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경전에서 최고의 3가지의 서문(序文)이 있다.
1, ‘往復序(왕복서)’ 청량스님이 <화엄경>을 해설
‘往復이 無際(왕복무제)나 動靜은 一源(동정일원)이라’고 해서, 불교 글 중에서 첫 손가락 꼽을 정도로 아주 뜻이 깊고ㆍ글이 아름다운서문
2, ‘일물서(一物序)’. 함허스님의 <금강경오가해>‘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해서 ‘一物序’라고 별명
3, ‘馬防序(마방서)’. 마방馬防의 <임제록>. 임제록을 편찬해서 당시 아주 유명한 문장가이면서 사회의 지명도가 아주 높았던 불자. 마방(馬防) 쓴 임제록 서문이 또 유명합니다.
金剛般若波羅密經五家解序說
함허서 有一物於此하니
여기에 한 物件(一物)이 있으니
설의 一物이 何物고 ○秪這一着子는 希夷焉하야 絶情謂하며 髣髴焉하여 看似有하며 響曶然하야 難可追하며 恍惚然하야 難可測이니 非迷非悟라 不可以凡聖으로 稱이며 無我無人이라 不可以自他로 名일새 故로 但云一物이니라 六祖가 云有一物호대 無頭無尾하며 無名無字로대 上柱天下柱地하고 明如日黑似漆하야 常在動用中호대 動用中에 收不得者가 是니라 然雖如是나 一物之言도 亦强稱之而已라 故로 南嶽讓和尙이 道하사대 說似一物이라도 卽不中이라하시니 有一物於此者는 不離當處常湛然故로 云爾니라
“한 物件이란 어떤 物件인가.”
○ 다만 이 하나는
希夷하여 생각이 끊어지고
髣髴하여, 보면 있는 것 같으면서도
響昒하여 따라가기 어렵고
恍惚하여 헤아리기 어려우니
어리석은 짓(迷)도 아니고 깨달은 것(悟)도 아니다. 凡夫나 聖人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나(我)도 남(人)도 없으므로 나(自)니 너(他)니 하고 이름 붙일 수도 없다. 그러므로 단지 “한 物件“이라 한 것이다.
六祖가 이르길 “한 物件이 있으니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으며 名도 없고 字도 없으되 위로는 하늘에 닿고 아래로는 땅에 꽉 차있다. 밝기는 太陽과 같고 어둡기로는 옻칠(漆)과 같다. 항상 움직이고 쓰는 가운데(動用中) 있으되 動用中에 거두려 해도 거두지 못하는 것이 이것이다.“하였다.
비록 이와 같기는 하나 “한 物件“이라는 말도 또한 억지로 말했을 따름이라.
그러므로 南獄懷讓和尙(六祖스님의 弟子)이 “설사 한 物件이라 할지라도 맞지 않다.“한 것이다.
그러니 “여기 한 物件이 있다.“는 것은 바로 이 자리(當處)를 여의지 않고 항상 湛然한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함허서 絶名相호대
이름(名)과 모양(相)이 끊어졌으되,
설의 蕭焉空寂하며 湛爾冲虛하야 無名可名이요 無相可睹故也니라
蕭然하여 고요하며 맑고 텅 비어서 가히 이름으로 부를 것이 없고 모양으로써 볼 것이 없느니라.
함허서 貫古今하고
古今을 꿰뚫고 있고
설의 歷千劫而不古하고 亘萬歲而長今이라 多經海岳相遷하니 幾見風雲變態오
千劫을 지나도 옛이 아니고 萬歲에 뻗쳐 있어도 항상 지금이라. 많은 세월동안 바다와 山岳이 서로 수 없이 바뀜을 겪었으니 風雲의 變態를 얼마나 보았던가.(“바다와 山“云云은 이 세계가 成 · 住 · 壞 · 空할 때 바다가 山이 되는 세계의 變을 말한 것이고, “風雲“云云은 君臣興亡의 人間變易를 말한 것이다.)
함허서 處一塵호대 圍六合이로다
한 티끌에 處하되 六合(四方上下)을 에워쌈이로다.
설의 凡有事物이 小不能大하고 大不能小로대 此則反是하야 能小而細入隣虛하고 能大而廣包法界니라
무릇 있는 바 모든 事物이 작은 것은 能히 클 수 없고 큰 것은 能히 작아질 수 없으나 이것(한 物件)만은 이(事物)와 반대로 작고 가늘어서 能히 隣虛에도 들어가고 크고 넓어서 能히 法界를 에워싼다.
함허서 內含衆妙하고
안으로는 온갖 微妙한 것을(衆妙) 머금었고
설의 體量이 恢恢하야 恒沙性德과 無量妙用이 元自具足이니라
本體의 量이 恢恢하여 恒河의 모래 수와 같은 性德과 限量없는 妙用(묘한 작용)이 元來 저절로 갖추어져 있다.
