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물서

화엄경 왕복서

통융 2017. 1. 6. 12:00

대방광불화엄경 왕복서(大方廣佛華嚴經 往復序)
청량국사가 오대산에 계시면서 화엄경연구를 깊이 하였고, 청량소, 또는 화엄경소라고도 불리는 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를 편찬하면서 그 서문에 화엄경의 내용을 압축해서 표현했다. 그 첫구절이 ‘왕복(往復)이 무제(無際)나’로 시작하기 때문에 통칭 왕복서라고 부른다.
이 글과 쌍벽을 이루는 서문으로는 금강경오가해의 서문인 함허스님의 일물서(一物序)가 있다. 선(禪)의 기운이 빛나는 일물서는 그 시작이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로 되어있기 때문에 통칭 일물서라고 한다. 함허스님은 고려말 조선초의 우리나라 스님으로 깨달음의 안목이나 글도 뛰어난 분이다.
일물서나 왕복서는 모두 뛰어난 글이지만 왕복서를 더 명문으로 친다.
왕복서는 불교 최고의 안목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 법계의 내용이 이러한데, 화엄경은 그 깊고 오묘한 이치를 이렇게 밝혔다’라고 하는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부처님의 안목이다. 부처님의 안목으로 이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 이 세상을 누가 무엇을 통해서 표현했는지, 그를 통해서 우리 중생들에게 깨우쳐 준 것은 무엇인지 하는 깊은 내용들이 샅샅이 밝혀져 있다. 그러한 내용들은 모두 화엄경 안에 숨어있는 내용들이다. 화엄경이 경전이다 보니 그것을 구체적으로 지칭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왕복서에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딱 부러지게 집어서 명확히 말하고 있다.
 
 
당(唐) 청량산(淸凉山) 대화엄사사문(大華嚴寺沙門)
청량산은 중국 오대산을 일명 청량산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강원도에 있는 오대산은 중국에 있는 오대산과 그 모양이 비슷하다고 해서 오대산이라고 이름 지은 것인데 이 역시 청량산이라고도 부른다.
두 산은 그 모양이 아주 닮았지만 우리나라 오대산이 훨씬 더 잘생겼다. 산이 수려하고 잘 생긴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오대산인 청량산이 있고, 중국에도 청량산인 오대산이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중국 불교의 4대성지 중에 하나인 오대산에는 문수보살이 항상 거주한다고 하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그 오대산에 가면 중심에 대화엄사가 있다.
청량국사가 주석하면서 화엄경을 연구하고 화엄경을 가르치고 화엄경으로써 평생을 전파한 곳이다. 나도 젊어서 건강할 때 오대산에 가본 적이 있다. 대화엄사는 화엄종찰로서 그 옛날 화엄의 분위기가 아직도 그대로 곳곳에 남아있었다. 중앙 건물의 현판이나 주련에 화엄경이 설해진 7처9회의 명칭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 감격스러웠다.
화엄경이 설해진 일곱 곳의 이름인 보리장, 보광명전, 도리천, 야마천과 같은 이름이 법당마다 붙어있었는데 ‘이 절에 들어온 여러분들은 지금 바로 화엄경 속에 들어왔습니다’ 라고 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여러분들이 화엄경을 공부하고나서 중국 오대산으로 성지순례를 가면 그 중심에 있는 편액들을 잘 살펴보기 바란다. ‘우리가 공부한 내용들이 바로 여기 이렇게 있구나’하고 반가울 것이다. 사찰은 이런 특징이 있어야 되고 그 특징을 몇 천 년이 흐르더라도 살려야 된다.
우리나라는 범어사, 해인사, 부석사가 모두 화엄사찰이다.
화엄사찰 중에서도 본사가 부석사이므로 부석사 같은 데서는 365일 화엄경이 설해져야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 사찰을 세운 의미를 살리는 것이 되고 그를 통해 수행과 불교에 대한 지식이 확보된다.
나는 스님들에게 경전을 강의하면서 스님들이 혹시 개인적으로 절을 짓는다면 불교적인 경전이나 어록 중의 하나를 선택해서 그 사상에 초점을 두고 사찰을 세우면 의미가 있으리라고 말하곤 한다. 절을 지을 때나 그 절을 설명할 때나 그 절 자체를 통해서 신도들이나 스님이 항상 공부가 되는 것이다.
 
