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法이란 사실을 사실대로 알아서 그 사실을 사실대로 굴리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아픕니다. 그러나 아픈 건 몸뚱이지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나'는 조금도 아프지 않아요. 다만 몸뚱이가 아픈 걸 대신해서 내가 알 뿐입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와서 설법을 듣는 것도 전생, 전생, 전생에서부터 크나큰 인연이 있어서 오게 되는 거예요. 따라서 여러분은 인생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합니다.
인생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머리털 하나라도 틀리면 안됩니다. 마치 비행기의 작은 부품 하나라도 고장이 나면 비행기가 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본다'고 말할 때는 보는 것은 눈 자체가 아닙니다. 눈에 비치긴 해도 눈이 보는 것은 아닙니다. 눈 자체는 다만 거울 역할을 할 뿐 보는 놈은 따로 있습니다. 마치 거울에 내 얼굴이 비쳐도 거울 자체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나를 모르는 것과 같습 니다. 마찬가지로 귀에 소리가 들려도 귀 자체가 듣는 것이 아니며, 혀도 혀자체가 맛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죽비를 손으로 잡고 있는 데 손은 잡고 있는 걸 모릅니다. 이 보고 듣고 맛보는 놈은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자리인데, 이 자리가 여러분에게 있어요. 여러분이 지금 앉아 있는 것도 이 자리가 몸뚱이로 하여금 앉게 한 것이에요. 이 자리는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기 때문에 언제부터 있냐는 말이 성립이 안됩니다. 하늘과 땅이 생기기 이전부터 있어요. 왜냐하면 하늘과 땅이 여기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가 몸뚱이를 나퉈서 인생놀이를 하는 겁니다. 이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진짜 '나'가 모든 걸 나툰 겁니다.
이 세포로 이루어진 몸은 자체의 성품, 자체의 슬기가 없는 무정물입니다. 눈에 자체 슬기가 없고 귀에 자체 슬기가 없고 혀에 자체 슬기가 없고 나아가 몸뚱이 전체에 자체 슬기가 없는 것으로서 다만 인연에 따라 변할 뿐입니다.
진짜 나의 분수로 보면 생과 사도 써 보는건데 이 써보는 작용의 상은 실다운 것이 아닙니다. 이걸 모르고 불교공부를 한다면 전혀 말이 안됩니다. 염불이든 예불이든 참선이든 이걸 알고 해야되지 아무것도 모르고 앉기만을 위한 좌선은 안되는 것입니다.
몸뚱이의 소유주는 細胞를 비롯한 적혈구 백혈구 등입니다. 따라서 내 管理物은 될 지 언정 내 소유의 몸뚱이는 아닙니다.
눈이란 器官을 통해서 보는 놈이 무엇인지, 귀라는 기관을 통해 듣는 놈이 무엇인지, 자꾸 의심해 보세요
이 마음자리는 눈이란 기관을 통해서 보기도 하고 귀라는 기관을 통해서 듣기도 하고 코라는 기관을 통해서 냄새를 맡기도 하고 혀라는 기관을 통해서 말하기도 하지만 이 자리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 자리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성내기도 하며 손을 시켜 물건을 잡게도 하지만 찾으려고 하면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 허망한 육신이 나가 아니라 빛깔도 소리도 냄새가 없는 이 자리가 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것부터 알아야 다른 설법이 먹혀들어갑니다.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육신을 내버리고 아울러 지금까지 알던 지식도 싹 내버려야 합니다. 내버리라는 건 마음을 두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리고나서 눈이란 기관을 통해서 보는 놈이 무엇인지 귀라는 기관을 통해 듣는 놈이 무엇인지 자꾸 의심해 보 십시오.
이 마음 자리는 有에 속하지도 않고 無에 속하지도 않습니다, 유와 무를 초월한 자리입니다. 모습이 없어서 찾을 수 없으니 있는 데(有) 속하지도 않고, 보고 듣고 울고 웃고 하는 놈이 있으니 없는 데(無) 속하지도 않습니다. 말하자면 허공과 꼭 같습니다 . 허공은 명자는 있지만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어서 걷어잡을 것이 없으니 있는 데 속하지 않고, 태양이나 지구같은 만물이 나왔으니 없는 데 속한 것도 아닙니다. 바로 이 자리가 허공이기 때문에 크다면 온 누리를 덮고 작다면 바늘귀도 뚫습니다.
