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회 및 행사 법문

4월초하루 법문---내가 부처인데 왜 행복하지 못할까!

통융 2017. 4. 13. 22:04

<4월초하루 법문>


내가 부처인데 왜 늘 행복하지 못하고 마음이 고요하지 못할까?

 

지난달 화두 공안에 대해서 각자가 열심히 참구를 했습니까?

책을 들고 흔들어 보이며

"이 책을 흔드는 것이 책입니까 손이 흔드는 것입니까?"

.......... 침묵


 

여기 뎅뎅 종소리가 납니다.

여러분은 종소리를 듣습니다. 여기 모인 모든 사람들이 똑 같이 듣습니다.

그 종소리는 하나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다르게 들리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종소리를 잘 들리지요?

....

그러면 질문하나 하겠습니다.

종소리가 어떻게 들립니까?”

댕, 댕 합니다.

, 텅 합니다.

, 쨍합니다.

모두가 자신이 듣는 방법이나 조건에 따라 다르게 들립니다.

같은 종소리인데도 말입니다.

그것은 왜 일까요?

각자의 분별심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분별심이란 각자가 배운 지식이나 인식 능력 환경 등 다양하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종소리를 들을 때 다른 생각이 함께 합니까?

아니면 종소리만 있습니까?

 

대부분 종소리만 들립니다.

종소리 하나만 온 마음에서 들리고 존재한다. 이 말입니다.

결국 나는 종소리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종소리와 내가 구분되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을 우리는 연속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종소리가 끝나니 다시 내 생각이 돌아옵니다.

 

그러면 다시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겠습니다.

모두가 소리를 각자 내어보세요.

.....

그 소리를 낼 때 여러분의 생각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직 속에 존재합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이것을 보십시요?

'죽비를 들어 보인다.'

 

여러분은 지금 죽비를 보고 있습니다.

순간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죽비에 와 있습니까?

그 자리에 앉아 있습니까?

여러분은 모두가 이 죽비와 하나가 되어 있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여러분은 자신이라는 생각 즉 나라는 생각이나 다른 분별생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물을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느끼는 것들을 할 때 여러분의 마음은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느끼는 곳에 머뭄니다. 하지만 어떤 마음이 따로 있어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순간 대상에 따라 그대로 인식하는 놈이 있습니다.

그 인식하는 놈은 어디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되어 나타 납니다.

그 인식하는 놈은 허공처럼 공합니다.

그런데 허공이 없지는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양초가 불을 켤 때 불이 어디에 있다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에 따라 나타났다가 조건이 다하면 살아집니다.

살아진다고 어디로 숨어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또 조건인 공기와 양초와 심지와 성냥불과 서로 인연되면 다시 불꽃이 살아 났다가 조건이 다하면 살아진 것입니다.

그래서 있다고 할 수도 없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인연연기성이라 합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은 이러한 원인과 결과 조건과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현상은 한 순간도 머물지 않고 변하여 조건이 다하면 살아집니다.

이 진리를 부처가 알아차린 것입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하다고 합니다.

 

이 이치를 알아차리면 어떤 것을 또 알게 되느냐 하면

모든 존재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모든 상은 지수화풍이 서로 인연되어 나타나 잠시 머무는 현상이구나....

즉 촛불처럼 내 몸둥이도 나무도 산도 하늘도 모두가 인연되어 나타났다가 살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는 상이 없다하여 무아라 합니다.

이것을 제법무아(諸法無我)라 합니다.

  

이 두 이치를 깨닫게 되면 생사를 초월하게 됩니다.

성주괴공 이라하고 생로병사라 고도 합니다.

재물이나 권력 명예나 젊음과 늙음에 대해서 초연해 지고 집착심이 없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진리의 본성을 바로 깨닫게 되면  열반적정(涅槃寂靜)에 들어간다. 우리가 말하는 죽이는 환상인 극락가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제법무아와 제법무아를 알지 못하면 내가 만들어 지고 내가 있게 되면 모두가 탐진치심으로 나타나는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도 한다. 

 

위의 세가지 이치가 3법인 이라 하여 부처님이 깨달은 전부이며 불법의 핵심이다.

이 삼법인을 바로 깨닫기 위해서 4성제 8정도라는 실천 덕목이 있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실천하는 일만 남았는데

그것이 대승불교의 핵심인 사섭법과 6바라밀 행이 나타나고

이것을 실천하는 부처님들이 노사나불, 아미타불,석가모니불, 등 각 부처님과 4대 8지보살들의 행실이 있는 것이다.

결국 부처나 보살 들은 능력을 나눠주는 신이 아니고 진리를 깨닫고 실천하는 위신력 혹은 사람들인 것이다.

 

불법의 진리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봤는데

다시 지금으로 돌아와 봅시다.

 

이러한 사물에 전부가 되는 것을 반복해서 인식하고 행동을 해 보십시요.

그러한 인식이 깊어지면 여러분은 늘 깨어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매 순간순간 분별하는 생각 없이 모든 존재와 하나가 되는 것을 연습 하십시요.

그것이 화두 챙김입니다.

그것이 수행입니다.

