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각경
원각경圓覺經의 원래 이름은 '대방광 원각 수다라 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이다.
수다라修多羅는 경經을 뜻하는 인도말 수트라Sutra를 소리나는 대로 적은 것이다.
그리고 철학에서 아주 어려운 사상을 잘 이해했을 때 요해了解라고 한다. 요了란 깊이 확실하게 이해하였다는 뜻이다. 의義란 뜻을 말하며 결국 요의了義란 사상의 깊은 뜻을 철저하게 이해하였다는 의미이다. 원각경 전문은 대장경大藏經 842번에 들어있다. 12장 각 장마다 마지막에 그 장을 요약한 게偈[詩句]를 200자씩 달아 놓았다.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국에서는 원각경이 가장 유명한 경전이다.
한국에서는 화엄경이 제일 잘 알려졌다. 구례 화엄사, 합천 해인사 등 화엄 10찰 또는 화엄 9찰이 유명하다. 한국에서 화엄종華嚴宗이 잘 알려진 이유는 원효元曉(617-686)와 의상義湘(625-702)이 화엄을 공부하러 당나라로 가던 중에 원효는 그 유명한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는 사건으로 깨달은 바가 있어 '나는 이제 다 알았으니까 더 갈 생각 없다'하고 다시 돌아오고 의상만이 유학을 하였다.
그 일화를 미루어 볼 때 원효는 선종禪宗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선종이란 '책 다 읽을 필요없다. 나는 이거면 다다.'하는 것이니까. 원효가 선종에 관해서 많은 일을 한 것은 아니다.
원효는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화엄경의 서문 등도 썼지만 원효 자체를 보면 선종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의상은 그대로 당나라에 가서 십 년 동안 공부했다. 화엄경은 방대해서 마지막에 선재동자 얘기만 해도 40권이다. 보통 간단하게 쓴 것은 60권이고 세밀하게 쓴 것은 80권이다. 의상이 가서 60권짜리를 공부했는지 80권짜리를 공부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옛날에 공부하는 법은 80권짜리라고 하면 그 80권을 전부 붓글씨로 베끼는 것이다. 한 줄 베끼고는 해석해보고 그것이 무슨 뜻인지 자꾸자꾸 생각해서 또 선생님께 질문하고 해서 알아지면 다음으로 넘어가고 또 넘어가고 하는 식으로 했다.
옛날 불교공부는 다 그렇게 했다. 불경을 한 절씩 한 절씩 베끼고 해설해가다 보면 '번역은 이런데 원문은 무엇일까' 하게 되어 자연 인도말이 필요하게 된다.
의상은 십년 만에 지엄智儼(602-668)의 수제자가 되어, 화엄종의 1조祖 두순杜順, 2조 지엄을 이어 3조가 된다. 의상의 졸업논문은 화엄경 80권을 210자로 간추린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이다. 의상은 화엄경을 통달한 사람이다. 신라의 선덕여왕이 의상을 불러서 귀국하여 한국화엄의 개조가 된다. 의상 때문에 한국에서는 화엄이 가장 유명해졌다. 한국의 화엄종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나라奈良에 동대사東大寺를 세웠는데 이는 일본의 최고의 국보로 남아있다.
일본에서는 일연日蓮(Nichiren, 1222-1282)이 나와서 법화경을 통달하게 되자 법화종이 제일 잘 알려져 있다. 화엄경은 석가가 부처가 되어서 맨 처음 쓴 책이고 법화경은 석가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쓴 책이다.
중국에서는 원각경이 제일 유명하다. 중국에서 원각경이 유명한 이유는 종밀宗密(780-841) 때문이다. 종밀은 화엄종의 두순杜順, 지엄智儼, 법장法藏, 징관澄觀에 이어 제5조이다. 선종에서는 달마達磨로부터 시작하여 6조 혜능慧能, 신회神會에 이어 도원道圓의 제자가 종밀이다. 종밀은 달마로부터 11대 손이고 혜능으로부터 제5조로 선의 대가이자 화엄의 대가이다.
