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융의 이야기

참 된 포교란 우리 마음에 자비를 일깨우는 것

통융 2017. 8. 13. 19:29

참 된 포교란 우리 마음에 자비를 일깨우는 것

 

 

 

 

우리의 마음에 잠자고 있는 사랑과 자비를 깨워내는 것이 참된 포교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진리이며 깨달음은 스스로 내면 안에 있는 진실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 진실은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나와 우리가 동등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연기의 진리와 중도의 해법으로 만들어 졌음을 자각하는 것이 포교입니다.

만법의 참 진리는 자비공덕임을 알고 실천하는 것이 포교입니다.

 

내 안에는 늘 대자대비의 부처님이 상주한다는 생각으로 여여함이 포교입니다.

그 부처님같이 온 중생을 어여삐 여기고 사랑과 온유로 보살피고 어버이 같은 자애함으로 나투는 것이 포교입니다.

 

온갖 유혹에서도 당당히 맞서는 용기와 대자유심을 일으키는 것이 포교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포교를 위해서는 온갖 유혹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진심이 포교입니다.

내 안에는 부정과 불만의 마구니를

나는 할 수 없다는 비관의 마구니를

세상은 늘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비굴한 마구니를 교화하고 다스려

 

늘 긍정과 대신심의 씨앗을 심고 가꾸며 자비 행을 나눔하게하는 것이 최상의 포교입니다.

일반적이지만 올바른 포교는 이와 같습니다.

 

부천님이 전도 선언이 그러합니다.

이제 떠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두 사람이 한 길로 가지 말라. 처음이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도리에 맞고 언설이 정돈된 가르침을 펴라.'.

나는 하늘나라의 올가미와 인간세계의 올가미, 그 모든 올가미에서 벗어났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도 하늘나라의 올가미와 인간세계의 올가미, 그 모든 올가미에서 벗어났다.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안락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하늘사람과 인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둘이서 같은 길로 가지 마라.

수행승들이여,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하라.

지극히 원만하고 오로지 청정한 거룩한 삶을 실현하라.

 

본래부터 눈에 티끌이 거의 없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가르침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쇠퇴하고 있다.

그들이 가르침을 들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相應部經典] 5:5 係蹄(2). 漢譯同本, [雜阿含經] 39:16 繩索) (상응부경전) (계제) (한역동본) (잡아함경) (승삭)

 

포교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법씀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즉 방편으로 법을 스스로 알아차리게 하는 수단입니다.

 

아무리 말로 끌로 설명을 해도 그 참 뜻은 본인이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참 법을 전달 할 수는 없습니다.

 

사과의 맛을 아무리 설명을 완벽하게 한다해도 어디 까지나 설명입니다.

그 설명을 듣고 사과의 맛을 백프로 알 수 없습니다.

 

내가 먹어본 사과의 맛을 아무리 설명을 잘 해도 말입니다.

상대는 설명을 듣고는 그 사과의 맛을 자신이 알고 있는 식견이나 경험을 통해서 유추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먹어본 사과는 시고 달고 아삭하고 등 자신이 경험한 이해를 가지고 상상합니다.

하지만 그대 앞에 놓인 사과의 맛하고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이 사과는 당신이 아직 먹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사과의 맛을 알아차릴까요.

 

직접 먹어 봐야 안다고 합니다.

그래서 "먹어 봐야 맛을 알지요" 라고 한다.

 

하지만 사과를 먹어 보지 않고는 아무리 먹어 봐야 안다고 해도 아직 사과의 맛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스스로 먹어 보게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사과를 포크에 찍어서 상대의 입에다가 사과를 넣어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단이나 방법이 상대에게 사과의 맛을 바로 느끼게 하는 방법입니다.

 

이것을 방편 수단인 전도이며 포교인 것입니다.

가장 확실한 포교는 상대에게 직접 체험하게 하는 방법이 가장 수승한 포교입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포교는 직접 화두를 챙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이나 글로 설명하는 것은 이차적인 수단인 것입니다.