이 마음자리를 찾아내려고 하면 허공부터 걷어잡아야 합니다. 허공부터 잡지않고 마음을 알았다면 거짓말입니다. 허공을 잡기 전에는 마음을 모릅니다. 또 허공을 알려면 마음부터 파악해야 합니다. 허공과 마음이 한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색신은 내 관리물은 될지언정 실제로 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눈으로써 눈을 삼지 말고 보는 놈으로 눈을 삼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허공성이 보는 것이니까요. 귀로써 귀를 삼지 말고 듣는 놈으로 귀를 삼으라는 것도 허공성이 듣기 때문입니다. 허공성 자체가 내몸이라는 인식을 주기 위해 하는 말입니다.
이 허공안에 살면서도 우리는 허공을 걷어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허공을 부인하겠습니까? 허공은 지혜가 없지만 여러분의 마음자리는 지혜가 있으니 바로 여러분이 허공의 主人公 누리의 主人公입니다. 이 슬기자리가 바로 누리의 주인공인데 이 자리는 여러분이 다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당장의 마음이 누리의 주인공이라 생각해서 항상 몸가짐을 삼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眞如本性 - 여김 - 무명 - 알음알이로 굴리어지는 것을 마음이라 하고 있어요.
화두를 의심해 들어가다 나중에 어떤 계기 -이 계기는 여러분의 마음가짐새예요- 가 닥치면 경계에 닿찔린 마음을 넘어서서 마음자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무릇 법을 말한다는 것은 중생심을 일컫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중생이 있으므로 해서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누리의 주인공인데 이 사실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뼈대에다 살을 바르고 옷을 걸친 이 육신만을 나라고 하기 때문에 누리의 주인공이 못되는 것입니다.
슬기는 무엇이냐 지금 내 말을 듣고있는 바로 그 자리가 슬기입니다. 물론 이 슬기는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기 때문에 걷어잡질 못하지만 내 말을 들어서 인식하는 그 놈이 슬기란 말입니다. 부처님의 슬기도 이걸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 '당장의 마음'은 억년전에도 이 마음입니다. 물론 억년전의 몸뚱이는 지금과는 달라요. 하지만 境界에 닿찔리지 않는, 변하지 않는 그 마음은 억년전이든 억년후든 같습니다 (물론 이 마음을 바탕으로 해서 일으키는 천차만별의 분별심은 별문제입니다.) 그래서 당장의 마음이 하늘땅의 임자가 되는 것이며, 지금 갖고 있는 그 몸 그대로 하늘땅의 임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여러분의 마음이면서 여러분의 마음이 아닌 일체의 마음입니다. 부처님도 우리들도 축생들도 욕계 색계 무색계도 이 마음을 바탕으로 일어나니 여러분은 절대의 존재입니다.
진여본성(眞如本性: 청정한 본심)에서 한가닥 여김을 일으켜 그 여김이 경계와 이러쿵저러쿵 따지는 데서 無明이 일어나는 데 그 무명이 알음알이를 낳는 이것을 業識이라고 합니다. 보통사람이 내마음이다 네마음이다 하는 것은 이 알음알이가 몇 차례나 굴리어진 현상인데 세상 사람들은 이걸 전부 마음이라고 해요.
허공이 하나니 지도리(樞)가 하나요 지도리가 하나니 목숨도 하나입니다. 이 지도리(누리의 알맹이)는 絶對의 자리이며 虛空이 하나라는 것도 절대에 속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목숨도 절대에 속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숨자리, 생명자리는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지만 이 가죽부대인 몸뚱이를 끌고 다니니 절대자리 아닙니까? 김서방, 박서방하며 모습을 나투는 것은 因緣과 時節에 따라 다르지만 온누리는 生命이 하나입니다.
여러분의 절대성자리가 그대로 의젓하건만 그 본래의 마음은 여러분의 알음알이가 분별을 해서 까마득히 숨겨져 있습니다.
허공에 기미를 나투면 이것이 성품이며, 성품에서 기미를 거두면 허공입니다. 허공에서 기미를 나툰다고 해서 기미가 다른데서 오는 것이 아니며, 성품에서 기미를 거둔다고 해서 이 기미를 다른 데로 갖고 가는 것이 아니니, 전부 우리 마음의 작용일 뿐입니다. 이 때문에 허공과 나의 성품은 갈라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허공이라는 것도 하나의 말마디에 불과하므로 호호막막한 이 허공도 남의 것이 아닌 나의 허공, 즉 나로서인 허공입니다.
이 모습을 끌고 다니는 그 자리가 허공이며 지도리며 목숨입니다. 여러분은 숱한 지견에 사로 잡혀있기 때문에 이 절대성 자리를 굴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견의 당처도 비어있음을 안다면 바로 여러분이 말하는 그 자리가 절대성이라는 느낌이 옵니다.
극락이든 천당이든 지옥이든 다 같이 어울려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이 불빛과 저 불빛이 어울려 있으면서도 서로 충돌이 되지 않는 것과 같아요. 충돌이 되지 않으면서도 엄연히 같이 있습니다.
