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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내가 아니고 우리인가? ...소설 연재. 초고5

통융 2025. 3. 29.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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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르신 말씀처럼 진리는 굳이 찾을 필요가 없다면, 내가 그동안 궁금해하고 찾아왔던 진실은 무엇이란 말인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문득 왜 일어난 모든 것이 진리라고 하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노인을 바라보며 다그치듯 다시 물었다.

세상 모든 것이 진리라면, 굳이 진리를 찾을 필요가 없겠네요?”

어르신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요. 이제 답을 아셨네요. 진리는 찾고 자시고 할 것이 없어요. 그냥 바르게 알아차리면 됩니다.”

알아차린다는 말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 누구나 알아차리면서 살고 있지 않은가?

내가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을 계속 궁금해하는 것도 일종의 알아차림이 아닌가?

바르게 알아차린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뭘 알아차려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참된 진실이지요.”

참된 진실이라...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알죠? 그리고 어르신 말씀대로라면 세상 모든 것이 진리라야 하는데, 현실은 온통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다면 알아차린다는 것은 진실과 거짓을 잘 구분하라는 뜻인가요?”

그는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말했다.

진리에는 거짓과 진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것을 나누고 선택하는 것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잣대일 뿐입니다. 진리는 오직 지금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대상을 바라볼 때 자기 식대로 해석하거나 분별하지 말라는 뜻이지요.”

그 말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견해(見解)’안목(眼目)’은 각자의 생각과 분별하는 마음이다.

나는 여전히 세상을 나만의 기준과 관념으로 보고 있지만, 어르신은 있는 그대로 즉견(卽見)’하고 있다는 차이일까?

어르신은 내 표정을 살피며 덧붙였다.

내 말이 조금 어려울 수도 있겠네요. 관념은 지식과 경험의 잣대로 분별하는 것이고, 즉견은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말을 생각해 보세요. ‘먹어본다’, ‘알아본다’, ‘해본다등 우리는 모든 것을 본다라고 표현하지요.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바른 길중 하나인 정견(正見)’, 즉 바르게 보는 것과도 연결됩니다. 범어로는 사띠(sati)’, 즉 알아차림 또는 마음챙김이라 하지요.”

나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남아 있었다.

경험과 체험은 상대적이다.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므로, 각자가 도달한 어떤 깨달음을 진리라고 생각하며 설명하려 하지 않는가?

그런데 그는 찾을 것도 없고, 지금 있는 그대로가 진리라고 한다.

저는 아직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르신은 내 찻잔이 빈 것을 보고 다시 차를 따랐다.

그리고는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눈은 마음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그는 내 눈을 통해 내 마음을 읽으려는 듯했다.

그대가 어떤 진리를 궁금해하는지는 모르지만, 세상에서 말하는 진리는 결국 각자의 식견과 주장일 뿐이에요. 그리고 그 식견은 변하지요. 그러므로 그것은 참된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참 진실, 즉 진리는 변하지 않아요. 머물러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이것은 진리고 저것은 진리가 아니라며 나누지도 않지요.

말장난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조금만 공부해 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 그대를 만나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는 이 모든 순간이 바로 참 진리입니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그대에게 진리를 보여주고, 전해주고, 함께 행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대가 아직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지요.”

노인은 잠시 눈을 감고 침묵했다.

조금 더 쉽게 설명하자면, 참 진리는 늘 지금 이 순간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보고 들으면 그저 보고 들을 뿐, 하면 그저 할 뿐. 늘 지금을 깨어서 알아차리는 것, 그것이 참 진리입니다.

무엇을 얻거나 버리려 하거나, 비교하고 분별하는 것은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것이 진리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닙니다. 말로 설명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장일 뿐이지요.

이른바 ()’라는 것은 말이나 글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 자체를 나타낼 수는 없습니다. 도는 멈추지 않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팽이가 멈추면 쓰러지듯, 도는 계속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오직 할 뿐인 것이지요.

세상은 조건과 작용에 따라 한순간도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가만히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고요함조차도, 그 안에는 움직이기 위한 또 다른 작용이 숨어 있지요.”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아직 확연히 와닿지는 않았지만, 무언가 중요한 느낌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모든 진리는 결국 자신이 중심이 되어, 무언가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시작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르신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어르신께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찾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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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를 해온 대표적인 인물들을 찾아본 적이 있다.

인간은 사고하는 존재다.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와 생존, 즉 삶과 죽음에 대해 고민하며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특히 인류 문화의 흐름을 살펴보면, 철학, 종교, 과학, 의학, 예술 등의 모든 사상과 이념이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인류 최초의 철학자로 불리는 피타고라스(BC 570~495)는 누군가 그대는 누구인가?’라고 묻자, “철학을 사랑하는 사람(A person who loves philosophy)” 이라고 답했다. 이것이 철학의 시작이었다. 그는 만물의 근원을 ()’라고 보았으며, 채식주의를 실천하고 윤회설(輪迴說)을 주장했다.

 

같은 시대, 인도에서 태어난 붓다(BC 560~480)나는 누구인가?’를 탐구하며 생로병사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출가했다. 수행 끝에 그는 모든 존재가 연기(緣起)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며, ‘나는 무아(無我)’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누구나 이 진리를 깨닫게 되면, “천상천하 유아독존, 내가 곧 우주이며, 자비의 실현이 된다고 설파했다.

