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方廣佛華嚴經(대방광불화엄경) 疏序(소서)
唐(당) 淸凉山(청량산) 大華嚴寺沙門(대화엄사사문) 澄觀(징관) 撰述(찬술)
●第1門(제1문) 標擧宗體(표거종체)
往復(왕복)이 無際(무제)나 動靜(동정)은 一源(일원)이라
含衆妙而有餘(함중묘이유여)하고 超言思而逈出者(초언사이형출자)는 其唯法界歟(기유법계여)며
●第2門(제2문) 別歎能詮(별탄능전)
剖裂玄微(부열현미)하고 昭廓心境(소확심경)하며 窮理盡性(궁리진성)하고 徹果該因(철과해인)하며 汪洋冲融(왕양충융)하고 廣大悉備者(광대실비자)는 其唯大方廣佛華嚴經焉(기유대방광불화엄경언)인저
●第3門(제3문) 敎主難思(교주난사)
故我世尊(고아세존)이 十身初滿(십신초만)에 正覺始成(정각시성)하사 乘願行以彌綸(승원행이미륜)하시며 混虛空爲體性(혼허공위체성)하시니 富有萬德(부유만덕)이요 蕩無纖塵(탕무섬진)이로다
●第4門(제4문) 說儀周普(설의주보)
湛智海之澄波(담지해지징파)가 虛含萬象(허함만상)이요
皦性空之滿月(교성공지만월)이 頓落百川(돈락백천)이로다
不起樹王(불기수왕)하사 羅七處於法界(나칠처어법계)하시며 無違後際(무위후제)하사 暢九會於初成(창구회어초성)이로다 盡宏廓之幽宗(진굉확지유종)하사 被難思之海會(피난사지해회)하시니 圓音落落(원음낙락)에 該十刹而頓周(해십찰이돈주)하시며 主伴重重(주반중중)하사 極十方而齊唱(극시방이제창)이로다
●第5門(제5문) 言該本末(언해본말)
雖空空絕跡(수공공절적)이나 而義天之星象(이의천지성상)이 燦然(찬연)이요 湛湛亡言(담담망언)이나 而教海之波爛 (이교해지파란)이 浩瀚(호한)이로다 若乃千門潛注(약내천문잠주)라 與衆典爲洪源(여중전위홍원)이요 萬德交歸(만덕교귀)는 攝群經爲眷屬(섭군경위권속)이로다
●第6門(제6문) 旨趣玄微(지취현미)
其爲旨也(기위지야)여
冥真體於萬化之域(명진체어만화지역)하고
顯德相於重玄之門(현덕상어중현지문)이로다
用繁興以恒如(용번흥이항여)하고
智周鑑而常靜(지주감이상정)이로다
眞妄交徹(진망교철)이라 卽凡心而見佛心(즉범심이견불심)이요
事理雙修(사리쌍수)라 依本智而求佛智(의본지이구불지)로다
理隨事變(이수사변)이라 則一多緣起之無邊(즉일다연기지무변)이요
事得理融(사득이융)이라 則千差涉入而無礙(즉천차섭입이무애)로다
故得十身歷然而相作(고득십신역연이상작)하고 六位不亂而更收(육위불란이갱수)로다
廣大即入於無間(광대즉입어무간)이요 塵毛包納而無外(진모포납이무외)로다
炳然齊現(병연제현)은 猶彼芥瓶(유피개병)이요
具足同時(구족동시)는 方之海滴(방지해적)이로다
一多無礙(일다무애)는 等虛室之千燈(등허실지천등)이요
隱顯俱成(은현구성)은 似秋空之片月(사추공지편월)이로다
重重交映(중중교영)은 若帝網之垂珠(약제망지수주)요
念念圓融(염념원융)은 類夕夢之經世(유석몽지경세)로다
法門重疊(법문중첩)은 若雲起長空(약운기장공)이요
萬行芬披(만행분피)는 比華開錦上(비화개금상)이로다
●第7門(제7문) 成益頓超(성익돈초)
若夫高不可仰(약부고불가앙)이라 則積行菩薩(즉적행보살)도 曝腮鱗於龍門(폭시린어용문)이요 深不可闚(심불가규)는 則上德聲聞(즉상덕성문)도 杜視聽於嘉會(두시청어가회)로다
見聞爲種(견문위종)이라 八難(팔난)에 超十地之階(초십지지계)하고 解行在躬(해행재궁)이라 一生(일생)에 圓曠劫之果 (원광겁지과)로다
獅子奮迅(사자분신)에 衆海頓證於林中(중해돈증어임중)이요 象王迴旋(상왕회선)에 六千(육천)이 道成於言下(도성어언하)로다
啟明東廟(계명동묘)하니 智滿不異於初心(지만불이어초심)이요 寄位南求(기위남구)하니 因圓不逾於毛孔(인원불유어모공)이로다
剖微塵之經卷則念念果成(부미진지경권즉염념과성)이요 盡衆生之願門(진중생지원문) 則塵塵行滿(즉진진행만)이로다
●第8門(제8문) 結歎宏遠(결탄굉원)
眞可謂常恒之妙說(진가위상항지묘설)이며 通方之洪規(통방지홍규)며 稱性之極談(칭성지극담)이며 一乘之要軌也(일승지요궤야)로다
尋斯玄旨(심사현지)하고 却覽餘經(각람여경)하니 其猶杲日 (기유고일)이 麗天(여천)에 奪衆景之耀(탈중경지요)요
須彌橫海(수미횡해)에 落群峰之高(낙군봉지고)로다
●第9門(제9문) 感慶逢遇(감경봉우)
是以(시이)로 菩薩搜祕於龍宮(보살수비어용궁)이요
大賢闡揚於東夏(대현천양어동하)로다 顧惟正法之代(고유정법지대)에도 尚匿清輝(상익청휘)어늘 幸哉(행재)라
像季之時(상계지시)에 偶斯玄化(우사현화)하고 況逢聖主 (황봉성주)하며
得在靈山(득재영산)하야 竭思幽宗(갈사유종)하니 豈無慶躍 (기무경약)이리오
●第10門(제10문) 略釋名題(약석명제)
題稱大方廣佛華嚴經者(제칭대방광불화엄경자)는 即無盡修多羅之總名(즉무진수다라지총명)이요 世主妙嚴品第一者( 세주묘엄품제일자)는 卽衆篇義類之別目(즉중편의류지별목)이니라
大以曠兼無際(대이광겸무제)하고
方以正法自持(방이정법자지)하고
廣則稱體而周(광즉칭체이주)하고
佛謂覺斯玄妙(불위각사현묘)하고
華喻功德萬行(화유공덕만행)하고
嚴謂飾法成人(엄위식법성인)하고
經乃注無竭之涌泉(경내주무갈지용천)이로다
貫玄凝之妙義(관현응지묘의)하며 攝無邊之海會(섭무변지해회)하며 作終古之常規(작종고지상규)로다
佛及諸王(불급제왕)을 並稱世主(병칭세주)요 法門依正(법문의정)을 俱曰妙嚴(구왈묘엄)이니 分義類以彰品名(분의류이창품명)할새 冠群篇而稱第一(관군편이칭제일)이니라
斯經(사경)이 有三十九品(유삼십구품)하니 此品(차품)이 建初(건초)ㄹ새 故(고)로 云大方廣佛華嚴經 世主妙嚴品第一 (운 대방광불화엄경 세주묘엄품제일)이라하니라
부처님이 이상하시던 화엄세계의 모습
팔공산 자락에서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선선한 바람은 이 강당에 불어와서 정신을 맑게 하고 천하의 명문 왕복서를 우리가 이렇게 함께 읽고 있으니 이것이 그대로 화장장엄세계고 또 우리 불교가, 부처님께서 이상하시던 바 그러한 사부대중들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우리 불가의 본래의 모습이고 본래 이러해야 하거늘 그동안 정말 많은 시간, 많은 사람들이 너무 헤매고 너무 옆길을 돌고 돌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부처님도 늘 제자들에게 당부하기를 ‘자주 모여서 내가 설한 경전을 가지고 늘 토론하라. 그리고 늘 함께 외우고 반복해서 외우고 또 토론하고, 그렇게 해서 마음에 깊이 담도록 하라’ 라고 당부한 바가 있습니다.
자주 말씀하셨어요.
‘내가 설한 가르침을 자주 모여서 토론하고 반복해서 외워라’ 그러한 것을 우리가 지금 티벳불교를 보면 티벳스님들이 많이 모여서 서로 경전을 토론하고 손뼉을 치면서 또 염주를 휘두르면서 마치 싸움이라도 할 듯이 그렇게 하는 모습을 우리가 자주 보게 됩니다.
티벳불교는 스님들이 토론하는 모습 빼고는 달리 이야기 할 게 없죠. 각자 있을 때는 끊임없이 서당에서 천자문 읽듯이 몸을 흔들면서 경을 읽고, 단 둘이라도 모였다 하면 경문을 가지고 토론을 하는 모습 그것이 티벳불교 전부인 것처럼 보입니다.
티벳에 가서 박사학위도 받고 티벳어를 여러 해 공부하고 티벳의 저 시골에 가서 살다온 사람을 만났어요.
그래 내가 ‘그 사람들 박수치고 손뼉을 치면서 염주를 흔들고 막 그냥 싸우듯이 하는 게 그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하니까 그것이 어떤 명제를 하나 두고 거기에 대해서 끊임없이 묻고 답하고 묻고 답하고 그렇게 한대요.
‘왜 그러면 손을 가지고 그렇게 박수를 치듯이 박수를 치는 것도 아니고 때리는 걸로 그렇게 하느냐’ 라고 하니까 그렇게 하는 게 뜻이 있답니다.
한 손을 위로 드는 이것은 고집(苦集), 때리는 이것은 멸도(滅道)래요.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야 그거 근사하구나. 결국은 불교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고통을 소멸하는 것이다. 그리고 도(道)를 우리가 성취해서 누리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형식을 그렇게 이것은 고집이고 오른쪽으로 치는 것은 멸도다. 그래 고집을 없앤다는 것입니다.
‘고집을 없애고 멸도를 살려내는 형식을 취하면서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더라고요.
그 사람은 거기서 그런 것도 같이 많이 했던 경험 있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시간이 기준과 표본이 되기를
모처럼 참 이런 좋은 환경에서 이런 시간을 우리 사부대중들이 함께 가지니 ‘아 이것이 참 우리 부처님 제자의 본래의 모습이구나’ 하는 생각을 더욱 하게 됩니다.
여기서 2박 3일간의 이러한 시간이 하나의 기준이 되고 표본이 되어서 각자 돌아가서도 이러한 시간을 갖도록 한다면 보다 더 좋은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부처님 만나서 불교에 귀의해서 이러한 시간보다 더 좋은 시간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第一門(제1문) 標擧宗體(표거종체)
往復(왕복)이 無際(무제)나 動靜(동정)은 一源(일원)이라
含衆妙而有餘(함중묘이유여)하고 超言思而逈出者(초언사이형출자)는 其唯法界歟(기유법계여)며
가고 다시 돌아오는 일이 끝이 없다.
움직이고 조용함은 그 근원이 하나로다.
온갖 미묘함을 다 함유하고 있으나 여유가 있고,
말과 생각을 초월하여 멀리 벗어난 것은 오직 법계(法界)뿐이로다.
여천무비 대강백 화엄경 왕복서 특강
(2019년 6월 24일-26일 대구 동화사 국제선센타)
往復(왕복)이 無際(무제)나
가고 다시 돌아오는 일이 끝이 없다.
그 다음 20쪽 그 다음에 21쪽 이제 본문에 들어가겠는데 <근본체성을 높이 들어 표시하다> 그랬어요.
아시는 대로 이 책은 천하에 화엄경을 가장 깊이 제대로 많이 연구하시고 그 화엄경을 축약하고 축약해서 하나의 서문에 이렇게 담아놓은 글입니다.
단순하게 화엄경을 알았다기보다는 이 우주 법계의 일체 존재의 원리를 화엄경을 통해서 꿰뚫어보신 분이다. 단순하게 화엄경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일체 존재의 현상과 본체와 그 작용들을 제대로 파악했다.
화엄경이 곧 그러한 일을 했고, 또 청량국사는 화엄경을 제대로 공부함으로 해서 역시 ‘아, 화엄경만을 설명한 것이 아니고 화엄경을 통해서 우주만유 일체존재의 근본원리를 그대로 파악했고 또 그것을 펼쳐보였다’ 저는 그렇게 이해를 했습니다.
‘아 이분이 단순하게 화엄경만을 이해한 것이 아니구나’
물론 화엄경은 저기 작은 세포에서부터 저 은하계 많고 많은 별들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의 실상을 설명하신 것은 틀림없지만 그렇게 보기는 또한 부처님 경전으로써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화엄경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있죠.
처음에
‘왕복(往復)이 무제(無際)나’
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고단락 끄트머리에 무슨 이야기가 있는고 하니 ‘기유법계여(其唯法界歟)며’라고 했습니다.
25쪽에 ‘기유법계여며’ 이것을 저는 ‘법계라고 하는 것은 왕복이 무제다’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
법계라고 하는 것은, 법계가 뭡니까?
법계 우리 참 잘 쓰는 말입니다. 불교용어로써.
법계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인체에 있는 가장 미세한 세포, 여기에 꽃 한 송이가 있는데 꽃을 분해하고 분해하고 하면 아주 많고 많은 원자도 있고 입자도 있고, 소립자도 있고 아주 여러 가지로 분해가 됩니다. 그런 데서부터 그야말로 가까이는 우리 육신, 그리고 산천초목, 산하대지, 나아가서 지구, 지구에서 이 태양계, 태양계에서 더 나아가면 은하계, 은하계에서 나아가면 우리가 속해 있는 ‘은하수 은하계’라고 하는데 우리들의 이 은하수 은하계 같은 은하계가 은하계 숫자만치 또 은하계가 있는 거예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고 많고 많은 세계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이제 잘 알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모든 존재 거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거기서 부처님이 수행을 해서 도를 통했다는 사실에서부터 그것의 근본원리는 어떻게 됐고, 그 작용은 어떻고 그 형상은 어떻고 하는 것, 이 모든 것을 아울러서 이야기 할 때 불교에서는 ‘법계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법계하면 그 속에 다 포함되어 버려요.
거기서 성인도 범부도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그 속에 다 포함됩니다. 너도 나도 그 속에 다 포함되어 버리고, 가고 오는 것도 그 속에 다 포함되어 버립니다.
*
그래 ‘왕복이 무제’가 뭡니까.
법계에 있는 모든 존재는 그 무엇도 배제되지 아니하고 ‘모든 존재는 왕복이 무제다’ 가고 오는 것이 끝이 없다.
가면 또 오고, 제가 여기 세 번째 왔습니다. 또 이렇게 왔습니다. 갔다가 또 오고 갔다가 또 오고, 춘하추동(春夏秋冬) 사시절이 이렇게 끊임없이 반복을 하고 생로병사(生老病死)가 반복하고 이 지구는 성주괴공(成住壞空)으로 반복합니다.
성주괴공 성주괴공 우리가 그렇게 이야기 하는데 물론 생노병사와 춘하추동과 연관시켜서 생각하면 성주괴공이 맞는 표현이긴 한데 괴공성주(壞空成住)가 오히려 더 적절한 표현이예요.
사실 이 별이 생기기 전에 먼저 파계가 됩니다. 파계가 되면서 공(空)으로 돌아가요. 공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공이라고 할만치 작고 작은 가스라든지 미세한 먼지라든지 이런 것들이 하나씩 하나씩 합해지고 뭉쳐지면서 또 새로운 별이 생성이 됩니다. 그게 성(成)이예요. 그래 성주괴공(成住壞空) 어느 것이 먼저다 라고 할 필요가 없이 끊임없이 돕니다. 파괴가 되고 공으로 돌아가고 미세먼지들이 하나씩 하나씩 합쳐지면서 커져가지고 저 태양과 같이 되고 지구와 같이 되고 별과 같이 되고 저 태양보다 수십배 수천 배보다 더 큰 별들로까지 이루어져요. 그래서 그야말로 ‘아 참 파악 잘했다. 이 법계는 왕복이 무제다 끊임없이 오고가고 오고가고 하는구나’ 우리의 인생사도 마찬가지죠. 정치 사회에서도 보면 왕복이 무제야 끊임없이.
인간사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그 어디에 가고 오고 가고 오고 끊임없이 그렇게 반복되지 아니한 것은 없어요.
*
그래 좀 기다리면 돼.
내가 좀 어떤 원한 쌓인 일이 있다. 또는 내가 그동안 참억울한 일이 있다. 여러가지 인생사 많을 것 아닙니까.
나보다 후배가 나보다 앞서가기도 하고, 별의별 일들이 다 있습니다. 이런 이치를 알면 왕복서를 제대로 알면 기다리면 돼요. 잠깐만 참고 기다리면 웃는 날이 금방 돌아옵니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웃는 날이 돌아와요.
그게 뭡니까 왕복이 무제입니다.
법계는 이세상의 그 누구의 일도 어떤 사물도 사건도 법계에 해당되지 않는 것은 없다. 그것부터 먼저 기억해야 돼요. 이건 우주 만유의 진리이기도 하고 물론 화엄경이야기 이기도 하지만 화엄경이 뭡니까? 우주 만유의 진리를 이야기 하자는 것입니다.
‘우주 만유의 진리가 무엇이다’ 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 하자는 것이기 때문에 ‘우주 만유의 진리는 한마디로 법계’라고 해놓고 그 ‘법계의 작용이 있어서는 왕복이 무제다’
아 글자 넉자지만은 이 속에 모든 인생사 세상사 벌어지고 있는 그 별별 사건들이 전부 이 속에 해당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만 우리가 잘 숙지하고 있고 가슴 깊이 그걸 새기고 있다면 ‘아 왕복이 무제라니 참 그렇구나’
하루에도 몇 번씩 무릎을 칠 일이 있을 것입니다.
이 넉자만으로도 이 법계를 우리가 살고 있는 인생사 세상사를 잘 설명했다 봅니다.
動靜(동정)은 一源(일원)이라
움직이고 조용함은 그 근원이 하나로다.
이것은 이 우주 법계의 본체(本體)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우주법계. 아무리 가고 오고 가고 오고 움직이고 조용하고 움직이고 조용하고 한다 하더라도 뭐예요? 법계 그자체야.
우리 몸 하면 뭡니까. 우리 육신 역시 모든 것은 체상용(体相用)입니다.
불교에서는 그렇게 참 아주 분석을 잘하는데요.
본체가 있고 모양이 있고 작용이 있다.
모든 것은 그래요. 우리 육신도 마찬가지고 마음도 마찬가지고 마이크도 마찬가지고 책상도 마찬가지고 책도 마찬가지고 그 무엇 하나도 체상용(体相用)이 없는 것이 없어요. 전부 체상용으로 분류가 다 됩니다.