 
 
징관(澄觀) 청량국사(淸涼國師) 찬(撰)
역사적으로 화엄경공부를 가장 깊이 하고 화엄경에 대한 저술이 제일 많은 분은 청량국사다. 청량스님의 이름은 징관(澄觀)이다. 청량산에서 화엄경을 공부하였고, 국사까지 되었다고 해서 청량국사(淸凉國師 國師)라고 한다.
청량국사는 머리가 워낙 뛰어난 분이라 세속 학문을 다 하고 불교경전을 다 보았다. 그런데 화엄경을 보고 ‘득기사소(得其死所)’라는 표현을 했다. ‘내가 죽을 곳을 얻었다’는 뜻이고 곧 ‘내가 이 화엄경에서 죽어야겠다’는 말이다.
얼마나 화엄경에 감동을 했으면 이런 표현이 나왔겠는가. 나는 청량스님의 득기사소라는 구절을 읽고 감동하여서 자주 인용하곤 한다.
그런 청량스님은 102세까지 사셨다. 여러분들이 화엄경을 공부하면서 ‘내가 죽을 곳을 얻었다. 화엄경에 내가 죽어야지’라고 해도 102세는 거뜬히 살 것이니 걱정하지 않고 화엄경 공부에 매진해도 된다.
이 분은 태어나서 돌아가실 때까지 아홉 분의 황제를 거쳤다. 요즘으로 치면 이 분 생애에 대통령이 아홉 명 지나간 것이다. 옛날에는 수명이 짧았고, 왕도 자주 바뀌었으니 102년동안 왕이 아홉 명이 되는 일이 가능하다.그런데 중요한 것은 청량스님이 그 중에 일곱 왕의 왕사(王師)노릇을 했다는 것이다. 아홉 분의 황제가 거쳐갔는데 그 중 일곱 황제의 국사(國師)노릇을 했다.  청량국사라는 호칭이 익숙한 이유가 그 때문이다.
정권이 바뀌고 왕이 죽어서 새 왕이 등극하면 ‘우리 할아버지, 우리 아버지의 국사지 나에게는 내가 모시는 스승이 따로 있다’고 해서 국사를 그만두게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일곱 왕의 국사로 대접을 받았다는 것은 청량스님이 얼마나 훌륭한 스님이었는지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왕들이 청량국사에게 ‘화엄경의 요지를 이야기 해주십시오’라고 청하는 내용도 청량스님의 글에 있다. 또 어떤 왕은 ‘화엄경제목만 좀 설명해 주십시오’하고 묻는 이도 있어서 화엄경의 제목만 설명한 글도 있다.
 <유인물>
大方廣佛華嚴經 往復序 7 (제14강, 11년 4월 4일)

唐 清涼山 大華嚴寺沙門 澄觀(淸涼國師)撰

제10門, 명제를 간략하게 해석하다[略釋名題]

1, 경과 품의 제목을 표하다[雙標二目]

題稱大方廣佛華嚴經者는 即無盡修多羅之總名이며 世主妙嚴品第一者는 即眾篇義類之別目이로다

제목을 대방광불화엄경이라고 한 것은 다함이 없는 경전의 총명이며, 세주묘엄품 제1이란 곧 여러 편으로 의미를 나눈 다른 이름이다.

2, 경의 제목과 품의 제목을 해석하다[雙釋二目]

大以曠兼無際요 方以正法自持요 廣則稱體而周요 佛謂覺斯玄妙요 華喻功德萬行이요 嚴謂飾法成人이요 經乃注無竭之涌泉이로다

대는 드넓고 끝없음이요, 방은 정법을 스스로 가짐이요, 광은 체에 합하여 두루함이요, 불은 현묘함을 깨달음이요, 화는 공덕만행을 비유함이요, 엄은 법을 꾸며 사람 이룸을 말함이요, 경은 다함이 없이 솟아나는 샘물을 댐이다.

