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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불교신문 -이 세상은 내가 주인공, 행복(幸福)을 구걸하지 말고 창조하자!-

통융 2012. 5. 12. 15:23

 

-이 세상은 내가 주인공, 행복(幸福)을 구걸하지 말고 창조하자!-

<세계불교세심종 황룡사포교원 주지 통융>

 

부처님 당시 제자들이 모여서 진정한 행복은 무엇인지를 놓고 토론을 했는데 돈이 있으면 다 된다, 부자, 권력, 왕이 되는 것, 감각적 쾌락 등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각각 제시했다. 그 때 부터님께서 ‘참된 행복은 그런 것 들이 아니니 이 세상에 부처님이 출현 했을 때, 위없는 진리를 듣는 기회를 만났고 수행해 나갈 때 참으로 행복하느니라.“라고 했다. 오늘날 까지도 보편적인 사람들은 행복을 돈과 명예 출세 등의 외부적 만족이 최고의 가치가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런데 행복이란 과연 그런 것일까? 당대 최고의 부을 가진 현대그룹의 총수가 빌딩에서 뛰어내리고 최고 인기여배우가 자살을 하는 것은 무슨 이유겠는가. 만약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그런 재산이나 명예 인기가 행복이라면 그들은 최고의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 탠데 왜 목숨을 끊었을까? 결국 우리가 찾아 헤매는 참 행복은 외부의 환경이나 조건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사건들이 아닐까!

노벨 문학상을 탄 극작가 모리스 마텔르링크의 ‘파랑새’라는 동화에서 가난한 나무꾼의 아이들인 치르치르와 미치르가 파랑새를 찾아 여행을 떠나지만 결국 그들은 집으로 돌아와서야 파랑새가 바로 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내용처럼 우리가 찾는 행복도 외부의 어디에 있어서 찾아 취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작용성에 있음을 말해준다.

행복은 또한 누가 가져다주지 않는다. 일부 종교들은 신이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주관하니까 행복도 가져다준다는 구걸의 믿음을 갖는다. 우리는 첨단과학의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유독이 종교적일 때는 비과학에도 불신 없이 맹목하고 있다. 내 배가 고프면 내가 밥을 먹어야 배가 부르지 누가 대신 먹어 준다고 내 배가 부르지 않다. 이 세상에 그 어느 누구도 나를 대신해 생사를 해결할 수가 없다. 오직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내가 할 뿐이다. 성경에도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산다’(갈2:20)고 했다. 결국 하나님도 내 안에서 온전하게 나와 하나가 될 때 즉 스스로 신인 자신이 하나로 완성 될 때 성령 충만이 되는 것이다. 즉 성령이 만법이고 불성인데 이러한 진리를 밖에서 찾으려한다면 파랑새를 찾아 헤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만약 이와 같이 외부의 조건인 사회가, 이웃이, 부모형제가, 신이 나를 버렸다는 착각 등이 모두가 주인공인 자신을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불교는 이러한 인간심리의 모순과 병패를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자신이 이 세상에 주인공임을 자각(自覺)하여 대 자유인, 대장부로 창조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는 종교이다. 임제선사도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 했다. 자신이 주인공으로 그곳에서 주체자가 되어 깨달음에 삶을 사는 것이 불법을 바로 건립한다는 것이다. 즉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자신이 심어놓은 결과를 거두는 인과법(因果法)임을 알고 우리네 삶을 지혜롭게 살아가도록 안내하고 있다.

 

또한 모든 것이 마음의 찰나작용(刹那作用)론이다. 모든 것이 순간순간 마음이 결정한다. 지금 자신의 행동이 신구의(身口意) 삼업이 청정(空)하면 부처요. 청정하지 못하면 중생이다. 결국 우리가 매 순간 순간 일어나는 지혜 작용성이 불성(佛性)이고 작용하는 자가 부처임을 자각(自覺)하고, 지금 여기서 주인공인 내가 외부적인 어떤 대상과의 분별심인 번뇌망상(煩惱妄想)을 벗어나 생사윤회(生死輪回)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 대 해탈(解脫)이요 열반이며 생명활동인 영원한 행복을 창조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