*
그래서 이 법계의 본체(本體)는 뭐냐? 일원(一源)이다. 하나의 근원자리다. 법계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봄이 왔어요. 봄은 일원 자체야. 봄이 왔다고 하는 사실은. 거기에 현상은 어떻죠? 나뭇잎이 피고 꽃이 피고 하는 것이 봄의 현상입니다. 그리고 작용은 뭡니까? 거기에 열매도 열리고 날씨도 따뜻하고 사람들이 활동하게 되고 거기에 따르는 작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봄이라고 하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봄이라고 하는 체(体=體)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相)과 작용[用]은 눈에 보입니다.
그와 같이 이걸 낱낱이 세밀하게 설명할 시간은 없지만 배대해서 우리가 이해하기로 하면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동정(動靜)은 일원(一源)이다’는 법계의 본체를 말하는 것이고.
含衆妙而有餘(함중묘이유여)하고
온갖 미묘함을 다 함유하고 있으나 여유가 있고,
함중묘이유여(含衆妙而有餘)라고 하는 말은 상(相)을 말하는 것입니다. 법계(法界) 속에는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도 포함되고 중생도 포함되고 성인도 포함되고 범부도 포함되고 지옥도 포함되고 극락도 포함됩니다.
작은 것도 포함되고 큰 것도 포함되고 저 미세 아주 미세 극미세한 인허진(隣虛塵), 허공에 가까운 먼지에서부터 아니면 아주 작고 작은 우리들의, 우리 몸에는 100조의 세포가 있다 그러죠, 그 100조의 세포같은 그렇게 작은 것에서부터 저 은하계 그 크고 큰 별들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법계 속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래 법계(法界)라고 하면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
법계(法界) 안에 다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이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는가? 그걸 설명하는 거예요.
아, 화엄경에서 이런 설명을 하고 있다니 참 대단한 것 아닙니까. 화엄경에서 이런 설명을 하고 있어요.
온갖 미묘한 것을 포함하고 있지만 여유가 있다.
그래놓고는 그럼 그것을 또 다른 시각에서 이 법계를 한 번 다시 보자.
超言思而逈出者(초언사이형출자)는 其唯法界歟(기유법계여)며
말과 생각을 초월하여 멀리 벗어난 것은 오직 법계(法界)뿐이로다.
다시 볼 때 뭐라고? ‘아무리 네가 설명을 잘하고 화엄경에서 법계를 설명을 잘하고 부처님이 설명을 잘하고 청량국사가 설명을 설사 잘했다 하더라도 초언사이형출자(超言思而逈出者)야, 말과 생각을 초월하여 멀리 벗어났다’
다 부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또 예를 들어서 왕복(往復) 무제(無際)다, 동정(動靜)은 일원(一源)이다, 함중묘이유여(含衆妙而有餘)다, 법계의 속성은 이런 세 가지 체상용(体相用)을 가지고 있다. 설명 근사하지요. 그런데 거기에 매여 있으면 어떻게 돼요? 불교 상식을 조금만 알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벌써 그것은 집착하는 말이고 허물을 많이 뒤집어 쓴 소리라는 것을 압니다.
*
근사하지요 설명이.
왕복(往復)이 무제(無際)요
동정(動靜)은 일원(一源)이고
함중묘이유여(含衆妙而有餘)라
아, 이 법계는 참 설명 잘했습니다. 요 세마디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법계를, 세포 하나 속에도 마찬가지예요.
세포 하나속에도 이것을 다 포함하고 있어요.
우리 자신 개개인에게도 이 세 가지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거 적용시키면요 적용 안되는 사람이 없고 적용 안되는 일이 없고 적용 되지 않는 존재가 없습니다.
그것이 법계의 원리예요.
그렇다고 거기에 그것이 설명이 다냐?
50점짜리 밖에 안되는 거죠.
그래서 언사를 초월해서 말과 생각을 초월해서 멀리 벗어나는 입장이 있다. 그 모든 것을 다 벗어난 입장이 있다.
그것이 법계다.
법계는 앞에서 설명한 대로고, 그 설명한 그것이 또한 법계다. 법계라는 낱말을 맨 뒤에서 붙였지만 앞에서 붙여놓고 ‘법계는 왕복이 무제고, 법계는 동정이 일원이고, 법계는 함중묘이유여다’ 그렇게 해석하면 아주 훨씬 와 닿을 것입니다. 이 법계에 대한 것을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해서 25쪽 밑에서 다섯째 줄 한 번 보겠습니다.
*
그래서 십회향품에서는 법계의 속성에 대해서
열 가지로 밝혔다. 곧
“법계는 한량 [量]이 없다.
법계는 끝[邊]이 없다.
법계는 한계[限]가 없다.
법계는 변제[際]가 없다.
법계는 단절함[斷]이 없다.
법계는 한 성품[一性]이다.
법계는 자성이 청정[自性淸淨]하다.
법계는 수순(隨順)한다.
법계는 장엄(莊嚴)하다.
법계는 깨뜨릴 수 없다[不可失壞]”라고 하였다.
법계에 대한 속성을 경전에서는 바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초언사이형출이야. 이걸 놓치면 안됩니다 또. 법계를 이해하는데 우리들 자신에서, 뭐 세포 이야기하지 말고 저기 멀리 있는 은하계 이야기 하지 말고, 우리들 자신 오온 육근을 나라고 생각하는 것 이걸 제일 이해하기 쉬워요, 제일 가까이 있으니까.
또 이것만 의지해서 그동안 살았습니다.
지금도 그 많고 많은 법문 들었고 그 훌륭한 부처님 말씀 읽고 배웠지만 우리는 어디까지나 항상 어디에 더 중심을 두고 있느냐? ‘오온이 나다 육근이 나다’ 거기서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많고 많은 훌륭한 말씀, 계란으로 바위치기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 들어도 오온 육근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그거 뭐 세상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 보면 다 알 수 있습니다. 자수해야 돼요 우리는.
그래서 나는 가끔 자수 잘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말을 하고 공이 어쩌느니 무상이 어쩌느니 무아가 어쩌느니 그래봐야 다시 제자리에 돌아오는 것이 뭐야? ‘오온이 나고 육근이 나다’ 오온, 육근을 가진 내 자신,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늘 그 좋고 훌륭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계란으로 바위치기구나. 그렇지만 그 연약한 계란으로 그 단단한 바위를 치면 어느 날 계란은 멀쩡하고 바위가 부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 역사가 많습니다.
또 우리의 선배 불보살들은, 조사스님들은 전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 희망 가지고 사는 거죠.
1문(門)이 그쯤해서 법계에 대한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第2門(제2문) 別歎能詮(별탄능전)
화엄경을 특별히 찬탄하다
剖裂玄微(부열현미)하고 昭廓心境(소확심경)하며
유현하고 미묘한 내용을 분석하고 나누었으며 마음과 경계를 환하게 비추었으며,
법계를 제가 그동안 설명한 것은 순 엉터리고 또 억만분의 일 정도 설명했을까 말까이고, 2문(門)은 청량스님이 알고 계시는 법계의 설명 그것을 우리가 보겠습니다.
법계의 설명은 곧 화엄경입니다.
그래서 화엄경을 특별히 찬탄한 내용입니다.
*
부열현미(剖裂玄微)하고 소확심경(昭廓心境)이라 그랬어요.
화엄경은 유현하고 미묘한 내용을 분석하고 나누었으며 마음과 경계를 환하게 비췄다 그랬습니다.
설명하지 아니한 것이 없어요.
부열현미(剖裂玄微) 아무리 미세한 것도, 우리 몸에 100조의 세포가 있다 하더라도 그 100조의 세포, 또 그 한 세포를 100조로 나눈다고 하더라도 그것마저도 다 낱낱이 분석하고 나누었어요.
얼마나 미세하게 나누었는지 어안이 벙벙하고 숨이 막힐 정도가 화엄경의 설명입니다. 부열현미예요.
어떤 미세한 설명도 화엄경의 설명에 미치지 못합니다.
*
그리고 소확심경(昭廓心境)이라. 마음과 경계를 환하게 비추었다. 이 세상을 둘로 나누면 우리 주관적인 마음과 마음 이외의 모든 것 경계입니다.
법계라고 하면 그것이 다 포함되지만 또 세분화해서 둘로 나누어 보자하면 우리 마음하고 경계입니다. 그것 밖에 없어요. 전부 내 마음이든지 아니면 경계이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그 관계를 너무나도 자세하게 잘 쪼게 놨어요. 정말 환하게 비추어서 설명해 놓은 것이 화엄경이다. 소확심경, 마음과 경계를 환하게 비추었다. 그랬습니다.
剖裂玄微(부열현미)하고 昭廓心境(소확심경)하며 窮理盡性(궁리진성)하고 徹果該因(철과해인)하며 汪洋冲融(왕양충융)하고 廣大悉備者(광대실비자)는 其唯大方廣佛華嚴經焉(기유대방광불화엄경언)인저
유현하고 미묘한 내용을 분석하고 나누었으며 마음과 경계를 환하게 비추었으며,
이치를 다 드러내고 본성을 다 표현하여 결과에 사무치고 원인을 갖추었으며,
깊고 넓고 가득하여 넘치며 심원하고 융성하고 넓고 커서 모두 다 갖춘 것은 오직 대방광불화엄경뿐이로다.
여천무비 대강백 화엄경 왕복서 특강
(2019년 6월 24일-26일 대구 동화사 국제선센타)
汪洋冲融(왕양충융)하고 廣大悉備者(광대실비자)는 其唯大方廣佛華嚴經焉(기유대방광불화엄경언)인저
깊고 넓고 가득하여 넘치며 심원하고 융성하고 넓고 커서 모두 다 갖춘 것은 오직 대방광불화엄경뿐이로다.
왕양충융(汪洋沖融)하고 광대실비자(廣大悉備者)는
기유대방광불화엄경언(其唯大方廣佛華嚴經焉)인저
이걸 아까 법계에서 설명하듯이 설명하면
대방광불화엄경이라고 하는 것은 쭉 앞에서 설명해온 대로
부열현미(剖裂玄微)하고 소확심경(昭廓心境)하며
궁리진성(窮理盡性)하고 철과해인(徹果該因)이다.
따라서
왕양충융(汪洋冲融)하고 광대실비자(廣大悉備者)다.
*
왕양충융 그 글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40권 화엄경, 60권 화엄경, 80권 화엄경 또 거기서 보현행원품까지 합쳐서 81권 화엄경 하는데 거의 81권으로 굳혀졌어요. 청량스님도 81권으로, 물론 한 사람이 번역하고 같은 책은 아니지만 반드시 보현행원품이 끼어야 된다 라고 해서 그 후로 계속 출판할 때마다 보현행원품을 끼워서 81권, 81권 합니다.
제가 중국이나 대만에서 출판한 책들 다 보면 전부 보현행원품까지 해서 81권으로 그렇게 치고 있습니다.
*
아무튼 그 법문이 왕양충융이라.
깊고 넓고 가득하여 넘치며 시원하고 융성하고 넓고 커서 모두가 갖춘 것은 오직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뿐이로다.
그 법문이요 정말 저 큰 바다에 대해가 넘실대는 것과 같은 왕양충융 큰 바다가 어디에도 걸릴 것 없이 넘실대는 듯한 느낌이 말하자면 화엄경을 읽어보면 그렇습니다.
*
광대실비자라 넓고 커서 모든 것을 다 갖추었다.
뒤에도 나오지만 그래서 ‘팔만대장경의 전체적인 이름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대방광불화엄경이다’ 이렇게 표현해요.
팔만대장경 여러 가지 6천여 종류의 경전 이름이 있지만 그거 복잡하게 할 것없이 <대방광불화엄경이다> 이렇게 해버리면 그 속에 다 포함된다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
법계하고 화엄경
제일 중요한 명제를 지금 우리가 봤습니다.
*
법계
우리가 다른 것 다 내려놓고 그동안의 불교상식 다 내려놓고 ‘아 이 세상에 참 복잡다단한데 많고 많은 현상들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 이걸 한 마디로 이야기 하면 뭐라고 할까?’ 두 말할 것도 없이 ‘법계’입니다.
그것을 가장 작은 미세한 먼지에서부터 저 큰 은하계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존재들을, 그 넓고 넓은 세상 속에 명멸해간 성인이든 범부든 영웅이든 졸부든 할 것 없이 다 포함해서 그래서 뭉뚱그려서 한마디로 이야기 할 때 그것을 법계라고 한다. 그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 까지도 다 법계라고 한다. 그렇게 한마디로 뭉뚱거리면 쉽기는 쉬운데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 방법은 없겠는가?
화엄경이 그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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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화엄경도 여기에서 설명한 게 뭐
부열현미(剖裂玄微)하고 소확심경(昭廓心境)하며
궁리진성(窮理盡性)하고 철과해인(徹果該因)한다.
왕양충융(汪洋冲融)하고 광대실비자(廣大悉備者)다.
아, 태평양 바다가 넘실대듯이 그렇게 넘실대면서 설명했고 그래서 그 속에는 갖추지 아니한 것이 없다. 광대해서 다 갖추었다.
이건 너무 애매모호하잖아요. 그렇게 알기는 너무 애매모호한거야. 그래서 그걸로 끝나지 않고, 그래 버리면 또 할 일이 없죠.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게 됩니다. 실제로 아무것도 모르게 돼요. 그쯤 해놓으면.
‘그거 뭐 우리가 살고 있는 일 그대로인데 그거 뭐 들으나 마나 한 소리 아니냐?’ 이렇게 돼요.
*
그래서 이것을 좀 더 그야말로 깨달은 사람, 눈을 뜬 사람의 입장에서 환하게 설명할 길은 없는가?
이렇게 보았을 때 이제 3문(門) 교주난사(敎主難思)라고 하는 문이 등장하게 됩니다.
*
우리가 불교하면 깨달음의 가르침, 깨달은 사람, 그러잖아요. 두말할 것 없이 깨달은 사람의 가르침입니다.
깨달음 빼버리면 불교는 이야기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깨달음과 깨닫지 못한 그 차이는 어떻게 설명하는가. 그것은 눈을 뜬 사람과 눈을 감은 사람의 차이입니다.
가장 간단하게 설명하면 그래요.
*
우리는 지금 모두 눈을 뜨고 있어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다가 이제는 차츰차츰 어두워지는구나’ 아주 섬세하게 1분 1초도 놓치지 아니하고 다 감지합니다. 이게 눈 뜬 사람의 일이예요. 이게 눈뜬 사람의 일이라.
그런데 눈을 감은 사람은 ‘야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다. 참 석양 아름답다’ 뭔 말인지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눈 감은 사람이 그걸 어떻게 이해하겠어요?
그리고 또 5분쯤 있다가 ‘그새 저렇게 또 해걸음이 더 짙어졌는데 더 근사하네’ 옆에서 눈뜬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 한단 말이야. ‘야 아까보다 석양이 더 찬란하구나. 저 붉은 절 기둥 좀 봐 얼마나 근사한가’ 이렇게 이야기 한다 말이야 우리 눈뜬 사람은.
그런데 눈감은 사람은 어떨까요 그게.
참 답답하기 이를 데 없죠.
우리는 눈뜨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감사한 일이요.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 이 인생문제, 세상문제 앞에서 설명한 모든 법계의 문제에 대해서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은 눈뜬 사람과 눈을 감은 사람의 차이다. 그렇게 알면 돼요.
*
그래 이제 우리는 그러한 것을 추적해서 ‘눈뜬 사람은 법계를 이렇게 본다’ 이러한 이야기를 펼쳐 나가는 것입니다.
잠깐 쉬었다 하라고 시계를 갖다 놨습니다. 잠깐 쉬었다 하겠습니다
窮理盡性(궁리진성)하고 徹果該因(철과해인)하며
이치를 다 드러내고 본성을 다 표현하여 결과에 사무치고 원인을 갖추었으며,
궁리진성(窮理盡性)하고 철과해인(徹果該因)했다. 그랬습니다. 처음에 왕복서를 아무리 읽어봐야 이해가 안되고 화엄경을 다 공부하고 나서 왕복서를 읽으면 조금 이해가 되고 또 그리고 나서 화엄경을 읽으면 화엄경 하고 왕복서 하고 매칭이 돼요. 비로소 그렇게 됩니다.
그래 화엄경을 환하게 꿰뚫고 있어야 그것을 간추린 것이 왕복서이기 때문에 그래서 왕복서가 사실은 이해가 됩니다.
이것은 사실 미끼 던지는 거예요.
‘아 화엄경은 이와같이 훌륭하고 이와 같이 심오하다’라고 하는 것을 약간 맛보이는 것인데 이 미끼에 모두 걸려야 하는데 그게 문제입니다.
*
궁리진성(窮理盡性) 철과해인(徹果該因)
이치를 다 드러내고 본성을 다 표현했다.
궁리(窮理), 이치를 다 궁구했다. 진성(盡性), 성품을 다했다. 이치와 본성을 낱낱이 그 무엇도 하나 빠뜨리지 않고 낱낱이 설명한 것이 화엄경이다.
철과해인(徹果該因)이다. 결과에 사무치고 원인을 갖추었다.
이 세상 모든 존재는 인과의 법칙에서 벗어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전부 인과의 법칙에 다 해당되는 거거든요.
화엄경도 역시 인과의 이치에 의해서 설해졌습니다.
우리가 흔히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그러잖습니까? 저는 늘 평소에 승속을 막론하고 불교를 공부하는 불자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들려주어야 할 것, ‘그것이 삶에 어떤보탬이 되겠는가?’ 하는 것을 깨놓고 한 번 연구해 보고 서로 토론해 보고 탁마해 볼 때 무엇이 가장 좋을까를 이야기 합니다.
마음 이야기도 좋습니다. 화두 이야기도 좋아요. 마음 가라앉히는 위파사나 좋습니다. 내일 1억 짜리 49재를 지낸다는데 49재 지내는 법도 또한 좋습니다. 천도재 다 좋아요. 불공 들이는 법도 좋습니다. 불교 안에는 여러 가지 그야말로 팔만 사천 문제에 대해서 팔만 사천 가지의 방편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딱 한 가지 딱 하나만을 우선적으로 우리가 소개해야 하고 우리가 또 실천해야 하고 ‘불교가 뭐냐?’하면 두말할 것 없이 ‘불교는 이거다’‘이것이 우리 생활에 가장 유익한 가르침이다’ 할 것은 무엇일까?
저는 늘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인과의 법칙이다.
부처님이 뭘 깨달았느냐? 연기를 깨달았다 하지 않습니까? 연기니 인연과니 전부 같은 맥락인데 인과의 이치를 몰라서 세상이 그렇게 어지럽습니다.
왜 공무를 집행하면서 그렇게 부정을 저지르고 함부로 그렇게 해서 나중에 들통이 나서 큰집에 가고 저런 지옥고통을 당합니까?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큰집에 갔다 하면 그 사람하고 인연되는 모든 사람들은요 전부 지옥 생활입니다. 전부 지옥생활이예요.
왜 그래요? 왜 그 많은 사람들이 지옥 생활을 하게 합니까? 그 사람이 인과의 법칙대로 살지 않고 인과를 무시하고 살았기 때문에 그래요.
인과를 무시하고 ‘아 나는 절대 잘못한 적이 없다’라고 하더라도 자기가 스스로 깨달았지 못했을 것이고, 설사 금생에는 잘못이 없다 하더라도 과거생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틀림없이 자기가 그런 지옥 생활을 할 만한 일을 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불교의 목적은 이고득락(離苦得樂) 아닙니까.