貫玄凝之妙義하고 攝無邊之海會하며 作終古之常規하니 佛及諸王을 並稱世主요 法門依正을 俱曰妙嚴이라 分義類以彰品名하야 冠群篇而稱第一이라

깊고 깊은 미묘한 뜻을 꿰뚫고, 가없이 드넓은 회중들을 포섭하며, 아주 먼 옛날의 항상한 법규를 지으니, 부처님과 여러 제왕을 아울러 세상의 주인이라 일컫고, 법문과 의보와 정보를 함께 미묘한 장엄이라 한다. 뜻의 종류를 나누어 품의 이름을 드러내어 여러 편의 첫머리에 두어 제일이라 일컫는다.

3, 경과 품의 제목을 결론짓다[雙結二目]

斯經이 有三十九品하니 此品이 建初라 故云 大方廣佛華嚴經 世主妙嚴品第一이라하니라

이 경이 39품이 있으니 이품이 처음에 있다. 그러므로 대방광불화엄경 세주묘엄품 제일이라 한다.

 
참으로 날씨가 화창한 전형적인 봄날이다. 산하대지에 만물이 소생하고 곳곳에 매화꽃 벚꽃이 활짝 피어서 세상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다.
이런 정경을 보니 새삼스럽게 화엄경이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아름다운 보살행으로 우리들의 삶에 수놓아지는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화엄(華嚴) 꽃으로 장엄하다, 우리들 삶의 꽃은 아름다운 행위, 보살행이다. 보살행으로 인간 세상의 모든 삶을 아름답게 꾸며갈 때 화엄이 아니겠는가, 나는 늘 그런 생각을 한다.
*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왕복서(往復序) 일곱 번째, 마지막 유인물이다.

제10문(門) 약석명제(略釋名題) :명제를 간략하게 해석하다.
1, 쌍표이목 (雙標二目) :경과 품의 제목을 표하다
*
제칭대방광불화엄경자(題稱大方廣佛華嚴經者)는: 제목으로 대방광불화엄경이라고 말한 것은
즉무진수다라지총명(卽無盡修多羅之總名)이며 : 삼장을 포함한 수많은 경전들, 무진수다라를 한마디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라고 한다.
*
우리가 흔히 불교 경전을 팔만대장경이라고 한다. 이것을
분류하여 9부나 12부로 나누는데 그 속에 수다라(修多羅)가 들어 있다. 경이라고 번역하는 수다라의 정확한 번역은 계경(契經)이다. 계합할 계(契)자를 쓰는데 계리계기(契理契機)라 하여 이치에 계합하는 것이고 중생의 근기에 계합하는 것이다.
불교 경전에는 물론 진리에 안 맞는 방편설이 많다. 그러나 궁극으로는 이치에 맞아야 한다. 아무리 중생들을 구제하는 방편이 뛰어나도 진리에 안 맞으면 곤란하다. 또 아무리 우수한 진리라 하더라도 중생의 근기에 안 맞으면 쓸모가 없다.
수다라(修多羅)는 이치에도 맞고 중생을 구제하는 근기에도 맞는 학설이고 가르침이다.
*
이러한 경전은 경(經) 율(律) 론(論) 3장(三藏)이 기본이 되고, 뒤에 또 선장(禪藏)이라고 하는 것이 첨가된다. 그래서 삼장 대신 4장(四藏)이라는 말을 써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선장은 엄격히 따지면 삼장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는 선불교 전적들이 다른 어떤 분야의 불교 책보다 훨씬 더 많다. 특히 한국 불교는 선불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선장을 소홀히 생각할 수가 없다. 그 모든 것을 포함하여 다 함이 없는 수다라가 무진수다라(無盡修多羅)이다.
*
우리가 공부하는 이 화엄경은 경문이고 원문이다. 청량스님께서는 그 원문을 가지고 소(疏)라고 하는 이름으로 해석을 했는데 이것이 너무 간략하므로 다시 해석을 붙인 것이 초(抄)이다.
청량스님의 소초(疏抄)를 가지고 지금 저처럼 나름대로 해석을 붙이게 되면 그 또한 소(疏)가 되고 초(抄)가 되고 논(論)이 된다. 그러한 것이 끝없이 펼쳐나간다. 이렇게 불교는 가면 갈수록 불어나고 그 가르침이 새로운  시대에 맞게 첨가가 된다. 누가 경전을 해석하거나 논문을 써도 전부 불교의 전적으로 포함한다. 경, 율, 논 삼장의 역사가 그랬고, 선장의 역사가 그랬다. 그러므로 수다라는 무진(無盡)이다.
기독교는 이와 반대다. 기독교 역시 초기에는 경전이 많았지만 기준을 정해서 그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은 전부 깎아내고 깎아내어 배제하였다. 그렇게 해서 남은 것이 지금의 신구약 성경이다.
*
청량스님은 화엄경이야말로 모든 불교전적의 총명이라고 하였다. 밀교 경전, 현교 경전, 선불교 저술, 그 어떤 불교의 가르침도 단 하나의 경전으로 이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름이 바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다, 라고 하였다.
천태지자스님 같은 이들은 화엄경 공부도 많이 했지만 법화경을 우선으로 하는 스님이다. 그런 분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좀 섭섭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지난 시간에도 말씀 드렸듯이 ‘화엄경을 만나서 내가 죽을 곳을 얻었다. 이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이 아닌가’ 라고 한 청량스님의 안목이다.
감히 누가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아마 반기를 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원각경을 좋아하는 사람은 ‘원각경이 제일인데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할 수도 있겠고, 능엄경 좋아하는 사람은 ‘능엄경이다’ 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청량스님의 안목으로는 ‘화엄경이야말로 전체 경전의 대표 이름이다’ 라는 것이다.
*
세주묘엄품제1자(世主妙嚴品第一者)는 :세주묘엄품 제1이라고 하는 것을
즉중편의류지별목(卽衆篇義類之別目)이로다: 약찬게에도 나와 있듯이 화엄경은 39품으로 나눈다. 내용에 따라 분류하여 39편으로 나누어서 세주묘엄품, 여래현상품,  보현삼매품, 화장세계품, 세계성취품 등등 낱낱이 다른 제목을 붙이게 되는데 세주묘엄품은 그중에 하나라는 뜻이다.
 

