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등 草觀(마음이 머무는 곳)

사마타와 비파사나

통융 2017. 12. 3. 17:18

五停心觀 (마음을 어지럽히는 다섯 가지 번뇌를 멈추기 위한 관법)
1. 부정관 : 탐욕을 버리기 위해 육신의 더러움을 주시함.
2. 자비관 : 노여움을 가라앉히기 위해 모든 중생에게 자비심을 일으킴.
3. 인연관 : 어리석음을 없애기 위해 모든 현상은 인연으로 생긴다는 이치를 주시.
4. 계분별관 : 나에 불변하는 실체가 있다는 그릇된 견해를 버리기 위해 오온 십팔계

                    등을 주시하는 관법

5. 수식관 :  산란한 마음을 집중시키기 위해 들숨과 날숨을 헤아리는 수행법

 

이상은 불교사전등에 수록된 내용으로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습니다. 만일 여기서 부정

관이 사마타에 해당하고 나머지 네가지는 비파사나에 해당한다고 착각하면 안됩니다.

사마타는 이론으로 말할수 없는 멈춤자체를 뜻하기에 관에 관한 내용만 설 한 것입니다. 

지(止)는 생각을 그치고 마음의 동요를 진정시키며 본원적인 진리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

하며, 觀(비바사나毘婆舍那)은 움직이지 않는 마음이 지혜의 작용이 되어 사물을 진리에

합치시켜 올바르게 관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초기경에 의하면 삼매와 마음챙김의

결합을 말하며, 止를 모르는 비파사나는 단순한 습관적 행위일뿐 진정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 따라서 사마타와 비바사나는 선후의 문제로, 먼저 사마타로 자아몰입에

들어간 후 지혜를 끌어내어 대상을 보는 비바사나 수행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집중과 관찰은 동전의 양면과 같으며 팔정도의 마지막 正定(올바른 집중)에 해당

합니다.이러한 이치로 보아 정정은 '올바른 집중' 이라고 하면 집중에 대한 오해의 소지가

있기에 '올바른 선정' 이 본뜻에 가까우며 따라서 止(사마타)와 觀(비바사나)는 定과 慧에

해당하기에 둘로 분리되거나 나눌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止觀不二,  定慧不二

 

사마타는 능히 없앤다[能滅] 이름하나니 온갖 번뇌를 없애는 연고며, 사마타는 능히

조복한다 이름하나니 모든 根의 악하고 선하지 못한 것을 조복하는 연고며, 또 사마타

는 고요하다 이름하나니 三業을 고요하게 하는 연고며, 또 사마타는 멀리 여읜다 이름

하나니 중생으로 하여금 五欲樂을 멀리 여의게 하는 연고며, 또 사마타는 능히 맑힌다

이름하나니 탐욕·성내는 일 어리석음의 흐린 법을 맑히는 연고니라. 이런 뜻으로 선정

의 모양[定相]이라 이름하느니라.

 

비바사나(毘婆舍那)는 바르게 본다[正見] 이름하며, 또 분명히 본다[了見] 이름하며,

또 능히 본다[能見]이름하며, 두루본다[遍見]·차례로 본다[次第見]·딴 모양으로 본다

[別相見]이름 하나니, 이것을 지혜라 하느니라. 가섭아, 나는 온갖 하늘과 사람들에게

항상 사마타와 비바사나를 닦아 자기 자신을 조복하라. 세간에는 당연히 믿고 좋아하

는 바라문과 거사들이 있어 사리에 공양하게 될 것이다' 라는 이런 법을 말하였느니라.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의 생각을 아시고, 그들을 타이르셨다.

[주 : 따라서 사마타 없는 정견이란 존재 할수 없듯이 사마타 없는 비파사나는 단순한

습관적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누구나 사마타(奢摩他)와 비바사나(毘婆舍那)를 닦으면 반드시 번뇌를 다할 수 있고,

만약에 그것을 닦지 않는 자라면 번뇌를 다할 수 없으며, 또 이미 그것을 보았거나 알

았다면 비록 비천한 종성에 태어났더라도 아라한의 과위를 얻을 수 있느니라. 이제 바

다라와 같은 자는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했으므로 비록 수승한 종족에 태어났더라도

아라한을 얻지 못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래는 평등하게 법을 설하여 치우침이 없느니라.

"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는 까닭에 도의 선교[道善巧]를

닦나니, 도의 선교에는 또 두 가지가 있느니라.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하면, 사마타와

비발사나(毘鉢舍那)이니, 이것을 두 가지라 하느니라. 보살이 한 가지 법을 성취하면

모든 악한 길과 악한 벗을 떠나 빨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게 되느니라. 어떤

것이 그 한 가지인가 하면 이른바 훌륭한 뜻과 좋아함으로 보리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

이니, 이것을 하나라 하느니라. 미륵아, 다시 두 가지 법이 있어서 모든 악한 길과 악한

벗을 떠나 빨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게 되느니라. 어떤 것이 두 가지 법인가

하면 첫째는 사마타를 항상 부지런히 닦아 익히는 것이요, 둘째는 비발사나에서 교묘

함을 얻는 것이니, 이것을 두 가지라 하느니라.  [주 : 달마의 이입사행과 같은 내용]

 

청정한 시라에 머무는 것에 의지하여 허물없는 지(止)와 관(觀)을 닦아

세밀하게 근(根)과 뜻[意]을 보호하면 감로(甘露)의 열반 법을 증득할 것이다.

