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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내가 아니고 우리인가? ...소설 연재. 초고7

통융 2025. 4. 5. 10:26

노인은 다시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요즘 기후 변화로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는 것도 인간의 오만 때문이지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생각으로 자연을 정복하려 하고, 동물을 학대하며, 환경을 파괴한 결과가 지금의 이상기후와 각종 재해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이 뿌린 씨앗을 돌아보지 않고, 그저 운이 나쁘다고만 하지요. 하지만 인과(因果)의 법칙은 절대 오차가 없습니다. 다만 빠르게 혹은 늦게 나타날 뿐이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하지만 세상을 보면 온갖 나쁜 짓을 하면서도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어르신은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들은 아마도 과거에 저축해 놓은 복이 있어서 지금 찾아서 쓰느라고, 잘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지금 짓는 악행의 과보는 차고차곡 쌓이고 있으니 언젠가 반드시 돌아갈 것입니다.”

어르신은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끗 보더니,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경험한 진리는 인연(因緣)에 의한 인과법(因果法)’이며, ‘모든 것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작용(相互作用) 속에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 이치를 바르게 공부하고 직접 체험해 보세요. 그대가 찾고 궁금해하는 모든 질문의 답을 거기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금 전 그대는 내게 그대는 그대가 누구인지 찾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이제 그 질문에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 같군요.

나는 왜 내가 아닌지, 그리고 왜 우리인지를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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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났다.

어른을 모시러 왔다는 중년 남자가 등장하면서였다.

개량한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그는 노인에게 깍듯이 예를 갖추었다. 수행하는 제자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조용히 자리를 떠났고, 나는 주인장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인장에 따르면, 그 어른은 일반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근자에 보기 드문 선지식이라고 했다. 함께 수행하는 이들도 몇 명 더 있으며, 주인장 자신도 한때 그분을 따라 수행한 적이 있다고 했다. 노인은 가끔 산에서 내려오면 꼭 이곳에서 차 한 잔을 마시고 간다고 했다.

나는 궁금증이 생겨 물었다.

그렇게 깊은 수행을 하신 분들이 왜 세상으로 나와 중생을 돕지 않고 숨어 계십니까?”

주인장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모든 것이 때와 인연이 맞아야 합니다. 시절 인연을 기다리는 것이지요.”

나는 그 어른이 계신 곳을 찾아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계룡산 정상인 천왕봉, 천단(天壇) 남쪽 아래 8부 능선쯤에 토굴이 하나 있습니다. 조그만 계곡에 자리 잡아 마치 분지처럼 둘러싸여 있지요. 쉽게 찾기 어려운 곳입니다. 더러 소문을 듣고 찾아가는 이들이 있지만, 대부분 헛걸음하고 돌아갑니다.”

그러던 주인장은 무언가 더 이야기하려다 말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벽을 가리켰다.

저것이 유일하게 그 어른을 찾아가는 방법입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벽을 바라보았다. 분명 노인과 함께 있을 때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느새 화선지 전지 크기의 족자가 하나 걸려 있었다. 낡고 빛바랜 족자에는 산수화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그 아래로 은은하게 네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月下法階(월하법계).

()’은 진리를 뜻한다. 물 수()변에 갈 거() 자가 더해진 법()이라는 글자는, 마치 물이 흐르듯 자연의 이치를 따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람들이 만든 법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법은 변치 않는 참된 진리를 뜻할 것이다.

하지만 법계(法界)가 아니라 법계(法階), 법의 계단이라니.

왜 계단 ()’ 자를 썼을까?

궁금했지만 깊이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주인장은 말을 아꼈다.

그곳에서 공부한 사람은 절대 장소를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그곳을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각자의 인연법에 달렸지요. 하지만 오늘 어른을 직접 뵈었다면, 그대에게도 어떤 인연이 닿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더니 주인장은 내게 작은 팁을 하나 주겠다며 말을 남겼다.

만약 그곳을 찾고자 한다면, 달빛 좋은 날 산에 오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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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내가 아니고 우리인가?

오래전에 류시화 시인이 번역한 나는 왜 네가 아니고 나인가?’라는 책을 감명 깊게 읽은 적이 있다. 시애틀 추장과 여러 인디언들의 연설문을 엮은 이 책은, 우리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진리를 전하고 있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원주민들의 삶이 떠올랐고, 그들의 이야기와 어른의 마지막 말씀이 겹치면서 내 가슴 깊이 질문 하나가 자리 잡았다.

나는 왜 내가 아니고 우리인가?’

그 질문은 늘 내 안에서 살아 숨 쉬었고, 그 어른을 다시 찾아가 뵙는 것이 숙제처럼 따라다녔다.

그 어르신과 만남 이후, 내 삶은 크게 변화했다. 가장 큰 사건은 머리를 깎고 출가 수행자가 된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 삶의 여정은 이미 불교 수행자의 길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늘 라는 존재에 대한 깊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한때는 교회를 다니며 성경과 영성 신학을 공부했고, 인도의 베다와 명상가 크리슈나무르티, 오쇼 라즈니쉬, 니사르갓따 마하라지 등의 명상이론과 수행에도 심취했다.

그 여정 속에서 바가반 슈리 라마나 마하리쉬의 말씀이 내게 출가의 결정적 동기가 되었다면, 유성장터에서 만난 노인의 말씀은 나를 붓다와의 만남으로 이끌며 더욱 확신을 심어주었다.

