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등 草觀(마음이 머무는 곳)

때와 緣

통융 2017. 12. 3. 18:06

때란 지금이다.

때란 있을 수 없다.

단지 인식할 뿐이다.

조건(因=緣)이 일어나는 것을 때(緣=紀)라 한다.

때란 空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

다만 공한 본성을 잃어버리면 자신의 心意識이로 때를 판단한다.

다른말로 하면 조건의 합당하지 않으면 때를 탓하게 된다는 말이다.

옳다느니 잘못되었다느니 지금이 때가 아니다느니 지났다느니 오지 않았다느니 정확한 때라느니 온갖 분별심으로 대를 기준한다.

본래의 때는 늘 그 때일 뿐인데 말이다.


그런데 그 때(空)가 조건(色)과 조화롭지 못하면 후유증이 발생한다.

건널목 교통신호가 빨간불인데도 건너간다면 때를 잘 못 행하는 것이다.

교통신호기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배가 부른데도 밥을 계속 먹는 미련한 사람은 없다. 스스로 조건과 때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과 때가 나와 남일 때가 중요하다.

고요하게 명상을 하는곳에서  시끄럽게 노래를 부르는 자가 있다면 그는 때를 잘못 행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왜 당신은 여기서 떠느드냐고 하면 '나는 나는 내 가 하고 싶은 데로 한다'는 식으로 때를 쓴다면.....

한 대 쥐어박아야 한다. 왜 때리느냐고 대들면 '나도 내 가 하고 싶은 데로 하는데 왜 당신이 참견이냐'고....

이러한 것이 때만 중요시 하지 조건과 과를 무시한 처사다.


현상계는 모르고 이치만 알았다는 말이다. 이것이 理(空)과 事(色), 體와 用의 관계다.

즉 체의 진리인 공에만 집착하는 것으로 나타내 보이는 실상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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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온 사람에게 "미리 연락을 하고 오셔야지요" 했더니  "卽心卽行한다" 하기에

"참으로 고생이 많소, 그럼 시간이 날때까지 기다리던지 아니면 다음에 오십시요"

대꾸없이 내일만 했습니다. 그대 마음과 내 마음이 다름은 어찌 알지 못하는가?

같은 것과 다른 것을 알지못하니 나는 무시이래 그대와 한번도 같아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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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하는 卽心卽行이란 마음의 空한 理致만 깨치고 事를 전혀 모르는 행입니다.

 

몇분 만나보니 때가 없는 것은 잘 알면서, 때가 있는 것은 전혀 모르더군요. 이래서

현상계는 모르고 이치만 알았다는 겁니다. 이것이 理(空)과 事(色)의 관계입니다.

노파가 덕산에게 '어느 곳에 점을 찍으렵니까?' 理를 깨치면 때없는 理致는 알아서

굶지는 않겠지만 때는 현실세계 實로서 事와 같으니 "점 찍는 곳을 말해 보십시요?"

 

혹여, "찍을 곳 없는 곳에 찍는다" 하면 귀신의 지혜와 같아서 무간지옥행이 됩니다.

어느분에게 一歸何處를 물으니 답하길 "돌아갈 곳 없는 곳으로 돌아간다"  역부여시

주장자가 법상에 부디치는 찰라가 때입니다. 때란 인연의 부디침으로 조건의 성취

'육긍!  "네"  '보았는가?' 남전이 육긍에게 병속의 거위를 꺼내 보이는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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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는 비단같이 풀면서 '때를 모른다 때가 없다' 하기에 理만 깨쳤다고 하는겁니다.

때를 모르기에 법문을 미리 준비한다고 합니다. 때란 만나는 순간 보고 아는 겁니다.

 

또 "망상 그대로가 보리입니까?" 물으니 "망상자체가 없는 것이다" 고 답했습니다.

색즉공을 모르는 소치 입니다. 망상자체는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망상이 없으면

죽은 송장과 같은데 죽은 송장이 망상이 있고(有) 없음(無)을 어떻게 안다는 말인가? 

이것은 理(사마타)를 깨친 수상멸처에서 '아무 것도 없다' 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망상이 있기에 그것을 인식하는 육신 존재하는 것입니다. 體를 모르는 소치 입니다.

일념즉 무량겁,  때를 모르기에 납자가 찾아와도 무량겁 전에 준비한 법문을 하니

무량겁 전에 죽어버린 문자를 줄수 밖에 없지요. 이 가페에 어느 스님이 올린글에

잘 나타납니다. 이런 말로 어떻게 이끌고 이끌려 질까요..

 

찾아온 사람에게 " 당신 혼자 아는 소리 하지 말고 그런 지혜로 몇이나 이끌었는가?"

문자풀이는 잘하면서 정작 사람을 만나면 보여줘도 모르고 들려줘도 모르니...

 

마조가 개왓장 가는 스승에게 묻기를 "왜 개와를 가십니까?"

스승 "거울만들려고"  마조 "개와가 거울됩니까?" 스승 "앉아있다고 부처가 되겠는가?"

의정처에 든 것을 알고 분별하는 생각(의심)을 말로 끊어주는 찰라 입니다. 

 

찾아와 묻기를 "어떻게 하는 것이 觀(염불)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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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는 것이, 즉 觀(염불)이 뭔가요?  묻기에 정작 질문한 염불에 관한을 말은

하지 않고 엉뚱한 대답을 해줬습니다.  이때 염불을 설명해주면 교학이 됩니다.

되묻길 "그 생각 하기 전에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머뭇 머뭇하더니 "모르겠습니다"

'그때 잠을 잤었는가?'   '아니요'  그러면 죽었었는가?"   '아니요'

"잠도 안자고 죽지도 않았다면서 왜모른다는 말인가? 바보 아니요!?"

"빨리 대답해보시요!"  서너번 다구쳐도 대답을 못하니 참으로 답답하겠지요.

빠르면 言下요, 진실로 답답하다면 이틀이 안걸립니다.

 

그가 진실로 답답해 하는가" 를 보고 만일 건성이라면 그 방편은 소용이 없습니다.

다음날 때를 보고 다른 방편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고로 때란 시절인연과 같습니다.

 

궁굼한 것은 그게 아닌데 전혀 다른 질문을 던져, 그런 생각이 일어나기 전

모르는 곳(不識處)을 집어 주는 것입니다.  이틀이 못되 깨치고 찾아왔습니다.

 

의정이 소리에 부디쳐 몰록 깨치는 순간과 그 후에 경험들을 이곳에 올려놨듯이

體가 확실해지는 법문이 一乘을 가르키는 법문입니다.

          = 범소유상개시허망, 若見(같은 것을 보라) 諸相非相(色 卽 空) =

 

중생심은 잘못을 지적하면 화를 냅니다. 도리어 핑게를대고 합리화 시키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언제 지적해야 하는가 때를 모르는 지혜(지적)는 도리어 화를 일으켜 주고

종국에는 둘다 함께 지옥으로 끌려가는 결과를 만듭니다,

 

따라서 보고 듣고 순간 합당한 가르침으로 이끌기 때문에 법문이란 미리 준비 할수가

없습니다. 때가 아니면 법문을 해도 안되고, 할수도 없습니다. 상중 근기를 말하는데

근기는 없습니다. 근기를 탓하면 중생을 탓하는 것이요, 오로지 因緣의 때 뿐 입니다. 

 

때란 간극없이 흘러가기 때문에.. 어느분이 말하길  "왜 글을 안쓰십니까?"  하기에  

"緣有가 없었습니다."  대답하고 즉시 緣有가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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