 

포교하면서 또 하나의 문제점이 포교하는 사람이 법을 확실히 알지 못할 때 입니다.

즉 자신이 체험하고 법을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경우입니다.

 

그는 단지 설명을 듣고 이럴 것이라는 생각이나 추측으로 알기 때문에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의 한계만큼 더 이상은 상대에게 알려 줄 수가 없습니다.

 

혹은 바르지 못한 자신의 알음아리로 오히려 상대들을 오도하게 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산행을 하는 사람이 정상을 가 보지도 못한 사람이 지도나 설명만 듣고 자신이 정상으로 가는 길을 잘 안다고 하면서 길을 안내한다고 봅시다. 그 사람은 정상을 가기 위해서 시행착오를 많이 격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사람이 나를 따라 오시면 됩니다. 라고 할 때 그 길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모두가 시행착오를 하게 되는 것와 같습니다.

 

전도는 목적지를 바르게 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안내자 입니다.

자신이 체험하고 경험한 것을 알려주고 바르게 목적지를 가게 도와주는 역할입니다.

 

그렇듯이 포교는 법을 바르게 가게 하는 수단이고 방편입니다.

모든 법은 그러한 방편을 통해서 스스로가 직적 체험과 노력을 통해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과를 직접 먹어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방편 법문인 것입니다.

 

사과를 직 접 먹어보면 당신이 사과의 맛을 온전히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설명하고 권유할 뿐이지 어떠한 경우라도 사과의 맛을 직접 전달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마음법도 그와 같습니다.

내 마음을 상대에게 전달하는 방법은 설명이나 글로서는 가능할 수 없습니다.

 

오직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마음을 통해야만 이 알 수 있습니다.

즉 본래의 마음인 참 성품은 모두가 같기 때문에 하나로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내 마음 다르고 너 마음 다르냐고 하면 각자의 식견인 알음아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알음아리를 내려놓으면 본래의 마음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너 마음 내 마음이 따로 없이 하나로 소통하기 때문에 단박에 알아차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공안을 가지고 화두를 들고 그 화두를 타파하면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도 그와 같은 원리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 봅시다.

단지 속에 보배 구슬이 있는데 밖에서는 어떤 색깔의 구슬이며 어떤 능력의 구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단지는 깨트릴 수도 입구가 좁아서 들어다 볼 수도 없는 단지입니다.

단지는 물질이 아닌 우리의 생각이나 지식으로 만들어진 단지입니다.

 

즉 육근경계인 업식으로 만들어진 단지입니다.

다시 말해서 단지는 지식의 말과 글이라면 보배구슬은 정신이 마음입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단지는 하드웨어이고 보배구슬은 소프트웨어라고 해도 되겠지요.

하드웨어는 물질인 구조물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형상이며 소프트웨어는 무형의 지식인 진리라고 말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럴 때 어떻게 하면 구슬의 본질을 볼 수 있겠느냐? 이것입니다.

답은 하나입니다.

 

단지를 투관하는 방법 즉 지식의 식이나 생각을 없애야 합니다.

지식인 알음아리가 오온의 경계인 육근경계라 했으니 그 경계를 허물거나 일으키지 않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부나 수행이 화두 참선이고

화두가 단지와 같은 것이고 혹은 화두를 타파 했다면 단지를 투관하거나 깨트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럴 때 구슬을 오롯이 들어나게 됩니다.

그 구슬은 어느 누가 봐도 같은 구슬입니다.

 

그 구슬이 사람에 따라 다를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자성인 본 성품 혹은 불성, 진아, 라고 쓰는 진리는 모두가 하나로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지 속에 갇혀진 보배 구슬을 밖으로 끄집어내고 쓰는 것이 지혜로운 삶인 것입니다.

즉 우리 안에 있는 참 진리인 자비공덕을 실천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포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