함허서 外應群機하며
밖으로는 온갖 根機(群機)에 다 應하며
설의 物來卽應하야 感而遂通이 如明鏡이 當臺에 胡來胡現하고 漢來漢現하며 洪種이 在虡에 大扣大鳴하고 小扣小鳴이니라
事物이 오면 곧 應하여 느껴 通하는 것이 밝은 거울(明鏡)과 같아 이 臺에 胡人(黑 호나라 사람)이 오면 胡人이 나타나고 漢人(赤)이 오면 漢人이 나타난 것 같고, 큰 鐘이 틀에 걸려 있어서 크게 치면 크게 울리고 작게 치면 작게 울리는 것 같다.
함허서 主於三才하고 王於萬法하니
三才(天 · 地 · 人)의 主人이 되고 萬法의 王이 되나니,
설의 天以之覆하고 地以之載하고 人以之處乎其中하며 以至日月星辰과 草木昆虫히 凡有貌像形色者가 莫不以之爲宗하야 而得成立이니라
하늘은 이것(한 物件)으로써 덮고(覆) 땅은 이것(한 物件)으로써 싣고(載) 있으며 사람은 이것(한 物件)으로써 그 가운데 處하니 이로써 日月星辰과 草木昆虫에 이르기까지 무릇 모양과 형색이 있는 것들이 이것으로써 根本을 삼아서 성립하고 있지 아니한 것이 없다.(이것은 “안으로 衆妙를 머금고 밖으로 群機를 따르며, 三才의 主가 되고 萬法의 王이 된 것“을 밝힌 것이다.)
함허서 蕩蕩乎其無比요 巍巍乎其無倫이로다
蕩蕩하여 그에 비길 것 없고 巍巍하여 그에 짝할 수 없도다.
설의 蕩蕩云云은 廣大勝第一者가 是요 巍巍云云은 最尊極無上者가 是니 此所以爲王爲主之勢也니라
蕩蕩하다는 것은 광대하여 제일이 되는 것이요, 巍巍하다는 것은 가장 높고 높아서 至極하여 위없는 것이니, 이것이 王이 되고 主人이 되게 하는 힘(勢)이 되는 까닭이다.
함허서 不曰神乎아 昭昭俯仰之間하고 隱隱於視聽之際하며
어찌 神秘하지 아니한가. 엎드리고 우러르는(俯仰) 사이에 分明하고, 보고 듣는 즈음에 隱隱히 스며있으며,
설의 決定是無로대 性自神解하고 決定是有로대 尋之無蹤하니 此所以爲神也니라
決定코 이것이 없으되 性이 스스로 神秘롭게 알고, 決定코 이것이 있으되 찾으면 자취가 없으니 이것이 神秘하다고 한 까닭이니라.
함허서 不曰玄乎아 先天地而無其始하고 後天地而無其終하니
어찌 그윽(玄玄)하지 아니한가. 天地보다 먼저 됐으되 그 비롯함이 없고 天地보다 뒤에까지 있으되 그 마침이 없으니,
설의 有形之最先者가 天地也요 有形之最後者도 亦天地也라 有形之最先者가 天地也로대 而天地가 以此爲始하니 此는 物之所以始者를 不可得而窮也라 所以始者를 旣不可得而窮則所以終者도 亦不可得而窮也니 此所以爲玄也니라
모양 있는 것 가운데서 가장 먼저 된 것은 하늘과 땅(天地)이고 모양 있는 것 가운데서 가장 끝까지 存在하는 것도 하늘과 땅이다. 모양이 있는 것 가운데서 가장 먼저 된 것이 하늘과 땅이지만 하늘과 땅이 이것으로써 비롯되니 이것이 物質(一物)이 된 까닭이라. 가히 그것은 窮究할 길이 없도다. 비롯된 까닭을 이미 窮究할 수 없은즉 마침도 역시 窮究할 수 없음이니 이것이 玄玄하다한 까닭이다.
함허서 空耶아 有耶아 吾未知其所以로다
空이냐 有냐. 나는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도다.