고통을 떠나서 낙을 얻자, 편안하게 살자는 거예요.
*
진정 편안하게 살자면 인과(因果)의 법칙(法則)대로 살면 편안한 거예요. 인과의 이치대로 살면 편안한 거라.
그저 자기가 비록 자기가 욕심 때문에 어리석음 때문에 예를 들어서 벼싹이 겨우 올라오고 있는데 빨리 좀 커서 열매를 맺으면 안되겠나? 하는 그런 욕심 때문에 그걸 뽑아 놓습니다. 보리싹이나 밀싹이나 뽑아 놓으면 그게 어떻게 되겠어요? 우리가 모두 그렇게 살고 있어요.
그렇게 살고 있는 거야.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그거 뽑아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치가 아니예요. 인과법칙이 아니야. 세월이 가야되고 때가 돼야 되고 그래 돼야 추수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데 그렇지 아니한 사람들은 모두 세상에서 죄짓고 지옥가고 큰집에 가고 하는 사람들은 전부 한마디로 말하자면 벼이삭을 미리 뽑아 놓는 일과 똑같은 거예요. 그런 사실입니다.
그래서 불교에 그 많고 많은 가르침이 있지만 인과의 가르침을 우리가 철두철미하게 알아야 되고 우리가 세상을 향해서 부처님 법을 전할 때 인과의 법칙을 전해야 돼요. 인과의 법칙.
그래야 세상이 편안해 집니다. 부정부패가 없어지는 거예요. 그리고 이고득락, 자기자신의 인생사에 있어서 이고득락이 됩니다. 다른 것 없어요. 길게 설명할 것 없습니다.
*
그러한 이치를 철과해인(徹果該因) 그 결과에도 사무치고 원인에도 사무친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간단하게 인과(因果) 인과 하고 인과의 법칙하고 또 인과 이야기 하면 마치 전설따라 삼천리 같이 옛날에 어떤 선비가 지나가다가 어쩌고 저쩌고 해서 결과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다 그런 이야기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예요.
간단한 게 아니예요.
인과 우리 깊이 연구해야 돼요.
우리가 알고 있는 인과 그거는 사실 십분의 일도 모르고 있어요. 아무튼 그런 문제까지도 화엄경에서는 다 세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철과해인(徹果該因).
●第3門(제3문) 敎主難思(교주난사)
故我世尊(고아세존)이 十身初滿(십신초만)에 正覺始成(정각시성)하사 乘願行以彌綸(승원행이미륜)하시며 混虛空爲體性(혼허공위체성)하시니 富有萬德(부유만덕)이요 蕩無纖塵(탕무섬진)이로다
그러므로 우리 세존(世尊)께서 열 가지 몸[十身]이 처음 만족함에 비로소 정각(正覺)을 이루시었다.
서원과 행(行)에 의지하여 넓고 두루 하며, 허공과 혼융하여 자체의 성품을 삼으시었다.
넉넉하고 풍성함에는 만덕(萬德)을 가지셨고, 텅 비어 없음에는 작은 먼지 하나마저 없도다.
여천무비 대강백 화엄경 왕복서 특강
(2019년 6월 24일-26일 대구 동화사 국제선센타)
故我世尊(고아세존)이 十身初滿(십신초만)에 正覺始成(정각시성)하사
그러므로 우리 세존(世尊)께서 열 가지 몸[十身]이 처음 만족함에 비로소 정각(正覺)을 이루시었다.
제3문(門) 교주난사(敎主難思)라. 교주는 두 말할 것 없이 부처님입니다. 우리 대승불교에서 보면 ‘부처님’ 하면 참 애매해요.
근본불교, 상좌부불교 같은 데서는 간단해요. 역사적인 석가모니 부처님 밖에 없으니까. 그들에게는 역사적인 석가모니 부처님 밖에 부처님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 대승불교 내지 선불교에서는 아주 쉬운 말로 뭐라고? 심즉시불(心卽是佛)이다.
또심불급중생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이다.
이렇게 하니까 이게 어떻게 된거예요?
석가모니 부처님, 역사적인 부처님, 2600년 전에 이 땅에 왔다가신 석가모니 부처님만을 부처님으로 생각하던 소승불교하고는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그런 이야기 세세하게 할 시간은 안되고요. 아무튼 그 모든 석가모니 부처님, 역사적인 석가모니 부처님을 위시해서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고 하는 선불교 부처의 의미도 포함하고, 화엄경에서 흔히 말하는 심불급중생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이라고 하는 의미도 포함해서 그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는 이가 교주야. 교주, 부처님이라 이말이야.
화엄경에서 말하는 부처님, 그분은 생각해서 알기 어렵다 그랬습니다.
*
고아세존(故我世尊)이 십신초만(十身初滿)에 정각시성(正覺始成)
앞에서 깨달음과 깨닫지 못한 경지를 ‘눈뜸과 눈을 감은 입장’하고 비유를 들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그러므로 우리 세존께서 십신초만에 정각을 시성했다 그랬어요. 열 가지 몸이 막 가득해졌을 때 바른 깨달음을 비로소 이루었다.
*
여러분들, 부처님이 깨달음을 성취했을 때 어떤 과정이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까?
첫째 십이인연을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6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
이 12인연을 역관 순관 하면서, 그것도 끊임없이 매번 한 번의 오차도 없이 거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역으로 관하고 순으로 관하고, 12인연을 역으로 관하고 순으로 관하고 이렇게 해서 비로소 깨달음을 이뤘다.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이게 근본불교에서의 이야기예요.
*
그 다음에 또 무슨 사선천(四禪天)을 하나하나 닦아 올라갔다. 그래서 초선천 중선천 삼선천 사선천을 하나하나 닦아 올라갔는데 그것도 무수한 반복을 거듭하면서 사선천까지 선정을 닦아 올라가서 비로소 깨달았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그런 두 종류의 설명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었을 때요.
*
그런데 화엄경에서는 뭐라고?
열 가지 몸이 처음 만족했을 때 정각을 비로소 이뤘다. 그렇습니다. 그 열가지 몸 한번 살펴볼게요. 밑에 설명 세 번째줄 (p.30)
그 열가지 몸[十身]이란 중생신· 국토신· 업보신· 성문신·벽지불신· 보살신· 여래신· 지신(智身)· 법신· 허공신이다
그 열가지 몸이란 중생신 우리도 중생신 있습니다. 국토신 우리도 국토신 있어요. 여기까지는 우리도 동급입니다. 업보신 여기까지도 우리 동급이예요.
그 다음에는 조심하셔야 돼요.
성문신 벽지불신 보살신 여래신 지신 법신 거기까지는 전혀 우리는 손도 못대는 경지입니다. 글쎄 지신까지는 그렇다손치더라도 법신 허공신은 해석여하에 따라서 우리가 손댈 수도 있고 우리도 거기에 동참할 수 있는 몸입니다.
그렇다면 50퍼센트는 십신 가운데 우리가 어느 정도 자리를 차지하고 나머지 50퍼센트는 도저히 그야말로 ‘땅짐도 못뗀다’ 그러죠. 그야말도 이빨도 들어가기 아니하는 경지입니다. 성문이 호락호락한 경지가 아니예요.
벽지불도 호락호락한 경지 아닙니다.
보살신 여래신 지신은 말할 것도 없어요.
법신은 우리가 우리 마음이 본래 법의 자리고 또 법신이라고 하면 모든 것을 다 포함한 그런 입장에서 설명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마음의 경지를 법신이다. 그건 우리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허공신 이것도 내가 금방 허공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어느 정도 이것도 우리가 가능한 경지입니다.
이것이 가득했다 그래요.
우리 50프로는 부처가 되었다고 볼 수 있고 50프로 못되었다. 50프로 못된게 문제인데 그게 부처님과 우리의 다른 점입니다.
아무튼 ‘12연기를 역관 순관 하면서 무수한 밤을 지낸 뒤에 깨달음을 이루었다’ 하고는 천지차이입니다.
전혀 다른 입장이예요.
*
불교가요 크게 나누면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근본불교, 초기불교, 부파불교, 상좌부불교 이런 것을 다 포함해서 그것을 소승불교 이렇게 이야기 하고, 그 다음에 대승보살 불교가 있고 그다음에 선불교가 있습니다.
이 세가지예요.
특히 우리나라에 세 가지 불교가 횡행하고 있습니다. 막상막하예요. 그런데 아직까지는 선불교가 조금 힘이 세요.
선불교에 오랜 세월 말하자면 종사하지 아니한 사람은 조실도 안되고 방장도 안되고 종정도 안돼요.
그것만 보더라도 선불교는 상당히 힘이 세. 위파사나 해가지고는 안돼요.
또 대승불교 화엄경 아무리 해가지고는 종정 못해.
아무튼 크게 나누면 그 세가지 불교, 물론 다른 불교도 말할 수 있겠지만 크게 나누면 그 세 가지 불교입니다.
*
그 세 가지 불교에서 ‘과연 어떤 불교가 정말 부처님의 정신에 맞는 불교인가? 가까운 불교인가?’ 이런 걸 우리가 늘 고민해 보고 토론도 해야 할 내용입니다.
아무튼 여기서 말하는 열가지 몸 그것이 가득했을 때 비로소 깨달음을 이루었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어요.
富有萬德(부유만덕)이요蕩無纖塵(탕무섬진)이로다
넉넉하고 풍성함에는 만덕(萬德)을 가지셨고, 텅 비어 없음에는 작은 먼지 하나마저 없도다.
부유만덕(富有萬德)이나 탕무섬진(蕩無纖塵)이로다
내가 그 전에 탄허스님에게 한참 공부할 때, 글씨를 쓰고 있기에 ‘스님 좋은 글 한 마디 써주십시오’ 하니까 이걸 써주더라고요.
*
부유만덕(富有萬德) 탕무섬진(蕩無纖塵)
부처님이, 나를 포함한, 여러분들을 다 포함한 중생과 중생이 가진 중생심, 마음을 포함한, 또 역사적인 부처님을 포함한 그 부처님은 부유하기는 만덕을 소유하고 있고, 만행만덕을 다 소유하고 있고, 탕무섬진이라. 탕탕해서 텅 비어서 없기는 먼지하나 없다. 미세먼지 하나 없다 말이야. 그런 자리가 부처님의 자리야.
*
그런 자리가 부처님의 자리야.
우리 마음부처, 마음부처 하잖아요. 틀림없이 이 자리에서 그것이 들어서 경(經)도 보고, 글도 보고, 좋아도 하고, 모든 풍경을 감상도 하고, 화도 내고, 기뻐도 하고, 온갖 것을 마음이 들어서 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실체를 한 번 찾아봅시다.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요.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 미세 먼지 하나 찾을 수가 없어. 어떤 장치를, 과학적인 장치를 해놓고 그렇게 꽉 차 있는 우리 마음을 거기서 한 점이라도 찾아내려고 무슨 장치를 해 놓아도 도저히 우리 마음은 찾을 길이 없어. 그렇게 꽉 차 있는데도 탕무섬진이야. 텅텅 비어서 먼지 하나 없어. 그러면서 온갖 것 다 알아서 하네?
*
그게 들지 아니하면 아무 것도 안돼.
우리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도 전부 그것이 시켜서 여기까지 왔고 때가 되면 또 그것이 명령을 내려.
명령을 내리면 뭣도 모르고 몸뚱이는 따라서 제 갈 길을 가고, 숙소를 찾아가고, 기온이 차면 불을 때고, 이불을 두껍게 덮고 할 줄 아는 게 전부 그것이 들어서 하는 거예요. 그 부처가 들어서 하는 거예요.
불가수유리(不可須臾離)야.
한 순간도 떠나 있을 수가 없어.
만약에 한 순간이라도 떠나 있다면 그것은 마음이 아니고 부처가 아니야. 도(道)도 아니야.
이거 찾으려고 할 거 없다니까.
난 그거 안 이상은 그 후로 선방에서 나와버렸어요.
한 순간도 이것이 떠나있지 않는다 말이야.
버릴래야 버릴 수도 없고. 잊어버릴래야 잊어버릴 수 없는게 이 주인공이라.
*
주인공이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 질 수가 없어. 전부 그것이 들어서 다 하는데 뭘 따로 찾아?
이미 그것이 하고 있으면서.
그 주인공이 들어서 모든 것을 다 하고 있으면서 뭘 찾는단 말이요?
선불교가 어떤 의미에서 좋기는 하지만 너무 거기에 직업적으로 매달려 있는 것은 참 큰 문제예요.
그 옆에 페이지(p.33)
‘그러므로 화엄경 제80권 맨 마지막 부분에서 부처님의 다함이 없는 공덕을 찬탄하기를’
같이 읽겠습니다.
“세계 티끌 같은 마음 헤아려 알고
큰 바닷물까지 마셔 다하고
허공을 측량하고 바람을 얽어매어도
부처님의 공덕은 말로 다할 수 없네.
이러한 공덕 바다 누가 듣고서
기뻐하며 믿는 마음 내는 이들은
위에 말한 공덕을 얻게 되리니
여기에서 의심을 내지 말지라.” 라고 하였다.
십신(十身) 가운데 몇 가지는 우리가 다 차지하고 있잖아요. 찰진심념가수지, 뭐 아무것도 아닌 걸 가지고 그랬네. 다 아는 것을 가지고 그랬구만.
찰진심념가수지(刹塵心念可數知)
대해중수가음진(大海中水可飮盡)하며
허공가량풍가계(虛空可量風可繫)라도
무능진설불공덕(無能盡說佛功德)이로다.
아 참 그렇습니다.
여기에 그거 잊어버리지 마세요.
부처님, 부처님 하니까 역사적인 부처님을 생각하면 절대 여기서는 금기사항입니다.
우리 마음부처, 중생부처, 허공부처 아까 십신 가운데 몇 가지는 우리가 50프로쯤은 차지하고 있어요. 중생신 국토신 업보신 법신 허공신 이런 건 다 우리도 다 함께 하고 있잖아요.
乘願行以彌綸(승원행이미륜)하시며 混虛空爲體性(혼허공위체성)하시니
서원과 행(行)에 의지하여 넓고 두루 하며, 허공과 혼융하여 자체의 성품을 삼으시었다.
승원행이미륜(乘願行以彌綸)하시며 혼허공위체성(混虛空爲體性)하시니 서원과 행(行)에 의지하여 넓고 두루 하며, 원행 우리 대승불교에서 제일 좋아하는 말입니다.
행원(行願)이라고도 하죠. 원행(願行)이라고도 하고 보살행원(菩薩行願) 또 보현행원(普賢行願)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바로 그게 진짜 불교예요.
*
대승불교를 제대로 실천을 못하지만 저는 선불교도 아니고 소승불교도 아니고 대승불교입니다.
그래서 대승불교를 이 땅에서 가장 잘 표현하고 있고 실천하고 있는 대만불교를 나는 가장 이상적인 불교다, 이 시대에 제일 훌륭한 불교다, 이렇게 말합니다. 최소한도 제가 보기엔 그래요.
신심에 있어서는 티벳 불교를 따를 수가 없어요.
눈길, 얼음길, 자갈길, 산, 내 할 것없이 수많은 시간을 오체투지를 하면서 지나가는 것 봤지요? 거기가서 포탈라 궁 앞에서 몇 날 며칠을 오체투지를 하면서 그것이 자기들의 소원성취고 우리로 말하면 성불이고 그렇습니다 그런 신심 참 그거는 불가사의한 신심이예요. 어떻게 그런 신심을 표현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만 저는 대만불교, 이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 힘든 사람, 어려운 사람을 제일 잘 돌보는, 보살행을 제일 잘하는 불교가 대만불교입니다.
교회를 몇 채씩 지어주고 성당을 몇 채씩 지어주고 힌두교가 있는 나라에 불교티비를 개설해서 TV방영을 해주고.
그 자제공덕회 대만 불교의 이상이라고 하는 자제공덕회 증엄스님의 눈에는 부처니 중생이니 없습니다. 불교도니 기독교인이니 천구교도니 회교도니 하는 것이 없습니다.
오직 고생하고 어려움에 처해있는 중생이 있을 뿐입니다. 중생이 눈에 밟히는데 어떻게 거기서 무슨 불교도다 기독교인이다 찾고 있습니까. 아 대단하잖아요. 그게 진정한 불교같아요. 제가 보기에.
제가 지금까지 공부한 바에 의하면 그게 진정한 불교 같애요.
그런 사람들,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인과의 법칙을 제대로 가르쳐 주고, 그 다음에 여력이 있다면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주고.
의식주 문제와 인과의 법칙을 가르쳐주는 것, 이것이 제일 불교가 해야 할 급선무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
승원(乘願)과 행(行)에 의지하야 넓고 두루하다.
부처님은 그렇다. 교주니까, 교주에 대한 이야기니까.
또 혼허공위(混虛空爲) 체성(體性)이라
어디에 국한되어 있거나 한정되어 있으면 부처님이 아니죠. 허공과 혼융하여 체성을 삼았다. 진정한 부처님.
이것 보십시오. 역사적인 석가모니 가지고 이게 가능합니까? 역사적인 석가모니 가지고는 가능하지 않는 설명이예요.
이거는 심불급중생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이고, 심즉시불(心卽是佛)이고, 마음이 모든 것이다 라고 하는 안목에까지 이르러야 이게 가능하지 부파불교나 상좌부불교에서는 이런 이야기 할 수가 없어요.
*
허공을 혼융해서 체성을 삼는다. 부처님의 체성이 허공을 혼융해서, 온 우주 법계가 그대로 한마디로 말하자면 앞에서 설명한 우주 법계가 그대로 부처님의 몸이다.
그러면서 부처님의 몸 이꼬르(=) 중생심. 그리고 마음, 부처 이것은 동일한 것이다.
뭔가 모르긴 몰라도 시원하잖아요 일단은.
우리가 거기에 해당되는 사람이고 우리가 그것의 주인공이니까. 아는 사람이 다 그렇게 해왔으니까.
*
저는 왜 화엄경 화엄경 하는가 하면 우리나라에서 세계에 자랑할 만한 스님이 누구입니까?
원효, 의상입니다. 성인(聖人)이예요.
그분들이 수많은 경전과 유교서적 도교서적을 다 섭렵하고 나서 제일 마지막 낙점을 찍은 것이 화엄경입니다.
그래서 의상스님은 화엄경을 만천하에 펴기 위해서 화엄십찰 전국의 유명한 사찰 열 개를, 제자들을 보내고 자신이 직접가서 건립하기도 하면서 화엄경을 펼쳤고.
원효스님은 화엄경을 가지고 천성산 화엄벌, 화엄경을 가르쳤다고 해서 화엄벌입니다. 천명의 대중들을 가르쳤다고 해서.
그 천명 중에서 여덟 명이 좀 공부를 잘 못해서 팔공산에 와서 공부해서 마지막에 팔공산에서 성인이 되었다는 거예요. 그거 역사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팔공이야. 여덟 분의 성인이라고 해서.
