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융의 이야기

내 안에 부처를 부정하는 타력 신앙인이 되지 말라!

통융 2017. 10. 8. 18:08



  

지난 모 행사장에서 법문

'내 안에 부처를 자각하라.' 


자신을 죽이는 거는 부처를 죽이는 것이고

그렇다고 타력에 의존하는 것은 내안에 부처를 부정하는 것이다.


"부처는 내안에 있는데 간단히 만날 순 없지.
왜냐면 부처마음보다 그대 마음이 앞서기 때문이다.
이것도 갖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화가나면 멍청한 짓으로 눈을 가리기  때문에 부처가 보이지 않는다ᆞ
그래서 참선을 하고 염불을 하는 것이다.
그런 눈가림이 풀릴 때까지 한결 같이 그렇게 되면 자기안의 부처와 마주하는거다."
 - 위 글은 일본 조동종을 창시한 도겐 선사의 영화를 보다가 멋진 말이라 적어놓은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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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내가 부처이면서도 부처임을 모르고 산다.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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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안에 참부처님이 있다는 걸 아셨고
그러면 부처를 어떻게 찾아야 되지. 방법이 뭐냐하면?

오늘 다 가켜주면 절에도 안가고
 스님도 안 찾을껴 아녀ᆞ


 그래도 궁금한 것은 절에가서 스님들께 묻는겁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성인이 부처님인데 아니 내가 그런 부처가 된다는디

도시락 싸가지고라도 절에가서 스님들께 갈켜달라고 때를 써야지요.

중들 니들만 부처 될려고 하지 말고.

나도 부처라는데 어떻게 하면 부처 되는지를 떼를 쓰고 빗쟁이가 빗 받으러 가듯이 절에가 들어 눕어야 되는기여.

절은 절하러만 가는 곳이 아니라
맨날가서 엉덩이들고 절하고 그져 우리 자식 남편 가족들 잘 되게 해 달라고 떼쓰지 말고.ᆢ
그렇다고 기복이 나쁘다는 것이 아녀. 기복도 알고 하라는 기여.

기복은 기도해서 절대 신이나 누구에겐가 복을 바라는 것이 기복인데.

이런 근성은 거지 근성이여.

설사 남이 주는 걸 받는다 해도 그 댓가는 분명 따른다 이말이여.

세상에 공짜가 어딧노 이말이여.

참 기복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이말이여.

내안에 자성인 불성을 밝혀서 복을 얻는 것이여.

자성의 불이 무엇이냐 하면 지혜의 등불이다 이말이여.

우리가 눈앞이 캄캄해서 한 치 앞도 알지 못하고 못보는 거잖이여.'

만약 내 앞길을 내가 볼 줄 안다면 누구에게 매달리고 애원할 필요 없잖이여.

내가 다 알아서 가는데.....

결국 그러한 지혜의 안목을 갖게 되면 기복은 저절로 되는기여.
내안에 자성인 불성을 밝히면 기복은 저절로 되다 이말이여.
내가 불을 밝히면 제일먼저 누가 혜택을 보는가.

내가 가장먼저 혜택을 보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해택을 보는 이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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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얼마나 큰불을 밝히느냐에 따라 이웃의 도움이 큰거여.
태양처럼 큰불이 부처 불자 불이여 그래서 대일여래 대적광을 쓰는 것이여.

이 세상은 빛으로 창조되는 것이여.

굳이 이름을 붙여서 설명해 보면

불은 비로자나불이고

불빛이 노사나불이고

그 빛에 의해서 나투는 삼라만상이 석가모니부처라 이말이시.

이런 모든 과정을 볼 수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다 말이여.

허공이 있다는 것은 아는데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것이 듯이 말이여.

이 세불은 하나 이면서도 셋이고 셋 이면서도 하나다.

의상조사 약찬계에 일즉일체 다즉일 일미진중 함시방과 같은 의미다 이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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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꺼나
내안에 부처가 있다는데 어떻게 찾는지를 공부하고 배우러 가는 곳이 절이지

맨날 해 주십시요라고 손에 불나도록 빌로가는 곳이 아니여ᆞ.

그런다고 저 돌덩이리 부처가 해 주느냐 하면 눈도 꿈적 안해.

못 알아 들어.....
차라리 역전에 가서 돈통 놓고 앉아 비는 것이 훨씬 빨러......


절은 뭣하는 데다.
내가 어떻게 부처임을 바로 알수 있습니까? 하고

스님네 한테 질문하고 스스로 공부하러 가는 곳이 절이다 이말이여.

자 한 번 따라 해봅시다.
내가 누구냐고요?
부처.
님짜 붇여요. 저 앞에 말도 못하고 앉아있는 돌덩어리 한테는 깎듯이 부처님! 부처님! 하면서 궁뎅이도 안보이면서....

어찌 살아 있는 부처한테는 소홀한기여.
내가 부처라면 얼마나 존경스럽습니까.

나는 뭐다고요?
부처님!

그렇습니다.
내가 부처님이면 나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합니까?
부처님 같은 행동,
그렇치요.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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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 눈에는 뭐가 보인다. 부처만 보일 뿐입니다.