설의 物體深玄애 虛徹靈通하야 有不定有요 無不定無니 言語道斷하고 心行處滅가 故로 云爾니라
(物自體는 볼 수 없다. 다만 우리의 눈망울 속에 나타난 그림자를 볼뿐이다. 그것을 보고 이렇다 저렇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일이다. 그래서 空과 有 두 가지를 놓고 무엇이라 할 것인가 망설인 것이다.) 物體가 깊고 그윽하고 비어 사무쳐 영통(靈通)해서, 있으되 決定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다고 하지만 決定코 없는 것도 아니니 말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갈 곳이 滅한(言語道斷 心行處滅) 까닭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함허서 我迦文이 得這一着子하사 普觀衆生이 同稟而迷하사 歎曰奇哉라하시고 向生死海中하사 駕無底船하시며 吹無孔笛하시니 妙音이 動地하고 法海가 漫天이라 於是에 聾騃盡醒하고 枯槀悉潤하야 大地含生이 各得其所하니
우리 釋迦牟尼 부처님께서 이 하나를 얻으시어, 衆生들이 다 같이 지니고(稟) 있으되, 모르고 있는 것을 두루 살피시고 歎息하여 가로되 ‘新奇하다’하시고 生死苦海속을 향해 無底船(밑 없는 배)을 타고서 無孔笛(구멍 없는 피리)을 부시니 妙한 소리가 天地를 震動하고 法海가 하늘 가득함이로다. 이에 귀먹고 어리석은 凡夫가 다 깨어나고 마른나무들(小乘)이 다 潤澤하게 되며 大地의 모든 생명들이 다 그 살 곳을 얻으니,
설의 此物이 非聖非凡이로대 而凡而聖하며 非淨非染이로대 而染而淨이라 所以로 道호대 手把破砂盆하고 身披羅錦綺하야 有時에 醉酒罵人이라가 忽爾燒香作禮라하니 比之空日컨대 空豈長晴이며 亦豈常雨며 日豈長明이며 亦豈常暗이리오 一念迷也에 雲起長空하야 上明下暗하고 一念悟也에 風掃迷雲하야 上下洞徹하니 染淨所以興也며 聖凡所以作也니라 聖凡旣作則感應이 生焉하야 凡在迷而渴仰風化하고 聖在悟而爲物興悲하나니 所以로 我迦文이 於寂滅場中에 初成正覺하사 作獅子吼하시며 奇哉奇哉라 普觀一切衆生호니 具有如來智慧德相이언마는 但以妄想執着으로 而不證得이라하시고 於是에 運無緣慈하시며 說無言言하사 廣演敎海하야 徧注衆生心地하사 使之道芽로 榮茂하고 心花로 發明케하시니 大地同春에 萬物이 感熙로다
(그래서 그것은 聖凡染淨에 관계되지 않으면서도 聖도 되고 凡도 된다 한 것이다.) 이 物件은 聖人도 아니고 凡夫도 아니로되 能히 凡夫도 되고 聖人도 되며, 깨끗한 것도 아니며 더러운 것도 아니지만 때로는 能히 더러워지기도 하고 깨끗하여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르되 “손에는 깨진 사기그릇 조각을 쥐고 몸에는 비단옷을 걸치며, 때로는 술에 취해 사람들을 욕하는가 하면 忽然히 香 사르고 禮拜한다.“하니 저 虛空의 太陽에 比喩한다면 虛空이 어찌 늘 맑기만 하고 또한 어찌 늘 비만 오며 해가 어찌 늘 밝기만 하며 또한 어찌 늘 어둡기만 하겠는가. 한 생각이 迷惑해지면 구름이 큰 虛空에 일어나 위는 밝으나 아래는 어두운 것과 같고, 한 생각을 깨달으면 바람이 미혹의 구름을 쓸어버려 위아래가 모두 밝아지는 것과 같다. 더럽고 깨끗한 것(染淨)도 이렇게 일어나고(興) 聖人과 凡夫도 이렇게 지어진다(作). 聖人과 凡夫가 이미 이렇게 지어졌다면 感應이 일어나서 迷惑함이 있는 凡夫는 聖人의 교화(風化)를 목마르게 바라고 깨달음이 있는 聖人은 衆生(物)을 위하여 慈悲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우리 석가모니부처님께서 寂滅道場 가운데서 처음 正覺을 이루시어 獅子吼를 지으시고 이르시기를 “기특하고 기특하다. 널리 一切衆生을 살펴보니 如來의 智慧德相을 갖추고 있건만 단지 妄想執着으로 證得하지 못하고 있구나” 하시고 이에 인연 없는 慈悲를 굴리시며(運) 널리 가르침의 바다(敎海)를 펴시어(演) 골고루 衆生의 마음 밭(心地)에 대어(注) 道의 싹을 잘 자라게(榮茂)하고 마음 꽃(心花)이 환하게 피게(發明) 하시니 大地가 똑같이 봄을 맞이하여 온갖 萬物이 感動하여 크게 빛나도다.
함허서 今般若經者는 妙音之所流요 法海之所自者也라
지금의 般若經이라는 것은 妙音이 흘러나온 바이며 法海가 이(金剛經)로부터 흘러온 바로다.
설의 般若는 一物之强稱이요 經者는 現物之具也리 此乃金口親宣이요 不是餘人之所說이니 法門淵源이 不同??之敎乘이니라
(註, 다음은 金剛般若의 體相用을 밝힌 것에 대하여 주해한 것이다.) 般若는 한 物件을 억지로 이름한 것이고 經은 한 物件을 나타낸 道具이다. 이것은 부처님(金口)께서 親히 말씀하신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說한 것이 아니다. 法門의 깊고 깊은 根源(淵源)이 자질구레(??)한 가르침(敎乘, 小乘)과는 같지 않다.
