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세상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당신이 만들고 있습니다.
*내가요, 대부분 조물주가 만들었다고 알고 있지 않습니가?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이 조물주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가 조물주이고 모두가 피조물입니다.
특정히 누가 누구를 만들거나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 왜요. 나는 오늘 아침을 내가 만들어 먹었는데요.
하 하. 그것은 잘 생각해 보십시요,.
과연 내가 아침이라는 것을 만들었다고 했는데
그 아침은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지요.
밥, 국 ,반찬, 등 모두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을 서로서로 조합해서 재 창조한 작품이지요.
물이 없고 쌀이 없고 불이 없고 그릇이 없고 양념이 없으면 어는 것 하나라도 만들 수 없습니다.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요소들이 한테 어우려져서 하나의 존재를 만들어 냅니다.
그렇듯이 이 우주에 존재하는 그 어느것도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틱낫한 스님이 꽃 한 송이에 우주가 들어 있다고 했고,
호킹박사는[거대한 디자인]에서 우주는 중력같은 물리학 법칙에 따라서 발생한 것,
창조주는 필요없으며 우주는 無로부터 스스로를 창조했다" 고 했습니다.
호킹박사의 無의 계념을 좀더 확인해 봐야 겠지만 空이라 해야 맞다고 봅니다.
없는 것은 영원히 없는것이지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 함니다.
*신이 세상을 만들었다면 신은 왜 불공평하게 만들었을까?
신을 만드는 것은 자신임을 알자.
당신이 신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대 신은 만들어지나 나에겐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나에겐 신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이 연기법이라는 것이다.
모든 존재나 생각들은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며 그 결과를 다하면 살아진다.
그렇다면 신은 원래 있다면 나에게도 신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만약 나도 신의 피조물이라면 그대 신이 말했다는 바이블에서 적용해 보면 나는 벌써 지옥행이나 이단자로 존재 할 수 없다.
그런데 나는 신을 인정하지 않고 지금도 그대 신앞에서 당당히 신을 부정하고 있지 않는가?
무엇이 신을 만드는가?
그대 신은 그대 자신이 만들고 있음을 알라.
그런데 신이 없다면 왜 태양은 존재 합니까?
당신이 본 태양이 존재 하는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당신이 본 태양은 벌써 살아져 버린 뒤다.
그렇듯 당신이 신이라고 생각하는 그 신의 존재는 벌써 지나가 버린 신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무엇이 이 우주 만물을 만들었습니까?
연기법이다.
*연기법요?
無人空山에 水流花蓋라,(사람 없는 빈 산에 물 흐르고 꽃이 핀다.)
* 쉽게 설명해 주십시요.
좋은 예가 여기 있다.
범신을 추앙하는 바라문이 부처님을 찾아와서 질문을 했다.
우리는 범신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창조한다고 믿는데
당신은 어째서 모든 창조가 연기법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 하십니까?
세존께서 바라문사제에게 묻기를 "그대는 그대들의 행하는 주문(범신)을 보았는가?"
" 아닙니다 보지 못햇습니다." "그렇다면 그대의 스승은 보았다 하던가?"
"아닙니다" ... "그렇다면 그대의 스승의 스승 그렇게 7대 스승들은 보았다 하던가?"
"아닙니다,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렇다는 말을 전해듣고 믿을뿐입니다."
"그렇다, 누구도 보았다는 사람은 없고 그렇다는 말만 전해듣고 주문을 욀뿐이다."
"나는 다 보고 다 안다." 실지실견悉知悉見
나는 보지 않는것은 믿지 않는다.
연기법은 지금 그대 눈 앞에서 창조를 펼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서로 연연되어 나타났다가 소멸하는 것이 연기법緣起法이다.
연생연멸緣生緣滅이라 한다.
이 연기된 순간은 찰라에 생멸을 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말이 맞지 않다.
시간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것은 과거와 미래가 있기 때문에 현재하는 찰라를 생각(心)하는 것 뿐이다.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의 말 일 뿐이다.
요즘 과학으로 힉스입자니 화이트홀 블랙홀 등을 찾아 내고 있지만 과학은 어디까지나 존재를 가정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無를 밝힐 수가 없다.
