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솔(龜龍松)을 찾아서
시월의 들판은 어디를 가나 결실을 앞둔 풍요로움으로 마음이 넉넉했다.
솔을 찾아 전국 기행을 나서면서 새삼스럽게 느껴졌던 것이 우리의 산하와 들녘 그리고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는 시골 마을들이 너무나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을 구석구석 까지 잘 닦여진 포장길과 문화혜택을 두루 갖춘 농촌을 보면서 정말 살기 좋아 졌다는 것을 느꼈다.
차는 구불텅 거리는 비탈길을 몇 굽이돌아서 산을 오르고 있었다.
이 굽이만 돌면 마을이 나오겠지 나오겠지 하던 것이 수십 구비 산길을 돌아 산 정상에 다 와서야 조그마한 마을을 하나 만났다.
십여 채의 집들이 산비탈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 이렇게 높고 깊은 산골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 나그네의 눈에는 마냥 신기할 뿐이었다.
마을의 옛 이름은 나곡리로 지금은 대 여섯 가구만 사람이 살고 있고 나머지 집들은 빈집들이었다.
뉘엿거리는 가을 오후의 햇살을 받아 계곡 안은 황금빛으로 출렁거리고 있었다.
한 눈에 쏟아져 들어오는 산골의 풍경은 그야말로 경악과 충격으로 큰 숨이 턱 가슴에 내려앉았다.
그 마을 아래쪽 계곡 한 가운데 도올하고 거대하게 솟아 있는 신전,
산골 하나를 통째로 안아내며 누워 있는 푸른 거북,
아니 또아리를 틀고 하늘을 향해 비상을 꿈꾸며 눈빛 번뜻이는 한 마리의 거대한 용이 앉아 있었다.
계곡 산비탈의 논에 황금빛깔 벼들과 대조적인 푸른 용이 꿈틀거리며 가을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숨쉬고 있었다.
그 거대한 몸짓으로 산골을 굽어보며 마을을 지키고 땅을 밟고선 자태는 신령스러움 그 자체였다.
새로움에 대한 기대와 설레임으로 쌓여 있던 마음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감당할 수 없는 전율로 눈가에 이슬을 맺히게 했다.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땅을 치며 큰 골 안으로 메아리 치는 것 같았다.
긴장된 발 거름은 거대한 그의 힘에 이끌려 신전 앞으로 옮겨갔다.
가까이 다가갈 수록 그의 자태가 더욱 선명해 지면서 나의 존재는 점점 적어지고 분산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힘은 나의 이성적 판단과 분별을 내려놓고 텅 빈 가슴으로 나를 끌어 드렸다.
'그래 이런 것을 두고 기운(氣運)이라 하는 거지'
'용트림!'
거대한 용이 땅 속 깊숙이 몸을 내리고 하늘로 몸통을 뒤틀며 비상을 하고 있는 모습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 일 께다.
그 큰 몸통에서 뻗어 나온 다섯 가지의 힘찬 기운과 사방으로 길을 내며 주욱 뻗어나간 그 가지에서 뒤엉켜 있는 손들 그 틈을 메우고 있는 푸른 눈빛들, 그 눈빛을 감싸고 있는 기운들,
사백 년의 세월동안 그 푸른 눈빛들은 깨어 있으면서 그렇게 하나되기 위서 하늘로 하늘로 승천을 기다리는 한 마리의 거대한 청룡이었다.
그런 긴 세월의 명상과 인내의 기세 앞에서는 그 누구도 겸허(謙虛)와 숙연(肅然)해 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리라.
그 어느 바람결에 작은 씨알이 땅의 기운을 먹고 하늘로 머리를 두고 발을 땅에 둔 것이 이렇게 긴 세월을 키우며 한 곳에서 사백 세월을 당당히 뿌리내리고 살아 있는 생명의 존재와 삶의 가치를 경이(驚異)롭고 숭고(崇高)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으리라.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들의 삶이 이 존재 앞에서는 얼마나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작은 존재 인가를 느끼게 했다.
가만히 양팔을 벌려 거대한 용의 몸을 안아 보았다.