우리의 성품자리는 아는 것도 없고 모르는 것도 없고 착한 곳도 없고 악한 것도 없으며 깨친 것도 아니고 미혹된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 우리는 하늘과 땅이 생기기 이전의 소식에 앉아 있습니다. 이 우리의 마음자리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며, 나거나 죽는 자리도 아니고, 깨쳤다거나 미혹한 자리도 아니고 正道니 邪道니 하는 자리도 아니고 알거나 모르는 자리도 아니고, 밝은 것 도 어두운 것도 아닌 자리예요.
죄와 복이 서로 상쇄가 안됩니다. 절대로 안됩니다. 만약 상쇄가 된다면 이미 죄는 죄가 아니고 복은 복이 아닙니다. 그건 죽도 밥도 아니지않습니까? 죄와 복은 엄연한 것입니다. 티끌만한 죄라도 복과 상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죄의 소멸도 스스로가 없애야 하는 겁니다. 없앤다는 것은 죄의 당처가 비었음을 뼈져리게 느끼는 데에서, 아울러 다시는 그런 번뇌를 하지 않는 데서 자연히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완전히 녹여 없애려면 견성(見性)을 해야 합니다. 견성을 해야만 그 당처가 비었음을 뼈져리게 느끼게 되니까요.
경지에 오르면 生死도 쓰고 善惡도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선을 굴려서 악을 만들 줄도 알아야 하고 악을 굴려서 선을 만들 줄도 알아야 하는 겁니다.
내가 절을 하면서 예불을 하는 데 그 예불은 내가 이 몸뚱이를 시켜서 내 마음속에 모셔진 부처에게 하는 겁니다. '나'로서인 백봉이 '나'로서인 부처님에게 하는 거예요. 이 '나'를 떼놓고는 부처님이 있을 수 없어요. 나의 슬기속에 부처님의 명호가 모셔져 있거든요.
내가 아미타불 하게 되면 내가 바로 아미타불이 되는 겁니다. 이건 법성신분으로 봐서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관세음보살 하거나 아미타불 하면 그 자리엔 내가 없고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만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색신도 관세음보살이 나툰 여러분의 색신입니다. 또 문수보살 하면 여러분이 바로 문수보살이예요. 문수보살이 나툰 색신이예요.
어떻게 해야 이 습성에 이끌리지 않겠습니까? 눈으로 무엇을 보든 그것과 타협하지 않고, 귀로 무슨 말을 듣든 그것과 타협하지 않아야 합니다. 타협하지 않는다는 건 거기에 들어앉지 않는 것입니다. 일체만법이 허망한 것인데 거기에 시시비비를 따지면서 들어앉을 필요가 없어요.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가 두 뿔의 토끼라는 데 이거 무슨 말입니까? 이건 누리의 진리를 그대로 뜻하는 말입니다. 욕계 색계 무색계도 실답지 않는 거짓이고 우리의 몸뚱이도 실답지 않은 거짓입니다. 그러나 명자는 있어요! 한 생각으로 태양을 지구를 만들어 내도 실다운 것이 아니며, 모습이란 생겼으면 반드시 없어지는 것입니다. 실다운 것이 아니거든요
여러분은 서울에서 여길 왔어요. 하지만 온 것은 헛것인 여러분의 몸뚱이인 모습이지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그 자리는 오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 자리가 오고 가는 것이 있다면 뭔가 머리털 하나라도 있어야 하는 데 그 자리는 터럭 하나 없는 깨끗한 자리거든요. 뭐가 있어야 가고 오는 것이 있죠.
여러분은 지금 生死問題를 해결하려는 마당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믿어야 되겠습니까? 먼저 나의 몸뚱이는 느낌이 없는 가짜이고,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것은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자리로서 허공과 한가지이며 영원한 주체성이란 걸 믿어야 합니 다.
참된 진리는 무엇입니까? 이 참된 진리를 말하는 자는 여러분입니다., 이 여러분의 아는 자리, 여김(念)자리가 참된 진리예요. 슬기로운 사람은 이 자리가 텅 비었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는 5溫, 12處, 18界도 없고 나아가 苦集滅道의 四諦도 없다고 하는 것이예요.
고집멸도도 假有고 부처도 가유고 중생도 가유입니다. 눈 귀 코 혀 몸 뜻 등도 전부 가유이예요. 무명도 있고 범부도 있고 극락도 있고 열반도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모습으로 있는 것은 사실이나 가유예요. 전부 거짓으로 있습니다. 이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데,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니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고 설법하신 것입니다. 무명 생사 열반이 다 가짜라도 그 가짜를 무시하는 법이 아니예요. 가짜인 명자를 걷어잡고 우리가 行을 하는 것이 아닙니 까?
