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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내가 아니고 우리인가? ...소설 연재. 초고6

통융 2025. 4. 3.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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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광대한 우주 속에서, 나는 과연 누구인가?

전생이 있다면,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이었을까?

나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가?

우리라는 관계는 왜 존재하며,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리고 내생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끝없는 질문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처럼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의 사상가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나는 누구인가?’ 를 탐구해 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나의 존재는 무엇인지, 나를 둘러싼 세계는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깊이 고민하게 된다.

이러한 를 찾는 질문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러면 이러한 궁금증과 질문은 나만의 사치스러운 생각일까?

깊이 사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철학적 물음보다는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들에게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보다 당장 눈앞의 삶이 더욱 절실하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곧 삶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한편,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마치 옷걸이에 걸린 옷에 따라 신분이 달라지는 것처럼, 자신의 이름, 성별, 가족, 직장, 사회적 역할을 자신의 정체성이라 착각한다. 대부분 내가 나다라는 자아의식에 도취 되어 살아가며, 그것을 아집(我執)이라 한다. 흔히 자존감, 정체성이라 불리는 이 개념은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고 감정을 형성하는 기준이 된다.

그러나 종교적 신념이나 이념에 따라 각자가 자신의 존재를 바라보는 관점은 다를 수 있다.

유신론자들은 신이 창조한 인간이기에, 결국 신에게 귀의한다.”라고 믿는다.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며, 자신의 의지보다는 신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영생의 존재라고 확신한다.

반면, 동양에서 전해 내려온 운명론인 사주팔자(四柱八字) 라는 명리(命理)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정해진 운명에 따라 살아간다고 믿는다. 삶은 이미 결정된 것이며, 그 흐름에 순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신론자나 현실주의자들은 어떨까? 그들은 전생이나 내생 같은 개념을 부정하며, 오직 지금에 충실하려 한다. 그들에게 삶은 우연의 연속이며, 결과는 원인에 따른 자연스러운 흐름(因果應報, 인과응보) 일 뿐이다. 삶은 단 한 번뿐이며, 운명보다는 선택과 행동이 중요하다고 본다.

불교에서는 모든 것은 인과(因果)의 원리에 따라 이루어진다. 내가 짓는 업()은 결국 내가 받는다”(自作自受)는 법칙에 근거해 윤회(輪廻)를 설명한다. 그러나 윤회설은 궁극적인 진리를 깨닫기 위한 방편이자 수단일 뿐이다. 불교의 핵심은 오히려 윤회의 굴레를 끊고, 해탈의 경지에서 중도의 삶을 실천하며 이웃과 나누는 데 있다. 여기서 말하는 중도(中道)는 유교의 중용과는 다른 개념으로, 불교의 본질적인 진리를 담고 있다. , 연기작용의 알아차림인 중도는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깊은 통찰과 실천을 통해 삶의 본질을 꿰뚫어 자유로워지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한편, 우리는 오랫동안 유교적 가치관 속에서 살아왔다. 조상과 부모,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예()를 지키고, 윤리를 따르며 살아가는 삶 이 곧 올바른 길이라 여겨왔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얼마나 나를 알고 있지? 라는 반문을 해 본다. 사실 아직 나는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 확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분이 말하는 진정한 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어르신은 진정한 자신을 찾았는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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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주전자에 찻물이 식었는지 확인하더니 다시 난롯불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던진 질문, “그대는 그대가 누구인지를 찾았는가?” 에 그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대신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내가 아무리 설명해도, 그대가 직접 참진리를 체험하지 못했다면 무슨 소리인지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일 겁니다.”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예를 들어봅시다. 갓난아이에게 불 가까이 가면 뜨겁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아이는 모릅니다. 직접 불에 손을 한 번 데어봐야 울면서 , 불은 뜨겁구나하고 스스로 알게 되지요. 단 한 번의 체험으로 그냥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깨달은 것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깨닫지 못한 자는 깨달은 자를 보지 못하지만, 깨달은 자는 깨닫지 못한 자를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아직 깨달음이 부족해서 어른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2차원의 세계에서는 5차원의 세계를 절대 이해할 수 없듯이, 초등학생이 대학생의 공부를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일지도 모른다.

나는 다시 질문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참진리를 전해 줄 수 있습니까?”

그는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진리는 실체가 없으니,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각자가 체험을 통해 그냥 알아차릴뿐입니다. 한문으로는 직지인심(直旨人心)이니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말을 쓰지요.

누구나 진실을 진리로 알아차릴 수 있지만, 그 과정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이는 이 길로 가고, 어떤 이는 저 길로 갑니다. 하지만 알아차리는 실체, 즉 진리의 본질은 하나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동문서답이거나 사견(私見)에 불과할 것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깨닫지 못한 자는 깨달은 자를 보지 못한다라는 말이 전적으로 이해되었다.

선지식(깨달은 자)들이 나눈 선문답(禪問答)을 읽어보면 대화의 뜻은 이해가 가지만, 그 핵심을 간파하지 못해 마치 말장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한 가지 의문이 남았다.

그렇다면 오직 체험만이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입니까?”