내가 안은 그의 몸은 불과 한 가슴의 작은 공간이었지만 대지의 혈맥을 움켜잡고 꿈틀거리며 힘차게 뿜어내는 기운이 온 몸으로 와 닫아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양 손끝에 다가오는 껍질의 감촉은 분명 존재를 확인 시켜주는 인식일 것인데 첫 만남의 말은 무엇으로 해야 하나,
텅 비어버린 머리 속에 가물거리며 첫 인연의 만남의 단어가 고작 "고맙습니다." 다른 어떤 말로도 하나된 마음을 나타낼 수 없었다.
하지만 말 없는 말들이 몸 속으로 흐르고 있었다.
소리 없이 들려오는 관음(觀音)이었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대가 여기 있기 때문 일 것이며 그 존재(存在)와 현상(現狀) 속에서 시공간(視空間)을 초월한 본래(本來)의 자리(本性)가 이 순간일 것'이라며...
나는 준비한 술을 한잔 대접했다.
사십 세월을 밟고 온 나의 생에서 가장 고귀한 감동과 벅찬 환희를 안겨준 존재에게!
그의 신전 밑에는 그의 이력서가 붙어 있었다.
우리 사람들에게는 그런 수치와 기록이 중요하니까, 나이400살 키18m 가슴둘레550cm 양팔넓이25m, 1619년 연흥 부원군 김제남의 육촌뻘 되는 사람이 이 나무 밑에서 집을 짓고 살았다는 이야기 등등
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한 장의 화선지 위에 존재를 담는 것이 가소로운 일 인줄 알면서도 열심히 욕심을 내고
잠시 마음에 여유를 갖고 이리저리 마을을 둘러보았다.
동네 어른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구룡솔(할머니솔)보다 더 큰 나무(할아버지솔)가 마을 뒷산에 있었다고 했다.
수 년 전에 병충해로 고사되고 지금은 잔해만 남아 있다고 했다.
길도 없는 산 속을 헤매면서 그 할아버지 솔을 찾아냈다.
앙상한 가지들이 그 옛날의 웅장함을 말 해주듯 푸른 잡목들 틈에서 우뚝 솟아나 있었다.
그 기세는 산 전체를 호령하고도 남음직한 위풍당당한 형세를 갖추고있었다.
그 죽은 잔재들이 여기저기 땅위에 뒹굴고 있는 모습들은 다시 존재할 그 싹들을 위해 거름이 되고 땅이 되고 있으며 벌써 수십년이 됨직한 이세들이 자라고 있었다.모든 자연법 인 뭇 생명의 순환본성(緣起法)을 보면서 참 사랑과 생사의 의미를 다니 느끼게 했다.
마을 사람들은 죽은 나무이지만 아직도 신성함이 남아있는 존재로 여기며 여기저기 금줄을 치고 지성을 드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오늘밤은 존재와 함께 동침을 하기로 했다.
가을로 익어가는 산골 밤은
풀벌레 소리에 달 물이 차 오르고
푸른 손으로 연주하는 신성(神聲)과
그 사이로 달빛 부스러지는(松影) 소리와 산새들 소리 어우러져 천상의 음악이 연주되고
존재는 긴 세월 속에 담아 두었던 마을 이야기와 먼 그리움들을 두런두런 들려주었다.
천년의 만남을 지켜보는 별들도 우루루 몰려와 귀를 세우고 있었다.
기다림이 무엇인지를
사 백년 세월과 물소리가 하나다 는 것을 알려준 존재의 마음을 꼬옥 껴안으면서
"임천(林泉)을 초당(草堂)삼고 석상(石床)에 누었으니
송풍(松風)은 거문고요 두견성은 노래로다
건곤(乾坤)이 날더러 이르되 함께 늙자 하더라."
솔과 두견이 노래하는 선계에서 함께 노닐자는 너무나 유명한 송계연월옹(松桂烟月翁)의 시조 한 수를 벼개하고 누우니
화엄(華嚴)의 밤은 더욱 깊은 사랑을 느끼게 했다 .
경남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에 있는 천년기념물
제 298호인 구룡솔(龜龍松)을 만나던날
둘즈믄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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