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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잡고 약재상으로 갔다. 오래된 듯한 여닫이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자, 문에 달린 풍경이 요란하게 울렸다. 약재 냄새가 가득한 가게 안은 서늘하고 어두컴컴했다.
"계십니까?"
"어서 오세유~"
사십 대쯤 되어 보이는 중년 남성이 특유의 충청도 사투리로 가게 뒤편에서 걸어 나왔다. 몸집보다 머리가 보통 사람의 두 배는 될 만큼 커서 순간 놀랐다. 나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주인장 되십니까?"
"그렇게 돼유~"
주인이면 주인이지 ‘그렇게 돼유’는 뭔 뜻인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시 물었다.
"조금 전에 들어오신 어르신을 좀 뵙고 싶어서 왔습니다."
주인은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의아한 듯 서성이다가
"잠깐 기다리시유, 여쭤보고 올게유."라며 뒷간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다시 나와 나를 보며 말했다.
"따라오시유."
안으로 들어서니 조그마한 홀이 나왔다. 마루가 깔려 있고, 한쪽에는 장작 난로가 피워져 있었으며 그 옆에 작은 차탁 하나가 놓여 있었다. 노인은 이미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내가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나는 조용히 목례한 후 차탁 옆 의자에 앉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주인은 우리 사이를 살피더니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시유. 야기들 나누시유~"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둘만 남자 공기가 더욱 무거워졌다. 다행히 노인이 눈을 감고 있어 찬찬히 그를 살펴볼 수 있었다. 그의 안색과 기품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다. ‘귀한 인연이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순간의 선택이 인생을 좌우한다. 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어르신, 아까는 제가 도라지를 사겠다고 했는데 왜 그냥 가셨습니까?"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귀가 어두우신가 싶어 좀 더 큰 소리로 물었다.
"도라지를 팔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나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분인가?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갑자기 그가 입을 열었다.
"도라지를 왜 사시게요."
카랑한 목소리에 순간 움찔했다. 수행이 깊어지면 목소리부터 다르다고 하더니, 울림과 음색이 남달랐다.
"예, 제가 폐가 약해서 산도라지를 보면 삽니다. 어르신이 가지고 계신 도라지는 약도라지 같아서요."
그제야 노인은 천천히 눈을 뜨고 말했다.
"도라지가 어떤 것인지 보지도 않았으면서요."
그러더니 탁자 위에 있던 다기들을 하나씩 가지런히 놓으며 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빛은 고요하고 맑으면서도 예리했다.
언제부턴가 난로 위 주전자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그는 보따리에서 봉지 하나를 꺼내더니 한약 환 같은 것을 몇 개 집어 다관에 넣었다. 그리고 주전자에서 끓는 물을 다관에 붓고 뚜껑을 닫았다.
은은한 향이 금세 공간을 가득 채웠다. 녹차를 자주 마시는 나였지만, 이 차는 향부터가 특별했다.
"어르신, 차 향이 참 좋습니다."
나는 좀 더 친근해지려는 마음으로 말을 건넸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는 힐끗 나를 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허락으로 여기고 말했다.
"혹시 어르신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그는 빤히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보고도 모르십니까?"
나는 순간 이해하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현재 계시는 곳이 어디신지요?"
"허허 참 그 양반 눈 뜨고도 못 보는 구만, 눈앞에 성성하게 살아 있는 놈은 보지 못하고 죽은 송장을 찾는구려.“
나는 노인의 말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노인은 차를 찻잔에 따르며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 같은데, 왜 마음공부를 하십니까?"
나는 늘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면 많은 사람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왔다.
"먼저 나를 구원하고, 이웃을 제도하려고요."
그는 우습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구원이니 제도니 하는 것은 그저 문자놀이에 불과해요. 만약 그런 목적이라면 개미 한 마리도 구원하지 못할 겁니다. 목적을 버려야 목적에 도달할 수 있거늘……"
그러더니 대뜸 내게 다그치듯 물었다.
"그래, 지금 그대 마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즉, 내 마음이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라는 뜻이었다.
"그야, 지금 마음을 내고 있으니 질문을 하는 것 아닙니까?"
"누가 그대더러 마음을 설명하라고 했나요? 나는 그대 마음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지요."
나는 말문이 막혔다. 마음은 생각인데, 생각을 말하지 않고 따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인가? 내 마음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어떻게 설명 없이 보여줄 수 있을까? 머리가 복잡해졌다. 마음이란 상황에 따라 나타나는 모든 생각과 행동이다. 그래서 마음은 고정될 수 없다고 생각되었다. 붙잡으려 하면 이미 지나가 버리고, 과거의 마음이나 미래의 마음을 지금 잡을 수도 없다. 그렇다고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노인이 말하는 것은 근본적인 마음, 즉 어떤 것도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본래의 마음씨를 뜻하는 것일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마음의 본성을 알아차리는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지금 내 마음자리를 보여줄 수 없는 수준이라고 스스로 판단했다.
내가 우물쭈물하자, 노인은 힐끗 나를 쳐다보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마음공부를 한다는 사람이 정작 자신의 마음자리도 찾지 못하면서, 도대체 뭘 공부한다는 겁니까?"
나는 마치 내 수행의 깊이가 모두 들통난 듯한 기분이었다. 수행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림살이'란 공부의 깊이나 수준을 뜻하는데, 내 살림살이가 형편없음을 들킨 것만 같았다. 나름대로 마음공부를 해왔다고 자부했지만, 노인의 기세에 눌려 그저 따라주는 차만 연거푸 마셨다.