어르신은 나를 바라보며 가만히 듣고 있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경험하지 못한 것은 절대 깨달음이 될 수 없다면,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일을 경험해야만 하는 걸까요?

예를 들어, 우주를 다녀온 사람이 없던 시절에도, 인간은 상상 속에서 우주를 그려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실제로 우주를 여행하고, 달에도 사람이 갔다 왔잖아요.

그리고 같이 석양을 봐도 어떤 사람은 슬픔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환희를 느끼듯이 같은 경험을 해도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감정이 다르지 않나요?”

어르신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질문입니다. 경험과 체험은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만, 앞서 말한 것처럼 깨달은 사람은 깨닫지 못한 사람을 알 수 있다라고 했지요. 그대의 질문은 익숙한 고정관념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틀을 깨면, 그대는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게 될 것입니다.”

나는 순간 멈칫했다.

어르신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지식적인 진리는 새로운 것을 얻거나 쌓아가며 얻어지는 것이지만,

참진리는 모든 지식을 비우고, 더 이상 버릴 것이 없을 때 깨닫게 됩니다.

이를 무심(無心)’ 이라 합니다. 무심은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분별하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 존재와 하나가 되어 융통되는 것이지요. 무아(無我)라는 말도 내가 없는 것이 아니라 분별하는 마음이 없다는 뜻이지요.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그대가 마시는 찻잔 속이 그대의 마음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만약 찻잔을 깨뜨려 버리면, 그대의 마음은 어디로 가겠습니까?”

나는 잠시 고민했다.

어르신은 나의 반응을 지켜보더니, 스스로 답을 말했다.

찻잔이 깨졌다고 해서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요?

오히려 찻잔이라는 경계가 사라지면서, 그 마음은 우주 전체로 퍼지게 됩니다. , ‘찻잔이라는 틀이 있을 때는 내가 존재하지만, 그 경계를 허물어버리면 모두가 하나가 됩니다.

결국, 우리가 라고 착각하는 것은 다섯가지 무더기로 만들어낸 환상입니다.

5가지란 육체와 마음, (), (), (), (), ()인 감각, 인식, 의도, 의식의 무더기를 의미하지요.

깨달음은 지식처럼 무언가를 쌓아가며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보면 보고, 들으면 듣고, 하면 하는 것뿐이지요. 이를 알아차림이라 합니다. 흔히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하지만, 오히려 아는 만큼 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습득한 지식에 갇혀 다시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게 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깨닫지 못한 사람은 깨달은 사람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르신은 말을 멈추고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탁자 위에 놓인 과일바구니에서 사과 하나를 집어 들며 말했다.

쉬운 예를 하나 체험해 봅시다. 이 사과의 맛이 어떨 것 같습니까?”

그야, 먹어봐야 알겠지요.”

내 대답에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요.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맛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사과를 손으로 반으로 쉽게 쪼개더니, 나에게 한쪽을 내밀었다.

한번 먹어보세요.”

나는 사과를 받아 한입 베어 물었다. 아삭한 소리가 났다.

그는 다시 물었다.

사과 맛이 어떻습니까?”

, 맛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요?”

나는 다시 한입 베어 물며 천천히 맛을 음미했다.

수분이 많고, 약간 신맛이 나면서도 당도가 높아요. 씹히는 맛도 좋고요.”

어르신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이제 이 사과의 맛을 진리라고 가정해 봅시다. 이제 그 진리를 거짓 없이 100% 나에게 전달해 보세요.”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100% 전달한다고? 어떻게?’

각자 느끼는 맛이 다를 수도 있고, 내가 미식가도 아닌데 사과 맛을 온전히 분석해서 설명한다는 것도 어렵다. 어떻게 하면 사과 맛을 있는 그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나는 여러 가지 방법을 고민하며 답을 찾으려 애썼다.

그러나 어르신은 내 표정을 보더니 다시 말했다.

진리는 체험이라고 했지요. 그대는 지금 사과를 먹으며 사과 맛이라는 진리를 체험한 것입니다. , 그대는 이 사과 맛을 100% 알아차렸습니다. 그런데 왜 그대는 그 깨달은 진리를 나에게 바로 전달할 수 없을까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르신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대의 생각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내게 나머지 반쪽 사과를 건네며 말했다.

이 사과와 그대가 먹은 반쪽 사과는 같은 것이지요. 이제 내게 먹도록 해보세요.”

나는 사과를 다시 받아 노인에게 건넸다.

그는 사과를 받아 한입 베어 물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슨 설명이 필요합니까?

이렇게 내가 직접 먹어보면 그대가 경험한 것과 같은 맛을 그냥 알 수 있는 것입니다.

~ 이 맛이네요.’

진리는 이렇게 서로가 체험을 통해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우리 둘은 이제 이 사과 맛이라는 진리를 100% 공유한 것이지요.”

어르신은 사과를 천천히 음미하며 말을 이었다.