우리의 몸뚱이도 거짓으로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공부를 지어가는 입장에서는 거짓인 이걸(육신을 말함) 방하착(放下着: 내려놓다)하라는 거예요 이걸 방하착하기 전에는 천만년 공부해 봤자 안됩니다. 그리고 이 방하착은 슬기있는 사람이라야 되는거예요. 슬기없는 사람은 지금 내가 말한 걸 납득못하기 때문에 이 색신을 걷어잡고 모습놀이를 하는 것입니다.
如來는 글자 그대로 '온 듯'입니다. 태양도 온 듯하고 바람도 부는 듯하고 산하대지가 온 듯해서 일체의 모습이 모두 '듯'이예 요. 미운 듯, 예쁜 듯, 죽은 듯, 사는 듯, 밥을 먹는 듯, 오는 듯 가는 듯 어느 것 하나 '듯'아닌 것이 없어요. 眞如도 '참인 듯' 해서 도저히 끌어 잡을 수가 없습니다. 팔만대장경인 듯이므로 부처님이 한 말씀도 하지 않았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 이 '듯'을 잘 굴리면 삼천대천세계의 진리가 여러분 손바닥 위에서 놀게 돼요. 이 '듯'을 여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가짜놀이를 안하면 되는데 - 그 성품자리를 놓치지 않으면 가짜놀이를 안하게 되는데 - 어떤 방법으로 가짜놀이를 피해 야 할까요? 바로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멸진정에 들어가기 전에는 어떤 마음씀씀이를 가져야 할까요? 어두울 땐 밝은 것을 생각해야 하고 밝을 땐 어두운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두울 때 밝은 걸 생각하고 밝을 때 어둠을 생각하면, 어둠은 어둠이 아니고 밝음은 밝음이 아니면서 평등하게 됩니다. 이 말은 어둠에도 머물지 않고 밝음에도 머물지 않는다는 뜻이니, 생각한다는 건 물론 내 마음을 조복(調伏)받는 방편의 말이예요. 진정으로 밝은 성품과 어두운 성품을 안다면 생각하고 말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惡으로 시방성현을 제도할 줄 알아야 하는데, 아무나 악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악을 쓸줄 아는 사람은 선도 쓸 줄 알아서 삼악도의 중생을 제도합니다. 이 악을 쓸 줄 모르는 것도 한 쪽에 치우치는 것이예요.
어떻든간에 여러분은 '허공으로서의 여러분'이라는 것을 참구해 주십시요. 왜냐하면 여러분이 허공으로서의 여러분이 아니라면 평생가도 공부되는 법이 아닙니다. 虛空으로서의 여러분을 다른 말로 하자면 空劫人입니다.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으면서 별별 법을 다 굴리는 이 空劫人 자리는 허공과 꼭 같기 때문에 지구의 생성이나 욕계 색계 무색계의 생성이 문제가 되지 않으며, 중생이니 부처니 문제가 되지 않으며, 시공간이 끊어져 있기 때문에 몇 살이니 하는 것이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一體萬法이 이루어진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인정을 하면서도 이 일체만법이 항상 변화하는 실답지 않은 허공성으로서 인생살이의 놀음놀이라고 보는 겁니다. 이렇게 본다면 나무는 나무대로 인정을 하면서도 나무가 아니고, 땅은 땅대로 인정을 하면서도 땅이 아니라서 전부 나의 놀음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경우 라도 名字에 들어앉아서는 안됩니다.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허공이 말하는 것이고, 허공이 듣는 것이고, 허공이 보는 것입니다. 눈과 귀와 입은 기관일 뿐 진짜 '나'는 허공입니다. 우리의 몸뚱이도 허공성이기 때문에 법칙에 따라 어린애에서 어른 노인으로 변하는 것이예요. 따라서 우리 몸은 상대적으로 쓰는 기관이며 나의 주인공은 허공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납득이 안가고 실감이 오지 않는데, 그때는 눈, 귀, 입에 성품이 없다는 걸 자꾸 의심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부처도 얻지 못하고 중생도 버리지 못하는 이 허공성, 법신 자리를 실감해야 합니다.
유(有)인 사물을 공(空)으로 보되 공에 들어앉지 말아야 해요. 유와 공을 뛰어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온누리에는 별도 있고 태양도 있고 내 몸도 있는데 이 모든 것을 공으로 봐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무시하고 공으로 보라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인 모습으로 인정을 하고서 공으로 보라는 것이니, 이것이 유와 무를 둘로 보지 말라는 뜻이예요.