다만 있다는 가정하에 없다는 것을 유추해서 말이나 글로 쓸 뿐이다.
그 無을 인식하는 것은 단 지 마음 밖에 없다.
무는 조건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무이다.
공은 존재하지도 않으면서 존재하는 것이며 무는 본래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임어당 같은 사람들이 무와 공을 같은 것으로 혼돈하여 불교을 허무주의니 하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공은 무와 전혀 다른 이치임을 알아아야 한다.
그래서 空은 색(色)을 말하며 허공과 같다면 無는 마음(心)을 말할 수 있다.
오늘은 無가 아닌 존재의 물질에 대한 이야기이니 색(色)즉 공(空)인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여러 인(因)과 연(緣)에 의해 과(果)가 생겨나는 것이 연기의 법(法: 존재=空)이다.
단 하나의 법(法: 존재)도 인과 연을 따라 생겨나지 않은 것이 없다.
여러 인(因)과 연(緣)에 의해 과(果)과 생겨나는 것인 법(法: 존재)은 한 순간도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공하다(空)고 말한다.
여러 인과 연이 다 갖추어져서 화합하면 비로소 사물이 생겨난다.
이것을 창조(創造)라는 말을 쓸 분이다.
유일 神이 굳이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성부(聖父)가 인(因)이고 성령(聖靈)이 연(緣)이며 성자(聖子)가 果(과)인 삼위가 된다.
따라서 사물은 여러 인과 연에 귀속되는 것이므로 사물 자체에는 고정된 성품(自性 ·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고정된 성품(自性 · 자성)이 없으므로 공(空)하다.
법(法: 존재)은 고정된 성품(性 · 自性 ·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법(法: 존재)을 "있음(有)"이라고 말할 수 없다.
또한 법(法: 존재)은 공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법(法: 존재)을 "없음(無)"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래서 불佛이 깨달은 법法이 불법(佛法)이 공(空)하다는 말을 쓴다.
있음(有)"과 "없음(無)"의 양 극단(二邊)을 벗어나기에 중도(中道)라 이름한다.
그래서 법을 중도실상(中道實相) 이라 하고 "법(法)을 보는자 여래(如來)를 본다"라고 한다.
현대 물리학에서 중도는 아인슈타인의 등가원리인 E=MC자승(E=에너지,M=질량,C=광속도)에서 증명되면서
등가의 원리에 모든 에너지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양만 바뀔 뿐이다. 물과 얼음의 예를 들 수 있다
촛불을 비유해 보자.
불은 본래 허공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촛불이 창조 , 나타나느냐?
양초와 심지가 있어야 하고 성냥으로 불을 심지에 붙여야 불이붙고 탄다.
또한 공중에 산소가 없으면 불이 타지 않는다.
*그렇게 타는 촛불은 잠시라도 고정되어 있는 불곷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불꽃은 어떻게 계속타면서 하나의 불꽃으로 보이느냐?
불꽃이 쉴 사이 없이 연속적으로 타기 때문에 연결되어서 하나처럼 보입니다.
그렇다.
형광등은 1초에 60번을 깜박거린다. 그런데 우리는 늘 밝게 켜져있는 것 같이 착각을 한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현상도 같은 현상이다.
영화는 한 스크린에 여러 장의 영화 필름이 연결하여 영사하게 되면 실지 활동하는 것 처럼 움직이는 착시 현상을 보는 것이 영화인 것이다.
우리는 영화만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우리가 보는 모든 세상이 영화와 다른 것이 없다.
내가 보는 대상은 한 순간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찰나 찰나 생멸을 이어간다.
대상을 보는 한 순가에 우리 마음은 16-17번이 작용한다고 청저도론에서는 말하고 있다.
* 그런데 영화는 허상으로 끝나고 나면 아무것도 없지만 우리 현실은 형상이 그대로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렇다.
영화는 고정된 스크린에서 비추기 때문에 허상으로 보이는 것이고 영화가 끝나고 나면 금방 영화라는 것을 알아차리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실상으로 나타나는 영화라고 하면 될 것이다.
ㅇ여기에서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영화와 실상은 엄연히 구분된다.
