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有一物於此(유일물어차)하니 一物(일물)이 何物(하물)고
“여기 한 물건이 있으니 이 물건이 무슨 물건인고”
“凡有事物이 小不能大하고 大不能小로대 此則反是하야 能小而細入隣虛하고 能大而廣包法界라”(범유사물 소불능대 대불능소 차즉반시 능소이세입인허 능대이광포법계)
“무릇 온갖 사물들이 작은 것은 능히 클 수 없고 큰 것은 능히 작아질 수 없으나 이것(한 물건)은 사물과 반대로 능히 작고 미세하여 인허(분자정도의 작은 것)에 들어가기도 하고 능히 커서 법계를 널리 에워싸느니라”
“歷千劫而不古(역천겁이불고)하고 선萬歲而長今(선만세이장금)이라” 천겁을 지나도 옛이 아니고 만세에 뻗쳐있어도 항상 지금이 마음자리요,
<금강경오가해>에 대한 함허스님의 서문을 ‘일물서(一物序)’라 한다.
여기 한 물건이 있으니(有一物於此), ‘한 물건’은 어떤 물건인가?
“ㅇ”이 ‘하나’란 것은 소리도 없고(希) 빛깔도 없어서(夷) 뜻으로도(情) 말(謂)로도 표현할 길이 끊어졌으며,
알쏭달쏭해서 보면 있는 듯하다가 메아리처럼 홀연히 사라져서 뒤쫓을 수 없고 황홀하여 헤아릴 수 없으니 나(我)와 남(人)이 없어 나의 것(自)이다, 남의 것(他)이다 일컬을 수 없어서 다만 ‘한 물건(一物)’이라 말했을 뿐이다.
혜능선사는 “한 물건이 있는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으며
이름도 문자도 붙일 수 없으며 위로는 하늘을 받쳐주고 아래로는 땅을 버텨주면서 밝기는 해보다 더 밝고 어둡기는 칠흙보다 더 검은데 항상 움직이고 쓰는 가운데 존재하지만 움직이고 쓰면서 거두어 가질 수 없는 것이 이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한 물건’이란 말도 역시 억지로 칭했을 뿐이다.
그래서 남악회양은 “설사 한 물건이라 하더라도 맞지 않다”고 하였으니,
‘한 물건이 여기 있다’함은 바로 당처(삼라만상이 벌어지기 이전, 텅 비어있는 실상)를 떠나 있지 않으면서 항상 깨끗하고 맑은 까닭으로 그렇게 지칭한 것이다.
원상(ㅇ)의 최초 작품은 남양 혜충국사이다.
혜충국사가 그 원상을 탐원에게 전하고, 탐원이 다시 앙산에게 전했다.
원효스님이 분황사 도량의 낙엽을 쓸고 있는 설총에게 말했다.
“총아, 넌 이 세상에서 착한 일이라고는 하지 마라.”
“스님, 그럼 악한 일을 해야 합니까?”
“착한 일도 하지 말라는데, 악한 일을 해서야 되겠느냐?”
중국의 화엄사상은 두순선사에 의해 꽃을 피웠다.
하루는 제자가 두순선사에게
“화엄경이 너무 방대하고 어려워서 어떻게 하면 화엄경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까?”하며 묻자, 게송으로 답했다.
"회주우끽화(懷州牛喫禾) 익주마복창(益州馬腹漲)
천하멱의인(天下覓醫人) 구저좌박상(灸猪左膊上)"
이는 “회주의 소가 여물을 먹었는데 익주의 말이 배가 터졌으니,
천하명의를 찾아 돼지 왼쪽 어깨에 뜸을 떠 주어라”라는 뜻이다.
회주와 익주는 수 천리 떨어져 있지만 깨달음의 세계, 화엄의 세계에서는
진짜와 가짜 시비선악의 분별이 모두 사라진 한 공간이다.
소가 여물을 먹었는데 말이 배가 터졌다는 것은 마치 자녀가 아플 때 어머니도 함께 아픔을 겪듯 생명이 둘로 나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유마거사도 중생을 대신해서 앓아 누웠던 것이다.
천하의 명의는 곧 화엄법사를 가리킨다.
주역에 의하면 좌측은 생명의 근원, 고요함, 바탕, 진리 등을 의미하니
좌측 어깨란 곧 진리의 근원을 의미한다.
따라서 두순법사의 법신송은 중생이 마음의 병을 앓고 있을 때에는
화엄법사라는 의사를 만나서 화엄사상이라는 뜸으로 진리의 근원을 찾으라는 뜻이다.
색신의 세계에는 인상과 아상이라는 산이 존재하고,
인아산 가운데에는 번뇌의 광석이 있다.
번뇌광(煩惱鑛) 가운데에는 불성이란 보배가 있고,
불성의 보배 가운데에는 지혜의 스승이 있다.
지혜의 스승을 활용해서 인아산을 뚫고 깨뜨려 번뇌의 광석을 보고,
깨달음의 불로서 달구고 다듬어 자신의 금강불성이 분명하고 밝고 깨끗함을 볼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금강으로 비유를 들고 ‘금강’이라 이름을 삼으시니
공연히 알기만 하고 실천이 없으면 이름만 있고 본체는 없는 것이요,
뜻을 알아 수행하고 실천하면 이름과 본체가 구비되는 것이다.
닦지 않으면 범부요, 닦으면 성인의 지혜와 같으니 고로 금강이라 이름하셨다.
무엇을 이름하여 반야라 하는가?
반야는 범어이고, 당나라 말로는 지혜다.
지(智)는 어리석은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고 혜(慧)는 방편이 있는 것이다.
체에 만약 혜가 있으면 지의 사용이 어리석지 않지만,
체에 만약 혜가 없으면 어리석음을 사용하여 지(智)가 없으니
(중생들이) 다만 어리석음 때문에 깨닫지 못하므로 마침내
지혜를 가차(假借)하여 어리석음을 제거해야 한다.
바라밀이란 ‘저 언덕에 이른다’는 것이니,
저 언덕에 이른다는 것은 생멸을 여읜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편 세상 사람들은 성품이 견고하지 못하여
일체의 법 위에 생멸상을 두어 제취(諸趣, 혹업에 이끌려 사는 곳)에 떠돌고
진여의 땅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이를 두고 ‘이 언덕’이라고 한다.
대지혜를 갖추어서 일체법을 원만히 닦아(공한 상태에서 상이 없음)
생멸을 여의면 곧 저 언덕에 이르는 것이다.
또한 마음이 미혹하면 이 언덕이요, 마음을 깨달으면 저 언덕이다.
마음이 삿되면 이 언덕이요 마음이 바르면 저 언덕이니,
입으로 설명하고 마음으로 실천하면 곧 자신의 법신에 바라밀이 있는 것이요
입으로 설명만 하고 마음으로실천하지 않으면 곧 바라밀이 없는 것이다.
무엇을 이름하여 경이라 하는가?
경이란 바르고 빠른 길이니, 이는 부처를 이루는 도로(道路)다.
범인(凡人)이 이 길에 이르고자 한다면 응당 안으로 반야행을 닦아야 구경에 이를 것이다.
혹 능히 입으로 외우고 설명만 하면서 마음으로 의지하여 실천하지 않으면
자신의 마음에 경이 없는 것이요,
(금강경을) 여실히 보고 여실히 실천하면 자신의 마음에 경이 있는 것이다.
고로 이 경을 여래께서 이름하여 금강반야바라밀이라 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