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회 및 행사 법문

정유년 11월 법설

통융 2017. 11. 18. 15:59

수 많은 부처와 보살은 도대체 누구이며 어떤 역할의 부처이며 보살인가?


지난 달에 준비한 부처가 무엇이며

왜 내개 부처가 되는지를 알아보면서 각각의 부처와 보살에 대해서 준비를 했지만 설명을 드리지 못했는데

오늘 한 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먼저 부처는 누구입니까?

'나 입니다.'

'내가 부처다.'


그렇지요.....

내가 부처 인지를 어떻게 아느냐?

'보고 들어서 앎니다.'


무엇을 보고 부엇을 들어서 부처라고 안다합니까?

스님들이나 경전에서요.

.....

주먹을 들어서 펼쳐보인다.

........


부처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일단 내가 부처라는 것은 안다 이 말이지요.....

그것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지 참 부처를 내가 채득해서 앎이 아니지요.


우리는 내가 왜 부처인지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지난 번에 내가 죽비를 들어보이면 죽비를 죽비 인 줄 아는 놈이 부처라고 했지요.

왜 부처인지를 다시 확인해 봅시다.


죽비를 보고 죽비인지를  아는 것

불상을 보고 불상인 줄 아는 것, 즉 아는 지혜가 뭐다.... 문수보살


죽비를 보면 죽비를 치고, 불상을 보면 절을 할 줄 알고

걸을 줄 알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잠오면 잠잘 줄아는 것 즉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보현보살 


죽비, 불상, 꽃

내 몸이 나타나는 것 등 실재로 존재하는 것을....... 관자재보살


몸에 병이나면 병원에가서 몸을 낳게 하려는 마음이나

내 손은 약손이다 하면서 배를 만져주는 마음이  ----약사여래불


누가 참새를 잡아서 죽이려 하면 그 참새를 구해서 살려주는 것이

배고파 죽어가는 강아지를 먹이를 주고 살려주는것이  ----- 지장보살 


우리가 햇빛을 보고 사물을 확인하고 빛이 세상을 만드는데 이것이---  아미타 부처님


보고 듣고 아는 모든 것이 누가 합나까? 누가 보고 듣고 앎니까?

내가 하지요. 즉 모든 불보살들이 ..... 관세음 보살입니다.

그래서 천수천안 관세음 보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모든 보살들이 밖에서 작용하고 있습니까? 

내 안에서 작용하는 것입니까?

'내 안에서 작용합니다.'


네,

지금 까지는 부처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부처나 보살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작용하는 작용성이다.

이렇게 이해를 했습니다.

이해를 한 것은 생각이지 현실이 아닙니다.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먹어야 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말로 먹야 한다, 무엇을 먹고 배부르게 해야 한다고 해서 배가 불러지지 않습니다.

내가 아무리 나는 부처다 하고 다녀

내가 실지 부처의 깨달음을 갖지 않고는 중생이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금년 내내 여러분에게 주먹을 쥐었다 펴고 책을 흔들어 보고 죽비도 쳐 보이면서

부처로 깨어나는 공부를 한 것입니다.


자 여러분이 내가 손가락을 들어 올렸습니다.

보이십니까?

네...

무엇입니까?

손가락입니다.

(손가락을 아는 것은 문수보살이라고 했는데)


손가락이라고 알기 전 단계를 생각 해 봅시다.

내가 물건을 들어 올린다.

들어 올린 것을 본다.

보는 그 순간은 손가락인지는 알 수 없겠지요.

찰나간이지만 시간이 지나야 손가락이구나 하고 생각을 넣겠지요.

그렇다면 손가락이라고 생각하여 알기 이전에는  

무엇이지요.

무분별의 상태 (분별하지 않는 순간)

....

모르지요.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알아차리는 순간의 전 단계이니까?

나의 직관으로만 알뿐 인식하는 의식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화두에서 말하는 '말과 뜻 이전의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모를 뿐입니다.


그냥 행동일 뿐입니다..

그래서 내가 지난달 공부하면서 간난아기가 보는 마음으로 보라고 했던 것입니다.)

간난아이는 말과 문자를 알지 못하지만 바로보고 바로 안다 했지요.

그냥 보고 알뿐! 무엇을 안다. 어떻게 안다. 그렇지, 이렇지 분별하여 알지 못합니다.

척! 보면 알뿐입니다.

안다는 말도 내가 쓰는 것이지 그 아니는 안다는 자체도 없습니다.

그냥 보는 것이 아이고 아이가 보는 것입니다.

말과 문자가 만들어 지기 이전에 상태입니다.

그래서 부모미생전과 같은 상태가 됩니다

거기에는 어떤 것도 분별이 있을 수 없는 상태

보는자와 작용성이 하나가 되는 일체성입니다.

법성원융 무이상(의상조사의 화엄경 약찬계) 이라는 말입니다.

느낌으로 안다는 말도 느낌이 생각이니 맞지 않습니다.


즉 오직 보고(조견) 빛에 의해서 형상으로 나타난 존재 ..... 실지실견(悉知悉見)

부모 미생전 본래 모습입니다.

반야의 지헤인 空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 찰나에 나타나는 작용성이 아미타 여래불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무념무상 절일체가 되어야 증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하착(放下着)이니 마음을 비워라니

화두 챙김에서 말과 생각 이전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면 지금 부터는  그 작용성인 부처의 실상을 직접 느껴보고 깨달아 봐야 합니다.

내가 문수보살 관음 보현행의 보살이 되어 봐야 합니다.

......................................................................


'실지실견' 보고아는 자가 여래라 했는데 

여러분이 손을 들어 보십시요.

손을 들어 보이는 이것이 무엇입니까?

'부처입니다.'


ㅎㅎ 네, 부처를 바로 나타내지 않고

눈과 귀로 보고 듣고 설명은 잘 하십니다

........


'부처'라고 말하는 자는 허깨비 부처에 속아 살고

'내가 한다'고 말 하는자는 아직도 송장 씨나락 까먹는 소식이요.

말 없이 손을 들어 한 소식 하는자가 있다면

그대가 곧 여래 이며 부처이니라.....


오늘은 동짓달 초하루

부처가 부처를 보고 부처에게 부처라 하네!


오늘 법설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