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등 草觀(마음이 머무는 곳)

정사유

통융 2017. 12. 3. 17:05

깨달음의 순차를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화두타파란, 은산칠벽의 칠통에서 소리에 부디치는 순간! '앗~!' 하고 살아나오는 것

그리고 모릅니다. 고로 답하길 "나도 모르고 일천성인도 모른다" 도둑이 빈방에 든 것

같다. 모르는 놈을 깨쳤다. '不識(모른다)'입니다.  부처도 조사도 없는 적멸 空으로

無心을 깨쳤다, 이것이 理入의 사마타로 寂觀입니다. 마음은 밝아졌지만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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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의 발견은 은산철벽에서 살아 나온 마음(定)이 아니고 지극히 정상적인 마음

(平常心), 편안한 마음, 순일한 마음, 텅빈 마음, 분별없는 마음으로 대상의 흐름을

사유하는 것으로 죽은 놈이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산 놈이 산 놈을 발견하는 것]



理로 事(中道)를 발견하는것, 순일한 마음으로  사유하여 진공묘유를 발견하는 것,

理와 事, 두가지를 모르고 12연기를 말하면 지해풀이입니다. 12연기는 色의 흐름과

受想行識의 흐름을 병행하여 나열했기에 理(空)卽 事(色)를 모르면 不思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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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思惟는 滅定이 아니고, 순일한 마음으로 보고 듣는 대상을 사유하라 입니다.

신수심법의 위빠사나는 하나의 정형화시킨 방편일뿐입니다.  法을 사유하는 것,

法을 사유하면 법문이 됩니다. 이미 정해진 글자나 경전이 아니고 일상에서 부디치는

현상에 대한 통찰이 法의 思惟입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사유하며 받아들이는 受用心

 

싯달타의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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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달타는 의식도 비의식도 아닌 무색계에 이르렀다. 다시 정진을 거듭한 결과 마침내

모든 감각과 인식이 완전히 사라진 수상멸처에 들어갔다. 그것은 완전한 소멸의 경지로

니로다(niroda,멸정)의 경지였다. 그것은 옛 스승 알랄라와 웃다까의 경지를 넘어선 것

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삶과 죽음으로 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자리는 아니였다. 다시

명상에서 깨어나보니 조국과 부모 자식들이 떠오르고 모든 욕망들이 또다시 살아났다.

그것들은 실로 끊임없이 물고 늘어지는 마구니의 화신들이였다. 싯달타는 다시 집중하여

전과 같은 수상멸처로 들어가지 않고 대신 순일하고 유연해진 마음가짐으로 자기 자신을

통찰하기 시작했다. [주: 보십시요 身受心法(위빠사나)을 어느 경지에서 하는 것인가 를]

 

몸은 부모로 부터 만들어져 음식으로 지속되는 사대의 조합이며 이러한 육체란 끊임 없이

변하는 가운데 손상되고 마모되고 부서지고 있음을 보았다. 이러한 육신과 맞물려 일어났다

사라지고 또다시 일어나 흐르는 의식을 꿰뚫어 보았다.

 

육체와 마음이 어떻게 서로 의존하며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았다. 이러한 통찰에 의하여

육체와 정신의 화합체로 인간은 마음이라는 지혜를 갖게된 것이다. 이러한 지혜로 하나의

인간이 이세상에 태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十二緣起입니다]

[세번만 보시면 싯달타께서 무엇을 깨치쳤는지 확실히 이해가 될겁니다. 중도실상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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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중생들의 윤회하는 모습을 보았다. 때로는 비참하게, 혹은 고상하게, 아름답게,

추하게 또는 행복하게 불행하게 사라지고 또다른 생을 이어간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 자기

행위의 영향을 물려받고 반복하는지, 즉 업(행위)에 의한 결과(보)의 인과관계를 꿰뜷어

보았다. 이러한 원인이 貪(탐욕) 嗔(증오) 痴(어리석음)가 모든 고통의 근본 원인이라는

것을 깨닳고 모든 번뇌로 부터 해방되어 해탈했을 뿐 만 아니고 자신이 해탈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드디어 무명과 집착과 모든 미혹으로 부터 벗어나 열반을 성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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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지향성을 보고 그 생각에 알맞는 모습으로 진행하는 것을 발견할수 있습니다.

연화지가 말하길 "참으로 이상합니다. 가끔 만나는 사람인데 절름바리로 보여질때가

있습니다" 정진화가 말하길 "평소 젊잖게 생각했던 분인데 쥐의 형상으로 비쳐집니다."

사람들은 현재의 고집체인 걷 모습만 봅니다. 생각의 지향성을 보지 못합니다.

 

찾아왔던 사람에게 "어찌 당신에게서 이러한 모습이 비쳐지는가?, 정신차리시오!"

몸에서 마음이 나오고, 마음에서 생각이 나오고, 생각은 말로 나타납니다.

말이 바르지 않으면 생각이 바르지 않고, 생각이 바르지 않으면 마음이 바르지 않고,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그에 합당한 모습으로 다음 생을 이어갑니다.

가깝게는 흉을 자주보면 입이 삐뚤어지고, 눈꼬리는 삐뚤어 지듯이...

 

 

다시 말하지만, 죽은 놈을 아주 죽여 다시 살려 내는 것을 보는 놈은 理가 아닙니다.

따라서 '살아나는 것을 보는 놈은 佛性으로 살아있는 體입니다. 이것이 중도입니다.



.....草觀님의 블로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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