그런데 거기서는 천성산은 전체 대중을 뭉뚱그려서 천성산, 천명의 성인이 태어났다. 이게 모두 화엄경 가지고 한 거예요.
그럼 우리는 원효스님, 의상스님에 대하면 천 분의 일, 만분의 일도 안돼. 머리도 안되고 그 심성, 그 지혜, 그 자비가 안돼.
그럼 누굴 따라가야 돼요?
눈을 감고 무조건 원효, 의상 따라가면 돼요.
그건 허물이 없어. 잘못될 까닭이 없어요.
*
그래서 저는 저의 판단도 말할 것 없지만, 원효스님 의상스님 판단을 존중합니다.
왜냐 화엄경이 좋다고 설명할 때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있어야 되니까, 그분들이 저의 백그라운드야.
그분들 팔면 되거든요.
저를 팔아서는 안되지만 그분들 원효 의상을 팔면 되는 거야.
그렇습니다.
그런 분들이 이런 이치에 다 공감 정도가 아니고 완전히 혼연 일체가 된 사람들입니다.
이래도 화엄경 공부 안할 거예요?
*
그리고 교주(敎主), 우리 부처님은, 우리 부처님은 할 때 역사적인 부처님, 내 마음의 부처, 마음과 부처와 중생 둘이 아닌 부처, 그 모든 것을 포함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거 분리 할 수가 없어요. 알고보면 도대체 분리가 되지도 않고 해서도 안되고 분리가 안됩니다.
역사적인 석가모니 부처님만 부처님 부처님 해가지고는 이거는 불교를 만분의 일도 설명 못하는 거예요.
그래 갖고 내가 요즘 큰소리치기를 화엄경도 모르면서 부처님 이야기 하면 안된다 말이야.
화엄경 모르고 어떻게 불교를 이야기 하느냐.
불교를 이야기 하려면 화엄경을 읽어라.
부처님을 이야기 하려면 화엄경을 읽어라.
금방 우리가 공부해 왔듯이 어떻게 역사적인 석가모니만 가지고 그렇게 부처라고 할 수가 있느냐 말이야. 그렇습니다.
●第4門(제4문) 說儀周普(설의주보)
湛智海之澄波(담지해지징파)가 虛含萬象(허함만상)이요
皦性空之滿月(교성공지만월)이 頓落百川(돈락백천)이로다
不起樹王(불기수왕)하사 羅七處於法界(나칠처어법계)하시며 無違後際(무위후제)하사 暢九會於初成(창구회어초성)이로다 盡宏廓之幽宗(진굉확지유종)하사 被難思之海會(피난사지해회)하시니 圓音落落(원음낙락)에 該十刹而頓周(해십찰이돈주)하시며 主伴重重(주반중중)하사 極十方而齊唱(극시방이제창)이로다
맑고 고요한 지혜 바다의 맑은 파도가 텅 비어서 삼라만상을 다 품었으며
밝고 밝은 법성 하늘의 둥근 달이 한꺼번에 백천 강물에 다 떨어졌도다.
보리수나무 밑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법계에다 일곱 곳을 펼치었으며
최후의 설법[後際]을 어기지 않고 처음 성도(成道)에서 아홉 번의 법회를 펼치었도다.
크고 넓고 유현한 종지(宗旨)를 다 설하여 한량없는 대중 바다에 베푸시니
원만한 음성이 멀리 퍼지니 시방세계에 빠짐없이 두루 하였도다.
주인과 벗이 중중하고 중중하여 모든 시방에서 다 같이 노래하도다.
여천무비 대강백 화엄경 왕복서 특강
(2019년 6월 24일-26일 대구 동화사 국제선센타)
●第4門(제4문) 說儀周普(설의주보)
설법하는 의식이 넓고 두루 하다
湛智海之澄波(담지해지징파)가 虛含萬象(허함만상)이요
맑고 고요한 지혜 바다의 맑은 파도가 텅 비어서 삼라만상을 다 품었으며
그 다음에 설의주보(說儀周普)라
설법하는 의식이 넓고 두루 하다
화엄경에 대한 서문이니까 이게 이야기를 해 나가다 보면 엉뚱하게 주제는 잊어버리고 딴 데로 흐르기가 쉬워요.
설법하는 의식이 뭐냐?
화엄경이 법계를 설명하고 있는데 법계의 됨됨이를 설법하고 있는데 그 의식이 넓고 두루하다. 간단치가 않다 이겁니다.
그래서 화엄경 책 쌓아놓은 것만 봐도 ‘아이구 저걸 어떻게 다 읽어’ 한 권도 안 읽으면서. 한 권이라도 읽어보고 말하면 좋을텐데. ‘저걸 언제 다 읽어’ 열 번 스무 번도 읽고도 시간이 남던데, 그 왜 읽어보지도 않고 ‘저걸 언제 다 읽어’
옛날 사람들도 그런 이야기 다 했어요.
높은 산 딱 마주보고는 아이고 산 높아서 그만 뒤돌아 가버리는 것, 거기에 1미터나 2미터나 올라가보면 그 나름대로 볼 거리가 있을 텐데. 아 1, 2미터도 올라가 보지 아니하고 이렇게 쳐다보기만 하고 되돌아섰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렇다 라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
담지해지징파(湛智海之澄波)가 허함만상(虛含萬象)이요
맑고 고요한 지혜의 바다, 맑은 파도가 텅 비어서 삼라만상을 다 품었으며.
깨달은 사람, 눈을 확 뜨고 석양이 뉘엿뉘엿 져가는 모습, 그림자 지는 모습, 좀더 어두워지는 모습 그런 것을 환하게 꿰뚫어 아는 지혜를 갖춘 사람, 마치 맑은 파도와 같이 그 맑은 파도에는 온갖 만상이 다 거기에 포함되잖아요.
*
그와 같이 화엄경의 설법에는 정말 이 세상 모든 존재의 원리가 설명되어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저는 늘 화엄경을 공부하고 화엄경을 강의하지만은 항상 유감인 것이 ‘아, 더 설명할 거리가 있을 텐데 내가 이거 제대로 설명했는가? 제대로 설명 못했으면 어쩌나?’ 그리고 그 짧은 안목 가지고도 ‘아이고 더 설명할 거리가 있는데, 이것만 설명하다니’ 하는 그런 마음 그게 늘 유감으로 남아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지혜가 툭 터져 버린 사람은 얼마나 이야기할 거리가 많겠습니까?
여기서 강설에서 또는 저의 설명에서 부족한 점은 전부 여러분의 몫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아셔야 돼요.
*
옆에 (p.35) 또 시가 하나 있네요.
‘현수품(賢首品)에 있는 해인삼매의 큰 작용을 밝히는 내용의 일부를 인용하였다’ 하고
“혹 동남동녀의 모습과
천신과 용과 아수라와
마후라가 등을 나타내시어
그들이 좋아하는 바를 따라서 다 보게 하시니라.
중생의 형상이 각각 다르고
행(行)과 업(業)과 음성 또한 한량없거늘
이와 같이 온갖 것을 모두 능히 나타내시니
이것은 해인삼매의 위신력이로다.”
여기 지혜, 지혜의 바다, 그 맑은 곳에 삼라만상이 전부 그 속에 다 나타난다. 드러났다 라고 하는 것을 여기서 ‘해인삼매의 위신력으로’ 이렇게 이제 또 다른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
그 안에 들어가면 예를 들어서 현수품에서 삼매에 대한 이야기가 많죠. 그것이 하도 글도 좋고 해서 우리 염불에도 많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현수품.
제가 현수품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화엄경 많고 많은 품 가운데 39품이잖아요. ‘그 가운데 무슨 품을 제일 좋아하느냐?’ 그 질문이 첫째 망발이긴 하지만 중생들이야 망발 그저 부지기수로 쏟아내는 것이니까 그렇다손치고 저는 이세간품을 제일 좋아합니다.
*
이세간품이 화엄불교 대승불교 소승불교와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여러 번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지혜의 행은 어떤 것인가. 또 마구니의 행은 어떤 것인가, 어떤 것이 부처의 행인가, 어떤 것이 부처의 행이 아닌 것인가.
이런 제목하에다가 소승불교를 사정없이 뭐라고 할까, 드러내서 적나라하게 하여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제 여기서 말하는 현수품, 또 현수품이 좋아요. 거기 ‘신위도원공덕모(信爲道元功德母)’라고 하는 여러분들이 잘 아는 그 글도 현수품에 있습니다.
제가 화엄경을 다 공부해보니까 우리 수준은
‘신위도원공덕모(信爲道元功德母)
장양일체제선법(長養一切諸善法)
그 수준에 그저 멈춰있구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거기 십신위 아닙니까.
믿음을 이야기 하는 부분이거든요. 믿음.
‘우리는 믿기만 잘해도 상당하겠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현수품을 또 좋아합니다.
皦性空之滿月(교성공지만월)이 頓落百川(돈락백천)이로다
밝고 밝은 법성 하늘의 둥근 달이 한꺼번에 백천 강물에 다 떨어졌도다.
또 설법하는 의식에 대해서
교성공지만월(皦性空之滿月)이 돈락백천(頓落百川)이로다
아 이제 시가 나오기 시작한다.
지해지징파(智海之澄波)가 허함만상(虛含萬象)도 전부 시업니다, 시어.
이 화엄경 왕복서는 한 반 이상이 시어로 되어 있어요.
‘지해지징파(智海之澄波)가 허함만상(虛含萬象)이요’
세상에 이런 근사한 시어가 어디 있습니까.
그 다음에 또 금방 읽은
교성공지만월(皦性空之滿月)이 돈락백천(頓落百川)이로다
교(皦)자 공(空)자 만월(滿月), 낙(落)자 백천(百川)
이런 건 전부 시에, 당시(唐詩)에 읽어보면 전부 이런 글자만 가지고 짜깁기 해 놨어요.
교성공지만월(皦性空之滿月)이 돈락백천(頓落百川)이로다
밝고 밝은 법성 하늘의 둥근 달이 한꺼번에 백천 강물에 다 떨어졌도다.
성공의 둥근달이 성품이 밝고 밝은 달이 백천의 강물에 다 떨어져 있다.
이게 뭔 말입니까?
우리들 아무리 탐진치 삼독과 팔만사천 번뇌로 뒤범벅이 되어 있는 그 인간 한 인간 한 인간, 뿐만 아니고 저 꾸물거리는 파리 모기 벌레 날짐승들 또 축생들 그 모든 것에 낱낱이 다 우리의 심성의 밝은 달 심월(心月)이 다 그 속에 들어가서 그것이 그 나름대로 삶을 영위하고 있더라.
*
선시에도 보면은 모든 중생들을
구류동거일법계(九類同居一法界)
구류, 금강경에 나오는 아홉 종류의 중생들
구류동거일법계
자라장리살진주(紫羅帳裏撒珍珠)라
아홉 종류의 중생들 꾸물거리는 벌레에서부터 축생에 이르기까지 인간으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탐진치 삼독과 온갖 번뇌로 뒤범벅되어 있는 그 인간들까지도 한 법계에 우리가 처음에 말씀드리는 그 법계 한 법계에 함께 어울려 살고 있으며
자라장리살진주라.
그 깨달은 사람의 안목으로 보니까 자라장리살진주야. 아주 아름다운 비단 위에 진주를 뿌려놓은 것과 같다. 그걸 '진주를 새겨놓은 것과 같다' 이런 표현도 하는데.
진주를 뿌려놓은 것 같다.
아주 아름다운 비단위에다가 영롱하게 빛나는 진주를 한 말 갖다가 쏟아갖고 뿌려놓은 모습과 같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저기 밝은 날, 아주 구름 한 점 없을 때 캄캄한 그믐에 밖에 나가서 시내서는 어렵지만 산중에서는 하늘 쳐다보면 은하수가 아주 초롱초롱 영롱하게 빛나는 그런 모습처럼 진주가 비단 위에 아름답게 흩어져 있는 것과 같다. 그랬습니다.
거기에 무슨 축생을 나누고 무슨 벌레를 나누고 잘난 사람 나누고 못난 사람 나누고 그럴 까닭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건 화엄경의 안목이 아니죠.
물론 '중생을 성숙시켜서 성인으로 만든다' 라고 하는 이야기도 많이 있습니다만 근본적으로 화엄경은 현재 존재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옳다, 그대로 백점짜리다. 이 뜻입니다. 화엄경은 그래요.
*
선사들도 그런 이치를 아는 사람이 구류동거일법계 아홉 종류의 별별 중생들이 같이 법계에, 하나의 법계에 머물고 살아가는 모습이 비단 위에 진주를 흩어 놓은 것 같이 너무 아름답고 값지고 사랑스럽고 좋다 말이야.
거기에 사기치고 뭘 하고 한다 하더라도 사기치는 놈은 사기치는 그대로 어여쁘다 말이야. 그게 깨달은 사람의 안목이라. 우리는 도저히 용납 못하지요.
우리는 도저히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용납이 안돼요. 그런데 깨달은 사람의 안목은 보는 게 따로 있어.
눈 뜬 사람은 보는 게 따로 있어요.
눈 감은 사람들이 뭘 안다고 그렇게 날이 밝다 어둡다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아 참, 화엄경의 가르침은, 진짜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렇습니다. 이래요. 그러면 그만 다 마음이 놓이는 거예요.
*
그래 내가, 나는 오도송이 여러 개야. 근래의 오도송이 또 하나 있어.
다 옳다
다 맞다
다 좋다
그걸 제대로 하려면
좋다 다 좋다
맞다 다 맞다
옳다 다 옳다
화엄경 공부하면서 오도송 여러 개 나와요 나는.
그 전에 초기에 지은 오도송은 어차피 나왔으니까, 여기 어디 적어놨나?
아름다워라, 세상이여!
환희로워라, 인생이여!
아, 이대로가 화장장엄세계요
이대로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인 것을!
나는 한문 몰라서 한문으로 못써 오도송.
전부 그렇게 쉽게 알아듣도록 써요.
아름다워라, 세상이여!
환희로워라, 인생이여!
세상은 아름답고 인생은 환희롭다 말이야 알고보니까.
아, 이대로가 화장장엄세계요, 이대로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다 말이야 사람사람이 전부가.
내 이런 표현은 아무것도 아니야.
부처님은 시성정각 하시니 뭐라고?
시성정각(始成正覺)하시니 기지(其地)가 견고(堅固)하야 금강소성(金剛所成)이더라
그 땅은 견고해서 전부 온통 세상이 다이아몬드로 되어 있더라.이렇게까지 공갈치고 있어.
나는 아름다워라 세상이여 이거 아무것도 아니야 표현이.
환희로워라 인생이여 이거 아무것도 아니라고.
*
온통 땅이 전부 다이아몬드로 되어 있더라.
땅만 다이아몬드로 되어 있는게 아니라 거기에 보리수는 어떻고 거기에 사자좌, 사자좌는 무슨 사자좌. 바위하나 놓고 풀 그저 겨우 뜯어 놓고 앉아 있었는데, 깨달은 순간에는 일주일이 지났기 때문에 벌써 말라 비틀어졌어 그 길상초라는 풀도. 그런데도 그 자리를 얼마나 아름답게 표현했어요.
전부 이 세상에 있는 보석이라는 보석은 다 동원해가지고 표현하고 있어요.
*
온통 다이아몬드로 되어 있더라. 저는 거기 가서 진짜 다이아몬드 있는가 하고 온통 다이아몬드로 되어 있다면 누가 주워가고도 많이 남아있을 거다 생각하고 사실은 찾아봤지. 찾아봐도 안찾아지더라고요 없어.
그렇게 찾아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야, 그 다이아몬드는.
그러니까 내가 아주 어리석은 중생이 되어 놓으니까 중생짓만 했지. 그렇게 찾는 것이 아니고, 앉은 자리에서 인도 가기 전에, 인도 가려고 하는 생각도 나기 전에 이미 그 앉은 자리에서 다이아몬드를 봐야 했어.
그런 이치입니다. 아 대단하잖아요.
아 이렇게 좋은 가르침을 왜 공부 안하고 그렇게 딴 일만 하는지.
*
돈락백천이라. 다 떨어져 있다 이거야. 백 개의 그 달이.
달이 온갖 물에 다 떨어져 있잖아요. 달 뜨면 물 있는 데마다 다 그 달이 있잖아요.
술잔에도 있고 그대의 눈동자에도 있고.
그 밑에(p.36)또 시가 한 수 있네요.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 고 시가 두 개가 있는데 다 읽겠습니다.
“비유컨대 밝은 달 허공에 떠서
모든 별 가려 버리며 찼다 기울다 하며
간 데마다 물속에 비친 그림자를
보는 이들 자기 앞에 있다 하듯이
여래의 밝은 달도 그와 같아서
삼승(三乘)은 가려 버리고 길고 짧음 보이며
천신들과 인간 마음 물에 나타나거든
모든 중생 자기 앞에 대하였다 하도다.”
不起樹王(불기수왕)하사 羅七處於法界(나칠처어법계)하시며
보리수나무 밑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법계에다 일곱 곳을 펼치었으며
불기수왕(不起樹王)하사 나칠처어법계(羅七處於法界)하시며
부처님께서 화엄경을 7처 9회 39품 설했다고 그러잖습니까. 장소부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불기수왕 수왕이 뭡니까. 보리수. 6년 고행 끝에 마지막으로 일주일간 앉아서 명상에 들어있던 바로 그 나무, 그것이 수왕입니다. 보리수라고도 하고.
그 수왕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그대로 깨닫기 전인지 깨닫기 후인지 깨달음도 시간성이 없습니다. 깨달음도 공간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화엄경은 상설(常說) 변설(徧說) 그래요.
항상 화엄경을 설하고 있고, 어느 곳이든지 설하지 않는 곳이 없는 것이 화엄경이다. 우리가 이렇게 ‘7처 9회 39품’을 가지고 화엄경이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형식적이고 지극히 아주 못난 방편 중에서도 가장 못난 방편이예요.
화엄경의 안목에서 보면 가장 못난 방편, 가장 저급한 방편이 7처 9회 39품의 화엄경입니다.
*
진짜 화엄경은 상설(常說) 변설(徧說).
우리가 동화사에 오기 전에 이미, 아니 한 생각 내기 전에 이미 그 자리에서 설하고 있고, 그때도 이미 설하고 있고 또 지금도 물론 설하고 있고, 앞으로도 영원히 설할 것이고, 어느 곳 저 수백억 광년,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위성에서도 별에서도 항상 그렇게 설하고 있는 것, 이것이 진짜 화엄경입니다.
상설(常說) 변설(徧說) 그것을 꼭 기억해 두세요. 화엄경은 진짜 화엄경은 뭐 보살이 설하고, 부처님이 설하고, 누가 설하고, 용수보살이 설하고 아니예요.
이미 일체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이미 설하고 있고 항상 설하고 있고 어디서나 설하고 있는 것 이게 진짜 화엄경이고 ‘7처 9회 39품’은 지극히 저급한 방편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런 말이 이해가 되어야 하는데 그래야 화엄경이 조금 이해가 됩니다.
