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융의 이야기

자연의 무정설법은 살아있는 경전!

통융 2017. 8. 4. 08:38

 

 

자연은 늘 펼쳐진 경전이다.

한 순간도 머물지 않고 책장을 넘기며 성성하게 살아 움직이는 경전이다.

 

대자비심으로 늘 새로운 법문을 쓰고 들려 주고 가르쳐 주고 있는데도

그대의 식견이나 분별심 때문에 알아차리지 못하니.

 

그대 알음아리를 내려놓고 경전 속으로 들어가 가만히 하나가 되어 보라.

그럴 때 자연이 그대에게 가장 귀중한 법문을 들려 줄 것이니.

 

!

비워보라. '안다'는 생심을 버리고 '몰라'.

모른다는 것은 지식의 분별을 짓지 말라는 뜻이니 비우고 담는 경계의 담을 허물어 버려라.

 

담고자 하는 그대 아상의 그릇을 부숴버려라.

그럴 때 자연과 그대가 하나 된 전부가 된다.

 

경계가 없는 우주 전체인 그냥 ' 일 뿐'이다.

무한 천공에 펼쳐진 세계 우주전체가 그대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어떠한 것에도 절대는 없다.

그대 생각이 기준을 만들고 분별 하였을 뿐이니 나무는 스스로 나무라 하지않고 그냥 꽃피우고 열매 맺을 뿐이요

 

강물도 자신이 흐른다고 말하거나 알지 못한다.

무시로 흘러 흘러 낮은데로 비다로 갈 뿐이다.

 

당송새대에 시서화(詩書畵)에도 뛰어난 문장가의 한 사람인 소동파가

불교와 관련한 많은 道談을 후세에 전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하루는 소동파가 동림 흥룡사라는 곳에 불인요원(佛印了元) 선사를 찾아가

법을 청하니 선사는그대는 어째서 자연이 들려주는 무정설법은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인 유정설법만을 들으려하십니까?”라고 했다.

 

자연이 설법하는 무정설법이라는 말을 듣자 동파는 앞이 캄캄하여졌다.

그는 말을 타고 무정설법이 도데체 무엇인가 자연이 설법을 하는데 왜 나는 듣지 못하는가?

 

의심덩어리에 정신을 잃고 산을 내려오다가 돌연 계곡에서 흘려 내려오는 폭포소리를 듣고 홀연히 자연과 하나되는 무정설법을 깨닫고 즉흥시를 읊었다.

 

계성편시광장설(溪聲便是廣長說) 계곡의 물소리가 부처님 법문이니

산색기비청정신(山色豈非淸淨身) 산색이 어찌 부처님 몸이 아니랴.

 

야래팔만사천게(夜來八萬四千偈) 밤새 온 비로 불은 시냇물 법문을

타일여하거사인(他日如何擧似人) 다른 날 어떻게 사람에게 말해 줄 수 있을까.

 

또 한 예를 보자.

 

죽은자들의 말과 글에 현혹되고 농락당하지 말고 살아 있는 법음에 귀를 귀울어 보라.

<전등록>에 보면 남양혜충 국사의 공안에 무정설법이란 말이 나온다.

 

조동종을 창시한 동산양개(洞山良介) 선사가 이 공안을 참구했다.

동산이 위산영우 스님의 회상에 있다 운암담성의 회상으로 갔다. 동산이 운암에게 물었다.

 

무정의 설법을 어떤 사람이 듣습니까?” “무정이 듣지.”

스님께서도 듣습니까?” “내가 만약 듣는다면 그대는 나의 설법을 듣지 못할 것이다.”

 

저는 어째서 듣지 못합니까?”

운암이 불자를 똑바로 세우고서 말했다.

 

들었는가?” “못 들었습니다.”

내가 설법하는 것도 듣지 못하거늘 어찌 무정의 설법을 들을 수 있겠는가?”

 

무정의 설법은 어떤 경전의 가르침에 들어 있습니까?”

“<아미타경>흐르는 물과 새들 그리고 수목들이 모두 염불을 하고 법을 설한다는 말을 모르는가?”

 

이때 동산이 깨달은 것이 있어 이렇게 말했다.

대단히 기이하고 기이하도다.

 

무정의 설법은 생각으로 미치지 못하고 말로 표현 할 수 없도다.

만약 귀로 들으려면 끝내 들을 수 없고 눈으로 들어야 비로소 알 수 있으리라.”

 

여기서 무정설법은 눈으로 듣는다는 말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