그대가 아무리 사과 맛을 설명해도 절대 100% 그 맛을 나에게 전달할 수는 없습니다. 신통한 능력을 지닌 존재라도, 전지전능한 분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사과의 맛을 전달하려면, 직접 여기서 같이 나눠 먹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모두가 에 불과할 뿐이지요. 이것이 방편(方便)’입니다. 말은 진리가 아닙니다. 말은 진실을 설명하는 도구일 뿐, 진실 그 자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나는 문득 깨달음이 왔다.

노인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렇다고 해서 말과 글을 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언어의 본질적인 한계를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언어 자체에는 모순이 없지만, 그 언어를 듣는 각자의 해석과 판단이 개입되면서 모순이 생깁니다. 언어는 전달하려는 대상과 목적을 만나게 하는 ‘2차적 수단일 뿐, 그 자체가 진리는 아니지요.

이를테면 불을 보고 뜨겁다고 말한다고 해서 입술이 뜨거워지는 것은 아니고, ‘배가 부르다고 말한다고 해서 실제로 배가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어르신은 잠시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말을 이었다.

“누가 언어의 본질은 욕구이다라고 했습니다. , 언어는 목적을 담아 전달하는 도구이지, 그 자체가 진리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이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나는 달을 보라고 손가락으로 가리켰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봅니다.

이론과 개념은 실제 체험 앞에서 힘을 잃습니다.

붓다도 회의론자 산자야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했지요.

나의 진리는 원리나 철학이 아니다. 오직 순수한 체험뿐이다.’

진리를 체험으로 알아차리는 것, 그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진리는 늘 각자의 눈앞에서 일어나는 알아차림속에 있습니다.”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어르신은 나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깨달음이란 무언가를 많이 배우고, 어떤 경지를 통과해야 얻는 거창한 무엇이 아닙니다. 그저 지금, 여기(now here)에서 살고 있는 현실(reality)100% 알아차리고 쓰는 삶,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지금 이순간 관념이 아닌 실재의 앎입니다.”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찻잔을 들어 보였다.

예를 들어, 오늘 우리가 이렇게 차를 마시고 있습니다. 그대가 진리를 물었을 때, 나는 이렇게 차를 따라 그대에게 건넸지요.

차 한잔하시지요.’

만약 여기 부처가 있거나, 예수가 있더라도 나는 똑같이 이렇게 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지금 여기에서 깨어있는 진실이 바로 진리입니다.”

나는 천천히 찻잔을 들었다. 차의 온기가 손끝을 감싸는 느낌이 새삼 새로웠다.

어르신도 차 한잔을 머금고 음미하더니 이어서 말을 했다.

이해하기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참진리를 체험하지 않고

아는 척, 믿는 척하는 것은 말장난이며,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일 뿐입니다.

요즘도 자칭 깨달은 자혹은 계시받은 자라며 사람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하는 이들이 있지요. 그러나 그것은 곧 나는 아직 부족하다라는 외침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라는 자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들이니까요. 진리는 누군가의 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누가 만든 것도 아닙니다. 참진리가 있다면 그 속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해야 하고, 서로를 존중하고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겠지요.”

나는 조용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어르신은 아직도 내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생각했는지 다시 말을 이었다.

자연은 진리를 알 필요도 없이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봄이면 꽃이 피고, 여름이면 비가 내립니다.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고요. 우리는 자연처럼 주어진 환경에 맞춰 변해 갈 뿐이지, 굳이 대단한 진리나 논리를 세울 필요가 있을까요? 오히려 인간이 진리를 독점하려는 것이 이기적인 오만은 아닐까요?”

어르신은 잠시 숨을 돌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요즘 세상을 보세요. 종교나 사회가 자기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오직 자신들만이 유일한 진리를 가진 것처럼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영생이니, ‘불성이니, ‘우리는 하나라며 말하고 노래합니다. 하지만 정작 생각이 다르고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적으로 간주하고 증오하며, 이단이라며 배척하지요.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종교와 이념의 이름 아래 전쟁과 살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테러와 폭력이 난무하는 현실이 이를 증명합니다. 이 모든 비극이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에서 비롯된 가짜 진리 때문입니다.”

어르신은 진지하게 듣고 있는 나를 빤히 처다보더니 질문하듯

이화여대 교목을 지낸 김흥호 목사라는 분이 있지요? 동양 삼교와 동서양 철학을 깊이 연구한 분인데,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한 종교가 다른 종교를 이단이라 한다면, 그것은 그 종교를 공부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특정 종교에 대해 좋지 않게 말하려거든, 최소한 그 종교의 경전이라도 제대로 읽어보고 말해야 한다.’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 나오는 격물, 치지, 성심, 정의가 더 중요한데도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지요. 격물(格物), 즉 사물의 이치를 깊이 탐구해야 바른 앎(치지, 致知)이 생깁니다. 그래야만 진실된 마음(성심, 誠心)과 올바른 뜻(정의, 正意)을 품을 수 있고, 그럴 때 비로소 나를 닦고(수신, 修身), 가정을 바로잡고(제가, 齊家), 나라를 다스리고(치국, 治國),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 수 있다(평천하, 平天下)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적만 앞세우다 보니, ‘내 가족, 내 나라만 우선하는 국수주의로 흐르기 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