그런 와중에도 코끝을 스치는 차향과 부드러운 차 맛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노인이 직접 만든 차인 듯했다. 하지만 나는 자존심이 상했다. 노인의 공부 깊이는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쉽게 물러서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빈 잔을 내려놓으며 대들듯이 물었다.
"그럼 참진리가 무엇입니까?"
그는 아무 말 없이 내가 내려놓은 빈 찻잔에 차를 따라 밀어주었다.
"뜨거우니 식혀가면서 드세요. 산도라지보다는 못해도 이 차는 몸에 좋은 보약이 될 겁니다."
나는 찻잔을 받아들었다. 뜨거운 기운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나는 여전히 내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기다리며 찻잔을 들고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도 나를 응시했다.
"그대가 생각하는 진리가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까부터 진리를 쓰고 있었어요. 그대가 지금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참진리입니다. 자신의 마음자리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진리를 살피려 한다면 어려운 일이겠지요."
그러더니 나에게 되레 반문했다.
"진리란 무엇이지요?"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답했다.
"차 맛이 너무나 좋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 진리를 보는 바른 눈을 가지지 못해서, 어르신 말씀의 뜻이 선명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어르신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질문이 너무 어려울 것 같아 쉽게 보여줬더니, 그대는 오히려 쉬운 것을 어렵게 이해하려 하는구려. 굳이 설명하자면, 진실이 곧 진리입니다. 그대가 바른 눈으로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진리라는 뜻입니다. 바른 눈으로 보면 세상에 진리가 아닌 것이 없어요. 모두가 참진리이지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진실이 진리'라는 말이 가슴에 깊이 박혔다. 나는 오래전부터 '진실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궁금증이 삶 속에서 따라다니 한 장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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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K 방송사에서 제작한 8부작 드라마 ‘원효대사’의 마지막 장면이다. 원효대사와 그의 아들 설총이 나누는 대화와 행동이 담겨 있다. 중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설총이 분황사에 있는 원효대사를 찾아온다.
가을 마당에서 만난 두 사람은 인사를 나누고, 설총이 "물을 말이 태산 같다"며 말을 건넨다. 그러자 원효대사는 말없이 담벼락에 기대어 있던 빗자루를 건네며 마당을 쓸라고 한다. 설총은 가을 마당에 쌓인 낙엽을 깨끗이 쓸어 한곳에 모은 뒤, 원효대사에게 "마당을 다 쓸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원효대사는 아무 대꾸도 없이 쓸어 모은 낙엽을 한 움큼 쥐고는 깨끗해진 마당에 다시 뿌리며 말한다.
"가을 마당에는 낙엽이 몇 개쯤 뒹굴어야 제격이니라."
그리고는 법당 안으로 사라진다. 설총은 원효대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합장하는 장면으로 드라마는 끝을 맺는다.
나는 그 마지막 장면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왜 원효대사는 애써 쓸어놓은 마당에 다시 낙엽을 뿌렸을까? 물론, 그의 말처럼 ‘가을 마당에는 낙엽이 몇 개쯤 뒹굴어야 제격’이겠지만, 불교적으로도 심오한 뜻이 담겨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질문이 많았던 설총에게 원효대사는 직접적인 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마당에 낙엽을 다시 뿌리는 행위를 보였다. 그리고 설총은 머뭇거리다 이내 아버지의 뜻을 깨달은 듯 합장을 했다.
도대체 원효대사의 의도는 무엇이며, 설총은 어떤 진실을 깨달았던 것일까?
드라마 작가는 장대한 원효대사의 일대기를 다루면서도, 이 장면을 마지막으로 설정한 의도가 무엇일까?
이러한 의문들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늘 ‘진실 게임’을 했다. 그러면서 나름의 알음알이로 이런저런 생각을 더듬어 보기도 했다.
완전함이란 의도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이 아닐까? 낙엽은 나무의 흔적이다. 인간으로 비유하면 살아온 삶의 흔적이나 번뇌가 될 것이다. 어쩌면 설총이 질문하고자 했던 의구심이 바로 그것일 수도 있다.
불교에서는 이를 업장(業障)이라 한다. 업장을 깨끗이 닦아 없애는 것, 즉 열반이나 해탈이 불교 수행의 목적이다. 그래서 절에서는 아침마다 스님들이 비질을 한다. 쓰레기가 있건 없건 상관없이, 그것은 수행의 한 방편이다. 자신의 번뇌와 업장을 쓸어 버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러한 비유와 방편들이 불교 진리의 심오함이라 생각했다.
뒤늦게 선불교를 접하면서 알게 되었지만, 그러한 의심 자체가 화두(話頭)라는 것을 깨달았다. 의문에 사로잡히면, 그 의문의 답을 스스로 알아차릴 때까지 ‘어째서? 왜? 이뭣고?’ 하며 골똘히 생각하는 것이다. 간화선 수행자라면 이런 의문을 화두로 삼아야 할 것이다.
‘원효대사는 왜 나뭇잎을 다시 마당에 뿌렸을까? 설총은 왜 아버지의 말 없는 가르침 앞에서 합장을 했을까?’ 이런 의문을 화두로 풀어야 할 공안(公案)이다.
공안은 화두의 의심을 촉발하는 내용이며, 이를 풀어낼 때 비로소 번뇌에서 벗어나 대자유의 해탈에 이를 수 있다. 어쩌면 나는 모르는 사이 불교의 깨달음에 대한 호기심을 품고 살았고, 불법의 진리를 수행하는 화두를 안고 살아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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