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생각(마음)의 그릇이요, 생각은 자신도 모르게 언어로 표현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몸짓(행동)과 눈빛 등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이 보여지게 됩니다.
또 말을 하면 그의 생각이 묻어나기에 역시 그가 생각하는 것들을 간파할수가 있습니다.
고로 상대의 뜻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상대에게 편하게 다가가야 합니다. 평소에 명예가
높다는 선입견에 주눅이 들어 있다면 상대는 올바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법을 말하면 귀는 멀어지고 사람을 추종하는 삿된스승이 되는 단초가 되기때문에 명예의
옷을 벗고 저자거리로 나서야 한다는 겁니다. 누가 알아봐주길 바라는 마음이 전혀 없어야
합니다. 중생심은 드러내고 싶어합니다. '고향에 가지말라'는 마조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한치라도 높으면 상대의 정수리가 보이지 않는 법
누가 나를 알아본다면, 알아보는 사람의 눈이 더 밝은 것입니다.
道人도 옷을 타는가요? 하고
비웃을 때는 비웃는 마음속에 잘못 입력된 정보가 있습니다. 깨치면 뭔가 달라질 것이다.
신통술로 옷도 안탈 것이다 등, 가끔 도인이라 칭하면서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 하며
대단한 신통을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전처럼 정보가 전달되지 않던 시대에나 통했던
짓입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tv가 이러한 환상을 깨트리고 있습니다. 오감이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으면 장애인 입니다. 주눅이 들면 노예가 되고, 말려들면 최면에 걸립니다.
어느때 남전 귀종 삼산이 길을 가다가 호랑이를 만납니다. 가슴을 졸이며 무사히 지나친후
남전이 귀종에게 묻기를 '방금전에 호랑이를 만났었는데, 그 모양이 어떠하던가" 귀종이 말
하길 고양이 같았소. 삼산에게 물으니 "개를 닮았소" 남전에게 되물으니 '호랑이 같이 생겼소'
인간의 오감은 긴장하거나 놀라거나 두렵거나 주눅이 들면 정상작동을 못합니다. 교통사고때
다친 것도 모르고, 전장터에서 총맞은 것도 모르는 이치와 같아서 진실로 두려움 없는 마음이
되어야 생사를 올바로 인식하고 갈수가 있는데 작은 비웃음도 이유를 모르고, 참지를 못하고,
화부터 낸다면 그의 마음에 걸려있는 잘못된 인식을 제거해 줄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