 도착하여 절문 앞의 9층탑 곁에 이르자 여왕은 안으로 들어가면서 지귀에게 말하기를. "내가 부처님께 예불을 마치고 그대를 궁으로 데리고 갈 것이니 이곳에서 잠깐만 기다리거라"
그러나 밖에 남게 된 지귀는 일각이 여삼추라 예불 시간도 채 기다리지 못하고, 마음에 심화(心火)가 끊어 올라 그만 죽고 말았다. 참, 지귀란 양반 성미도 급하지. 그 후에 죽은 지귀는 그야말로 사랑에 한을 품고 죽은 몽달귀신이 되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니 신라의 방방곡곡에는 이 지귀의 행패가 심하여 많은 사람이 해를 입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에 이 지귀 귀신의 달래주기 위한 방편으로 해마다 동짓날이 되면 팥죽을 끓여 집집마다 대문에 뿌리고 길에도 뿌렸더니 귀신이 사라졌다고 한다는 설화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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