함허서 以金剛之堅利로 剗我人之稠林하시고 照慧日於重昏하시며 開惑霧於三空하사
金剛의 굳고 날카로운 것으로써 我人의 稠林(번뇌의 숲)을 끊으시고 智慧의 太陽으로 重昏을 비추시며, 迷惑의 안개(惑霧)를 三空(我空 · 法空 · 俱空)으로 여시사
설의 我人稠林이 蔚於心地라가 金剛焰下에 掃地無蹤이라 法與非法此二惑霧가 掩蔽性空일새 故曰重昏이니 慧日이 一照에 重昏頓破하고 三空이 顯現이니라
我相 · 人相의 마음의 번뇌(稠林)가 마음 땅에 茂盛하다가 金剛의 불꽃아래서(焰下) 땅을 쓴 듯이 자취가 없어진다. 法과 非法의 이 두 惑霧가 性品의 空함을 가리우게 되므로 重昏이라 한 것이다. 智慧의 빛이 한번 비치면 重昏이 몰록 깨지고 三空이 훤히 나타난다.
함허서 使之出斷常坑하야 登眞實際하며 敷萬行花하야 成一乘果케하시니
그로 하여금 斷見(空)과 常見(有)의 구덩이(偏見)에서 나오게 하여 眞實際(참다운 이치) 오르게 하며 萬行(六度萬行)의 꽃을 피워서 一乘의 果(부처님의 지위 : 成佛)를 이루게 하시니,
설의 法非常而執爲有하고 性非斷而執爲空하나니 執爲空而不知空之不空則是落斷見坑也요 執爲有而不知有之不有則是落常見坑也니라 實際者는 空有兩忘하고 一味亦亡之處也니 佛以三空으로 開示하사 使之不落斷常之坑하고 頓超空有之外하야 如是圓修하며 如是圓證也니라
法은 常이 아닌데 執着해서 有라하고, 性은 斷이 아닌데 執着해서 空을 삼으니 空에 執着하여 空이 空아닌 줄을 알지 못하면 斷見의 구덩이에 떨어지고, 執着하여 有를 삼으나 有가 有아닌 줄 알지 못하면 常見의 구덩이에 떨어진다. 實際라는 것은 空 · 有를 둘 다 잊어버리고, 잊어버린 그 一味까지도 없어진 것이니, 부처님이 三空으로서 열어 보이사 그들로 하여금 斷常(斷見과 常見)의 구덩이에 떨어지지 않게 하고 몰록 空 · 有의 밖을 뛰어넘어서 이와 같이 圓滿히 닦아서 이와 같이 圓滿히 證得하게 하느니라.
함허서 言言利刃當陽이요 句句水灑不着이로다
말씀말씀이 날카로운 칼날이 햇빛에 반사된 것같이 무섭게 빛나고 句節句節이 물로 씻은 듯이 한 티끌도 붙지 않음이로다.
설의 金剛妙慧가 堅不爲物挫하고 利能斷衆生寃結이니 般若雄詮은 金剛妙慧之所現發이라 故로 利能破衆生疑網하고 堅不爲外魔所壞니라
金剛의 妙한 智慧가 堅固하여 다른 事物에 꺾임을 당하지 않고 날카로워서 能히 衆生들의 寃結을 끊으니 般若經典은 金剛의 妙한 智慧가 드러나는 곳이라 그 때문에 날카로워서 能히 衆生들의 의심(疑網)을 깨트리고 堅固하여 外道나 마구니(魔)들의 무너트림(壞)이 되지 않도다.
함허서 流出無邊法門海하사 孕育無限人天師하시니
가없는 法門의 바다를 흘러 내시어 限量없는 스승(人天師)들을 길러 내셨으니
설의 佛之與法이 皆從此經流出일새 故로 云爾니라
부처님과 法이 다 이 經으로부터 흘러나오므로 이렇게 말씀하셨도다.
함허서 若大鑑能과 圭峰密과 冶父川과 傅與鏡此五大士者는 皆人天之所尊이요 法海之所歸者也라
大鑑能(六祖慧能)과 圭峰密(圭峰宗密)과 冶父○川(冶父道川)과 傅大士와 宗鏡 이 五大士는 모두 人天이 尊重할 바요 法海의 돌아(歸) 갈 바라.
설의 五大士가 皆因此經하사 眼目夫人天이라 故로 曰人天之所尊이요 無法不了라 故로 云法海之所歸니라
五大士가 다 이 經으로 因해서 人天의 眼目이 됨이라. 그러므로 하늘과 사람이 모두 尊重해야 하며, 法을 모두 通達하셨는지라(無法不了), 그러므로 法海의 돌아갈 바라고 이르셨느니라.
