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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내가 아니고 우리인가? ...소설 연재. 초고8

통융 2025. 4. 6. 11:39

<반가사유상의 미소>

 

오늘 길을 나선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오랫동안 미뤄왔던 어르신을 찾아 뵙고 확실한 내가 왜 우리인가를 듣기 위해서다.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 내가 공부해 온 것들을 다시 점검하고, 더 깊은 깨달음을 체험하기 위한 구도(求道)의 여정이었다.

신원사를 지나 고왕암까지는 큰 무리 없이 올 수 있었다. 암자에 들러 약수 한 잔을 마시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고왕암을 지나자 본격적인 가파른 산길이 펼쳐졌다. 다행히 요즘은 위험한 구간마다 목재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그나마 수월하게 산 고개까지 오를 수 있었다.

천왕봉 정상으로 향하는 등산로에는 군사시설인 레이더 기지가 있어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가 가야 할 길은 정해진 등산로가 아니었다.

나는 천왕봉길을 벗어나 미지의 산길로 접어들었다. 길이 없는 만큼 방향을 잘 잡아야 했다. 대략 남쪽 8부 능선쯤, 우뚝 솟은 바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 바위를 목표 삼아 잡목과 가시덤불을 헤치며 나아갔다.

길 없는 길을 만들어 가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마에는 어느새 땀이 흘렀다. 다행히 큰 나무들 사이로 목표했던 바위가 멀리 보였다. 하지만 험준한 비탈을 지나자 거대한 암벽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장애물이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지 않은가?

길 없는 길을 개척하다 보면 수많은 장애물과 험난한 고비를 만나게 된다.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극복하며 한 고개, 또 한 고개를 넘어가는 것이 인생의 여정이 아닐까?

나는 잠시 숨을 돌리며 바위에 걸터앉았다.

사방은 가파른 경사로 둘러싸여 있었고, 잡목과 가시덤불이 빽빽했다. 바로 앞에는 거대한 바위 하나가 우뚝 솟아 있었다. 그런데 그 바위 위에는 오래된 소나무 한 그루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자라다 보니 성장 속도가 느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고, 수형 또한 특이했다.

마치 사람이 턱을 괴고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 형상이 통일신라 시대의 대표적 불상인 미륵 반가사유상을 닮아 있었다.

 

그 순간, 문득 활산 성수 스님이 떠올랐다.

스님은 2012, 세수 90에 입적하셨다. 활달한 선객이셨던 그분은 늘 이렇게 일갈하셨다.

"안 늙고, 안 죽는 법을 가르치는 곳이 불교다. 산과 물이 곧 도()이며, 세상 모든 것이 선()이 아닌 것이 없다."

성수 스님과의 인연은 내게 특별한 것이었다.

90년대 중반,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기 위해 전국의 소나무를 찾아다녔다. 그러다 통도사의 무풍한솔에 매료되어 사하촌 지산리에 전통 찻집을 열었다. 그곳에서 시문학 동호인들과 함께 주변인과 시라는 계간지를 발간하여 왕성한 시 활동도 했다. 이후 그 잡지는 한창옥 시인에 의해 포엠포엠이라는 시 전문 잡지로 이어져 오고 있다.

그 무렵, 월하 종정예하께서 통도사에 주석하고 계셨고, 나는 가끔 스님께 차 공양을 올리곤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여러 스님들과 인연을 맺었다. 내 찻집은 어느새 통도사 스님들의 지대방(스님들의 휴식 공간) 역할을 할 정도로 많은 스님들의 쉼터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자장암의 지상 스님, 극락암의 명정 스님, 선객 무주스님, 사명암의 동원 스님에게서 송운(松雲)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또한 금정산 비구니 스님께서는 동삼(東三)이라는 호를 내려주셨다. 그렇게 나는 점차 불교의 세계로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그때 통도사 주지 소임을 맡았던 태응 스님이 표충사 주지로 자리를 옮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침 몇몇 어르신들과 함께 인사를 드릴 겸 표충사를 찾았고, 그곳에서 뜻밖에도 태응 스님의 은사이신 성수 큰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점심 공양을 마치고 차담을 나누던 중, 성수 스님은 1978년 일본에서 열린 세계불교지도자대회에서 있었던 일화를 들려주셨다.

그해, 스님은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행사가 끝난 후, 일본 대표 스님들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일본의 국보 1호인 목조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그 불상이 자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여겨졌지만, 후에 목재가 한국에서 자생하는 금강송으로 밝혀지면서 통일신라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국보 제도와 달리, 일본은 각 품목별로 따로 국보와 보물을 지정하는 방식이었다. 일본 스님들은 목조 반가사유상의 예술성과 우수성을 자랑하며 그 의미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때, 성수 스님이 조용히 물었다.

"당신들이 신주(神主)처럼 모시는 목조 반가사유상이 하품하생(下品下生) 수인을 취하고, 손가락이 뺨에 닿을 듯 말 듯 앉아 있는 이유를 아십니까?“

스님은 이야기하면서도 우리에게 손가락을 뺨 가까이에 가져가 미륵 반가사유상의 자세를 직접 취해 보이셨다.

일본 스님들은 저마다 나름의 해석을 내놓았다.

미륵보살이 삼매(三昧)에 든 모습이다.”

보살이 중생을 구원하기 위한 선정(禪定)에 들었다.”

번뇌를 내려놓은 순간을 형상화한 것이다.”

등등

한참 설명을 듣고 있던 스님이 갑자기 호통을 치셨다.

"일본 불교의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 됩니까?"

"일본에서도 임제종(臨濟宗)과 조동종(曹洞宗)이 선불교를 표방하며, 활발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어찌 바른 답을 하는 스님이 하나도 없습니까?"

그러고는 스님이 스스로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 되어 대자비심(大慈悲心)의 광명을 있는 그대로 펼쳐 보이셨다고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감탄했다.

스님이 깨달음을 신통하게 보여 주셨구나! 과연 어떤 깨달음의 한 소식을 전하셨을까?”

그 후로 나도 반가사유상을 보면서 늘 궁금했다.

왜 손가락이 완전히 뺨에 닿지 않고 떠 있을까?”

한국에는 국보 78, 83호로 지정된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이 있다. 이 두 보살상은 손가락이 뺨에 살짝 닿아 있다. 하지만 일본의 목조 반가사유상은 손가락이 뺨에 완전히 닿지 않은 상태다.

그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유럽에서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반가사유상과 비교하기도 한다. 하지만 두 작품은 근본적으로 품격이 다르다. 한쪽은 철학적 사유의 고뇌를 표현한 것이고, 다른 한쪽은 미륵의 깊은 자비와 깨달음을 종교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나는 여러 차례 거창 해동선원을 찾아가 성수 스님의 법문을 들었지만, 반가사유상에 대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러다 세월이 흐르고, 어느 날 문득 반가사유상을 바라보던 순간, 내 안에서 한 소식이 일었다.

! 스님의 신통함이 별것이 아니었구나! 본래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이 이미 여기에 있는데

반가사유상의 미소가 그동안 나에겐 알게 모르게 화두로 자리 잡고 있었던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