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門열면 밝은世上-나 외에 우상을 섬기지 마라! 나(我)는 누구인가? 우상(愚

통융 2011. 4. 25. 15:37

 

門열면 밝은世上

-나 외에 우상을 섬기지 마라! 나(我)는 누구인가? 우상(愚相)은 무엇인가?-

                                                                                                   세계불교세심종 황룡사포교원 주지 통융 합장

 

독교성경에 나오는 십계명 중에 가장먼저 등장하는 계명이 나 외에 다른 우상(偶像)을 섬기지 마라는 내용이다.

불교의 대표적 경전인 금강경(金剛經) 제26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에는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 라고 했다.

만약 형상(색신)으로써 나를 보려하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함이라 진실로 부처를 보지 못하리라 즉 본성인 불성(佛性)외에 다른 우상을 섬기는 것은 외도라고 한 것이다.

 

여기 성경이나 불경에서 등장하는 나는 누구인가? 각각 하나님과 부처님일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의 나 외에 우상(偶像)을 섬김 한 우상은 뜻은 무엇일까. 나 외에 어떤 형상(形象)적 대상(對象)을 말한다고 보는데서 문제가 있는 것이다. 금강경의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로 해석해 보면 너무나 쉽게 이해가 된다. 즉 빛과 소리로써 구분하여 나를 보려고 하는 자 즉 하나님을 상으로 인정하고 다른 형상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삼위의 성품에 위배된 마음 즉 분별심(分別心)이 일어남을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결국 나(我相)라는 존재성으로 너(人相)라는 분별상이 생기면 우상(衆生)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이 하나님의 형상(形象)을 섬김으로 스스로들 마음속에 우상(愚相) 섬김이 되는 아이러니를 알아야 한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원래부터 우주법계의 가득한 법신(法身=宇宙精神)으로 존재하신다.

이것을 석가는 불성(佛性)이라 했고 500년 뒤에 구세주인 예수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이름을 달리 했을 뿐이다.

이러한 우주의 정신을 바로 알지(正見) 못하고 다른 정신(我見)의 섬김을 염려한 계율들이다. 사도바울도 갈라디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갈2:20)‘나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산다고 했다.

결국 내안에 온전하게 하나님의 성품을 영접하여 나의 존재(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法相,非法相)를 완전히 버려 청정하고 텅빈(空)상태 일 때 바로 성령 충만이요 온전히 하나님의 자식이 되는 것이다. 내안에 본래 성성한 불성을 바로 알아차림으로 부처로 깨달음을 갖는 순간과 성령이 충만함이 무엇이 다른가, 여기서는 너와나의 분별이 없다 시기와 폭력이 없고 탐진치(貪瞋癡)의 삼독(三毒)의 애욕이 없다. 즉 무소유의 여여한 성품인 사랑과 자비만 충만한 상태를 하나님이라 해도 좋고 부처라 해도 좋고 아니면 우상이라 해서 무엇이 문제 될 것인가! 다만 이름이 그것들일 뿐인데,

즉 하나님의 성품(佛性)은 우주만물에 꽉 채워진 사랑뿐이고 이를 온전한 사랑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식견(識見)이나 형상(形象)으로 구분하여 분별(分別)하는 것들이 모두가 우상(愚相)이 되는 것이다.

기독교가 있고 불교가 있고 부처도 예수도 슈리라마나 마하리쉬도 테레사수녀님도 현재 세계최고의 구호단체인 대만의 자재공덕회의 증엄스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나(我)라는 분별심이 완전히 없어진 존재 그냥 사랑, 자비, 빛 일 뿐 이들에겐 종교는 없다.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의 참살이가 무엇인지를 안다. 그래서 각 개인 육신의 안영을 위해서 법을 설 한 적이 없다. 오직 내 이웃과 중생을 위해서 상구보리하하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하는 사랑으로 인류구원을 위해서 행(行)할 뿐이었다.

그러한 살신성인들을 닮고자 만든 인류정신구원의 종교가 어떠했던가! 2000년의 역사 속에 오직 인간의 탐욕으로 살상과 전쟁은 대부분 하나의 신을 숭배하는 종교전쟁이었다. 왜 이러한 전쟁과 폭력과 테러가 현재까지 끝임 없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는 참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한데서 비롯된 현상이다. 인간뿐만 아니라 뭇 생명은 모두가 차별 없는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만이 혹은 특정 신앙을 믿는 자들만 하나님이 사랑하고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정상적인 사고를 갖는 어버이라면 여느 자식을 미워할 수 없고 형제들 간에 살생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겠는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눅 10:27)고 성경이 말한다.

‘불응주색생심(不應住色生心) 불응주성향(不應住聲香) 미촉법생심(味觸法生心) 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住 以生基心)’‘응당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요 응당 머문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고 <금강경>이 설(說)하고 있다.

 무슨 이야기인가 종교는 결국 실천행인데 ‘행함이 없이 행하라’는 말이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이다. 지식을 배워서 말씀으로만 행하라는 말이 아니다.

내 이웃도 내 몸 같이 우주 삼라만상이 나와 같다는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질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요. 불교도인 이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나와 종교가 다르다고 배척하고 이단시하고 편을 가르는 것은 스스로가 참 진리를 배척하는 것이고 무지의 소산이며 진정한 종교인이라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성품과 불성은 온 우주 안에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충만하다.

하나님도 부처님도 누구의 소유의 것이 아니다. 그냥 천지만물의 우주법계에 영원한 어버이로 골고루 나눠주는 햇살과 같은 사랑과 자비로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참 법을 바로 알아차려야 한다.

그런데 작금의 풍속이 어떠한가, 성직을 하는 사람들조차도 진정한 참 법과 우상의 법을 혼돈하고 성현들의 진리에는 눈이 멀고 천당과 극락이 저 하늘나라 어디에 있는 것처럼 혹세문민하고 성전탑 높이 세우기 시합이라도 하듯이 궁전 늘이기와 세력 갈등으로 수없이 늘어나는 종단들의 모습을 보면서 참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무엇이 진정한 인간구원의 참 종교인가, 착각하지마라 우리네 삶은 우상숭배하는 종교집단적 삶이 구원이 아니다. 각 개인이 만유제법 속에서 인격성을 격물치지(格物致知)하여 참살이(風流徒)가 그냥 종교적일 뿐이다.

우리 인생은 너무나 짧다. 잘못된 지식으로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참스승인 정법(正法)을 만나길 소원해 보며 성경과 금강경의 한 구절을 다시 새겨보면서 결을 맺는다.

[막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금강경(金剛經)의 제32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

일체 현상계의 모든 생멸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도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

 

 

 

 

<대전 중구 대흥도 502-15번지 세계불교세심종 황룡사포교원 010-8584-70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