2, 쌍석이목(雙釋二目) : 경의 제목과 품의 제목을 해석하다
*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라고 할 때의 경의 제목과 품의 제목을 해설한 것이다. 화엄경 첫 시간에도 간략히 말씀드린 부분이다.
*
대이광겸무제(大以曠兼無際)요 : 대(大)는 무한히 큰 것을 말한다. 화엄경은 널리 두루두루 전체를 다 겸했는데 제한이 없고 끝이 없고 한계가 없이 겸했다. 한계 없이 넓고 넓은 것이 대방광불화엄경의 대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경허스님은 ‘大라! 대들보도 大요, 댓돌도 大요, 대가사도 大요, 세숫대야도 大요, 담뱃대도 大니라!’라고 하였다. 처음 제가 경허스님이 화엄경 제목을 해석한 것을 만나고는 ‘이런 해석이 있을 수 있겠는가? 경허스님 아니고는 이런 해석을 할 수가 없다. 아마 청량스님도 이렇게는 해석하지 못할 것이다’ 하고 놀랐고, 감동을 받았다.
*
방이정법자지(方以正法自持)라 : 방(方)은 정법을 스스로 가진 것, 정법을 다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행동이 아주 모범일 때 방정(方正)하다고 한다. 방은 ‘아주 정확하다. 절도 있다. 흐트러짐이 없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서 신을 정리한다든지 방석을 정리하는 것도 절도 있게 정리를 잘 해 놓는 것이다.
대방광불화엄경 할 때의 방자 안에 세상의 진리, 참되고 바른 이치를 다 담았다.
경허스님은 ‘方이라! 큰방도 方이요, 지대방도 方이요, 질방도 方이요, 동서남북 사방도 方이니라.’라고 하면서 대방광불화엄경의 방만 방이 아니라 방자가 붙은 것은 다 방이라고 하였다. 화엄경의 깊고 넓은 뜻을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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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즉칭체이주(廣卽稱體而周)라 : 광(廣)은 진리의 본체에 칭합해서 두루한 것이다. 진리의 본체라고 하는 것은 있지 아니한 곳이 없기 때문에 두루하다. 모든 곳에 다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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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위각사현묘(佛謂覺斯玄妙)라 : 불(佛)은 아주 깊고 오묘한 이치를 깨달은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대방광불/화엄경’이라고 띄워 읽는데 이것은 4.3조로 읽는 한국 사람들의 언어습관에 의한 것이다. 정확하게 읽으려면 ‘대방광/불화엄경’으로 읽어야 한다. 이 원칙을 지켜서 꼭 ‘대방광/ 불화엄경’이라고 읽는 스님이 있다. 불자들은 이러한 것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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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유공덕만행(華喩功德萬行)이다 : 불교에서 꽃[華]이라고 하면 식물로서의 꽃이 아니라 공덕만행을 비유한 것이다. 아름다운 몸짓, 아름다운 말씨, 아름다운 마음씨, 신구의(身口意) 3업(三業)을 통해서 꽃처럼 아름다운 행위를 할 때 그것이 진정한 불교의 꽃이다.
그러한 행위로써 세상이 아름다워진다. 옆 사람이 좋아하고 이웃 나라가 좋아한다. 척박한 땅에 산다 하더라도 그 사회가 아름다운 사회이다.
그것이 공덕만행이다. 공덕은 그저 남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남이 잘 되도록 하는 것, 남을 배려하는 것이다.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무조건 남을 배려하는 일, 남을 중심으로 해서 사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기 때문에 세상 물질로 비유하자면 꽃이다. 꽃으로 장엄 해놓은 것과 같다.
*
엄위식법성인(嚴謂飾法成人)이라 : 엄(嚴)이라고 하는 것은 법을 장식하여 사람을 성숙시키는 것이다. 식(飾)이라고 하는 말도 엄(嚴)이나 다를 바 없다. 꾸미고 장식한다는 뜻이다.
수많은 성인이 나와서 그렇게 가르쳤건만 지금도 이 세상은 삭막하고 험하기 이를 데 없다. 뉴스에는 사람들이 부정을 저지르고 잘못하는 일들만 쏟아져 나온다. 만일 이 세상에 성인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았을지 모른다.
가르침을 통해서 사람을 만들어 간다고 하는 식법성인(飾法成人)이라는 말은 좋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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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내주무갈지용천(經乃注無竭之涌泉)이라 : 경(經)이라고 하는 것은 다 함이 없는, 끝이 없는 샘물을 대주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우리가 강원에서 경학을 공부하는데 경이라고 하는 글자 속에는 경율론(經律論) 삼장(三藏)과 선불교 전적을 포함하여 불교의 모든 전적들이 다 포함된다. 그래서 경을 한마디로 불교의 고전이라고 한다.
우리가 불교 안에서 산다면 그 기본사고의 틀도 경에서 나와야 된다. 선배 스님들로부터 구두로써 불교를 배웠다고 해도 그 근본은 경이다. 건물을 하나 세워도 그렇다. 속인들이 지어놓은 절들은 스님들이 지어 놓은 절과 다르다. 스님들의 근본 사고가 이미 경이라고 하는 과거의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의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훈습이 된 것이다.
여러 스님들이 일선에서 포교를 하시든지 법문을 하시든지 간단하게 일대일로 신도님들을 만난다든지, 관광객에게 전각 하나를 설명하더라도 그 근거는 결국 경에서 나온다. 경이 기본이 되고 근거가 되어 이렇게 저렇게 활용되는 것이다. 설법이나 강의, 연구, 미술, 조각 등등 불교 안에서 무엇을 하든지 그 근거와 기본이 바로 불교의 고전들이다. 그래서 이 기본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어디에 가서 교수를 하든 포교를 하든 설법을 하든 주지를 살든 항상 그 밑천이 딸린다. 마치 한 1년치 세금을 못낸 장사꾼 같은 심정이 된다.
*
여기에도 보면 경은 무갈지용천이라고 했다. 아무리 퍼내고 퍼내도 다함이 없이 끝없이 흘러나오는 샘과 같은 것이 경이다. 이것을 우리가 중요시 여기고 평생 늘 공부해야 한다. 우리가 경전을 열심히 공부하면 무슨 일을 하든지 경이 기본이 되고 바탕이 되어서 써도 써도 다함이 없다. 불자들이 사고하고 행동하는 근거가 모두 경을 통해 나와야 한다. 