라마나 마하리쉬는 라는 생각에 대한 자기 주시(Self-attention), 즉 자각(自覺)의 자기 탐구 수행을 강조했다. 그 가르침은 선불교의 간화선(看話禪), 즉 화두 참선과도 맞닿아 있었다.

그러던 중, 붓다의 말씀을 접하게 되었다.

수행자여, 직접 와서 보고 진리를 스스로 체험하여 알아차리라. 그리고 나의 길은 진리를 배우는 길이지, 숭배하거나 집착하는 길이 아니다.”

붓다가 깨달은 법의 논리는, 내가 찾아 헤매던 존재와 본성(本性)에 대한 탐구를 더욱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한 방울의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으려면 바다에 던져야 한다.”

나는 내 미래를 진리의 바다에 송두리째 던져보기로 했다. 불교의 공부와 수행이 내가 누구인가?’를 자각하는 길이며, 이웃과 더불어 법향(法香)을 나누는 우리의 삶이라는 점이 내 삶의 목표와도 맞닿아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나는 출가를 결심했다.

 

출가(出家)란 무엇인가? ‘집을 떠난다는 뜻이다.

집이란 단순한 거처를 넘어 한정된 울타리이자 공간이다. 개인적으로는 자아(自我)와 아집(我執), 그리고 이상(我相)이라는 틀일 수도 있고, 외부적으로는 가족과 삶의 관계망을 의미하기도 한다.

보통 출가라고 하면, 가족과의 인연을 끊고 속세를 떠나는 것으로 여겨진다. 마치 모든 장애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 머리를 깎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길을 택하는 것처럼, 혹은 현실의 구속에서 벗어나 멀리 숨어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출가는 흔히 이별과 슬픔으로 받아들여진다. 불심이 깊은 부모가 아니라면, 자식이 출가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진정한 출가자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것이다.

, ‘내가 누구인가?’를 온전히 깨달아, 지금 이 순간 깨어 있는 자가 출가자이며, 그 삶을 이웃과 나누는 것이 곧 출가 수행자의 길이다.

그러니 출가는 현실 도피가 아니다. 출가는 새로운 나섬이며, 슬픔이 아니라 환희이며, 모두가 축복해야 할 기쁨의 길이어야 한다.

 

출가의 형태는 시대에 따라 변화해 왔다. 붓다 당시의 출가는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인도는 지금도 여전히 카스트 제도가 남아 있지만, 붓다 시대의 출가는 그러한 계급을 뛰어넘는 행위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와 고려 시대에는 왕실과 귀족 중심의 불교가 성행했기 때문에, 왕자나 귀족들이 출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 들어 유교가 국가 이념이 되고, 불교가 억압되면서 사찰과 수행자들은 산속으로 밀려났다. 그 과정에서 출가의 형태 또한 변화했다.

출가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배가 고파서 출가하는 경우다.

지금은 그런 일이 드물지만, 과거 가난했던 시절에는 절에 들어가면 그래도 밥을 먹을 수 있었기에 출가를 선택한 경우가 있었다. 둘째, 현실에서 도피하는 출가다. 삶에서 좌절하거나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출가를 결심하는 경우다. 하지만 이러한 출가는 대부분 수행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환속하는 경우가 많다. 셋째, 동진 출가(童眞出家). 어릴 때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절에 보내지는 경우다. 이 경우는 어떤 스승을 만나느냐에 따라 삶의 희비가 엇갈린다. 좋은 스승을 만나면 깊이 있는 공부와 수행을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단순한 승려 생활에 그칠 수도 있다. 넷째, 진리를 찾아 떠나는 출가다. 이 경우, 출가의 목적이 분명하기 때문에 대부분 열심히 공부하고 수행하며, 나름의 깨달음을 얻는다.

출가의 이유는 이처럼 다양하지만, 모두 가보지 않은 길을 나서는 것이기에 과정 속에서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하지만 결국 진리의 맛을 알게 되고, 수행자의 참된 삶을 경험하면서 뜻깊은 길을 걷게 된다.

 

어느 날, 누군가 내게 물었다.

왜 출가하셨습니까?”

나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가족과 세속의 인연을 버리는 것이 출가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많은 인연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주의 모든 중생이 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출가는 단순히 몸과 환경을 바꾸고 조용한 곳으로 떠나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속에 자리한 오온(五蘊)이란 집을 떠나는 것이다. 내가 쌓아온 18(十八界)와 탐··(貪嗔痴)로 인해 생겨난 괴로움의 분별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인연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진정한 출가다.

나는 불법(佛法)에 귀의한 이후, 교학을 깊이 공부하며 다양한 수행을 경험했다. 그 과정에서 참된 진리를 체험할 기회도 얻었다. 특히 간화선(看話禪), 즉 화두(話頭) 참선 수행은 내가 이생에서 만난 최고의 선물이었다. 향기 나는 삶이 무엇인지 막연히 상상만 했던 나는, 직접 수행을 통해 그 향기를 체험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나는 세상에 태어난 이유와 뭇 이웃과 함께 살아가야 할 분명한 명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확신했다. 참된 진리(佛法)를 믿고, 바르게 실천하는 것이 나의 운명인 신수봉행(信受奉行)이다.

또한, 나는 왜 내가 아니고 우리인가? 이 질문은 출가 후에도 내 안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