온누리에 벌어진 일체만법이 각각 모습이 다른 실답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라고 하는 데 그 실답지 않은 것의 뿌리는 하나의 허공입니다. 事적으로 보면 나무와 땅이 있지만 헛것인 명자에 지나지 않고, 理적으로 보면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것이 진짜 나무요 땅입니다.
이 색신인 가죽주머니를 소중히 생각할지언정 이 색신을 진짜라고 보아선 안됩니다. 법신에 앉아서 변화하는 색신을 굴릴지언정 들어앉아서는 안되니, 들어앉아서는 꼭두각시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이 도리를 알면 古佛을 친견하는 도리가 여기서 나옵니다 . 이거는 좀 어려워요. 그러니 항상 그 마음을 놓치지 않고 죽 나가면 부처를 친견할 수 있습니다.
나고 죽는 것은 모습인 몸뚱이지 法性體는 나고 죽는 것이 아닙니다. 이 법성체를 깨쳐서 생사의 성품이 비었음을 안다면 생사가 없는 것이며, 이미 생사가 없다면 생사와 상대되는 열반도 없는 것이예요.
우리의 마음자리는 깨끗한 거울처럼 도저히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는 데 눈을 통해 보고 입을 통해 말하기 때문에 그 존재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맑은 거울과 같은 마음자리이기 때문에 경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짜를 붙잡고서 내 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심경일여라는 말이 있는 것이예요. 새의 소리를 붙들고서 새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을 볼 수가 없어요. 새의 소리와 새의 마음은 둘이 아닌 心境一如입니다. 이 이치를 깨달으면 온누리 전체가 우리 성품과 한가지입 니다.
法은 글자에 있지 않습니다. 법은 말이 없는 無言에 있어요. 그러나 말이 없는 무언을 나타내려면 말이라야 합니다. 그래서 없는 법을 나타내려면 유법이라야 하는 것이예요.
대학까지 나오며 읽은 몇천 권의 책과 신문 잡지 읽고, 선생에게서 들은 지식이 지금 어디 있죠?
경계에 닿찔려서 일어나는 마음은 상대성으로 자꾸 변하며, 절대성자리인 淸淨法身에서 온 것임을 부처님은 알았습니다. 이 청정법신은 하늘과 땅을 앞서 있는 것이며 성을 내려면 성을 내고, 춤을 추려면 춤을 추고, 한 생각을 일으키면 일체만법이 벌어지고 한 생각을 거두면 일체만법이 고요적적합니다.
우리 일단 일초에도 수없이 변하는 육신을 부인해 봅시다. 그러나 변함없는 허공신, '허공으로서의 나', 다시 말해서 이 꽃을 볼 줄 아는 이 놈, 저 목탁소리를 듣는 이 놈을 부인하겠습니까?
바로 이 성품, 이 마음이 허공입니다. 하지만 마음은 마음대로 따로 있고 허공은 허공대로 따로 있어서 우리의 마음이 허공을 싸고 있는 건 아닙니다. 사실 마음이 허공이라는 설법은 이해하기가 어려워요. 지금까지 우리는 명자놀이 모습놀이에 닿찔려서( 抵觸) 절어 있기 때문입니다. 설사 내가 명자놀이, 모습놀이를 청산하고 싶더라도 자기도 모르는 잠재의식 때문에 자꾸 끄달려요 . 허공이 따로 있고 마음이 따로 있다면 법은 둘 아닙니까? 그러나 법은 하나입니다.
태양도 허공성이요 산도 허공성이요 돌도 허공성입니다. 이처럼 허공성은 하나입니다. 왜 허공성에는 둘이 없을까요? 허공에는 아무 모습이 없으니 어찌 둘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과학적으로 이렇게 따져 들어가면 인생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문제도 아닙니다. 누리의 문제를 그대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보는 그놈을 눈으로 삼으라는 말이 납득이 갈거예요. 보는 그놈을 찾아본들 못 찾습니다. 찾으려고 하는 그 놈이 보는 건데 어떻게 찾는단 말입니까. 내 마음을 내가 찾는다고 하지만 내마음을 찾는 그 마음이 내 마음인데 어느걸 찾느냐 말예요. 그러니 보는 그 놈도 허공성이고 마음도 허공성이에요. 이 허공은 영원성입니다. 모습이 없기 때문에 영원성이 안될래야 안될 수가 없습니 다. 따라서 모든 걸 종합해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허공은 없는 것이며 마음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더라도 우리는 말을 나투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을 나투어서 허공이란 말도 붙이고 마음이란 말도 붙이잔 말입니다. 이렇게 이름을 붙여서 우리가 굴리잔 말입니다. 물론 굴리는 것도 거짓이예요. 하지만 거짓인 줄 알고 우리가 굴리잔 말입니다.