함허서 各具通方正眼하사 直傳諸佛密印하시고 各出廣長舌相하사 開演最上宗乘하시니 一一威振河嶽이요 輝騰古今이라 遂使當世에 盲者로 得見하고 聾者로 得聞하며 啞者로 能言하며 跛者로 能行하시고
各其 모든 것에 통하는(通方) 바른 눈(正眼)을 갖추시어 바로 諸佛의 密印(비밀한 가르침)을 傳하시고 각각 廣長舌의 모습을 내어서 최상의 근본 가르침(最上宗乘)을 펴시니 낱낱의 威嚴이 江山에 떨치고 빛이 古今에 드날림이라. 드디어 이 世上에서 눈먼 자로 하여금 보게 하며 귀머거리는 듣게 하시며 벙어리는 말하게 하며 쩔뚝거리는 이는 걷게 하시고(靈驗的인 것보다는 法에 대한 眼目을 열어 주셨음을 이름)
설의 通方正眼者는 明眞了俗하고 達乎中道하야 無所不通之正眼也라 密印者는 衆生所迷之眞理요 佛祖相傳之法印也라 五大士가 具如是正眼하며 傳如是密印하사 開大口說大話하시니 威光이 動地하야 照映今昔이라 遂使見聞으로 皆化하야 知非遷善케하시니 極於宗說兼通하며 解行相應之大化者가 皆於此經에 得之矣니라
通方正眼이라는 것은 眞을 밝히고 俗을 了達하며 中道를 通達하여 通하지 못함이 없는 바른 눈을 이름한 것이요, 密印은 衆生들이 알아야할 眞理이고 부처와 祖師가 서로 傳한 法印이다. 五大士가 이와 같이 바른 눈을 갖추고 이렇게 密印을 傳하여 큰 입(大口)을 열어 큰 말씀(大話)을 說하시니 威光이 땅을 震動하여 古今을 밝게 비추이시니 이것을 보고 듣는 이들이 모두 敎化되어 잘못을 알고 착해져서 마침내 宗說(宗은 理로서 眞理를 깨달은 것, 說은 事로서 깨달은 眞理를 말해줌)을 兼하여 通하니 解와 行이(解行) 서로 應하여 크게 敎化를 펴는 방편을 모두 이 經에서 얻었다.
함허서 旣而요 亦爲普覺將來하사 各自依經著解하야 以傳天下後世하시니
이미 그러하였고 또한 장래에도 널리 깨닫게 하기 위하여 각기 스스로 經에 의지하여 解를 지어서 天下後世에 傳하시니,
설의 旣而斯經으로 現益當世하시고 且造斯解하야 流芳萬古삿다
(다음은 이 經의 註釋者들에 대한 꽃다운 정신을 찬양하고 공경한 글을 註疏라 한다.) 이미 이 經으로써 當世에 이익을 주었고 또한 이 解釋를 지어서 그 아름다움을 萬古에 흐르게 하였다.
함허서 豈是彫文喪德이리오 可謂錦上添華며
어찌 무늬를 새겨서 德을 잃으리요. 오히려 금상첨화로다.
설의 玉無瑕而彫文에 反喪良玉溫潤之德이어니와 斯解則反是하야 致令經語로 益精하며 經義로 益明하야 遂使目之者로 披雲睹日하고 耳之者로 豁然心開로다
옥에 티가 없는데 옥에 무늬를 새기면 도리어 좋은 옥의 매끄러움을 상하게 하지만 이 解(五家解)는 이와 반대로 經의 말씀을 더욱 精密하게 하고 經의 뜻을 더욱 分明하게 하여 드디어 보는 者로 하여금 구름을 헤치고 햇빛을 보게 하고 듣는 者로 하여금 豁然히 마음이 열리게 하였다.
함허서 何止重輝佛日이리오 亦乃光揚祖道로다
어찌 부처님의 빛(佛日)을 더욱 빛내는 데에만 그치리오. 또한 祖師의 道까지도 드날림이로다.
설의 古人이 道하사대 三乘十二分敎에 體理得妙하면 何處에 更有祖師西來意이리오하시니 則別傳之旨도 亦不外乎斯經이로대 尙爲言敎의 所攝하야 隱而不現이어늘 今諸祖가 稱實發揚하시니 非獨敎義全彰이라 別傳之旨도 亦乃昭然이로다 有云호대 單傳直指之旨가 豈斯敎의 所攝乎이하니 看於黃梅曹溪에 足可見矣니라
古人이 이르되 “三乘 十二分敎의 이치를 깨닫고 妙를 얻으면 어느 곳에 다시 祖師(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이 있겠는가(祖師西來意).“하니 곧 따로 傳한 뜻(敎外別傳)이 또한 이 經밖에 있지 않다. 오히려 言敎에 攝受한 바가 되어서 숨어 나타나지 않으므로 이제 모든 祖師님들이 사실에 맞춰 드러내시니 비단 가르침의 뜻만 나타낼 뿐 아니라 따로 傳한 뜻(禪旨)까지도 훤히 나타났다. 어떤 사람이 이르기를 “홀로 傳한 直指의 뜻(禪旨)이 어찌 이 敎(金剛)에 攝受한 바 되겠는가.“하였지만 黃梅(五祖)와 曹溪(六祖)를 보면 足히 알 수 있도다.(바로 이 經 안에 禪旨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함허서 我曹가 生于千載之下하야 得遇難遇之寶하야 手接目睹하니 幸莫大焉이라
우리들이 千年 이후에 태어나서 만나기 어려운 보배를 만나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니 그 多幸스러움이 이보다 큼이 없도다.