*
그러니 수왕 보리수 나무 밑에서 깨달음을 성취했다고 하는데 그 나무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7처를 법계에다가 펼쳐보였다. 고 밑에(p.37) 공부삼아 보면 7처는
‘80권본 화엄경에서 1부(部) 39품(品)을 일곱 곳에서
설한 이야기다. 그 일곱 곳이란
제1 보리도량(菩提道場)
제2 보광명전(普光明殿)
제3 도리천(忉利天)
제4 야마천(夜摩天)
제5 도솔천(兜率天)
제6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타화천(他化天)이라고도 하고
제7 서다림(逝多林)의 중각강당(重閣講堂)이다.’
이렇게 해서 일곱 곳을 이야기 합니다.
제2 보광명전, 제3 보광명전 이런 말도 쓰지요.
넘겨서(p.38) 같이 읽겠습니다.
‘또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법혜보살의 게송에
“불자들이여, 그대들은 마땅히 볼지니라.
여래의 자재하신 힘으로
일체의 염부제에
부처님이 계신다 말하네.
우리들이 지금 보니
부처님께서 수미산 정상에 계시는데
시방에서도 다 또한 그러하니
여래의 자재하신 힘이셔라.” 라고 하였다.’
보십시오, 일체 염부제에 부처님이 계신다고 사람들은 말해. 그런데 우리들이 지금 보니 부처님께서 수미산 정상에 계시는데 그 수미산 정상 한 곳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고 시방에서도 다 또한 그러하니 전부 시방세계 수미산에서도 전부 부처님이 다 계셔. 여래의 자재하신 힘이셔라.
아 이런 설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가 이런 걸 밤에 주무시지 말고 이런 문제 가지고 토론 좀 하세요.
이것이 무슨 소릴까?
불보살들이 거짓말 할 리는 없고, 시로써 쓰자고 해서 시로써 쓴 것도 아니고, 이건 진실인데 진리의 가르침인데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그래가지고 그냥 티벳스님들 보다도 더 열정적으로 손바닥을 치면서 그냥 쥐어박으면서 토론을 해야 돼요.
거기다(p.39) 이런 말 해 놨네.
‘이러한 경전의 뜻은 무엇인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신 이후로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시든 항상 깨달음의 경지를 떠나지 않고 행주좌와(行住坐臥)하시고, 어묵동정(語默動靜) 하신다는 뜻이다.’
지금보니 순 엉터리 해석이다.
無違後際(무위후제)하사 暢九會於初成(창구회어초성)이로다
최후의 설법[後際]을 어기지 않고 처음 성도(成道)에서 아홉 번의 법회를 펼치었도다.
무위후제(無違後際)하사 창구회어초성(暢九會於初成)이로다. 후제를 어기지 않으시고, 최후의 설법을 어기지 않고, 후제란 그런 뜻입니다.
후제를 어기지 않고 처음 성도해서 아홉 번의 법회를 펼쳤다. 창구회어초성이라. 초성은 처음 성도하신 것을, 7처 9회 할 때 아홉 번의 법회를 펼쳤다. 그러니까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 공간이 자유자재해요.
뒤에 제6문에 들어가면 ‘이 세상 모든 존재가 이미 그렇게 되어 있다’ 라고 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도 전부 6문에는 시어를 동원해서 그렇게 이야기 하지요.
후제, 맨 마지막 설법한 것을 어기지 않은 채 그대로 그것은 그대로 두고 처음 정각해서부터 1회 2회 3회 4회를 쭈욱 그거 뭔 소리요?
어린아이가 어른이 됐다가, 어른이 어린아이가 됐다가 어린아이와 어른이 자유자재해. 어디에도 걸리지 아니하고 어른이 어른 노릇하는 데 걸리지 않고 어린아이가 어린아이 노릇하는 데 걸리지 않고, 그러면서 어린아이가 어른이고, 어른이 어린아이고 그런 이치는 우리가 조금 한 번 마음을 열고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됨직도 해요 사실은.
*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린아이가 어른이 됐다가 어른이 어린아이가 됐다가. 그러면서 어른은 어른대로 있고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대로 있다. 거기에 아무런 제약도 없고 걸림도 없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화엄경이 이러한 이치 때문에 어렵다고 하는데 또 이러한 이치를 우리가 우리 마음이라고 하는 것, 진심, 참나, 참마음 이 물건은요 보통 물건이 아닙니다.
*
나는 이 지구가 언제부터 생겼고 생명이 언제부터 태동이 됐고 그런 것에 대해서 상당히 관심이 있어서 유튜브에서도 그걸 제일 많이 봅니다.
몇 억 광년이니 태양이 어떻게 생겼고 요즘 우주 과학자들이 혈안이 되어 있는 문제, 지구와 똑같은 조건을 가진 별이 얼마든지 있다 확정적으로 이야기해요. 얼마든지 있다.
무수히 있다. 망원경을 가지고 저기 은하수를 보니까 은하수 숫자만치 은하수가 있는 거예요. 우리가 은하수라고 하는 그거.
우리는 은하수 은하에 들어 있고, 안드로메다은하니 무슨 은하니 은하에도 이름을 붙여서 많이 있어요.
그런데 지금 수억 별들이 태양보다도 어느 정도 크냐? 열 배, 백 배 큰 태양 그런 항성들이 있어요.
그런 것들이 수억 개가 있는데, 수억 개가 있는 그런 은하계가 또 수억 개가 있는 거예요.
수억 곱하기 수억 해도 이게 숫자가 안 나와. 안나올 정도로 그런 것이 요즘은 전부 알려져 있기 때문에 아주 자세하게 알려져 있어요.
그래서 생명이 지구처럼 살기 좋은 조건을 가진 별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거예요. 너무 확정적으로 이야기 하는 거야. 이 사람들은 꼭 가본 것같이 이야기를 해요.
*
우리 지구가 45억년 또는 50억년 되었다고 하는데 처음에 생명체가 생겼다가 혜성이 날아와서 큰 혜성, 저 백두산만한 혜성이 우리 지구에 딱 떨어지면요 지구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전멸입니다.
그랬다가 또 많은 세월이 지나서 또 생명체가 생기고 생기고 많은 과정을 거치면서, 그래서 우리의 생명에는 우주의 역사, 지구의 45억년 역사가 알알이 박혀 있다.
여러분들의 생명체 속에도 이 지구의 45억년의 역사가 아주 영롱하게 박혀 있다 말이야.
피 한 방울만 잘 분석해도 45억년의 지구의 역사를 다 알아낸다. 아 이러고 있어요 지금. 과학이 그정도로 나가 있어.
*
그런데 이 마음이라고 하는 이 물건이 언제쯤 장착이 됐을까? 참 신기해요.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어디서 별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수소, 탄소 하는 것, 90몇 종의 원소가 있는데 그 원소들은 어떻게 해서 생겼느냐? 별과 별이 부딪쳐서 폭발을 할 때 그 때 생겼다는 거야. 그것이 수없이 반복하면서 생겼다는 겁니다.
90몇 종의 원소들이 별과 별이 부딪쳐서 말하자면 폭발을 할 때 생겼다. 그래 내가 생각하기를 ‘남자와 여자가 부딪쳐서 폭발을 할 때 새로운 생명이 생기는 이치하고 똑같구나’ 너무 같은 거예요 이게. 모든 것은 같은 원리 속에 소속이 되어 있어. 그래서 우리 마음도, 마음이라고 하는 기가 막힌 그 물건도 결국에는 별과 별이 부딪쳤을 때 폭발을 하면서 거기서 원소가 생기듯이 우리 마음이라고 하는 물건도 생긴 것이 아닌가. 아직 과학자들은 그런 소리는 할 줄 몰라, 내가 하지. 나는 그렇게 알고 있지. 아니면 그 마음이 어디서 언제 생겼겠어요?야 신기하잖아요.
40페이지에는 7처 9회 할 때의 9회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이건 너무 익숙한 이야기고 익숙하게 알아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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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4門(제4문) 說儀周普(설의주보)
湛智海之澄波(담지해지징파)가 虛含萬象(허함만상)이요
皦性空之滿月(교성공지만월)이 頓落百川(돈락백천)이로다
不起樹王(불기수왕)하사 羅七處於法界(나칠처어법계)하시며 無違後際(무위후제)하사 暢九會於初成(창구회어초성)이로다 盡宏廓之幽宗(진굉확지유종)하사 被難思之海會(피난사지해회)하시니 圓音落落(원음낙락)에 該十刹而頓周(해십찰이돈주)하시며 主伴重重(주반중중)하사 極十方而齊唱(극시방이제창)이로다
맑고 고요한 지혜 바다의 맑은 파도가 텅 비어서 삼라만상을 다 품었으며
밝고 밝은 법성 하늘의 둥근 달이 한꺼번에 백천 강물에 다 떨어졌도다.
보리수나무 밑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법계에다 일곱 곳을 펼치었으며
최후의 설법[後際]을 어기지 않고 처음 성도(成道)에서 아홉 번의 법회를 펼치었도다.
크고 넓고 유현한 종지(宗旨)를 다 설하여 한량없는 대중 바다에 베푸시니
원만한 음성이 멀리 퍼지니 시방세계에 빠짐없이 두루 하였도다.
주인과 벗이 중중하고 중중하여 모든 시방에서 다 같이 노래하도다.
여천무비 대강백 화엄경 왕복서 특강
(2019년 6월 24일-26일 대구 동화사 국제선센타)
●第4門(제4문) 說儀周普(설의주보)
설법하는 의식이 넓고 두루 하다
湛智海之澄波(담지해지징파)가 虛含萬象(허함만상)이요
맑고 고요한 지혜 바다의 맑은 파도가 텅 비어서 삼라만상을 다 품었으며
그 다음에 설의주보(說儀周普)라
설법하는 의식이 넓고 두루 하다
화엄경에 대한 서문이니까 이게 이야기를 해 나가다 보면 엉뚱하게 주제는 잊어버리고 딴 데로 흐르기가 쉬워요.
설법하는 의식이 뭐냐?
화엄경이 법계를 설명하고 있는데 법계의 됨됨이를 설법하고 있는데 그 의식이 넓고 두루하다. 간단치가 않다 이겁니다.
그래서 화엄경 책 쌓아놓은 것만 봐도 ‘아이구 저걸 어떻게 다 읽어’ 한 권도 안 읽으면서. 한 권이라도 읽어보고 말하면 좋을텐데. ‘저걸 언제 다 읽어’ 열 번 스무 번도 읽고도 시간이 남던데, 그 왜 읽어보지도 않고 ‘저걸 언제 다 읽어’
옛날 사람들도 그런 이야기 다 했어요.
높은 산 딱 마주보고는 아이고 산 높아서 그만 뒤돌아 가버리는 것, 거기에 1미터나 2미터나 올라가보면 그 나름대로 볼 거리가 있을 텐데. 아 1, 2미터도 올라가 보지 아니하고 이렇게 쳐다보기만 하고 되돌아섰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렇다 라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
담지해지징파(湛智海之澄波)가 허함만상(虛含萬象)이요
맑고 고요한 지혜의 바다, 맑은 파도가 텅 비어서 삼라만상을 다 품었으며.
깨달은 사람, 눈을 확 뜨고 석양이 뉘엿뉘엿 져가는 모습, 그림자 지는 모습, 좀더 어두워지는 모습 그런 것을 환하게 꿰뚫어 아는 지혜를 갖춘 사람, 마치 맑은 파도와 같이 그 맑은 파도에는 온갖 만상이 다 거기에 포함되잖아요.
*
그와 같이 화엄경의 설법에는 정말 이 세상 모든 존재의 원리가 설명되어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저는 늘 화엄경을 공부하고 화엄경을 강의하지만은 항상 유감인 것이 ‘아, 더 설명할 거리가 있을 텐데 내가 이거 제대로 설명했는가? 제대로 설명 못했으면 어쩌나?’ 그리고 그 짧은 안목 가지고도 ‘아이고 더 설명할 거리가 있는데, 이것만 설명하다니’ 하는 그런 마음 그게 늘 유감으로 남아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지혜가 툭 터져 버린 사람은 얼마나 이야기할 거리가 많겠습니까?
여기서 강설에서 또는 저의 설명에서 부족한 점은 전부 여러분의 몫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아셔야 돼요.
*
옆에 (p.35) 또 시가 하나 있네요.
‘현수품(賢首品)에 있는 해인삼매의 큰 작용을 밝히는 내용의 일부를 인용하였다’ 하고
“혹 동남동녀의 모습과
천신과 용과 아수라와
마후라가 등을 나타내시어
그들이 좋아하는 바를 따라서 다 보게 하시니라.
중생의 형상이 각각 다르고
행(行)과 업(業)과 음성 또한 한량없거늘
이와 같이 온갖 것을 모두 능히 나타내시니
이것은 해인삼매의 위신력이로다.”
여기 지혜, 지혜의 바다, 그 맑은 곳에 삼라만상이 전부 그 속에 다 나타난다. 드러났다 라고 하는 것을 여기서 ‘해인삼매의 위신력으로’ 이렇게 이제 또 다른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
그 안에 들어가면 예를 들어서 현수품에서 삼매에 대한 이야기가 많죠. 그것이 하도 글도 좋고 해서 우리 염불에도 많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현수품.
제가 현수품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화엄경 많고 많은 품 가운데 39품이잖아요. ‘그 가운데 무슨 품을 제일 좋아하느냐?’ 그 질문이 첫째 망발이긴 하지만 중생들이야 망발 그저 부지기수로 쏟아내는 것이니까 그렇다손치고 저는 이세간품을 제일 좋아합니다.
*
이세간품이 화엄불교 대승불교 소승불교와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여러 번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지혜의 행은 어떤 것인가. 또 마구니의 행은 어떤 것인가, 어떤 것이 부처의 행인가, 어떤 것이 부처의 행이 아닌 것인가.
이런 제목하에다가 소승불교를 사정없이 뭐라고 할까, 드러내서 적나라하게 하여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제 여기서 말하는 현수품, 또 현수품이 좋아요. 거기 ‘신위도원공덕모(信爲道元功德母)’라고 하는 여러분들이 잘 아는 그 글도 현수품에 있습니다.
제가 화엄경을 다 공부해보니까 우리 수준은
‘신위도원공덕모(信爲道元功德母)
장양일체제선법(長養一切諸善法)
그 수준에 그저 멈춰있구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거기 십신위 아닙니까.
믿음을 이야기 하는 부분이거든요. 믿음.
‘우리는 믿기만 잘해도 상당하겠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현수품을 또 좋아합니다.
皦性空之滿月(교성공지만월)이 頓落百川(돈락백천)이로다
밝고 밝은 법성 하늘의 둥근 달이 한꺼번에 백천 강물에 다 떨어졌도다.
또 설법하는 의식에 대해서
교성공지만월(皦性空之滿月)이 돈락백천(頓落百川)이로다
아 이제 시가 나오기 시작한다.
지해지징파(智海之澄波)가 허함만상(虛含萬象)도 전부 시업니다, 시어.
이 화엄경 왕복서는 한 반 이상이 시어로 되어 있어요.
‘지해지징파(智海之澄波)가 허함만상(虛含萬象)이요’
세상에 이런 근사한 시어가 어디 있습니까.
그 다음에 또 금방 읽은
교성공지만월(皦性空之滿月)이 돈락백천(頓落百川)이로다
교(皦)자 공(空)자 만월(滿月), 낙(落)자 백천(百川)
이런 건 전부 시에, 당시(唐詩)에 읽어보면 전부 이런 글자만 가지고 짜깁기 해 놨어요.
교성공지만월(皦性空之滿月)이 돈락백천(頓落百川)이로다
밝고 밝은 법성 하늘의 둥근 달이 한꺼번에 백천 강물에 다 떨어졌도다.
성공의 둥근달이 성품이 밝고 밝은 달이 백천의 강물에 다 떨어져 있다.
이게 뭔 말입니까?
우리들 아무리 탐진치 삼독과 팔만사천 번뇌로 뒤범벅이 되어 있는 그 인간 한 인간 한 인간, 뿐만 아니고 저 꾸물거리는 파리 모기 벌레 날짐승들 또 축생들 그 모든 것에 낱낱이 다 우리의 심성의 밝은 달 심월(心月)이 다 그 속에 들어가서 그것이 그 나름대로 삶을 영위하고 있더라.
*
선시에도 보면은 모든 중생들을
구류동거일법계(九類同居一法界)
구류, 금강경에 나오는 아홉 종류의 중생들
구류동거일법계
자라장리살진주(紫羅帳裏撒珍珠)라
아홉 종류의 중생들 꾸물거리는 벌레에서부터 축생에 이르기까지 인간으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탐진치 삼독과 온갖 번뇌로 뒤범벅되어 있는 그 인간들까지도 한 법계에 우리가 처음에 말씀드리는 그 법계 한 법계에 함께 어울려 살고 있으며
자라장리살진주라.
그 깨달은 사람의 안목으로 보니까 자라장리살진주야. 아주 아름다운 비단 위에 진주를 뿌려놓은 것과 같다. 그걸 '진주를 새겨놓은 것과 같다' 이런 표현도 하는데.
진주를 뿌려놓은 것 같다.
아주 아름다운 비단위에다가 영롱하게 빛나는 진주를 한 말 갖다가 쏟아갖고 뿌려놓은 모습과 같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저기 밝은 날, 아주 구름 한 점 없을 때 캄캄한 그믐에 밖에 나가서 시내서는 어렵지만 산중에서는 하늘 쳐다보면 은하수가 아주 초롱초롱 영롱하게 빛나는 그런 모습처럼 진주가 비단 위에 아름답게 흩어져 있는 것과 같다. 그랬습니다.
거기에 무슨 축생을 나누고 무슨 벌레를 나누고 잘난 사람 나누고 못난 사람 나누고 그럴 까닭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건 화엄경의 안목이 아니죠.
물론 '중생을 성숙시켜서 성인으로 만든다' 라고 하는 이야기도 많이 있습니다만 근본적으로 화엄경은 현재 존재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옳다, 그대로 백점짜리다. 이 뜻입니다. 화엄경은 그래요.
*
선사들도 그런 이치를 아는 사람이 구류동거일법계 아홉 종류의 별별 중생들이 같이 법계에, 하나의 법계에 머물고 살아가는 모습이 비단 위에 진주를 흩어 놓은 것 같이 너무 아름답고 값지고 사랑스럽고 좋다 말이야.
거기에 사기치고 뭘 하고 한다 하더라도 사기치는 놈은 사기치는 그대로 어여쁘다 말이야. 그게 깨달은 사람의 안목이라. 우리는 도저히 용납 못하지요.
우리는 도저히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용납이 안돼요. 그런데 깨달은 사람의 안목은 보는 게 따로 있어.
눈 뜬 사람은 보는 게 따로 있어요.
눈 감은 사람들이 뭘 안다고 그렇게 날이 밝다 어둡다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아 참, 화엄경의 가르침은, 진짜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렇습니다. 이래요. 그러면 그만 다 마음이 놓이는 거예요.
*
그래 내가, 나는 오도송이 여러 개야. 근래의 오도송이 또 하나 있어.
다 옳다
다 맞다
다 좋다
그걸 제대로 하려면
좋다 다 좋다
맞다 다 맞다
옳다 다 옳다
화엄경 공부하면서 오도송 여러 개 나와요 나는.