부처님도 이 몸을 나투어서 절대성을 굴리는 재미를 가졌고 중생들도 이 몸을 나투어서 절대성을 굴리는 재미를 가졌지만, 부처님은 굴리는 재미를 알아서 굴리지만 우리는 절대성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어요. 그만 어머니가 낳아주셨다는 육신에만 들어앉아서 다시 말해 상대성에만 들어앉아서 모든 것을 미화시키고 승화시키려고 할 따름입니다.
사람 하나가 온누리의 존재이며, 온 누리와 사람이 둘이 아닙니다. 영도 앞바다 물과 태평양 물이 둘이 아닌 것처럼 공연히 우리가 분별을 가지고 이리 저리 갈라놓기 때문에 둘일 뿐입니다.
모습이 없는 허공은 無始 無終일 수밖에 없으며 바로 이 허공을 바탕으로 유정 무정의 상대성의 차별을 나누어서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슬기자리이며, 따라서 슬기자리야 말로 허공의 주인공인 것입니다.
김보살이 빙긋이 웃고 있네요. 누가 웃습니까? 허공이 웃는 것입니다. 허공이 웃는 것이 김보살의 얼굴가죽주머니를 통해서 웃음으로 나타난 겁니다.
이 자리가 어떤 모습도 없어서 걷어잡아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신성한 절대성자리지 우리가 걷어 잡을 수 잇다면 그까짓 것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이처럼 붙잡을 수 없는 데도 마음대로 이 입을 통해서 말을 하고 이 손을 통해서 온갖 형용을 하니, 이 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참 고맙고 거룩해서 절이라도 하고 싶어요. 하하
이 자리는 밝은 것도 아니고 어두운 것도 아니기 때문에 밝은 것도 나투고 어두운 것도 나툰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착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착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는 겁니다. 긴 것도 아니고 짧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어요.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기 때문에 남자도 나툴 수 있고 여자도 나툴 수 있습니다. 성스러운 자리도 아니고 범속한 자리도 아니기 때문에 거룩하게도 되고 범속하게도 되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 몸뚱이를 가리켜서 '나'라고 하지만 그건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물론 이 색신이 법신의 그림자인 건 틀림없어 법신은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기 때문에 방편으로 이 색신을 대신 내 놓고서 '나'라고 하지만 실제로 '나'는 아니거든.
여러분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해도 설마 하면서 실랑이를 벌여요. 이 때문에 안되는 겁니다.
여러분의 색신은 앞엔 얼굴이, 뒤엔 뒤통수가 있고 가슴과 등이 있지만 여러분의 진짜 몸은 안팎이 없이 텅 비었습니다. 이 텅 빈 가운데 슬기가 있을지라도 그 슬기 역시 모습이 없으며,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닙니다.
자식들 잘 키우고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공경하면서도 이 모든 걸 비었다고 알아야 합니다. 인연에 따라 헛것을 나투어서 남편이다 아내다 자식이다 하더라도 이 색신에 의한 것이지 그 당처(當處)는 비었다는 걸 안다면, 자식을 키워도 잘 키울 수가 있 습니다. 이 법은 너무나 높아서 슬기로워야지 깨트리지 어리석어서는 도저히 안되는 겁니다.
이 슬기 자리는 밝은 것도 아니고 어두운 것도 아닙니다. 밝은 것도 아니고 어두운 것도 아니기 때문에 밝은 것이 오면 밝은 것을 받아들이고 어두운 것이 오면 어두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도리를 확실히 알면 누리가 어디서 왔는가도 압니다. 이 자리는 절대성자리이기에 自心正覺汝佛寶, 즉 스스로의 마음을 바르게 깨친 너의 불보(佛寶)라는 겁니다. 너라는 뜻의 여(汝) 자를 놓은 것은 이 절대성자리가 여러분에게 다 갖춰진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불보는 깨달은 자리입니다. 여러분이 아침에 일어나서 밥먹고 일하러 나가는것도 다 이 깨달은 자리가 하는 겁니다. 모든 모습이 실답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법보(法寶)입니다. 온갖 법에 응하여 작용하면서도 어느 곳에도 머물지 않으며, 인연에 따라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바로 승보(僧寶)입니다.
개별적인 인격을 나투면서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자리를 완전히 잊어버리고서 받은 몸뚱이에 대해 희노애락을 느끼는 거예요. 하지만 이건 꿈입니다. 사실은 나가 없는 데도 그 나를 좋게 하고 어떻게 하려는 데서 생기는 거예요. 간탐심은 '나'라고 하는 데서 생긴 겁니다. 간탐심을 제거하면 我相이 없어지고 아상이 없어지면 人相 衆生相 壽者相도 싹없어집니다.