화엄은 인도종교로서 팔만대장경을 대표하는 것이 화엄이다.
선종은 중국불교로서 인도불교를 중국인들이 완전히 소화해서 토착화한 불교이다.
선종은 이제 세계적으로 불교를 대표하는 종교가 되었다.
선종의 대가 중에 혜능이 있다. 달마는 인도인이나 혜능은 중국인이다.
경經이란 공자나 석가의 말에만 붙이는 것인데, 혜능의 말에도 경을 붙여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이라고 한다. 중국인들은 혜능을 석가와 같은 사람으로 본 것이다.
종밀은 화엄종과 선종을 모두 거쳐 나왔다. 종밀은 서기 841년 62세에 세상을 떠났다. 종밀이 선종의 도원을 만난 것이 학설이 많아 확실치 않지만 27세 때이었다. 화엄종의 징관(738-839)을 만난 것은 32세 때이었다. 그 때 징관은 74세이었다.
종밀은 25세 이전까지는 유교도이었다가 25세 때 어떤 관리의 집에 갔다가 원각경[大唐 賓三藏佛陀多羅譯]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당唐나라의 계빈국 賓國(천산산맥 밑이자 인도북부, 즉 서역으로 지금의 중앙아시아 지역)의 삼장三藏이 번역한 것이었다. 삼장이란 유명한 중이라는 것으로 불경佛經, 계율戒律, 논문論文에 능통한 사람을 말한다. 우리가 잘 아는 현장법사도 인도에 가서 17년 동안 공부한 후 불경 570권을 중국에 가져와서 번역했다. 여기서 말하는 삼장은 서역 사람인데 중국에 와서 중국어를 배워서 불경을 중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그 번역한 때가 대개 측천무후 시대인 서기 693년 또는 당나라 현종 때인 718년이라는 학설이 있는데 693년이라고 해둔다. 그 번역한 사람의 법명이 불타다라佛陀多羅인데, '불타'란 각자覺者라는 뜻이며 '다라'는 '구원한다'는 뜻이다.
대방광大方廣이라는 말을 제일 많이 쓰는데 왜 그런가 하면, 불교의 핵심이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이다. 언제나 부처를 생각한다고 할 때는 염불念佛이고, 언제나 법을 생각한다고 할 때는 염법念法이고, 언제나 승을 생각한다고 할 때는 염승念僧이다.
불교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삼보이다. 불의 말은 경經이고, 법의 핵심은 율법이고, 승의 글이 논문이다. 경 율 논經律論도 다 여기서 나온 것이다. 요새말로 불은 선생님이고, 법은 교과서, 교재로 우리가 원각경을 배운다 하면 원각경이 법이다. 승은 이 원각경을 공부하는 여러분들이다.
이 승은 중이라는 뜻이 아니고 인도말로서 승가僧伽라고 하는데, 승가는 요새말로 클래스, 학교, 교실, 공부하는 반, 세미나, 같이 공부하고 연구한다는 뜻이다. 학교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선생님이다. 원효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 대승大乘은 예수, 석가, 공자 같은 분들이며 기신起信이란 대승이 나와야 믿음이 생긴다는 말이다. 대승이 안나오면 믿음이 안 생긴다. 그런 대승이 나와야 믿고 쫓아가게 되지 그런 대승이 안나오면 안 된다.
과학적으로는 아인슈타인이 대승이다. 아인슈타인을 믿지 않는 사람은 없다. 공자도 대승이다. 제일 중요한 것이 대승이다. 선의 벽암록에 '종교가 없는 것이 아니라 선생이 없다'는 말이 가끔 나온다. 큰 사람이란 모든 사람을 다 포섭해주는 사람이다. 노자로 말하면 사람을 일체 버리지 않는 것이다. 누구나 다 거두어 쓰지 누구는 쓰고 누구는 버리고 하는 것이 없다. 언제나 대大가 붙는 것은 불佛 때문에 대가 붙는다. 큰 선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방광大方廣에서 대大는 대불大佛로 큰 스승이다. 법은 언제나 모[方]가 져야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법은 법이 아니다. 법은 온 백성이 누구나 꼭 지켜야 하는 것으로 정방법正方法이다. 승가는 땅 끝까지 멀리 넓게 복음을 전해야 하므로 광승廣僧이라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종로의 파고다 공원이 원각사圓覺寺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13층 대리석 탑이 남아있다. 원각사는 세조가 지었으며 그는 말년에 지독한 피부병에 시달리면서 단종을 죽인 자기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참회懺悔의 눈물을 흘렸다. 진정으로 참회하면 구원받는다는 내용이 원각경 11장에 나온다. 그래서 세조는 원각경이 제일 소중한 경이라고 생각하였다.