(주 : 根이란 육근의 멈춤이요, 뜻이란 의도된 생각등에 해당합니다)

 

지법(止法)(사마타)을 닦으면 마음이 조복되고, 마음이 조복되면 탐욕을 여의나니

탐욕을 여읜 이는 해탈을 증득하며, 해탈을 얻은 이는 마음이 평등하리.

관법(觀法)을 닦으면 지혜가 밝아지며, 지혜가 맑으면 어리석음 멸하리.

어리석음 멸하면 해탈을 증득하고, 해탈을 증득하면 마음이 평등하리.

그러므로 너희 비구들아, 정진하여서 방일하지 말고

언제나 시라에 머무는 것에 의지해 허물없는 지와 관을 닦아 익히라.

 

적멸이란 것은 일심(一心)인 것이요, 일심은 곧 여래장(如來藏)이니,

이는 자기 속 몸 지혜의 경지에 드는 것이며 무생법인(無生法忍) 삼매를 얻는 것이니라.

 

모든 경전은 팔정도를 가르친 내용이며 팔정도를 줄이면 삼학이 됩니다. 결국 정견으로

시작되는 팔정도는 초심자를 가르친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알수가 있으며 따라서 비파

사나의 오정심관 역시 사마타를 득한 성문이 정진해야 할 수행의 방향입니다. 따라서

경에는 멈춤(사마타)을 체득한 수행자를 가르켜 아라한 이라고 한 듯 합니다.


사마타 없는 위빠사나란 습행이고, 반대로 위빠사나 없는 사마타는 單空의 지혜입니다.

사마타는 삼매를 말하고, 三昧란 깨어있는 고요를 말하며, 禪定에 해당합니다.

위빠사나는 한마디로 통찰이고, 마음챙김입니다. 고로 삼매와 마음챙김이 결합될때를

선나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사마타던 위빠사나던 습행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사마타는 頓法의 定이고, 위빠사나는 定으로 대상을 살피는 智慧로 세존당시나 현재나

마음을 멈추지 못하면 위빠사나가 아닙니다. 선재동자(선남자 선여인)가 선지식을 찾아

가는 것이 四行이고 위빠사나가 되며 보원행 수연행 무소구행 칭법행은 합일되기 전이나

합일 후에나 변함없는 행으로 붓다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보살행(隨緣行)의 연속입니다.

오비구로부터 수보리는 물론 주리반특, 앙굴마라등 아라한들이 사마타를 체득했습니다.

 

원각경에 의하면 사마타와 삼마발제관이 합일되어 원각의 선나를 이룬다 했고

심경에 의하면 반야바라밀에 의지하여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했습니다.


반야란 지혜(마음)를 말하고, 빈 空, 또는 無心의 智慧 라고 할수 있겠지요, 고로

依반야바라밀이란 '지혜(空)에 의지하여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를 얻었다 입니다.

따라서 반야바라밀의 완성이란 삼매와 통찰의 결합을 말합니다 



사마타가 頓法인 중거

사마타를 득하면 섭법제일 부르나존자처럼 돈법(唯傳頓法)을 說하고 傳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통찰이 안되기 때문에 전법을 떠날때 세존께서 당부하십니다. 이교도가 욕을 하면

때리지 않음을 고맙게 생각하라, 때리면 죽이지 않는 것을... 죽이면 그의 손으로 열반에

드는 것을 감사히 생각하라. 이런 이치를 몰라서 전법제자 부르나에게 설명 하셨겠습니까.

자비설법으로 상기시켜주기 위함이지요. 부디치지 말아라  受用身이 되라(받아 들여라)


그들이 중도를 발견하지 못해서 수용신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끝없이 중도를 설하십니다.

理를 깨쳤다고 事가 되는가? 보조국사는 물론 경허스님도 안되는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와같이 춘다의 공양으로 열반에 드실때 똑같은 논리로 제자들을 가르칩니다.

'춘다에게 죄가 없다' 붓다의 受用身을 마지막으로 보여주고 가시는 겁니다.

 

受用身(노사나불)은 지혜와 자비가 구족될때 비로서 나타나고 보여지는 것입니다.

비웃고 욕하고 때리고 죽이려는 자를 보고, 자비가 없다면 어떻게 수용할수 있겠으며

반대로 지혜없는 수용이란 때려도 꼬리치는 길들여진 개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

 

화두타파로 통찰이 된다면 거짓말 입니다. 작금에 화두타파 하신 분들 많을겁니다.

몇분 보았지만 되십니까?. 저역시 안됐었습니다. 마음이 고요해서 無心은 말했으나

부디치면 동요가 일어났습니다. 만일 산속에 홀로 있었다면 계속 편안했었겠지만...

옷벗고 거리로 나와 세파에 부디쳐 봐야 자신의 움직이는 마음을 바로볼수 있습니다.

가녀린 여인의 의심도 풀어주기 전에 화부터 일어납니다. 화는 지혜를 가로막습니다.

'무진등 草觀(마음이 머무는 곳)' 카테고리의 다른 글

때와 緣  (0) 2017.12.03
몸은 마음의 그릇  (0) 2017.12.03
정사유  (0) 2017.12.03
견문각지와 자각  (0) 2017.12.03
참선으로 깨달은자의 상태  (0) 2017.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