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모든 경문의 글귀도 진리의 원리를
교학으로 설명하는 비유와 방편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비유와 방편이 밝은 눈으로 깨어보면
모두가 참 진리가 살아서 숨 쉬는 화두와 같은데,
말이나 글귀에 속아서 원리와 지식으로 논한다면
허수아비에 옷을 입혀놓고 사람이라 우기는 경우와 같다.
그래서 말과 글에 속지 말고
그 말 이전에 뜻을 스스로 체험하여 알아차려야 한다.
공성(空性)은 늘 지금 이 순간 작용성에 있는 것이지
생각을 일으키는 과거의 말이나 글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명한 계현스님과 제자 신찬스님의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계현스님이 햇빛이 밝게 비치는 들창문 밑에서
한 쪽의 창문을 열어놓고 경전을 읽고 있었다.
마침 그 때 벌 한 마리가 방에서 밖을 나가려고
닫혀 있는 창문에 가서 계속하서 부딪치고 있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제자 신찬스님이
시를 한 수 읊는데
텅 빈 문(空)으로는 기꺼이 나가지 않고
창문에 가서 부딪치니 참 어리석도다.
공문불긍출(空門不肯出)
투창야대치(投窓也大痴)
백년 동안 옛 종이만 뚫은 들
어느 날에 벗어날 기약 있으리오.
백년찬고지(百年鑽古紙)
하일출두기(何日出頭期)
반야심경을 공부하는 우리들에게 아주 의미 있는 이야기다.
불자라면 대부분 반야심경 쯤은 모두 달달 왜우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반야심경이 전하고자 하는 진리의 참 뜻을
화두를 참구 하듯 스스로 골똘히 체험 해 봤는지?
아니면 문자나 지식으로 경문에만 매몰되어 어리석은 벌처럼
창호지만 열심히 뚫고 있는지를 스스로 반문해 봐야 한다.
공은 색즉공 공즉색이요.
무안이비설신의 무지역무득이라 했다.
말과 글로 설명도 지혜도 없다 했으니
설명을 떠나서
그 공의 도리를 말해 보시요? 라고 질문 받는다면
글과 말로는 AI 보다 더 잘 외우던 사람도
우물쭈물 꿀먹은 벙어리가 된다.
‘까궁! ’
정신차리십시요.
깨달을 각(覺)에 내 몸 궁(躬)이다.
내 우주를 깨달아 대자유인 주인공이 되라고
옛 어른들이 가르쳐준 화두이다.
경전만 외우고 시간만 뚫지말고
누가 공도리가 눠요? 하면
양손을 번쩍 들어서 손뼉을 한 번 쳐 보세요.
‘짝! ’
이렇게라도 흉내를 내다가 보면 아하! 그렇구나.
이것이 공(空)도리 구나! 하면서 알아차릴 때가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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