그 전에 초기에 지은 오도송은 어차피 나왔으니까, 여기 어디 적어놨나?
아름다워라, 세상이여!
환희로워라, 인생이여!
아, 이대로가 화장장엄세계요
이대로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인 것을!
나는 한문 몰라서 한문으로 못써 오도송.
전부 그렇게 쉽게 알아듣도록 써요.
아름다워라, 세상이여!
환희로워라, 인생이여!
세상은 아름답고 인생은 환희롭다 말이야 알고보니까.
아, 이대로가 화장장엄세계요, 이대로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다 말이야 사람사람이 전부가.
내 이런 표현은 아무것도 아니야.
부처님은 시성정각 하시니 뭐라고?
시성정각(始成正覺)하시니 기지(其地)가 견고(堅固)하야 금강소성(金剛所成)이더라
그 땅은 견고해서 전부 온통 세상이 다이아몬드로 되어 있더라.이렇게까지 공갈치고 있어.
나는 아름다워라 세상이여 이거 아무것도 아니야 표현이.
환희로워라 인생이여 이거 아무것도 아니라고.
*
온통 땅이 전부 다이아몬드로 되어 있더라.
땅만 다이아몬드로 되어 있는게 아니라 거기에 보리수는 어떻고 거기에 사자좌, 사자좌는 무슨 사자좌. 바위하나 놓고 풀 그저 겨우 뜯어 놓고 앉아 있었는데, 깨달은 순간에는 일주일이 지났기 때문에 벌써 말라 비틀어졌어 그 길상초라는 풀도. 그런데도 그 자리를 얼마나 아름답게 표현했어요.
전부 이 세상에 있는 보석이라는 보석은 다 동원해가지고 표현하고 있어요.
*
온통 다이아몬드로 되어 있더라. 저는 거기 가서 진짜 다이아몬드 있는가 하고 온통 다이아몬드로 되어 있다면 누가 주워가고도 많이 남아있을 거다 생각하고 사실은 찾아봤지. 찾아봐도 안찾아지더라고요 없어.
그렇게 찾아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야, 그 다이아몬드는.
그러니까 내가 아주 어리석은 중생이 되어 놓으니까 중생짓만 했지. 그렇게 찾는 것이 아니고, 앉은 자리에서 인도 가기 전에, 인도 가려고 하는 생각도 나기 전에 이미 그 앉은 자리에서 다이아몬드를 봐야 했어.
그런 이치입니다. 아 대단하잖아요.
아 이렇게 좋은 가르침을 왜 공부 안하고 그렇게 딴 일만 하는지.
*
돈락백천이라. 다 떨어져 있다 이거야. 백 개의 그 달이.
달이 온갖 물에 다 떨어져 있잖아요. 달 뜨면 물 있는 데마다 다 그 달이 있잖아요.
술잔에도 있고 그대의 눈동자에도 있고.
그 밑에(p.36)또 시가 한 수 있네요.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 고 시가 두 개가 있는데 다 읽겠습니다.
“비유컨대 밝은 달 허공에 떠서
모든 별 가려 버리며 찼다 기울다 하며
간 데마다 물속에 비친 그림자를
보는 이들 자기 앞에 있다 하듯이
여래의 밝은 달도 그와 같아서
삼승(三乘)은 가려 버리고 길고 짧음 보이며
천신들과 인간 마음 물에 나타나거든
모든 중생 자기 앞에 대하였다 하도다.”
不起樹王(불기수왕)하사 羅七處於法界(나칠처어법계)하시며
보리수나무 밑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법계에다 일곱 곳을 펼치었으며
불기수왕(不起樹王)하사 나칠처어법계(羅七處於法界)하시며
부처님께서 화엄경을 7처 9회 39품 설했다고 그러잖습니까. 장소부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불기수왕 수왕이 뭡니까. 보리수. 6년 고행 끝에 마지막으로 일주일간 앉아서 명상에 들어있던 바로 그 나무, 그것이 수왕입니다. 보리수라고도 하고.
그 수왕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그대로 깨닫기 전인지 깨닫기 후인지 깨달음도 시간성이 없습니다. 깨달음도 공간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화엄경은 상설(常說) 변설(徧說) 그래요.
항상 화엄경을 설하고 있고, 어느 곳이든지 설하지 않는 곳이 없는 것이 화엄경이다. 우리가 이렇게 ‘7처 9회 39품’을 가지고 화엄경이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형식적이고 지극히 아주 못난 방편 중에서도 가장 못난 방편이예요.
화엄경의 안목에서 보면 가장 못난 방편, 가장 저급한 방편이 7처 9회 39품의 화엄경입니다.
*
진짜 화엄경은 상설(常說) 변설(徧說).
우리가 동화사에 오기 전에 이미, 아니 한 생각 내기 전에 이미 그 자리에서 설하고 있고, 그때도 이미 설하고 있고 또 지금도 물론 설하고 있고, 앞으로도 영원히 설할 것이고, 어느 곳 저 수백억 광년,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위성에서도 별에서도 항상 그렇게 설하고 있는 것, 이것이 진짜 화엄경입니다.
상설(常說) 변설(徧說) 그것을 꼭 기억해 두세요. 화엄경은 진짜 화엄경은 뭐 보살이 설하고, 부처님이 설하고, 누가 설하고, 용수보살이 설하고 아니예요.
이미 일체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이미 설하고 있고 항상 설하고 있고 어디서나 설하고 있는 것 이게 진짜 화엄경이고 ‘7처 9회 39품’은 지극히 저급한 방편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런 말이 이해가 되어야 하는데 그래야 화엄경이 조금 이해가 됩니다.
*
그러니 수왕 보리수 나무 밑에서 깨달음을 성취했다고 하는데 그 나무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7처를 법계에다가 펼쳐보였다. 고 밑에(p.37) 공부삼아 보면 7처는
‘80권본 화엄경에서 1부(部) 39품(品)을 일곱 곳에서
설한 이야기다. 그 일곱 곳이란
제1 보리도량(菩提道場)
제2 보광명전(普光明殿)
제3 도리천(忉利天)
제4 야마천(夜摩天)
제5 도솔천(兜率天)
제6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타화천(他化天)이라고도 하고
제7 서다림(逝多林)의 중각강당(重閣講堂)이다.’
이렇게 해서 일곱 곳을 이야기 합니다.
제2 보광명전, 제3 보광명전 이런 말도 쓰지요.
넘겨서(p.38) 같이 읽겠습니다.
‘또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법혜보살의 게송에
“불자들이여, 그대들은 마땅히 볼지니라.
여래의 자재하신 힘으로
일체의 염부제에
부처님이 계신다 말하네.
우리들이 지금 보니
부처님께서 수미산 정상에 계시는데
시방에서도 다 또한 그러하니
여래의 자재하신 힘이셔라.” 라고 하였다.’
보십시오, 일체 염부제에 부처님이 계신다고 사람들은 말해. 그런데 우리들이 지금 보니 부처님께서 수미산 정상에 계시는데 그 수미산 정상 한 곳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고 시방에서도 다 또한 그러하니 전부 시방세계 수미산에서도 전부 부처님이 다 계셔. 여래의 자재하신 힘이셔라.
아 이런 설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가 이런 걸 밤에 주무시지 말고 이런 문제 가지고 토론 좀 하세요.
이것이 무슨 소릴까?
불보살들이 거짓말 할 리는 없고, 시로써 쓰자고 해서 시로써 쓴 것도 아니고, 이건 진실인데 진리의 가르침인데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그래가지고 그냥 티벳스님들 보다도 더 열정적으로 손바닥을 치면서 그냥 쥐어박으면서 토론을 해야 돼요.
거기다(p.39) 이런 말 해 놨네.
‘이러한 경전의 뜻은 무엇인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신 이후로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시든 항상 깨달음의 경지를 떠나지 않고 행주좌와(行住坐臥)하시고, 어묵동정(語默動靜) 하신다는 뜻이다.’
지금보니 순 엉터리 해석이다.
無違後際(무위후제)하사 暢九會於初成(창구회어초성)이로다
최후의 설법[後際]을 어기지 않고 처음 성도(成道)에서 아홉 번의 법회를 펼치었도다.
무위후제(無違後際)하사 창구회어초성(暢九會於初成)이로다. 후제를 어기지 않으시고, 최후의 설법을 어기지 않고, 후제란 그런 뜻입니다.
후제를 어기지 않고 처음 성도해서 아홉 번의 법회를 펼쳤다. 창구회어초성이라. 초성은 처음 성도하신 것을, 7처 9회 할 때 아홉 번의 법회를 펼쳤다. 그러니까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 공간이 자유자재해요.
뒤에 제6문에 들어가면 ‘이 세상 모든 존재가 이미 그렇게 되어 있다’ 라고 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도 전부 6문에는 시어를 동원해서 그렇게 이야기 하지요.
후제, 맨 마지막 설법한 것을 어기지 않은 채 그대로 그것은 그대로 두고 처음 정각해서부터 1회 2회 3회 4회를 쭈욱 그거 뭔 소리요?
어린아이가 어른이 됐다가, 어른이 어린아이가 됐다가 어린아이와 어른이 자유자재해. 어디에도 걸리지 아니하고 어른이 어른 노릇하는 데 걸리지 않고 어린아이가 어린아이 노릇하는 데 걸리지 않고, 그러면서 어린아이가 어른이고, 어른이 어린아이고 그런 이치는 우리가 조금 한 번 마음을 열고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됨직도 해요 사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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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린아이가 어른이 됐다가 어른이 어린아이가 됐다가. 그러면서 어른은 어른대로 있고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대로 있다. 거기에 아무런 제약도 없고 걸림도 없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화엄경이 이러한 이치 때문에 어렵다고 하는데 또 이러한 이치를 우리가 우리 마음이라고 하는 것, 진심, 참나, 참마음 이 물건은요 보통 물건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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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지구가 언제부터 생겼고 생명이 언제부터 태동이 됐고 그런 것에 대해서 상당히 관심이 있어서 유튜브에서도 그걸 제일 많이 봅니다.
몇 억 광년이니 태양이 어떻게 생겼고 요즘 우주 과학자들이 혈안이 되어 있는 문제, 지구와 똑같은 조건을 가진 별이 얼마든지 있다 확정적으로 이야기해요. 얼마든지 있다.
무수히 있다. 망원경을 가지고 저기 은하수를 보니까 은하수 숫자만치 은하수가 있는 거예요. 우리가 은하수라고 하는 그거.
우리는 은하수 은하에 들어 있고, 안드로메다은하니 무슨 은하니 은하에도 이름을 붙여서 많이 있어요.
그런데 지금 수억 별들이 태양보다도 어느 정도 크냐? 열 배, 백 배 큰 태양 그런 항성들이 있어요.
그런 것들이 수억 개가 있는데, 수억 개가 있는 그런 은하계가 또 수억 개가 있는 거예요.
수억 곱하기 수억 해도 이게 숫자가 안 나와. 안나올 정도로 그런 것이 요즘은 전부 알려져 있기 때문에 아주 자세하게 알려져 있어요.
그래서 생명이 지구처럼 살기 좋은 조건을 가진 별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거예요. 너무 확정적으로 이야기 하는 거야. 이 사람들은 꼭 가본 것같이 이야기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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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지구가 45억년 또는 50억년 되었다고 하는데 처음에 생명체가 생겼다가 혜성이 날아와서 큰 혜성, 저 백두산만한 혜성이 우리 지구에 딱 떨어지면요 지구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전멸입니다.
그랬다가 또 많은 세월이 지나서 또 생명체가 생기고 생기고 많은 과정을 거치면서, 그래서 우리의 생명에는 우주의 역사, 지구의 45억년 역사가 알알이 박혀 있다.
여러분들의 생명체 속에도 이 지구의 45억년의 역사가 아주 영롱하게 박혀 있다 말이야.
피 한 방울만 잘 분석해도 45억년의 지구의 역사를 다 알아낸다. 아 이러고 있어요 지금. 과학이 그정도로 나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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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마음이라고 하는 이 물건이 언제쯤 장착이 됐을까? 참 신기해요.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어디서 별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수소, 탄소 하는 것, 90몇 종의 원소가 있는데 그 원소들은 어떻게 해서 생겼느냐? 별과 별이 부딪쳐서 폭발을 할 때 그 때 생겼다는 거야. 그것이 수없이 반복하면서 생겼다는 겁니다.
90몇 종의 원소들이 별과 별이 부딪쳐서 말하자면 폭발을 할 때 생겼다. 그래 내가 생각하기를 ‘남자와 여자가 부딪쳐서 폭발을 할 때 새로운 생명이 생기는 이치하고 똑같구나’ 너무 같은 거예요 이게. 모든 것은 같은 원리 속에 소속이 되어 있어. 그래서 우리 마음도, 마음이라고 하는 기가 막힌 그 물건도 결국에는 별과 별이 부딪쳤을 때 폭발을 하면서 거기서 원소가 생기듯이 우리 마음이라고 하는 물건도 생긴 것이 아닌가. 아직 과학자들은 그런 소리는 할 줄 몰라, 내가 하지. 나는 그렇게 알고 있지. 아니면 그 마음이 어디서 언제 생겼겠어요?야 신기하잖아요.
40페이지에는 7처 9회 할 때의 9회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이건 너무 익숙한 이야기고 익숙하게 알아야 됩니다.
盡宏廓之幽宗(진굉확지유종)하사 被難思之海會(피난사지해회)하시니
크고 넓고 유현한 종지(宗旨)를 다 설하여 한량없는 대중 바다에 베푸시니
진굉곽지유종(盡宏廓之幽宗)하사 피난사지해회(被難思之海會)하시니, 크고 넓고 유현한 종지(宗旨)를 다 설하여 한량없는 대중 바다에 베푸시니.
이게 큰 제목이 뭐지요? 설의주보(說儀周普)라. 화엄경은 설법하는 의식이 너무 넓다 말이야. 그래서 크고 넓고 유현한 종지를 다 설하여 한량없는 대중바다에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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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에 나오는 소위 이름을 어떻게 또 그렇게 많이 지었는지 아 많고 많은 이름들.
불명 짓다가 딸리면 화엄경 들춰보면 그 속에 다 있어. 전부 화엄경에 있는 이름이야.
그와 같이 정말 깊은 이치와 그리고 말할 수 없이 많고 많은 난사지해회(難思之海會) 그런 대중들을 다, 화엄경 자체에서만 그건 아주 시시한 화엄경이지만 거기서만이라도 어마어마한 이름의 대중들이 그렇게 등장을 합니다.
그러나 상설(常說) 변설(徧說)이 진짜 화엄경이라고 한다면 거기에서 이름을, 대중을 일컬으려면 얼마나 많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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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한 발 한 발 떼면서 만나는 모든 사물들, 두두물물이 전부 이름이라. 화엄경에 등장하는 이름이라.
그래 화엄성중 화엄성중 저는 화엄성중을 잘 염하고 있는데 화엄성중은 법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한 마디로 일컬을 때 화엄성중이야.
관세음보살도 그 속에 포함되고 지장보살도 포함되고 석가모니도 포함되고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화엄성중속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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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성중(華嚴聖衆), 모든 존재의 이름을 한마디로 일컬을 때 화엄성중(華嚴聖衆)이다.
圓音落落(원음낙락)에 該十刹而頓周(해십찰이돈주)하시며
원만한 음성이 멀리 퍼지니 시방세계에 빠짐없이 두루 하였도다.
원음낙락(圓音落落)하사 해십찰이돈주(該十刹而頓周)하시며, 원음낙락 아주 원만한 말씀이 낙락하다. 원만한 음성이 멀리 퍼진다. 낙락이라는 소리가, 연구하고 연구해 보니까 멀리 퍼진다.
시방세계에 빠짐없이 두루하였도다. 해십찰이돈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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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설(常說) 변설(徧說)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상설 변설
항상 이야기 하고, 어디서나 이야기 하는 것, 그것이 화엄경 설법의 근본인데 거기에 견주어서 이야기 하면 이렇게 설명 가능해요.
主伴重重(주반중중)하사 極十方而齊唱(극시방이제창)이로다
주인과 벗이 중중하고 중중하여 모든 시방에서 다 같이 노래하도다.
주반중중(主伴重重)하사 극시방이제창(極十方而齊唱)이로다.
언제나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그렇지만 주인이 있고 벗이 있고, 주(主)가 있고 반(伴)이 있고, 주(主)가 있고 조(助)가 있고, 주바라밀이 있고 조바라밀이 있고, 주바라밀이 있고 반바라밀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법회를 주관하는 대학원이 주라면 이 기회를 알고 동참한 사람들은 반이 됩니다. 또 동참한 그 사람들을 주로 생각한다면 그 나머지 사람들은 반이 되고 전부 이렇게 짜여져 있습니다. 화엄경에는 말할 것도 없이 그 원리대로 설해져 있어요.
*
주인이 되고 벗이 되고, 주인이 되고 벗이 되면서 우리가 예를 들어서 A라고 하는 스님이 도반 B라고 하는 스님에게 갔을 때 거기에 있는 사람이 주인이라면 간 사람은 벗이 되고, 또 이쪽으로 오게 되면 이 사람이 주인이 되고 그 사람이 벗이 되고, 전부 서로서로 엇바꿔 가면서 그렇게 우리는 살아가고 있고 그렇게 형성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
극시방이제창(極十方而齊唱)이로다. 온 시방, 모든 시방에서 다같이 노래하도다.
어느 누구 노래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요. 화엄경을 설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어. 상설(常說) 변설(徧說) 그거 꼭 기억해야 돼요.
‘상설(常說) 변설(徧說)’이라는 열쇠를 갖지 아니하면 화엄경이 열리지 안해.
또‘심불급중생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이라고 하는 열쇠를 가지고 있어야 돼. 그 열쇠를 가져야만 화엄경이 열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열쇠 ‘시성정각(始成正覺)하시니 그 땅은 견고(堅固)하야 다이아몬드로 이루어졌더라’ 라고 하는 그 열쇠. 세 가지 열쇠는 화엄경을 푸는 아주 중요한 열쇠입니다.
그 세 가지 열쇠를 항상 지니고 다니면 화엄경의 어떤 어려운 내용도 다 그 속에 다 포함되고 다 열려요.
안 열릴 수가 없습니다.
심불급중생시삼무차별인데 왜 안열리겠어요?
깨닫고 나면 전부 이 세상이 다이아몬드로 이루어졌다는데 안 열릴 까닭이 있습니까?
●第5門(제5문) 言該本末(언해본말)
雖空空絕跡(수공공절적)이나 而義天之星象(이의천지성상)이 燦然(찬연)이요 湛湛亡言(담담망언)이나 而教海之波爛 (이교해지파란)이 浩瀚(호한)이로다 若乃千門潛注(약내천문잠주)라 與衆典爲洪源(여중전위홍원)이요 萬德交歸(만덕교귀)는 攝群經爲眷屬(섭군경위권속)이로다
비록 비고 또 비어 자취가 끊어졌으나 이치의 하늘에는 온갖 별들이 찬연히
빛나도다.
고요하고 고요하여 말이 없으나 가르침의 바다에는 물결이 호한하도다.