세조는 자기의 죄를 참회하는 마음으로 원각사를 지은 후 개원식에서 그 당시 생육신의 대표 격인 김시습金時習에게 원각경 강의를 부탁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또한 세조 때에 원각경이 한글로 번역되었는데 첫 장에 다음과 같이 불교, 유교, 도교의 내용들이 나온다.
元亨利貞乾之德也 始於一氣
常樂我淨 佛之德也 本乎一心
專一氣而致柔 修一心而成道
心也者 沖虛妙粹炳煥靈明
'원형이정건지덕야元亨利貞乾之德也'는 주역에 나오는 것이다.
'시어일기始於一氣'는 노자에 나오는 기철학이다.
'상락아정常樂我淨'은 열반경에 나오는 유명한 말로 불교의 핵심이다.
'상락아정'은 '원형이정'과 맞먹는 중요한 말이다.
'본호일심本乎一心'은 불교다.
'전일기이치유專一氣而致柔'는 노자이다.
'수일심이성도修一心而成道'는 불교이다.
'심야자 충허묘수병환영명心也者 沖虛妙粹炳煥靈明'은 유교이다.
25세 이전까지는 유교도이었던 종밀이 25세 때 원각경을 보다가 한번 다 읽기도 전에 진리를 깨달았으며[豁然大悟], 27세 때에는 선의 대가 도원을 만나서 수년간 배운 끝에 도원의 후계자가 된다. 32세 때에는 징관을 만나서 화엄경을 십 년 간 배운 뒤 다시 징관의 후계자가 된다.
그 후 일생 동안 연구한 것이 원각경이며 그 결과 40여권의 원각경 연구논문을 내놓았다.
종밀이 자기의 불교 속에 유교 도교의 내용을 전부 수용受容함으로써 당나라가 불교 일색이 되고 만다. 수용해야 살지 그렇지 못하면 죽고 만다. 종밀이 선과 화엄의 대가가 되어 유교와 도교를 다시 연구하고 재해석하여 불교 속에 유교와 도교를 다 수용함으로써 결국 당나라를 불교 일색으로 만든다. 그것이 중요하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불교로 전도하기보다는 종밀 한 사람이 공자를 수용함으로써 유교도가 불교도 앞에서 꼼짝 못하게 된다. 도교도 수용되어서 맥을 못추고 불교 일색이 되고 만다.
성리학性理學의 주자朱子가 일생 노력한 것은 불교에 수용된 유교를 끄집어내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불교 속에 수용된 유교의 성性을 끄집어내게 된다. 그는 화엄경의 이사설理事說을 이기설理氣說로 바꾸어서 끄집어내었다.
철학의 핵심은 성性과 심心인데, 왕양명王陽明은 불교에서 심心을 끄집어내어서 심즉리心卽理설을 주장하였다. 결국 왕양명에 이르러서야 불교에 수용되었던 유교를 다시 완전히 끄집어내었다.
이렇게 유교가 다시 정립되어서 송宋나라에서는 유교가 점차 발달하게 되면서 명明나라 시대에는 유교 일색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처럼 개인 전도보다는 타종교나 다른 사상을 수용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일이다.
왕양명은 불교는 물론 도교까지 수용하였다. 전습록傳習錄을 보면 그렇다. 그래서 왕양명이 대승이 된 것이다. 종밀은 도교와 유교를 수용하였으며 왕양명은 불교와 도교를 수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