설의 慶遇斯解也라
(다음은 이 解로 인하여 自覺的 大道에 진입하여 佛祖의 慧明을 밝힌 것을 찬탄한 대목을 해설한 것이다.) 이 해(五家解)를 만난 것을 慶事스럽게 여기도다.
함허서 以此로 可以揚佛祖之餘輝며 以此로 可以延君國之洪祚로다
이로써 佛祖의 限없는 빛을 드날리며 이로써 나라의 큰 福을 뻗치게 함이로다.
설의 儻因斯解하야 豁開正眼則法印이 在握하고 化道가 在己니라
만약 이 五家解로 因하여 正眼이 활짝 열리면 法印이 바로 우리 손안에 있고 敎化의 길(化道)이 자기에게 있느니라.
함허서 然此編集이 出於何人之手관대 而不現其名乎아
그러나 이 五家解의 編集이 누구의 손에서 나왔길래 그 이름을 나타내지 않았는가.
설의 歎不現夫編者之名也라
저 編集者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음을 歎息하노라.
함허서 吾가 喜其爲一佛五祖師之心을 令一轉而便見也하노라
나는 한 부처님과 五祖師의 마음이 한번 굴리매 문득 보게됨을 크게 기뻐하노라.
설의 一軸之內에 佛燈祖焰이 交光互映하야 可一轉而便見佛祖之心矣니 此所以爲喜也니라
한 卷의 冊 안에 부처님의 法燈과 祖師의 불꽃이 서로 어울려 비추어서 가히 한번 읽으매 곧 佛祖의 마음을 다 보게되니 이것이 기뻐하는 까닭이니라.
함허서 所嗟는 雖有彈絃之妙指나 未遇賞音之嘉聰이라 由是로 誤聽峨峨하야 作洋洋者가 多矣며
슬퍼하는 바는 비록 거문고를 퉁기는 妙한 손가락은 있으나 音을 감상하는 뛰어난 밝은 귀(智慧人)를 만나지 못했음이라. 이로 말미암아 峨峨(산을 연상하는 곡)를 洋洋(바다를 연상하는 곡)이라고 잘못 듣는 者가 많도다.
설의 三尺古琴에 妙音이 斯在하니 雖有妙音이나 若無妙指면 終不能發이요 縱有妙指하야 善能彈絃이니 聞而賞音者가 蓋難하니 賞音者가 難故로 誤聽峨峨하야 作洋洋者가 多矣로다 一部靈文에 妙理斯在하니 雖有妙理나 若非匠手면 孰能抽毫하야 稱實發揚이리오 雖有稱實發揚이니 目以善解者가 蓋難하니 善解者가 難故로 以淺爲深하고 以深爲淺者가 多矣니 是可歎也로다
(그러나 그것을 아는 이 몇이나 될 것인가, 그래서 음을 아는 이 만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한 대목을 다시 이렇게 해설한다.) 석자(三尺) 옛 거문고에 妙音이 거기 있으니 비록 妙音이 있으나 만약 妙한 손가락이 없으면 能히 나타내지(能發) 못하고 비록 妙한 손가락이 있어 줄을 잘 뜯으나 그 선율을 감상하는 자를 만나기는 더욱 어려운 것이다. 소리를 감상하는 者를 만나기 어려운 까닭에 훌륭한 감상자가 없으므로 곡조를 잘 못 듣고 ‘峨峨’를 ‘洋洋’이라고 들음이 많도다.
一部(책)의 신령스러운 글에 妙한 이치가 그 속에 있으니 비록 妙한 이치는 있으나 만약 匠人의 손이 아니면 누가 能히 붓을 빼어서 사실에 맞게 표현하리오. 그러나 비록 사실에 맞게 표현하더라도 그것을 보고 그대로 이해하는 이가 매우 적으니 잘 이해하는 이가 없는 故로 얕은 것으로서 깊은 것을 삼고 깊은 것으로서 얕은 것을 삼는 이가 많아 이것을 탄식함이로다.
함허서 又於經疏에 以僞濫眞하야 乳非城外者가 頗多하니 豈非以去聖愈遠하야 歷傳多手而致然歟아
또한 經疏(註解)에서 거짓이 참된 것에 흘러들어서 우유가 성밖의 우유(진짜)가 아닌 것(가짜)이 많도다. 聖人이 가신지 더욱 멀어져서 많은 손을 거쳐 전해지는 과정에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설의 眞僞相雜하야 水乳를 難判하니 所以舛訛는 蓋緣傳寫之誤耳니라
(古來로 이 책에 대한 주해서가 무려 八백여가 넘는다. 거기에는 옳은 것도 있고 그른 것도 있어 잘못된 것이 사람들의 눈을 그르치고 있음을 개탄하고 그것을 밝혀 바른 길을 제시하기 위해서 이 說誼를 짓는다고 본문을 쓰게된 동기를 밝힌다.) 眞(참됨)과 僞(그릇됨)이 서로 섞여서 물과 우유를 가릴 수 없으니, 잘못된 까닭은 대개 傳하여 쓰는 과정에서 잘못이 있을 뿐이니라.