*
관현응지묘의(貫玄凝之妙義)하고 : 아주 깊고 깊은 미묘한 뜻을 꿰뚫고.
화엄경이 너무 깊고 깊은 의미라서 우리가 제대로 이해를 못한다. 이해를 못하다 보니 설명 역시 다 못한다. 그래서 이 화엄경 강의에서도 아쉬움과 부족함이 있다. 그러나 화엄경 자체는 미묘한 뜻을 다 꿰뚫고 있다.
섭무변지해회(攝無邊之海會)하며 : 끝없는 대중의 모임을 다 포섭하고 있다.
회해라고 하는 것은 대중의 모임이고 법회이다. 세주묘엄품에서 보았듯이 화엄경은 의미도 깊지만 그 등장하는 인물들, 세주 세간 주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야말로 무변이다.
작종고지상규(作終古之常規)하니:  아주 먼 옛부터 내려오는 떳떳한 규칙이며 항상하는 법규이다.
화엄경은 우리가 의지해야 할 법규 역할을 하고 있다.
불급제왕(佛及諸王)을 : 그동안 세주묘엄품에 등장했던 부처님과 많고 많은 신장들과 왕은 얼마나 많은가.
병칭세주(並稱世主)요: 이런 이들을 모두 합해서 세상주인이라고 한다.
법문의정(法門依正)을 : 법문과 의보(依報)와 정보(正報)가
구왈묘엄(俱曰妙嚴)이라: 화엄경에는 다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다. 오히려 너무 많고 너무 아름답게 갖추어져 있지 않는가 싶을 정도이다.
*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인 의보(依報 환경세계)와 우리들 자신인 정보(正報 우리들의 심신)와 부처님, 부처님의 세계, 부처님의 법문 이런 모든 것이 이 화엄경에는 다 포함되어 있다. 그것이 다 무르녹아 있으니 함께 아름답게 장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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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의류이창품명(分義類以彰品名)하야 : 뜻의 종류를 나누어서 품의 이름을 드러냈다. 세주묘엄품, 여래현상품, 보현삼매품, 등등 여러 품의 제목들이 그런 것을 뜻하고 있다.
관군편이칭제일(冠群篇而稱第一)이라 :그 여러 품들 중에서 제일 위에 두었기 때문에 제일이라고 일컬었다.
 