그래서 천 가지 문으로 깊이 흘러들어 수많은 경전의 큰 근원이 되고
만 가지 덕이 함께 돌아옴이여, 여러 가지 경전을 거두어 권속을 삼았도다.
여천무비 대강백 화엄경 왕복서 특강
(2019년 6월 24일-26일 대구 동화사 국제선센타)
雖空空絕跡(수공공절적)이나 而義天之星象(이의천지성상)이 燦然(찬연)이요
비록 비고 또 비어 자취가 끊어졌으나 이치의 하늘에는 온갖 별들이 찬연히 빛나도다.
수공공절적(雖空空絶跡)이나 이의천지성상(而義天之星象)이 찬연(燦然)이요
비록 비고 또 비어 자취가 끊어졌으나 이치의 하늘에는 온갖 별들이 찬연히 빛나도다.
수공공절적이나 텅 비고 텅 비어서 자취가 끊어졌다.
화엄경 하지만 그 화엄경이 도대체 실체가 뭡니까?
실체가 과연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
문자로 된 80권 경은 가짜 화엄경이고 상설(常說) 변설(徧說)이다. 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그 자리에 그렇게 있으면서 있는 그대로 항상 법을 설하고 있다. 그 모습, 가지고 있는 그것이 그대로 무진설법이다. 근사하잖아요.
화엄경은 그렇게 보는 것이 우리가 화엄경 설법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어로 된 이런 말은 사실은 실체가 없습니다.
수공공절적(雖空空絶跡)이예요. 그렇지만 의천지성상(義天之星象)이 찬연(燦然)이요 또 읽어보면 근사하거든.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이 오는 내용이 너무 많아. 또 아주 수준 높은 진리의 말씀이 너무 근사해. 그것이 어디 한 두 질입니까. 한 두 페이지입니까. 한 두 권입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한 글자 한 문장 한 구절도 빠뜨리고 싶지 않은, 그 많은 화엄경이지만 진도가 나가는 것이 아까워요.
진도가 나가는 게 아까울 정도로 그렇게 진리의 하늘에서 찬연히 빛나는, 저기 은하수와 같은, 푸른 은하수 얼마나 근사합니까, 그와 같이 진리의 가르침이 그렇게 빛나고 있다.
그러나 실체를 찾아보면 뭐예요? 공공절적(空空絶跡)이야. 이런 내용입니다.
*
제일 밑에서 두 번째 줄(p.45)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없는 가운데는 있다 없다 하는 두 가지가 없으며
두 가지가 없음도 또한 없음이라.
삼계 일체가 공한 것이
이것이 곧 모든 부처님의 견해이니라.”라고 하였다.
또 그 다음에 영가스님의 말씀 한 번 같이 읽죠.
“제행이 무상하여 일체가 공한 것이
곧 여래의 크고 원만한 깨달음이다.”
일체가 공(空)한 것이 여래의 원만한 깨달음이다 했으니까
일체가 공한데서 나온 말은 더 말할 나위 없죠.
공한 데서 나온 말, 역시 그것도 공의 자식이니까 공일뿐입니다. 사람의 자식은 사람이듯이, 공의 자식은 공일뿐입니다. 아 근사하잖아요.
제행무상일체공(諸行無常一切空)이 즉시여래대원각(卽是如來大圓覺)이라. 부처님의 깨달음을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텅 빈 공한 자리인데 거기에서 나온 말씀이야 더할 나위 없죠. 그런데 거기에 또 감동을 합니다. 눈물을 흘리고 그게 좋다고 외우고 그냥 또 쓰고 외우고 쓰고 얼마나 많은 정성과 시간을 거기에 바칩니까. 이것이 제대로 된 안목입니다.
그게 소위 중도적인 안목이다 그렇게 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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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우리가 고려 때 팔만대장경을 조성을 할 때 얼마나 많은 국민들의 피 땀과 정성이 들어갔습니까. 그런데 그것 또한 그렇게 우리가 정성을 쏟은 그런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뭐라고? 공의 자식이야.
그렇게 알 줄 알아야 돼.
공의 자식인데, 텅 빈 없는 것의 자식인데 아버지도 없는데 자식이야 더 말할 나위 없이 더 없겠죠.
이게 말이 안 되는 소리죠.
불교는 말이 안되는 소리로 표현해야 비로소 불교에 접근합니다. 전부가 그래 되어 있어요.
세속적으로 말이 되는 소리만 가지고 하면 불교 이야기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해요.
그걸 이해 못하고 세속적인 상식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다. 상식에 어긋나는 소리다 등등 그런 이야기를 하죠. 그렇습니다.
여기는 화엄경이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위대한 것이고 팔만대장경의 전체인 것이다. 얼마나 대단한 가르침입니까.
*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공절적(空空絶跡)이다. 한편으로는 또 의천지성상(義天之星象)이 찬연(燦然)이다. 진리의 하늘에 주옥같은 가르침의 별들이 찬연히 빛나고 있다. 그게 중도적인 표현이예요.
공공절적인 것은 텅 비었고 의천지성상이 찬연히 빛난다.
이것은 또 있어도 너무 확실하게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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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가운데 그렇게 있고, 그렇게 있는가 했더니 또한 텅 비어서 공공절적이야.
깨달은 사람의 가르침은요, 말이 편지 한 장을 써도 중도의 이치에 맞게 써야 돼. 또 중도의 이치에 맞게 써져 있어.경전이나 어록 같은 것은 전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한 예로써 지금 우리가 읽은 이 구절입니다.
공공절적(空空絶跡)이지만 그러나 뭐라고? 의천지성상(義天之星象)이 찬연(燦然)이다.
진리의 하늘에는 그 진리의 말씀 저기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별들이 찬연히 빛나고 있다.
우리가 지금 들고 있는 이 왕복서에서부터 화엄경 전반에 이르고 팔만대장경 전반에 이르기까지.
湛湛亡言(담담망언)이나 而教海之波爛 (이교해지파란)이 浩瀚(호한)이로다
고요하고 고요하여 말이 없으나 가르침의 바다에는 물결이 호한하도다.
담담망언(湛湛亡言)이나 우리가 익숙한 말로 망언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무언이라고 발음해야 돼요. 무자, 없다고 하면 무라고 발음합니다. 없을 무(無)자 하고 같은 뜻인데, 망자를 놓고 왜 무라고 하느냐? 무자도 있는데 왜 망을 무라고 하느냐?
이거 다 글 쓴 사람이 거기에 글자의 모양도 전부 감안을 해서 한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서 망자에다가 없을 무자를 써놨다고 해봐요. 담담무언(湛湛無言) 글자가 너무 답답하죠. 글자 넉자가 너무 답답하게 느껴지잖아요.
그런데 텅 빈 망(亡)자 하나 탁 놓고 그걸 없을 무(無)자 하고 같이 본다 말이야. 담담무언(湛湛亡言) 그럼 조화가 기가 막히잖아. 글자 획의 조화입니다.
시도 제대로 된 시는요 이런 것까지도 시각적인 문자도 다 감안하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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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맑아서 아무 말이 없으나 교해지파란(敎海之波爛)이 호한(浩澣)이로다. 이건 앞의 구절인 ‘공공절적(空空絶跡) 의천지성상(義天之星象)이 찬연(燦然)’ 하는 것하고 대구(對句)로써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말입니다.
가르침의 바다에는 물결이 넓고 호한하다. 고요하고 고요하여 말이 없으나 가르침의 바다에는 물결이 호한하도다.
얼마나 많습니까. 화엄경만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만 지레 겁을 먹고 화엄경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아, 저렇게 많은 것을 어떻게 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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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교수의 강의를 들었는데 일본 가서 화엄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아와서 동국대학교에서 오랫동안 화엄학을 강의를 하다가 퇴직을 했어. 정년퇴직을 했는데 어느 불교 교양대학에서 화엄경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 많은 걸 누가 읽어? 전부 딴 사람이 했을 거야. 여러 사람이 울력을 해서 했을 거야’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천하에 일본의 유수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도 80권 화엄경을 보고 겁에 질려가지고, 그야말로 호한하거든요. 교해지파란(敎海之波爛)이 호한(浩澣)해. 화엄경만 가지고도 그렇습니다.
아무 말이 없는 가운데서 그와 같이 겁에 질릴 정도로, 천하의 훌륭한 교수도 겁에 질릴 정도로 호한하다고.
말하자면 들춰 보려고도 안하는 거야.
그렇게 호한하지만 또 그걸 머릿속에 다 짊어지고 있으면 어떻게 하라고.
*
옛날 목판본 화엄경이 딱 짊어지면, 그 80권이 짊어지면 한 짐이예요. 목판본 한지로 된 화엄경. 우리는 그거 많이 접했습니다. 딱 짊어지면 한 짐이야. 어지간히 힘이 있는 사람이라야 다 짊어지죠. 그러니까 어떻게 그걸 쉽게 가까이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것을 가슴에 담고 있다고 하면 더 무겁죠.
81권 짊어져 봐야 한 짐 밖에 안되지만 가슴에다 그것을 담았다 하면 더 무거울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담담무언(湛湛亡言)이라. 텅 비고 고요하고 맑아서 아무 말 한마디 없는 도리가 또 화엄경의 이치라.
그게 만약에 짐이 되고 가슴에 담았을 때 더 무거운 것이 된다고 한다면 그건 정말 감당할 수가 없죠.
*
넘겨서 48쪽 중간에 ‘십회향품에’ 같이 읽겠습니다.
“중생들의 언설과
일체 유위의 허망한 일을 취하지 않나니
비록 언어의 도를 의지하지 아니하나
또한 다시 언설이 없는 데도 집착하지 않음이로다.”
이거 유명한 말이예요.
불취중생소언설(不取衆生所言說)과
일체유위허망사(一切有爲虛妄事)하나니
수부불의언어도(雖復不依言語道)나
역부불착무언설(亦復不着無言說)이로다
말이 없는 데도 또한 집착하지 않는다. 말을 의지하지도 않지만 말이 없는 데도 의지하지 않는다.
이건요, 요 한 마디만 하더라도 이것은 불교에서 식은 죽 먹듯이 늘 하는 말입니다. 사미들도, 치문반 학인들도 다 그냥 입만 벌렸다 하면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불교가 아니고는 이런 소리 하는 곳이 천하에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런 말 할 줄 몰라요. 이거 무슨 이게 해괴망측한 소리냐.
언어의 도를 의지하지 않으면서도 또한 다시 언어가 없는 데도 집착하지 않는다.
정말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면 모순 중에서도 상모순입니다. 이보다 더 모순일 수는 없어요.
그런데 세속적인 그런 논리로써 이렇게 모순이 돼야만 불법의 이치가 조금 드러납니다. 조금 드러나요 그것도.
*
그 다음에 지공화상 대승찬을 내가 그 전에 삼대선시를 동화사 바로 이 자리에서 강의를 한 적 있습니다.
그 중에 한 구절을 인용했는데 같이 보겠습니다.
“대도(大道)는 항상 눈앞에 있어,
눈앞에 있지만 보긴 어렵다.
만약 도의 참된 본체를 깨닫고자 하면
소리와 물질과 언어를 제거하지 말라.
언어가 바로 대도이니
번뇌를 끊어 제거할 필요가 없다.
번뇌는 본래 텅 비고 고요하지만
망령된 생각이 번갈아 서로 얽힌다.”라고 하였다.
번뇌는 끊어서 제거할 필요가 없다. 언어가 바로 번뇌의 주범이죠. 번뇌는 속에서 있는 것이고 그것이 밖으로 튀어나오니까 문제야. 밖으로 튀어나왔을 때 그것이 언어가 됩니다. 번뇌의 덩어리예요. 너무 악취를 풍기는 번뇌의 덩어리가 바로 언어입니다.
그런데 뭐라고? 그런 언어가 바로 대도(大道)다. 큰 도다. 또 번뇌를 끊어 제거할 필요가 없다.
번뇌는 본래 텅 비고 고요하지만 망령된 생각이 번갈아 서로 얽힌다.
텅 비고 고요한데 망상이 거기에 끼어들어서 이러고 저러고 하는 거예요. 아무 잘못 없어요. 번뇌도 언어도 그 번뇌의 악취덩어리인 언어도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이게 화엄경의 안목입니다.
*
어제도 말씀드렸듯이 눈을 뜬 사람과 눈을 감은 사람, 지금 아침이 되어서 찬란한 햇볕 저기 푸른 소나무에 비치는 저 모습 저 아름답고 감동적인 저 모습을 눈 감은 사람이 어찌 알겠습니까.
천분의 일 만분의 일이라도 느끼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눈을 뜨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잘 느끼고 감상하고 감동에 젖습니다. 요즘 표현으로 힐링이 저절로 되는 거예요. 이런 환경에서 우리가 이런 최고의 가르침을 접하고 있다고 하는 이 사실만으로도.
뭐 귀에 안들어와도 괜찮아요. 무슨 뜻인지 몰라도 아무 상관없어. 그냥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100퍼센트 힐링이 되는 것입니다.
若乃千門潛注(약내천문잠주)라 與衆典爲洪源(여중전위홍원)이요
그래서 천 가지 문으로 깊이 흘러들어 수많은 경전의 큰 근원이 되고
약내천문잠주(若乃千門潛注)라 여중전위홍원(與衆典爲洪源)이요
이 화엄경은요 천 가지 만 가지의 가르침이 전부 흘러들어와요. 그래서 모든 가르침, 팔만대장경은 말할 나위도 없고 소설이다 수필이다 온갖 선데이서울이다 할 것 없이 일체 언어 문자의 가장 큰 근원이 되는 것이 바로 화엄경이다 말이야. 심지어 선데이서울까지도 이 화엄경에서 나왔다 이말입니다.
*
여중전위홍원(與衆典爲洪源)이라. 온갖 가르침 온갖 경전으로 더불어 큰 근원이 된다.
기가 막힌 말씀 아닙니까. 이게 어찌 청량국사가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중국사람이 풍을 잘 떤다고 하지만 이 스님은요 보통 자기 삶에 칼 같고 얼음 같은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이걸 근거를 갖다 대기로 하면 끝도 없이 이야기 해야 될 내용입니다.
일체 소승불교, 대승불교, 부파불교, 대승시교(大乘始敎) 대승종교(大乘終敎) 대승원교(大乘圓敎) 일승원교(一乘圓敎) 할 것 없이 전부가 화엄경 안에 다 포함됩니다.
*
말씀드렸듯이 살생을 하면 지옥 아귀 축생에 떨어진다. 설사 사람으로 태어난다 하더라도 이런 이런 과보를 받는다. 단명의 과보를 받거나 저처럼 몸에 병이 많은 과보를 받게 된다. 그런 이야기가 십지품 이구지에 명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십지품 하면 상당히 높이 올라갔잖아요.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그렇게 올라갔기 때문에 나는 처음에 화엄경을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는 거기에는 그야말로 하늘을 날고 구름을 타고 하는 그런 이야기만 있는 줄 알았어. 십지품에는 그런 이야기만 있는 줄 알았다고.
왜냐.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거기까지 올라갔잖아요. 그게 소위 화엄경에서 삼현십성해서 강원에서 삼현십지만 봤습니다. 그 앞의 것도 안보고 그 뒤의 것도 안봤어요. 그리고는 강원에서 ‘이제 화엄경 다봤다’ 하고 졸업을 했어요. 그때 삼현십지를 보면서 화엄경을 다봤다 라고 하는 경우는 삼현십지의 소초까지 다 읽었습니다. 그래서 삼현십지의 소초를 다 읽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화엄경을 다 뗐다 해도 과언이 아니예요. 삼현 위에 십지잖아. 십주 십행 십회향의 단계보다는 훨씬 하늘처럼 높은 단계라.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늘을 날고 구름을 타는 내용이 십지품에 있는 줄 알았는데 웬걸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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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을 해서 안 되는 것 누가 몰라? 그건 불교 아니라도 가르치고 있어. 세속에서 어지간히 도덕적인 사람들은요 그거 잘 지킵니다. 그리고 자기 자손들에게 잘 가르칩니다. 그건 아주 평범한 가르침이라. 그런 내용이 화엄경 십지품에 있다고요. 그러니 참 화엄경에는 없는 가르침이 없다. 그래서 뭐든지 화엄경에 있다.
‘진짜 화엄경 안에 있는가?’ 하고 어떤 누가 공적으로 무슨 신년사인가 뭘 하면서 ‘화엄경에 이런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해가지고는 나보고 ‘그게 진짜 화엄경에 있는 말이냐’ 하고 그냥 전화가 빗발쳤어. 화엄경에는 없는 이야기야.
그러니까 ‘무조건 화엄경에서 나온 이야기다’ 하면 되는 거야. 화엄경이 그걸 다 책임 져야 돼. 화엄경은 그런 책임과 의무가 있어. 그런 정도입니다.
여중전위홍원(與衆典爲洪源) 온갖 경전으로 더불어 큰 근원이 된다.
萬德交歸(만덕교귀)는 攝群經爲眷屬(섭군경위권속)이로다
만 가지 덕이 함께 돌아옴이여, 여러 가지 경전을 거두어 권속을 삼았도다.
만덕교귀(萬德交歸)는 섭군경위권속(攝群經爲眷屬)이로다
만 가지 덕이 다 함께 돌아옴이여, 여러 가지 경전을 거두어 권속을 삼았도다.
그래 선데이서울도 화엄경의 권속이야. 화엄경의 권속이라고. 그런데 하물며 아함경, 니까야 그게 화엄경의 권속이 아닐 까닭이 있습니까? 그래서 다 포섭하는 거예요. 그건 소승교야.
심지어 인천인과교인 방금 말씀드린 십지품에서 가르치고 있는 선악의 문제, 가장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선악의 문제에 대한 가르침까지도 화엄경의 권속이라고 이렇게 이야기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왕에 이런 경전을 두고 이야기 하기로 하면 인천인과교 그다음에 소승교 대승시교 대승종교 대승돈교 일승원교 이러한 차원을 대강이라도 알고 있어야 됩니다.
그러니 화엄경은 그런 책임과 의무가 있고 ‘전부 화엄경에 있다’ 이렇게 해도 틀린 말은 아니예요. 심지어 논서라든지 선불교의 선문까지도 사실은 화엄경에 다 포섭된다. 그래서 화엄경은 실로 큰바다와 같은 것이다.
큰 바다는 어떻습니까?
팔공산에서 흘러가는 아주 실 같은 계곡물도 큰 낙동강 물도 오폐수 물도 깨끗한 물도 전부 바다는 다 받아들이고 수용해서 전부 정화를 합니다. 전부 정화를 해요.
그래서 원효스님이 화쟁론을 지었는데 그 화쟁론 하나 가지고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이 여럿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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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쟁론(和諍論)이라는 것은 뭐냐.
그건 참 아주 이 세상에 정말 훌륭한 가르침인데 예를 들어서 작은 개울에서 흘러가는 아주 실오라기 같은 작은 개울물도 저 낙동강 강물과 같은 그런 큰 강물의 물도 오폐수 심지어 공장에서 나오는 오폐수 물도 아니면 아주 맑은 샘물도 전부 바다에 들어오면 바닷물 하나로 융화가 되어서 전부 청정(淸淨)하게 한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주의주장과 가르침이 있습니까? 특히 불교 안에 제일 심해요 그게.