함허서 夫聖言之所以傳之於後之世也가 唯文不能設이요 空義不獨傳이라 文義相資하야사 方成妙唱하야 作天下古今之龜鑑하야 開世與出世之眼目이어니와 若義有言肴訛하고 文有錯誤하면 則非唯不能開人眼目이라 亦令誤解하야 碍正知見하리니
대저 聖人의 말씀을 후세에 傳하는 데 있어서는 오직 글만 能히 베풀 것이 아니요 공연히 뜻만 홀로 傳함도 아니로다. 글과 뜻이 서로 어울려 바야흐로 妙한 노래를 이루어서, 천하고금의 귀감이 되어야 세간과 출세간의 안목을 열어주려니와 만약 뜻이 잘 못 되어있고, 글에 착오가 있으면, 能히 사람의 안목을 열어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잘못 알게 해서 바른 지견을(正知見) 막게 하느니라.
설의 文字는 現道之具也며 導人之方也니 須文義相資하야 而血脈이 貫通하고 精審詳密이 備焉하야 而脫衍倒誤가 未嘗雜於其間然後에 能使人開解하야 得爲萬世之龜鑑也니라 不爾則非唯不能開人眼目이라 反爲惑人之具也니라
文字는 道를 나타내는 도구이고 사람을 인도하는 方法이다. 모름지기 글과 뜻이 서로 어울려서 혈맥이 관통하고 정밀하고 자세하며 깊게 갖추어서, 빠지고 넘치고 잘못된 것이 그 사이에 섞이지 않은 연후에 사람들에게 이해하게 하여 萬世에 龜鑑이 되게 함이라. 그렇지 못하면 사람의 안목을 열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도리어 사람을 迷惑하게 하는 도구가 된다.
함허서 蓋不爲文字에 所惑하고 能體聖人之意者를 誠難得也로다
대개 文字에 迷惑하지 않고 能히 聖人의 뜻을 체득하는 이는 진실로 얻기 어렵다.
설의 若非哲眼이면 不能不爲言肴訛의 所惑也니라
만일 밝은 눈(哲眼)이 아니면 잘못 어그러진 것에 迷惑하게 된다.
함허서 然이나 若心淸慮靜하야 緣文究義하며 依義尋文하면 則文義之舛錯者가 不隱微毫하야 了然昭著호미 如世病脈이 不能逃於善醫之手하리니
그러나 만약 마음을 맑히고 생각을 고요히 해서 글을 만나 뜻을 연구하며 뜻에 의지해서 글을 찾으면 즉 글과 뜻의 잘못된 것이 털끝만큼도 숨지 못하여서 확연히 밝게 드러나는 것이 마치 세상의 질병이 훌륭한 의사의 손에서 도망치지 못함과 같으니라.
설의 雖非哲眼이나 若靜心慮하야 以硏之則文義之舛錯者를 可得而詳也니라
비록 밝은 눈을 갖지 못하였으나 마음과 생각을 고요히 하여 연구하면 글과 뜻에 어긋나고 그릇된 곳을 자세히 밝힐 수 있으리라.
함허서 予가 雖非善醫之儔나 幸粗識文義하야 略辨眞僞故로 今之經之疏之中之或脫或衍或倒或誤者를 簡而出之하야 參之諸本하며 質之諸師하야 以正之하노라 然이나 他本所據外에 未嘗一字一句도 妄自加損於其間이요
내가 비록 좋은 의사의 짝은 못되나 다행히 글과 뜻을 대강 알아서 眞과 僞를 조금 분별하는 故로 지금 이 經의 疏 안에 혹 빠졌거나 혹 넘치거나 혹 잘못되거나 혹 그르친 것들을 가려내고 다른 책들을 참고하며 다른 스님들께 질문해서 그것을 바르게 하노라. 그러나 다른 책에 의거한 외엔 일찍이 한 자 한 구도 망령되이 그 사이에 더하거나 빼지 않았도다.
설의 予以不敏으로 辨眞僞定言肴訛也니 然이나 此는 以有據依而然이요 非爲臆斷이니라
내가 민첩하지 못한 솜씨로 참과 거짓을 가리고 잘못된 것을 바로 하긴 했으나 이는 증거가 있음으로써 그런 것이요, 내 소견으로 우김이 아니로다.
함허서 凡有所疑를 他本無所據處란 據義以決하야 附之卷尾而已로다
무릇 의심이 있는 곳을 다른 책에서 의거하지 못한 곳은 뜻에 의거함으로써 決定해서 책 뒤에 붙일 따름이로다.
