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불교

우리말 불교 - 작용주의와 전체주의

통융 2022. 2. 2. 05:28

불교는 작용주의이며 전체주의다.

 

불교는 연기의 작용을 깨닫고 쓰는 삶이 불교이기 때문에 작용주의다.

모든 삶이 불교적 명상이기 때문에 전체주의다.

 

부처님이 인도 전통의 명상주의(고행,수정(修定)주의 ,

출입식의 명상)= 사마타 명상에서 시작 했다. 

 

부처님이 세명의 스승(막가바, 알라라 깔라마, 웃다가 나마뿟다) 에서 배운 고행주의나

수정주의 등에서 배운 수행은 모두 사마타 명상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출입식하는 수행은 결국 명상 할 때만 고요하나

삶에서는 또 괴로움이 나타나는 것은 진정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삶에서 늘 깨어있는 알아차림의

명상 관자재(觀自在) 수행이 위빠사나 명상을 한다.

 

부처님이 나의 진리는 논리나 철학이 아니라

스스로 체험하는 수행이라고 산자야에게 말씀했듯

 

불교 수행의 출발은 연기작용(作用)주의적 행동( 行動)수행이다.  

부처님은 본래 깨달음은  중도의 진리는 연기법이고 전체주의다.

 

연기작용으로 일어난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작용주의 불교이다.

 

이 세상은 모두가 나타남, 있기 위해서는 움직이고 

보고 듣고 알아차리는 모든 것이 일어나고 있는 연기작용이다.

 

움직이는 것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머무는 것도 쉼 없이 멈추려고 하는 작용이 일어나고 있다.

 

고요함이 고요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고요함이 움직이고 있듯

멈추고 있는 것도 멈추려는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듯 이 세상에 모든 것은 오직 작용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움직임이 없다는 것은 생각이나 말일 뿐이다.

 

하지만 글도 말도 고요함도 움직임도 사실은 모두가 움직인다.

말하는 그 순간, 글을 쓰는 순간, 읽고 보고 듣는 모든 순간이 작용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움직임이 작용성인 일어남이며, ...空

그 작용성이 나타나는 것이 있는 그대로이다..... 相

그 있는 그대로는 알아차리는 것이 바른 앎이고.... 中

그 바른 앎을 그대로 쓰면서(작용)하면서 사는 삶이 지혜로운 삶이다. ... 중도이고 연기작용이다.

 

부처 속에는 부처가 없다.

오직 일어남만 있을 뿐이다.

 

번뇌 즉 보리라는 말이다.

모든 법계는 불성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찾는 것이 부처라면 그대는 절대 부처를 찾을 수 없다.

눈이 눈을 보지 못하듯이 이미 부처인 부처를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그대가 지금 부처다. 생각이 부처이고 행동이 부처이다.

오직 일어난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라.

 

볼 때 는 볼뿐, 들을 때는 들을 뿐, 오직 일어난 것에 전부가 되어라.

매 순간순간 일어나는 그 것이 불성이며 그것은 모두가 하나임을 알라.

 

모든 것이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 의도적 지식

모든 행위에 전부가 되는 것 .... 일어난 그대로의 행동

 

모든 것은 작용으로 이미 일어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다.

 

그냥 일어난 그대로가 이미 완벽하기 때문이다.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난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연기작용성의 실체로 불성이고

일어난 그대로 연기작용성의 나타난 현상이 부처이다.

 

작용주의는 개인주의다. 작용성 안에 모든 부처가 있다.

그 행위는 모두가 부처의 행위일 뿐이라는 내용이다.

 

일원론적 사고이고 너와 나를 상관하지 않고 오직 상관치 않는 것.

모든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봐 주는 것. ..그것이 자비이다. 무관심이기도 하다.

 

너와 내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이원론적 사고이나

개인과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 자비와 사랑이다.

 

그러면서도 서로서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일원론적 사고이면서

우리라는 공동 운명체로 또 자애와 보리심이 생긴다.

 

대승불교는 일원론과 이원론적 사고를 동시에 수용하는 전체주의 사고이다.

너와 나의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로 연기되어 있다는 생각은 보리심을 유발하는 이유이다.

 

왜 이러한 전체주의 적인 사상이 가능한가?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가 연기( 緣起)법이기 때문이다.

 

 연기법은 연기가 일어나는(法) 작용성(性)은 한 순간도 멈춤 없고 변하고

모든 것은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전체주의(法性)를 깨닫는다.

 

즉 진리는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순간 연기작용으로 인해 나타난 상태,

즉 지금 보고 듣고 느끼는 그 순간의 작용이 진리의 본체이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런데 우리는 작용하여 일어난 그 상태를 그대로

100%인지하고 자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학습된 인식인 기억이나 생각으로 분석한다는 것이다.

즉 일어난 그대로가 아닌 2차적인 생각, 즉 관념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5가지 무더기로  6가지 근과 6경계로  6식을 통해 만든

자아의식이 7식인 말라식과을 만들고 그것을 모두 함장하는 8식 알라야식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인식이 유식(唯識)론을 만들고 유식을 바탕으로 여래장 사상과 불성사상이 생기면서

본래 부처로 돌아가는 선불교의 견성성불로 돈오의 사상이 만들어 진다.

 

오늘날 이것을 위파사나의  알아차림 수행과 접목해서

다양한 수행이 형성되고 있다.  

 

지금 여기서 매 순간 관념된 생각으로 분별하지 않고 자각하며

깨어 알아차려 쓰는 것이 중도(中道)적  진리임을 안 것이다.

 

모든 것은 나타내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 쓰는

작용( 作用)에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삶이 곧 명상이고 명상이 삶의 전부임을 깨달은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전체주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