구리새가 날아오는 것이 정법입니까? 무정법입니까? 나는 더 이상 말을 못하겠어요. 이 이상 더 말을 하면 말이 틀려버립니다.
'萬古長空 一朝風月'이 하도 좋아 '千里江山이요 萬年綠水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성품은 참으로 큽니다. 지구는 없어져도 허공은 없어지는 법이 아니예요. 우리 생명은 허공과 꼭 한가지입니다. 다만 그 자리는 아는 것도 없고 모르는 것도 없는 데, 이 때문에 아는 것도 나투고 모르는 것도 나툽니다. 선악도 없는 데 선도 악도 나투고, 迷悟도 없는 데 迷도 悟도 나투어요.
사람의 몸을 받은 이 기회에 어찌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겠습니까.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바보예요. 바보 중에서도 바보예요.
아는 것보다는 느끼는 것이 불법입니다. 느끼면 바로 자기가 느낀 그 자리로 되어버려 그대로 느껴버리면 자기가 산하대지이고 산하대지가 자기인 것입니다.
자비에 철저하기란 어려운 것이예요. 왜냐하면 我相을 여의기 전에는 자비에 철저할 수가 없거든요.. 아상을 완전히 여의는 데서 자비가 철저해집니다. 머리털만한 아상이라도 있으면 자비에 철저하지가 못합니다.
공부가 돼서 道가 높을수록 魔도 높은 거예요. 이거 참 이상한 겁니다. 어느 정도 공부가 되면 스스로 알게 되는데 그에 따라 魔도 높아져요. 그래서 까딱 잘못하면 魔 - 삿된생각 -에 지게 됩니다. 이 때문에 소신을 밀고나가는 사람은 대장부이자 지혜로 운 사람이라야 되는겁니다. 나는 여기에다 덧붙여서 복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겁니다.
불법은 느낌으로 새겨야 합니다. 무량수불하면 무량수불이 돼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위산이 있던 시대로부터 천년 후에 여기서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 참말로 우리가 위산보다 천년후의 사람인가요? 지금 이 말을 하는 생각, 이 생각자체에 천년세월이 흘렀습니까? 잘 생각해봐요. 흐를 것이 없어. 생각있음과 생각없음의 묘한 그 느낌, 그 느낌이 천년전과 다른가요? 모습은 달라져도 그 느끼는 자리는 꼭 한가지입니다. 그 자리에 거래(去來)가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느낌 하나 뿐이거든요.
밝음으로 오면 밝음으로 치니 밝음은 밝음이 아닙니다. 어둠으로 오면 어둠으로 치니 어둠은 어둠이 아니예요. 어둡지도 않고 밝지도 않은 것이 본래의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가 묘합니다. 일으키면 있고 일으키지 않으면 없어요. 그러니 이 자리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면서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아울러 쓰고 있어요.
내가 이 작대기 하나를 들었습니다. 내가 허공 하나 들은 것 아닙니까? 세존이 꽃한송이 든 것도 -딱 들어맞는 말은 아니겠지만- 시방 삼천대천세계를 든 것이나 한가지입니다. 성품으로 봤을 때 꽃한송이와 삼천대천세계는 둘일래야 둘일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이 꽃한송이 드신 소식은 씀이 (用)을 나툰 것이며, 허공 중에서 지구나 태양을 나툰 것도 묘한 씀이(妙用)을 나툰 것입 니다.
이 몸뚱이 자체가 느낌이 있든 없든 누리의 지도리가 나툰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몸뚱이는 천년만년 사는 것이 아닌데 그 이유는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씀씀이가 굴리어 질 때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그 자리는 엄연히 있으며, 엄연히 있기 때문에 그에 알맞는 씀씀이를 굴립니다. 여러분이 이거만 해결하면 더 공부할 것이 없어요. 그 다음에 닦기만 하면 됩니다. 그럼 닦는 것은 무엇을 닦을 까요? 사실 닦을 것도 원래 없습니다. 원래는 없지만, 우리는 모습에 치중한 그 버룻으로 꽉 찌들려 있기 때문에 이 습기가 좀채로 없어지질 않습니다. 그래서 그 버룻을 닦는 겁니다.
수보리가 텅트인 법신자리로서 부처님을 보았듯이 여러분도 지금 이 자리에서 몸뚱이를 걷어잡으면서도 - 사실 걷어잡지도 못하 지만 - 여러분의 무상신(無相身)을 그대로 느껴야 합니다. 이 자리에서 여러분의 무상신을 느낀다면 즉각 360도 달라집니다. 이건 머리털 같은 그 생각 하나의 차이입니다.
