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業) (karma) = 행위와 결과를 동시에 뜻하는 단어로 인과응보의 의미가 있기에
단순하게 행위로만 보면 안됩니다. 따라서 업보라고 합니다.
식(識) (Vijnana)이란 물론 경험에 의하여 생겨난 것을 뜻하긴 하지만 그러한 경험이
고정관념으로 고착하기 때문에 현재 존재하지도 않는 과거의 기억(경험)
들에 얽메여 괴로워 하기에 괴로움의 실체를 밝히는 과정에서
食이 발생하는 원인과 과정 그리고 결과를 알게 되옸고 그래서
불교에서 한문으로 번역한 識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식을 우리는 마음이라는 글자로 통일하여 사용해 왔지만
요즘은 내면의식 또는 잠재의식 무의식등 여러가지로 분류합니다.
본래 원어(Vijnana)에서 뜻하는 식이란 나누어(vi-)와 안다(j~na)의미로
구분해서 안다, 분별(分別)해서 안다. 분석적으로 아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식이란 인식의 주체인 根과 대상인 境이 결합하여 識이 성립하여
인식이 만들어 진다고 할때 인식의 주체는 자신이기에 주관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주관에 의해 성립된 식은 자아식으로 고뇌와 번뇌를 일으키고 이것이
전도되는 과정을 말라식 아뢰야식 또는 심, 의, 식으로 구분하는데
이러한 識이 각각으로 존재한다면 누구던지 이해하고 알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식은 각각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식이란 천태에서 말하는 一心三觀이 아니면 전혀 이해 할수 없는 것이니
업과 식을 알려면 깨쳐야 합니다.
一心三觀 : 한마음으로 세가지를 관찰한다
1) 고요한 마음으로, 2)대상을 볼때, 3) 고요함을 아는 마음 (세존께서는 열반을 자각한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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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귀, 코등 六根은 부처나 중생이나 항상 고요합니다.
중생은 대상에 휘둘려서 (물들기 때문에) 고요한 마음을 잃어버리지만
부처는 대상에 휘둘리지 않아서(물들지 않아서) 항상 마음이 고요합니다.
고로 응무소주 이생기심 또는 불수오염이라 하고
일심삼관이란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선정이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결국 業과 識이란
신구의 (몸뚱이)로 길들여진 행위(습관)를 업이라 할때
이것을 기억의 저장고에 입력해 놓은 것은 식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식에 의하여 몸이 움직이고, 몸에 의하여 식이 저장 되기에
업과 식이 글자는 다르나 한몸과 같기에 업식이라고 묶어서 부릅니다 .... 무진등 草觀의 블로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