그것이 부처를 만나는 것 즉 내안에 부처를 찾아서 만나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부처의 자리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분별심도 있을 수 없습니다.

 

내 안에 부처가 있고 당신 안에도 부처가 있다.

결국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가지고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 열만경에서 말한다.


존재하는 모두가 부처이라는 뜻인데

그런데 왜 우리는 각각 다르게 행동하고 다르게 생각하고

서로 의견이 맞지 않다고 싸우고 죽이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하느냐 ?

또, 모두가 부처이면 개 돼지 나무도 나와 같아야 되지 않느냐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모두가 부처인지를 모르고 산다고 하면 1차적인 답이 되겠지요.

모른다는 것은 불성을 깨닫지 못했다는 표현으로도 말 할 수 있습니다.

동식물은 제외하고 우리 인간들을 한 번 봅시다. 


각자 나라는  식견으로 세상을 분별합니다. 너와 내가 하나라는 생각이 아닌 분별과 판단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탐진치심으로 서로 싸우고 시기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육도윤회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 육도 윤회의 고리를 끝는 방법이 지금 우리가 찾고자하는 자성을 찾을 때 가능해 진다.


제가 불성은 뭐라 했지요.

불성은 자비라고 했지요.

스스로가 자비행을 밥먹듯이 즉 삶이 전부가 못하다면 부처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결국 모두가 똑 같은 불성(자비)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쓰지 못하니까 중생이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본래 부처인 나의 본성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본래는 부처라서 모두가 같은데 각각 나(아상)라는 생각과 마음들이 부처인 본성을 가려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각 개성이 다른 것처럼 아상 인상 수자상을 가지며 행동하고 생각하고 판단한다.

 

그러한 나라는 생각도 결국 부처가 아닙니까? 라고 질문 할 수 있다.

부처 일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 생각 전부일 때는 부처입니다. 하지만 생각이 있고 판단하는 내가 있다면  부처라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배가 고파서 빵을 훔쳤다면 나는 도둑놈이 됩니다. ......나를 생각한 것이라면

그런데  배고파 하는 사람에게 그 빵을 주었다면 나는 자비를 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연기성의 진리

주체인 나는 도독놈이 되기도 하고 부처가 되기도 합니다.

결국 내가 어떤 의지로 사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 의지의 씨앗인 본질이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무엇인지를 바로 깨닫게 되면 부처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마음를 바로 알아 차리는 것이

제가 들어보인 죽비를 바로 알아차리는 것이고 

종소리가 되는 이치를 깨닫게 되면 

척 마음하나를 알아 치르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다시 질문을 하겠습니다.

죽비를 들어 보이며

이것이 무엇입니까?”

 

1, 죽비입니다......상에 집착하는, 쫒아 다니는 생각입니다. <일반적인 우리들의 중생심이다.>

왜 그럴까요?

죽비를 보는 순간은 순순한 불성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저 것은 죽비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죽비를 알고 있는 지식 즉 분별심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죽비는 죽비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실상을 나타내는 답이 됩니다.

 

2, 죽비가 아닙니다....... 공에 집착하는 것입니다.<물체를 연기성으로 볼 줄 아는 지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설명에 불과하다.

왜 죽비가 아닙니까, 실상이 이렇게 뚜렷이 당신 눈앞에 있는데 말이지요.

만약 , 바닥을 치는등은 공(본체)에 대한 답으로는 맞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다.

손이 가려운데 발을 긁는 격이다.

 

 

3, 설사 죽비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생각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4, 유무를 초월한 죽비입니다...... 선은 설명이 아니다. 자성의 실체를 이해(의리선) 했으나 실상을 나타내 보이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유무를 초월한 죽비를 보여봐라!

......침묵.....

 

다시 죽비를 들고 질문을 한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죽비를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을 합니다. 죽비인데 , 대나무인데, 막대기인데 ,,,등등 여러 가지 생각(아상)을 합니다. 그것이 분별심입니다.

그러면 지식적 분별심 없이 이것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까요?

말을 하면 생각에 분별심이라 했고 말을 하지 않자니 공에 떨어진다고 했고..

도대체 어떻게 이 죽비를 있는 그대로 설명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화두가 되는 것입니다.

말을 하지도 말고 말 없지도 말고 나타내 보여라?”

 

화두는 말과 생각 이전에 것을 찾는 것입니다.

결국 생각이나 분별하는 마음 이전에 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안다는 생각을 모두 버리고 마음을 텅 비워 버릴 때 몰록 나타나는 것이 본성입니다.

본성은 알음아리인 지식의 생각(분별심)들이 덮혀 있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늘에 구름이 끼었다가 걷히면 하늘이 그대로 나타나듯이 본성도 생각들을 걷어내고 나면 그대로 본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본성이란 어떤 상태의 실재가 아니며 하늘과 같은 허공 같다.

그렇다고 허공이 있다거나 혹은 없다고 할 수 없듯이 본성이 공하다 함이 그와 같은 것이다.

 

 

마음이 뭐라 하겠습니까?

...... 침묵


죽비를 들어 보인다.


오늘 법문은 어것으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