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등 草觀(마음이 머무는 곳)

열반에 대한 이해

통융 2017. 12. 4. 21:49

: 열반은 빠알리어 닙바나(nibbaana) 혹은 산스끄리뜨 니르와나(nirvaana)의 음역입니다. 먼저 문자적인 뜻을 살펴보겠습니다. 니르와나는 nir(없어진)+√vaa(불다, to blow)의 과거분사로 ‘불어서 없어진’, ‘불어서 꺼진’이란 뜻인데 이것이 명사화한 것 입니다. 예를 들면, 바람이 불어서 촛불이 꺼진 상태를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면 무엇이 불어서 꺼진 것이 열반일까요. 여러 경에서 부처님은 ‘갈애가 소멸한 (tan*haakhaya)’이라고 한결같이 말씀하십니다. 한편, 〈상응부〉에서 사리뿟따(사리불) 존자는 “도반들이여, 탐욕의 소멸, 성냄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이 바로 열반입니다”(S38:1)라 정의하고 있는데 이것은 열반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반은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와 존재(깊은 선정체험의 경지)에 대한 갈애[有愛]와 존재하지 않으려는 갈애[無有愛]로 설명되는 모든 종류의 갈애가 다 사라진 경지이며, 탐욕[貪]과 성냄[嗔]과 어리석음[癡]으로 표현되는 모든 해로운 심리현상[不善法]들이 모두 다 불어서 꺼진 상태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이러한 해로운 심리현상들을 불어서 끌까요. 바로 팔정도라고 부처님께서는 고구정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열반은 팔정도의 실천을 통해서 구현하게 되는 궁극의 경지입니다.


열반은 죽고 나서나 실현되는 경지가 결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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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과 죽음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열반은 팔정도를 통해서 지금 여기[現今]에서 실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에서는 ‘열반의 실현’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실현으로 옮긴 '삿치끼리야'는 문자적으로는 ‘눈앞에 만듦’ 즉 ‘눈앞에 드러냄’이라는 뜻으로

[열반은 지금 여기에서 내 눈앞에 드러내고 현전하게 하고' 실현하고 구현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열반을 ‘꺼진 상태’라는 수동적인 의미로만 설명을 하면 자칫 허무주의적이고 염세적으로만 생각하게 되는 병폐가 생깁니다. 그래서 초기경에서는 탐진치가 해소된 열반은 허무적멸한 경지가 아니라 죽지 않음(不死. amata. 감로)이요, 평화(santi)요, 병 없음(aroga)이요, 지복(至福. parama-sukha. 최상의 행복)이라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더 적극적으로 열반이 허무의 경지가 아니라고 해명하는데, 열반은 영원하고[常] 행복이고[樂] 궁극적 실재이고[我] 깨끗한 것[淨]이라고 〈열반경〉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열반을 죽음과 연결지어 사용하게 된 것은 일찍부터 부처님이나 아라한이나 깨달은 분들의 죽음을 빠리닙바나(parinibbaana)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중국에서 반열반(槃涅槃)으로 음역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조사스님들이나 큰스님들의 입적을 반열반이라 표현하게 되었고,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반열반이라는 말 대신에 연로하신 스님들의 임종을 아무 생각 없이 열반에 들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열반은 절대로 죽음과 연결시키면 안 됩니다. 노스님들의 임종을 세속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부르고 싶지 않으면 차라리 ‘입적’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물론 입적(入寂)이라는 표현도 적멸의 경지 즉 열반에 들었다는 의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열반이라는 불교 최고 목표가 죽음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우연히 영남불교대학 우학스님의 글을 발견하고 옮겼습니다.

거의 정확한 이론입니다.

얼마전에도 말했듯이 열반이란 살아있는 여래가 자각하는 상태를 말하는데 이런 상태를 상낙아정이라 하고

常은 無常의 반대요, 樂은 妙心을 말하고, 我는 無我의 반대로 열반을 인식하는 주체(眞我)를 말하고 淨은

탐욕이 사라진 無欲(離欲)을 말함이나 이와 같이 세분하여 구분하기는 곤란하지만 설명하자니 그렇다는 것

일상적으로 '열반락' 또는 '열반을 아는 마음' 이라고 하면 틀림이 없습니다.


이와같이 열반은 죽음 이후의 문제가 아니고 살아있는 지금 현실에서 구현하는 것인데도 결국에는

인식하는 주체도 종국에는 죽음을 맞게 됩니다. 고로 어쩔수 없이 열반을 구분하여 반열반 또는 무여열반

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무여열반은 소승의 경지라는둥 참으로 한심한 말들을 합니다.


열반의 실체가 묘색신의 여래를 말하고, 현재 (불수자성수연성) 인연따라 이루워지고 있는 실상을 말하며,

다른 말로 인연따라 나타나는 과보신, 또는 응신불을 말합니다. 경에는 노사나불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래도 살아있는 동안은 지속적으로 보신불의 실체인 여래로서의 몸을 받을수 밖에 없습니다.


고로 살아서 자각하는 열반을 죽음으로 구체화 시키는 것이 반열반이고 무여열반입니다.

"다시는 받을 것이 없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해체된 상태를 반열반이라고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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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게 말해서

色(몸)을 따라 나타난 수상행식(마음의 흐름)은 역부여시지만,

살아있는 동안은 행심반야바리밀에 의하여 열반을 자각하고

육신이 해체될때 열반을 자각하던 마음도 함께 해체된다.

마음이란 나의 두발이 머문 곳을 떠나지 않는다.


이것을 삼심불가득에 비유하여

점심을 먹으려는 덕산에게 "어느 마음에 점을 찍으려 하는가?" 묻는 것이요

배고픈 것의 실체는 마음이 아니고 육신이니 나는 "배고픈 곳에 점을 찍겠다"

하고 떡을 먹는 이치와 같은 것으로 조사들이 문자반야로 實을 드러내는데 이러한 문자반야는

초선의 작은 지혜로도 조작이 가능하기에 검증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열반에 대하여 가장 세밀하고 실체적으로 감각적인 표현은

금강경에 나오는 "희유세존 여래 선호념제보살 선부촉제보살"로 이것이 涅槃自覺 상태입니다.


왜 如來의 入滅을 반열반이라 했는가?

밥상위로 되돌려 놓은 상태를 뜻하는 글자로 지수화풍으로 풀어 헤져진 상태를 말합니다.

"나는 다시는 어떠한 색신으로 오지 않는다" 가 여래의 마지막 상수멸 입니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 상수멸과 열반을 설명합니다.

열반자각은 진공묘유를 자각하는 것으로 '비상비비상'의 상태를 자각하는 것입니다.

자칮 산자가 상수멸을 행한다면 그것은 착각선으로 초기경에서 말하는 수상멸처에

해당합니다. 아무리 깊게 들어가도 아무 것도 없는 상태를 말하기에 진공묘유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즉 진공묘유를 자각하는 실체는 노사나불입니다. 따라서 무열열반이란 '수연성'이 끝난상태를

뜻하기에 적멸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열반적정에서 열반이 곧 적정이라는 뜻으로 함께 사용하는

이유 역시 노사나불이 위로는 적멸을 자각하고 아래로는 삼계를 비춰보기 때문에 자각과 비춰

보는 것이 동시에 이루워지고 있다는 뜻이요 심경에 의하면 행심반야바라밀때 묘색신을 보게

된다는 뜻으로, 이와같이 '적정(행심반야)과 보는 것(照見)'이 동시에 행해여 진다는 것을 안다면


진실로 번뇌가 끊어진 적정(행심반야)에 들었다면 照見에 대한 명쾌한 말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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