영화는 공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고 진리의 체성을 설명한 것이고.
삶에서 현상은 공의 차원을 넘어 살싱의 이치를 알아야만 그대가 " 영화는 허상으로 끝나고 나면 아무것도 없지만 우리 현실은 형상이 그대로 나타나지 않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오늘은 연기실체의 진리에 대한 설명임을 알아야 한다.
삶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계속 연결되어 돌아가지만
그 물질이나 생각에 집착하기 때문에 느리게 느껴질 뿐이다.
하지만 80을 살고온 노인들은 인생은 참 순간이야 라고 하듯이 우주의 생성변화의 시간으로보면 우리 인생 100년도 한 찰나나 같을 수 있다.
다행히 잠을 자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눈을 쉬게 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눈은 몇 년을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보고 있는 촛불이 허공이라는 스크린에 영화를 보듯 불꽃을 보고 있는 것이다.
촛불이 다 타고나도 불꽃이 보이느냐?
보이지 않습니다.
인연이 다하면 소멸하는 이치다.
*촛불이 어째서 중도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까?
중도는 무엇인가.
양변에 취우치지 않는것을 말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는 것이듯 촛불은 양초와 심지와 성양 산소가 없으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촛불 자체는 고정된 것이지 않기 때문에 영원히 잡아둘 수도 없고 촛불의 실체는 매 순간순간 변하고 있는 현상이다.
촛불은 이름에 불과한 것이다.
촛불은 양초와 심지 공기와 여러가지 요소들이 불을 만들고 눈으로 보는 것이다.
즉 불꽃이 혼자서 만들어 지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양초를 촛불이라 할 수 없고 성양도 그렇고 각 요소들이 촛불이 아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모여서 있다가 하나라도 흩어지면 촛불은 없어졌다가 다시 인연이 되면 촛불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촛불이 있다고 해도 맞지 않고 없다고 해도 맞지 않다.
물과 어름과 수증기도 같은 이치다.
어름은 본명 물로 만들어 지지만 어름을 보고 물이라 하지 않고 물을 보고 어름이라 수증기라 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수증기와 어름과 물은 형체만 다를 뿐이지 같은 성분이라는 사실이다.
세상에 모든 존재하는 사물들은 이와같은 원리로 만드어 져 있다는 것이 연기성이며 중도라고 한다.
그래서 이분법 적인 분별로 사물을 판단하는 것은 틀리다는 말이다.
길다 짭다.크다 적다, 옳다 그르다. 높다 낮다 등의 모든 비교되는 분별은 상대에 따라 바뀌기 때문에 하나로 이름 하지 못한다.
이 우주는 큰 하나의 나이다.
그대는 나보다는 크지만 이봉걸씨름 장사 옆에가면 그대는 작다.
그대나 적군이 같은 전쟁 터에서 싸우다가 그대가 적군을 무리치면 그대는 승리하나 적군은 패한다.
모든 것은 자신의 주관된 분별심이 만드는 착각이다는 것이다.
* 그런데 왜 우리 인간들은 그러한 이치를 모르고 전도몽상하여 살고 있는 겁니까?
왜 실 생활에서 알지 못하고 살까요?
중요한 질문이다.
우리는 연기성의 시공간은 늘 변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논리나 지식적으로는 이해하고 잘 알고 있는듯 하나 현실에서는 착각을 하고 있다.
왜 그러냐 하면 진리를 확철하게 자신의 것으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
그대 주먹을 쥐었다 펼쳐 봐라 ....
손안에 무엇이 보이느냐?
손금이 보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대 주먹을 쥐었다 펼치게 했느냐?
..................................................
이 것을 확철히 안다면 ..............
그대는 오늘 문답으로 설명한 1차 관문인 진리의 체성인 공한 이치를 깨닫는 것이다.
차 관문인 여여한 진리의 실상을 증득해야 하고
3차 인 즉여의 삶인 평상심의 도를 깨닫게 될 것이다.
...............................................
만약 1차 관문을 알아치린다면 그대는 다시 궁금할 것이 있다.
공한데 어째서 머리를 벽에 부디치면 아플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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