*
3, 쌍결이목(雙結二目) : 경과 품의 제목을 결론짓다
사경(斯經)이 유삼십구품(有三十九品)하니: 이 경이 39품이 있다.
차품(此品)이 건초(建初)라 :세주묘엄품이 앞에 있다.
고운(故云)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그러므로 대방광불화엄경
세주묘엄품제일(世主妙嚴品第一)이라하니라 :세주묘엄품 제1 이렇게 되어 있다.
왕복서라고 하는 이 화엄경의 서문이 끝나고 바로 들어가는 구절이 ‘대방광불 화엄경 세주묘엄품 제1’ 이렇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옛날 한문방식으로 쓴 것이고 요즘으로 치면 ‘대방광불화엄경 제1 세주묘엄품’ 이라고 해야 맞고, 이해하기 쉽다.

이렇게 해서 그 유명한 왕복서를 그야말로 대충 수박 겉핥기식으로 살펴보았다. 제가 혼자서 읽을 때는 참 깊고 오묘한 맛을 느끼는데 설명하려니 해놓고도 ‘영 이게 아닌데’하고 부족함을 느낀다.
‘왕복서 서문 속에 화엄경의 내용이 다 포함이 되어 있으니 강의 전에 한 번씩 읽자’고 스님 한 분이 좋은 제안을 하셔서 우리가 늘 강의 전에 왕복서를 읽는다.
오늘도 읽어보니 새삼 맛이 나고 좋다. --무비스님의 강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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