옛날 신라 때는 기껏해야 유교 도교 그다음에 또 불교안에 여러 가지 종파와 각자의 주장하는 바의 학설들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만 가지고도 시시비비가 돼요. 아주 공부 좀 한 사람들에게는 ‘이게 옳다 저게 옳다’야단이예요.
그런데 알고 보면 화엄경을 공부하신 원효스님께서는 가만히 보니까 우스운 이야기야. 심지어 오폐수 물도 바다에 들어오면 깨끗하게 정화가 되어서 하나의 바닷물로 통섭이 된다. 이런 정신에 입각해서 그래서 화쟁론을 지은 것입니다.
온갖 주의주장을 가지고 다투는 데 그 다툼을 전부 융화하고 포섭을 해서 결국은 눈을 뜨고 보면 그것이 전부 같은 권속이고 같은 무리고 같은 일심(一心)에서 나온 것이다.
전부 일심에서 나와서 온갖 주의주장을 편다.
이렇게 해서 화쟁론을 써서 천하의 아주 유명한 글이 됐잖습니까.
*
근래 한국 불교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교통이 편리하게 되면서 남방불교에 가서 공부하고 오는 이들이 참 많아요. 스님들도 많고 일반인들도 많고.
그런데 여기서 대승불교 선불교를 실컷 공부하고 가서 보니까 아 대승불교 선불교는 이게 부처님설[佛說]이 아닌거야. 자기안목에 부처님설이 아닌거야.
그럼 여기에서 10년 20년 내지 30년 가까이 대승불교 선불교를 공부하다가 남방에 가서 근본불교 소위 상좌부 불교를 공부해 보니까 그게 진짜 부처님 친설이고 그게 진짜 불교인 것 같거든. 불교인 것 같은 거야. 그 사람 안목에. 그래서 거기에서 한 10년쯤 공부하고 와가지고.
말도 서툴지요. 잠자리도 어렵지요. 생활이 얼마나 힘듭니까? 우리가 여행을 거기 한 일주일만 남방에 가서 하고 와도 지쳐서 감당을 못할 정도로 아주 열악한 환경인데 거기에서 한 10년간 공부하고 왔으니 거기에 들인 공이 얼마겠습니까? 피눈물 나는 과정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거기에서 그렇게 공을 들여서 공부하고 와놓으니까 거기에 애착이 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거기에서 주장하는, 가르치고 배웠던 것이 전부 옳게 생각이 드는 거예요. 왜냐 자기 공이 그만치 들었으니까, 자기 고생이 그만치 들어갔으니까 그게 옳게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남방불교 공부하는 사람이 꼭 들어야 하는 내용인데.
내가 그 문제에 대해서 상당히 내 나름대로, 나는 선불교 대승불교를 한 사람으로서 참 고민도 많이 하고 여러 가지 책자도 많이 읽고 그랬어요.
그래서 해결을 했어. 왜 그 사람들이 선불교 대승불교를 공부하고 그보다 저 밑의 수준인 소승불교의 가르침을 가지고 이것이 진짜 불교다 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입에 침을 튀기면서 강의하는 거예요 그냥.
왜 그렇게 되는가? 그것은 부처님이 일찍이 답을 하셨어.
*
모든 것은 인과관계로 이루어져 있고, 인연의 소치로 그렇게 되어 있다. 한국에서 20년 30년 동안 대승불교 선불교를 했으나 여기는 너무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공부해서 힘이 하나도 안들었어. 공이 하나도 안들었어.
기껏해야 2박3일 10만원만 내면 실컷 먹고 자고 공부하는 거야. 이런 호강이 어딨어? 세상에 이런 호강이.
이렇게 호강하면서 십년 이십년 공부한 거예요.
(대중 박수)
이 자리가 박수칠 자린가?
아무튼 이렇게 호강하면서 10년 20년 공부하다가 남방의 태국이나 미얀마나 저기 스리랑카 내가 옛날에 스리랑카 한 번 가봤는데 가보니까 유학생들이 몇이 있어. 고생이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모기 많고, 집 한 채씩 줬어. 조그마한 집 한 채씩 줬는데 집이랄 것도 없어. 모기장도 없는 그런 집에서 가사 빨아가지고 걸어놓으면 금방 마르고 그런 곳인데 그 고생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말이 통합니까? 일단 영어가 통해야지. 그다음에 스리랑카가면 스리랑카 말이 통해야지. 태국 가면 태국말이 통해야지. 기본적으로 두 가지 말 이상은 해야 돼.
거기다 또 남방불교를 공부하려면 빨리어 통달을 해야 되는 거야. 최소한도 아무리 못해도 3개 외국어는 통달해야 돼. 1개 외국어만 통달하는데 우리가 얼마나 고생합니까?
10년간 외국어 공부하는데 항상 10년 동안 입문서만 가지고 씨름하는 거야. 입문서만 가지고.
도대체 진도가 안나가는 게 우리나라 사람이 외국어를 공부하는 일이라.
그런데 3개 국어를 일단 해야 되니까 얼마나 힘들겠어요? 자기가 머리가 좋다 하더라도.
그렇게 고생고생하면서 공부한 그 공이, 그 고생과 공이 거기에서 한 철간 한 것이 우리나라에서 10년간 한 것 보다 더 무거워. 그 무게가 더 나가.
그런데 거기서 한 10년간 했다 하면 우리나라에서 100년간 공부한 것보다 더 애착이 가고 더 공이 더 들고 더 힘을 많이 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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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처편추(重處偏墜)라. 무거운 곳으로 떨어지게 되어있어.
자기 공을 얼마나 들였느냐에 따라서 그것을 옳다고 주장할 수 밖에 없어요.
자기 어머니가 아무리 문둥이라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어머니고 제일 아름다운 어머니고 제일 자비롭고 나에게는 최고의 어머니야.
뭐 세상의 어떤 미인 어떤 훌륭한 보살이 있다 하더라도 자기 어머니만 못해. 관세음보살 지장보살도 자기 어머니 따라오려면 형편없어. 저 밑에 떨어진 존재라. 관세음보살 지장보살도 자기 어머니하고 비교하면 그런 관계라.
그건 왜 그러냐? 자기와의 깊은 인연관계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소승불교가 불교도 아닌 불교지만 거기에 그만치 자기가 노력을 기울이고 애를 먹었고 공을 들였기 때문에 죽자 살자 갔다 오면 입에 침을 튀기면서, 내가 직접 들었는데 선불교 얼마나 위대한 불교입니까?, 선불교를 ‘중국의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표현하는 거야. 선사들을.
무슨 뭐 석가 달마를 능가하는 황벽 임제 같은 이들을 ‘중국의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표현합니다. 조사라고 안해. 절대 조사라는 표현 안 씁니다.
그렇게 표현합니다. 그래요. 그렇기 때문에 ‘아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대승불교 선불교를 비판하고 근본불교만 옳다고 하느냐’ 라고 하는 이유는 거기에 그만치 자기가 공을 들였기 때문에 그래요.
*
절대 대승불교가 더 우수하다고 선불교가 우수하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절대 거기에 기울지 않습니다.
내가 그전에 왜관 수도원에 가서 한 1주일간 수사들과 같이 생활을 했는데 거기 어떤 수사가 불교성전이 처음 나왔을 때라, 나온지 얼마 안됐어. 이 사람은 맨날 불교성전 가지고 법당에 가가지고 명상을 하는 거야. 불교성전 가지고.
공부를 해보니까 불교성전이 훨씬 성경보다 우수하거든. 가르침이 아주 훌륭한 거야. 그러면서 거기에 수사 노릇을 하는 거야. 평생 몸바쳐서 거기서 수행하고 있는 거야. 그만치 인연이 깊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옳기는 불교가 옳으면서 훨씬 우수하면서. 내가 들인 공이 여기에 깊기 때문에 그 인연을 따라가는 거예요. 전부가 인연의 무게라.
그렇게 이해를 하니까 소승불교 해온 사람이 그렇게 입에 침을 튀기면서 주장하는 이유가 그리고 대승불교를 비판하는 이유가 ‘아 그래서 그렇구나’ 이해가 가요.
결코 우수해서 하는 건 절대 아닌 것입니다.
어머니의 예를 든 것이나 수사의 예를 든 것이나 전부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인연을 잘 지어야 돼.
인연을 잘 지어야 돼요.
인연을 잘 못 지어놓으면요 정말 옳은 것을 보고도 옳다고 할 수가 없고 거기에 마음이 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문둥이라도 자기 어머니에게 정이 가는 것은 아주 정한 이치라. 당연한 이치야. 그럴 수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처음에 우리가 인연을 잘 선택해야 돼요.
이런 화엄경 같은 것을 우리가 인연을 맺었다고 하는 것은 대단한 복입니다. 보통 복이 아니예요.
그런 관계를 예를 들어서 여기 화엄경은 모두 포섭하고 다 용서하고 용납하고 끝내가서는 융화시키고 그래 화쟁(和諍) 투쟁을 융화시키는 그런 길로 화엄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第5門(제5문) 言該本末(언해본말)
말씀이 근본과 지말을 갖추었다
오늘 왕복서 처음부터 어제처럼 독송을 하고 강의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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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복서 독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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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원음낙락(圓音落落)에 해십찰이돈주(該十刹而頓周)하시며 주반중중(主伴重重)에 극시방이제창(極十方而齊唱)이라고 하는 방금 읽은 내용 그대로 원음이 낙락합니다.
원만한 소리가 낙락한데, 비록 귀로 듣는 소리 뿐만 아니라 화엄경의 안목으로는, 우리 귀에 들리는 소리든 귀에 들리지 않는 소리든 그야말로 원음낙락에 그 소리가 십찰, 시방세계의 모든 곳에 다 두루 하고 있다.
*
인류 역사가 한 5,6천년 된다 하더라도 그동안 사람들을 성숙시키는 교육기관을 우리가 쭉 일별해 본다면 두 말할 나위 없이 불교의 교육기관, 부처님 슬하에서 바로 친문한 제자들과 그 이후 그 많고 많은 학승들을 길러낸 나란다 대학입니다.
그것이 너무 부러워서 우리나라 신라의 스님들도 중국의 스님들도 일본 스님들도 그 나란다 대학에 가서 같이 한 번 동참해서 공부하고 싶은 꿈을 많이 가졌었습니다.
저는 늘 학인들이 강원을 졸업하고 떠나갈 때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 세상에 어떤 교육기관에서 원효(元曉), 의상(義湘)이 출현했겠나? 용수(龍樹), 마명(馬鳴)이 출현한 교육기관이 어디겠는가? 천친(天親) 무착(無着)이 출현한 교육기관이 어디겠는가? 옥스포드도 아니요, 케임브리지도 아니요, 하버드도 아니다 말이야.
수 천년 전통을 가진 우리 승가교육기관, 거기서 원효 의상이 나왔고 용수 마명이 나왔고 천친 무착이 다 거기에서 나왔다. 늘 그런 이야기를 해 주고 저는 거기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갖습니다.
*
오늘 아침 조금 일찍 올라와서 운집 목탁을 찰중스님이 내리고 여기저기서 스님들이 가사 장삼을 수하고 이 강당으로 모여드는 그 모습이 마치 옛날 나란다 대학에서 강의 시작의 목탁을 울렸을 때, 이 방 저 방에서 스님들이 가사를 수하고 나오는 그런 모습이 상상되었습니다.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듯, 꼭 그와 같이 그렇게 접사가 되어서 저에게는 보였습니다.
부디 이러한 전통, 2600년의 전통을 가진 이러한 불가의 문화가 오래오래 지속이 되고 더욱 더 발전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강의를 조금 몇 시간 듣는다고 해서 몰랐던 것이 얼마나 알아지겠습니까? 그저 이러한 우리의 아름다운 문화를 우리가 이렇게 계승해 나가는 그것이 더욱 중요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
모두 진도가 빠르다고 그러는데 저는 진도나 시간, 맞춰 놓은 시간과 끝내는 것 이런 데는 옛날부터 칼 같고 얼음 같다 이렇게 스스로 생각을 합니다.
지금 4문까지 공부를 했는데 정말 주마간산으로 보았습니다. 거기에서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더 반복해서 천착을 해야 할 내용들이 사실은 얼마든지 있는데 그렇지 못하고 지금 이렇게 지나갑니다.
앞으로 5문이 끝나고 6문에 들어가면 참으로 이야기 할 것이 많고 또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내용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
오늘은 제 5문(門) 언해본말(言該本末)이라. 한마디로 화엄경 서문입니다. 화엄경 전체를 간략하게 정리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화엄경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과 지말을 다 갖췄다고 하였습니다. 근본과 지말.
근본은 인천인과교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인천인과교(人天因果敎)는 교학상으로 불교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왜냐, 복을 지어서 또 선한 일을 해서 사람으로도 태어나고 천상에도 태어나고, 사람으로 태어더라도 아주 귀족으로 태어나고 아주 부유한 집안에 태어난다 라고 하는 가르침, 이것은 유치원에도 그런 교육이 있습니다. 또 유교에도 그런 교육이 있고, 다른 종교에도 그런 교육이 있습니다.
*
본래로 사람은 앞으로 앞으로 더 나아가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산천을 바라보면 정말 내가 한 5, 6년 전에 왔을 때보다 더 훨씬 나무들이 컸어요. 그때보다 숲이 아주 더 무성합니다. 그와 같이 끊임없이 살아있는 생명은 정신적인 것이든 어떤 면이든 간에 자꾸 발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이치에 맞춰서 우리도 끊임없이 정진해야 합니다.
*
불교의 가장 뭐라고 할까 수준높은 가르침 그것은 어제도 수차 말씀드렸지만 ‘마음 그대로 부처다’‘중생 그대로 부처다’‘부처와 마음과 중생이라고 하는 것이 동등해서 아무런 차별이 없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런 말을 소승불교 같은 데서 들으면 미친 사람이라고 취급하거나 아니면 깜짝 놀라거나 선근이 있는 사람은 크게 환희심을 일으킬 내용입니다.
인천인과교에서부터 상좌부 불교에서는 상상하지도 못할 이런 내용에 이르기까지가 근본과 지말입니다. 또 그것을 근본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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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화엄경이 대개 ‘최초 화엄 3·7일’ 이라고 해서 전체 팔만대장경의 교설을 정리를 하면 ‘부처님이 최초에 깨닫고 나서 그 깨달음의 내용을 남김없이 펼쳐 보인 것이 화엄경의 가르침이다’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그것은 뜻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요즘 학자들은 경전성립사라고 하는 안목에서 ‘어떻게 화엄경이 최초에 부처님이 깨닫고 나서 바로 삼 칠일 만에 다 설했다는 말이냐?’라는 얼토당토 않은 말을 합니다.
누가 그걸 몰라요? 역사적인 관점에서 이야기 하자면 ‘화엄경은 부처님 열반하신 이후에 한 600년 700년 경에 설했다’고 하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표면만 보고 껍질만 보고, 컴퓨터를 보되 양철로 된 케이스만을 보고 컴퓨터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안목입니다.
그 컴퓨터 안에 어떤 자료가 무슨 내용이 얼마나 들어있다고, 상상도 못할 자료가 있을 수가 있고 온 세계 자료를 키보드 하나로써 전부 이끌어다가 다 볼 수 있고 다 들을 수 있는 세상입니다. 그것이 바로 화엄경을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얼마 후에 설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펼쳐보인 최초 화엄 삼 칠일’이라는 것입니다. 과거 천하의 천재인 훌륭한 학덕을 갖추신 분들이 그런 내용을 왜 모르고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최초 화엄 3·7일.
‘삼칠일 동안 화엄경을 어떻게 다 설한단 말이냐’ 거기에 또 예를 들어서 ‘사리불이니 목건련이니 하는 제자들은 훨씬 이후에 부처님 제자가 되었는데 어떻게 삼칠일 안에 설한, 부처님이 성도하시고 21일 안에 어떻게 목건련, 사리불이 등장할 수 있었겠느냐? 얼마나 모순이냐?’ 이 말인데, 그걸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다 일일이 설명합니까? 아무도 설명 안해요. 그건 다 알아들으려니 하고 그렇게 온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아야 돼요.
그전에 여기 동화사에서 화엄경 세미나가 있었어요.
화엄경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지명도만 가지고 사람을 초청했어. 평생 소승불교를, 남방에 가서 공부한 사람들을 몇 모셔다놓고, ‘화엄경이 언제 설해졌느냐’‘용궁에서 가져왔느니 그게 어떻게 실제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이야기냐?’ 이걸 가지고 얼마나 많은 시간 토론을 하는지 참 기가 막히더라고요. 화엄경은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
그래서 여기서 말씀이 ‘근본과 지말을 다 갖추었다’ 라고 하는 것은 불교에서 거론하고자 하는 모든 가르침의 차원들 모든 내용들이 화엄경 안에 다 갖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인천인과교부터 불교에도 들어가지 않는 말하자면 선한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 그런 말에서부터, 근래 십지품을 제가 부산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거기에 제2지인 이구지에 보면 계율의 문제에 대해서 상당히 많이 언급을 해요. 예를 들어서 살생을 범하면 가장 큰 죄는 지옥 아귀 축생 삼악도에 떨어지고 설사 인간에 태어난다 하더라도 이러한 과보를 받는다. 심지어 이런 이야기까지 다 해 놓았습니다 화엄경에는.
그건 누가 몰라요? 유치원에서도 다 가르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이야기에서부터 그야말로 모든 사람, 모든 생명은 말할 나위도 없고, 일체 유정무정이 전부가 부처님이다. 그대로 부처님이다 라고 하는 차원에까지 화엄경은 다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시 이야기를 많이 하죠. 불가에서는 보시바라밀을 상당히 이야기 많이 합니다. 제1덕목이죠.
육바라밀에서도 그렇고 십바라밀에서도 그렇고 어떤 가르침에서도 보시바라밀을 제1덕목으로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상상도 못할 보시에 대한 이야기가 십회향품에 나와요. 살이 붙은 손톱을 뽑아서 보시를 하고, 살이 붙은 머리카락을 잘라서 보시를 하고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가슴이 찌릿찌릿합니다. 그렇게 충격을 주는 거예요.
그런 보시 이야기가 60여종이 나열이 됩니다.
그런 등등에 이르기 까지 그야말로 말씀이 근본과 지말을 다 갖추었다. 이런 이야기를 다 하려면 팔만대장경을 다 설명하고 ‘이것은 전부 화엄경에 다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해야 맞는 말이예요. 제대로 설명하기로 하면, 이 화엄경 왕복서는요 대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는 것은 주마간산도 보통 주마간산이 아닌 거예요.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면 그래도 상당히 눈에 들어옵니다. 상당히 들어와요.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그런 정도가 아니예요. 그야말로 광속(光速)으로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과 같은 정도다. 이렇게 표현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광속으로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산천을 바라보았다. 그 산천이 어떻더냐? 글쎄 광속으로 달려서 나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게 옳은 대답이죠.
그 정도로 알고 그 안에 우리가 알아야 할 내용들은 전부 여러분들 각자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