젊은 것은 젊은 대로 보내버리고, 늙은 것은 늙은 대로 보내버리고, 남자는 남자대로 보내버리고, 여자는 여자대로 보내버리면서 관여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전부 보내버리면 진짜 '나'가 말뚱말뚱하게 있거든요. 그러니 여러분들은 생사를 쓰더라도 그 생사에 관계하지 말고 전부 보내어 버리세요.
여러분이 갖고 있는 본래의 청정법신 자리는 범부에도 떨어지지 않고 성현에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거룩하다느니 범속하다느니 하는 것도 하나의 띠끌이니까요. 어찌됐든 마음의 파도를 일으키면 그 마음자리는 꾸정거려지게 마련인데, 그 해말쑥한 자리를 거룩하다 범속하다 하면서 꾸정거릴 필요가 어디 있겠느냔 말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과연 실재하는 것일까요 ? 우리의 몸뚱이도 이름뿐인 몸뚱이요, 생사도 역시 이름뿐인 생사입니다.
요즘엔 공부하는 手段과 方便이 달라져야 한다고 내가 말하는 겁니다.
여러분을 내가 설법하는 이 자리에까지 데리고 온 것도 바로 이 슬기자리, 絶對性 자리입니다. 이 자리를 아는 것이 바로 見性 이며, 이 자리가 바로 부처자리이며 보살자리에요.
여러분의 色身은 아무 지혜도 없는 허망한 물건이기 때문에 나는 여러분의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자리를 향해서 얘기하는 겁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罪와 福이 서로 상쇄가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죄성과 복성이 그 성품은 같을 지라도 行에 있어서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뉘우치긴 뉘우칠지언정 속죄를 위해서는 罪의 當處가 비었다는 생각을 항상 놓치지 않고 이 色身을 통해 功德行을 이루는 길입니다. 이렇게 되면 罪의 性品은 도리어 福의 길로 바뀜니다.
여러분의 주인공인 昭昭靈靈한 자리, 그 絶對性자리, 그 主體性 자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에요. 이 자리는 지구가 생기기 전부터 하늘과 땅이 생기기 전부터 있는 겁니다.
時間은 모습이 나타나서 꺼질 때까지의 사이입니다. 空間은 그 모습이 꺼진 상태에서 다시 나투는 사이를 공간이라 합니다. 결국 시간과 공간은 하나라는 걸 두고 한 말이예요.
여러분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因緣에 따라서 남자몸을 받기도 하고 여자몸을 받기도 하는데 그 當處는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앞소식인 자리입니다.
허공은 모습이 없어 보지 못하는 것이지만 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슬기의 눈을 갖추면 볼수 있는 것입니다.
출가의 진짜 목적은 좋다 나쁘다, 잘났다 못났다, 부처다 중생이다 하는 분별을 하지 않고 그대로 본래의 소식을 걷어 잡아서 자신의 聖胎를 키우는 것입니다.
그러하니 집에 가서 아침에 세수를 하거나 밥을 자시면서도 나에게있는 수많은 지식이 어디 있는지 자꾸 의심해 보세요.
내마음을 내가 찾는다고 하지만 내마음을 찾는 그 마음이 내 마음인데 어느걸 찾느냐 말예요. 보는 놈을 눈으로 삼으라고 하지만 찾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사실 이거 말이 안되는 겁니다. 나도 근사하게 방편으로 하는 말이지 이 자리를 어떻게 말을 합니까?
부처님은 하늘과 땅이 나뉘기 전 소식에 앉아서 하늘과 땅이 나뉜 뒤의 소식을 걷어 잡고 다시 돌아올 줄 알지만 중생들은 하늘과 땅이 나뉘기전 소식에 있으면서도 이를 깜박 잊어 버렸어요.
어느것이라도 이름자가 붙으면 相對性이에요. 말마디가 붙지 못하는 도저히 표현될 수 없는 이것이 絶對性이에요.
난 죽을 수만 있다면 참으로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죽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이에요. 우리가 축생몸도 받을수 있고 부처몸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재미가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난 재미없어요.
사실 여러분은 꿈속에 있습니다. 잠자면서 꾸는 꿈은 제 2의 꿈이고 지금 눈을 뜨고 꾸는 꿈은 제1의 꿈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일체의 모습이 진짜가 아닌데 진짜로 알고 있으니 이게 꿈 아닙니까?
아무튼 난 이번 철야정진에서 이 因을 심은 것을 하나의 큰 성과라고 생각해요. 여러분들이 도솔천에서 몸을 받을수 있는 因이 심겨졌다는 것은 결코 거짓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 도솔회상에서 다시 만나 거기서 또 공부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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