그라고 내가 부처면 부처같은 행동을 한다 이말이여.
대자대비 . 이웃을 나처럼 사랑하고 자비공덕을 나눔하는 것.

법구경에 '내 몸은 이웃과 같으니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고 했는데 

이웃 종교에서는 '네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고 배껴 썻는데 이게 엄청 차이가 있는 말이여.

법구경에 부처님 말씀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가 나와 같은 한 몸으로 연기소생(緣起所生)이니 마땅히 알고 실천하라는 뜻인데

이웃 신앙에서는 내가 절대 권력이니 불쌍한 이웃을 사랑해 줘라고 하는 논리다.

좋은 말을 누가 먼저 했다는 것이 중요하지는 않아.

그 이치을 바로 알고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여.

그런데 작금의 이웃 종교들은 어띠여.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 하면서 자기들과 같은 종교가 아니고 믿음이 아니면 어떻게 한다.

무슨 이단이니 지옥불에 들어 간다느니 하면서 언어공포를 유발 하잖이여.

그러면 스스로 모순에 빠져 있는기여.

그들이 쓰는 이웃이라는 단어에는 모두의 이웃이 아니라 특정 이웃이여.


그런데 불교는 어떤기여.

불교는 그들 종교가 가장 무서워하는 사탄과 마귀 귀신들 지옥에 중생들까지 다 구해 주려는 지장 사상이 있다 이말이여.

지옥문에 바랏고 서서 지옥에 있는 중생들 다 건져내어 구원하기 전까지는 절대 부처를 이루지 않겠다는 지장보살님이 있지.

온간 중생의 모든 것을 다 받아주고 안아주는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가진 대자대비 관세음 보살이 있지 않나.

물론 진짜 보살들이 따로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여.

내 안에 있는 부처 마음이 그렇게 작용할 때 죽어가는 개미 한 마리 살리고 자비하는 마음으로 사랑을 배풀 때 내가 지장보살 관세음보살 이 되는 것이여.

모든 불보살들의 명호가 많지만 다 내가 만드는 지혜작용성이여.

저 어디 서방정토에 하늘에 그런 부처가 살고 보살이 있다고 착각들 하는데.

그렇지 않아여. 

찰나찰나 불성으로 깨어서 작용하는 마음 씀이 그러한 것들을 만드는 것이여.

오늘 확실히 알아 두란 말이여. 모든 불보살들은 어디에 있다.

내 안에 다 있다.

왜 그런가 하면 그 불보살들이 다 부처이기 때문에 내가 부처라고 하는 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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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듯 불교는 종교간의 갈등이나 이웃을 그냥 남이라는 계념으로 접근하지 않아.

모두를 또 다른 나의 일부라고 보는 것이기 때문이야.

그겻이 불교의 가장 위대한 점이야.

인과법 혹은 연기사상의 진리가 그것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여.

그러한 이치를 깨닫는 것만으로도 초선 도인이 되는기여, 성문 연각의 아라한이 된다 이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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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만능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현대인들에게는 가당찮은 이야기로 들리지 모르지만

이러한 진리를 바르게 공부하고 깨닫게 되면 시공간을 초월한 큰 마음이 만들어지는 것이여.

우리 꺼 내 꺼를 철저히 하는 신용등급의 사회에서 너와 내가 둘이 아닌 한 몸이고 한 생각을 갖아야 한다고 하면

미친 사람이라고 말할 끼여.

그런데 참 말로 희얀한 것은 우리 인간의 본성은 미친 것이 참 진리이니 어쩌냐 이말이여.

인간의 본능 혹은 본성이라 하잖이여.

그 인성의 근본 초석에 충실한 뿌리가 바로 참 진리로 만들어진 성품이 부처라는 것이여.

하나님의 성품이라 해도 괜찮아.

도라 하든 알라라 하든 이름이 무슨 상관이 있겠어.

그 본질의 뜻은 하나일 수 밖에 없는 것이여.

다만 그 이치를 모를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제...

물을 가지고 워터라 하든 물이라 하든 미쯔라 하든 스웨이라 하든 말은 아무상관 없어.

 물은 물일 뿐이니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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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말이 허트로 흘러가는데

요점이 뭐여.

내가 부처라는 것이고 그 부처의 삶을 사는 것이 우리 인간의 참 바탕이며 진리라는 것이다.

내가 부처임을 자각할 때

나는 부처의 삶을 살게 되고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과 자비로 공덕을 쌓는 삶을 살게 된다는 이말이여.

확연한 부처가 되지 않더라고 이러한 이치를 터득하고

해야겠다는 마음을 챙기면서 살다보면 그렇게 되는기여.

콩심은데 콩 나듯이 말이여.

나는 부처다!

나는 부처다!

하루에 자고 일어나서 18번하고 잠자기전에 18번하고

왜 18번이냐 하면 씨팔이 욕인데 그게 아니여

우리 마음이 6근 6경 6식으로 18경계가 문제 잖이여.

그 마음에 번뇌의 씨를 하나씩 하나씩 실지실견(悉知悉見)하여 경계를 없에는 것이여.

여유 있으면 생각 날 때 마다 해봐 진짜 부처가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