설의 若以己意로 濫之於部內則或者가 爲達者之所非矣요 知有闕誤而不寫以傳之則未有今日較正之功也니 後世에 或聞較正之說하고 槪以爲全하야 而不加察焉則佛祖之正意가 幾乎墮地矣리라 故로 不獲已書之於卷尾하야 而傳之也로라
만약 자기의 뜻으로써 책 안에 붙여두면 혹 안목 있는 자(達者)가 할 바가 아니요, 빠졌거나 잘못된 것이 있는 것을 알고서도 그것을 써서 傳하지 아니하면 오늘 바로 잡는(較正) 功이 있지 못할 것이다. 후세에 혹 바로 잡았다는 말을 듣고도 온전함을 삼아서 더욱 살피지 아니하면 부처님과 祖師의 뜻이 거의 땅에 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부득이해서 책 뒤에 써서 그것을 傳한다.
함허서 若見盤根錯節之處하고 而抱拙拱手하야 不渤刃於其間이면 則豈爲通人達士之所可乎리오 是以로 不揆不才하고 解其結通其碍하며 正未正齊未齊하야 永貽來學하노니 誰知王舍一輪月이 萬古光明長不滅가 呵呵他日에 具眼者가 見之면 當發大笑矣리라
만일 뿌리가 얼키고 설키며 마디가 뒤섞인 것을 보고도 팔짱만 끼고 그 사이에 칼날을 놀리지 못하면 어찌 通人과 達士의 할 바가 되리요. 이로써 재주 없음을 헤아리지 않고 그 맺힌데를 풀고 막힌 것을 通하게 하며 바르지 못함을 바르게 하고 가지런하지 못한 것을 가지런히 해서 길이 미래의 學人에게 傳하나니,
누가 王舍城의 둥근 달이 萬古의 광명이 되어
길이 스러지지 않음을 아는가.
하하. 다른 날에 안목을 갖춘 자가
이것을 보면 마땅히 크게 웃으리라.
설의 解之舛訛가 如盤根錯節하야 結礙不通하니 若一向畏人非之하야 知誤而不決焉則其於報佛恩之義에 爲如何哉아 後世에 必有承訛踵誤하야 妄生穿鑿하야 以求其說之必通者矣리라 夫如是則其不決之弊가 至於使佛祖之言으로 終未免於駁雜之愆也리니 此는 通人達士之所不可也니라 由是로 終不固讓於決焉하야 寫以傳之也로라 夫然後에 一經之義天이 朗曜하야 當年之慧月이 將大明於天下矣니 孰知夫如是之理乎아 今悟自知其然而大慶于懷也로라 然이나 此言此說이 如蚊虻之鼓太虛也니 達者가 當以是로 爲笑具也리라
(잘못을 보고도 그대로 있는 것은 義人이 아니며 正人이 아님을 「부스러진 상다리를 보고 팔짱만 끼고 있는 사람」에게 비유한 것을 다음과 같이 해설하였다.) 이 해석의 잘못된 것이 마치 뿌리가 얼킨 것 같아서 맺히고 막혀 不通하니 만약 한결같이 남들이 그르다 할까 두려워해서 잘못됨을 알고도 해결치 않으면 부처님의 은혜를 보답함이 되겠는가. 후세에 반드시 잘못된 것을 이어 받고 그르친 것을 밟아서 망령되이 천착(穿鑿 : 思量)을 내어 그 說로써 通하기를 구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대저 이 같은즉, 해결하지 못한 폐단이 부처님과 祖師의 말씀에까지 이르러 마침내 뒤섞인 허물을 면치 못하리니 이는 通人達士의 할 바가 아니로다. 이로 말미암아서 해결하는 데 굳이 사양하지 않고 써서 傳하노라. 그런 연후에라야 한 經의 뜻이 하늘에 밝게 빛나서 당년의 智慧의 달이 장차 천하에 크게 밝으리니 누가 이 같은 이치를 알겠는가. 이제 내가 스스로 그러함을 알아서 마음속으로 크게 기뻐하노라. 그러나 이 말들은 마치 모기가 虛空에서 요동침과 같으니 達者가 마땅히 이것으로써 웃음거리를 삼으리라.
함허서 永樂乙未六月日에 涵虛堂衲守伊는 盥手焚香謹序하노라
永樂 乙未 유월에(1415년) 涵虛堂 衲子 守伊는 손씻고 향 사르고 삼가 序文을 쓰노라.
<참고>이 經은 다섯 분의 대 선사님들이 주해를 해 온 것이므로 서문 또한 다섯 분의 것이 있어 다소 본문에 들어가는 것이 지연되나 서문은 그 經을 일견함과 다름없을 만큼 주옥같은 글이라 옛날 서당에서는 서전 서문 같은 것은 몽땅 외어 오래도록 간직했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