 

동양에서는 노자(BC 571~471)도덕경에서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 도를 말로 규정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도가 아니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라는 존재도 단순히 이름으로 규정될 수 없으며, 본질적으로 자연과 하나라고 보았다.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BC 470~399)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통해 인간이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어느 날 한 제자가 그대는 그대가 누구인지 아는가?” 라고 묻자, 그는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라고 답했다. 이는 진리가 언어나 설명만으로 정의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BC 428~348)은 인간 본연의 본질을 이데아(Idea)’라고 정의하며, 감각 너머에 존재하는 절대적 실재를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자(BC 369~286)는 무위자연(無爲自然)과 물아일체(物我一體)를 통해 인간 본연의 자연스러움을 강조했다. 그는 대상과 내가 하나 되는 진리를 깨닫고 자연에 귀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300년 뒤, 예수(BC 7~30)는 유일신 사상을 정립하며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움직인다고 보았다. 그는 라는 존재도 나의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라, 성령(聖靈)의 일부로서 존재한다 고 설파했다.

 

중국 동진의 승조(僧肇, 384~414)조론에서 법은 떠나감과 다가옴이 없고, 운동과 변화가 없다라는 물불천론(物不遷論)을 주장했다. , 우리가 세상을 흐른다고 생각할 뿐, 실제로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동일하지 않으며, 찰나의 순간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라는 존재는 미망 속에서 본 허상에 불과하다고 했다.

 

서양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인간은 진리를 찾아내려는 사랑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어떤 진리를 발견하든, 적어도 지금 내가 물이 따뜻하다고 느낀다면, 그 인식이 바로 나임을 부정할 수 없다고 보았다.

 

북송의 주돈이(1017~1073)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 , 우주 만물의 근원은 움직임()과 멈춤()의 조화이며, 음양(陰陽)의 원리에 의해 변화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러한 원리가 오행(五行)으로 전개되며, 이는 의학(醫學), 명리학(命理學) 등으로 발전한다고 보았다.

 

근대 이후의 철학적 탐구한 논변 자들은 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데카르트(1596~1650,프랑스)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라는 명제를 남겼다. 그는 생각하는 주체인 나가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라고 보았다. 나와 생각과 존재는 독립적인 실체이며, 그의 분석적 접근법은 이후 현대 과학적 사고에 큰 영향을 미쳤다.

 

파스칼(1623~1662, 프랑스)팡세에서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혼자만의 지루함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간이 탄생과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두 점 사이에 매달려 있으며, 삶이라는 현실은 결국 생각이라는 틀 안에 갇힌 논리적 그림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스피노자(1632~1677, 네덜란드)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라는 말로 유명하다. 그는 자연의 모든 것이 신의 한 부분이라고 보는 범신론(汎神論) 사상을 주장하며, 나와 자연, 신은 하나이며 무한하다고 보았다.

 

칸트(1724~1804, 독일)나는 무엇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며, 인간이 이성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범위를 탐구했다. 순수이성비판에서 그는 이성의 한계를 지적하며, 합리론적 형이상학과 경험론적 인식을 조화시키려 했다. 그는 우리가 초감각적 세계를 선험적 직관으로만 인식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나는 신의 영역에 속한 초월적 존재라고 결론지었다.

 

쇼펜하우어(1788~1860, 독일)는 동서양의 철학 사상을 넘나들며, 존재의 본질을 의지와 표상으로 설명했다. 그는 불교의 인과론과 유사한 개념을 통해, 삶이란 끊임없는 의지로 인해 고통을 수반하지만, 자기 인식, ‘내가 누구인가를 자각하는 통찰을 통해 의지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니체(1844~1900, 독일)란 단지 사고(思考)에 의해 형성된 종합적 개념에 불과하다 고 보았다. 그는 신은 죽었다!” 라는 선언을 통해 기존의 종교적 가치관을 부정하며, 초인(超人) 사상을 주장했다. 초인이란 모든 것은 이미 여러 차례 반복되며 성취되었다라는 사실을 깨닫고, 운명을 긍정하는 자라고 했다.

 

에드문트 후설(18591938, 오스트리아)현상 그 자체로 돌아가라!” 세계와 나, 존재를 탐구하는 현상학을 주장했다. ‘본질의 본질을 찾고 초월적 세계로 진입하는 선험적 환원을 시도했다. 논리적 해석의 한계를 절감했다. 그의 제자인 하이데거(18891976, 독일)존재와 시간을 통해 실존주의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지만, 여전히 신 중심적 사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비트겐슈타인(1889~1951, 오스트리아)라는 존재는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된 것들의 결과로 형성되는 것 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논리적으로 무의미하다며,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낫다고 보았다.

 

신화학자 조지프캠벨(1904~1987,미국)은 인류의 삶을 단일신화(Monomyth) 로 설명했다. 모든 신화와 전설에는 헤어짐과 성숙 그리고 귀향이라는 공통된 구조가 있으며, 개인의 삶 또한 마찬가지라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익숙한 세상에서 떠나 도전과 시련을 겪고 성숙한 후, 다시 돌아오는 것이 인생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돌아온 자는 예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다.

 

장 폴 사르트르(1905~1980, 프랑스)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말하며, 존재와 무에서 새로운 철학적 방법론을 제시했다. 그는 인간의 삶이란 본질적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직접 경험하며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 이라고 보았다.

 

이처럼 동서양의 철학자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나는 누구인가?’ 에 대한 답을 찾아왔다.

서양철학은 대체로 이분법적 사고를 바탕으로, ‘전체를 분리하여 바라본다. 인간 존재는 신이 이미 정해 놓은 틀 안에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반면, 동양철학은 일원론적 사고를 바탕으로, ‘가 자연과 우주 전체 속에서 존재한다고 본다. 궁극적으로 라는 개념은 실체가 없으니 나와 자연, 우주는 하나라는 관점을 취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없다는 깨달음을 통해 나는 곧 우주 전체라는 역설적 결론에 이른다.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질문과 의심이 필요하다. 나도 내가 누구인가를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헤매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모습을 보고, 경험하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한 번쯤 가져 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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