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6門(제6문) 旨趣玄微(지취현미)
其爲旨也(기위지야)여 冥真體於萬化之域(명진체어만화지역)하고
顯德相於重玄之門(현덕상어중현지문)이로다
用繁興以恒如(용번흥이항여)하고
智周鑑而常靜(지주감이상정)이로다
眞妄交徹(진망교철)이라 卽凡心而見佛心(즉범심이견불심)이요
事理雙修(사리쌍수)라 依本智而求佛智(의본지이구불지)로다
理隨事變(이수사변)이라 則一多緣起之無邊(즉일다연기지무변)이요
事得理融(사득이융)이라 則千差涉入而無礙(즉천차섭입이무애)로다
故得十身歷然而相作(고득십신역연이상작)하고 六位不亂而更收(육위불란이갱수)로다
廣大即入於無間(광대즉입어무간)이요 塵毛包納而無外(진모포납이무외)로다
炳然齊現(병연제현)은 猶彼芥瓶(유피개병)이요
具足同時(구족동시)는 方之海滴(방지해적)이로다
一多無礙(일다무애)는 等虛室之千燈(등허실지천등)이요
隱顯俱成(은현구성)은 似秋空之片月(사추공지편월)이로다
重重交映(중중교영)은 若帝網之垂珠(약제망지수주)요
念念圓融(염념원융)은 類夕夢之經世(유석몽지경세)로다
法門重疊(법문중첩)은 若雲起長空(약운기장공)이요
萬行芬披(만행분피)는 比華開錦上(비화개금상)이로다
그 종지(宗旨)가 됨이여, 참다운 본체는 만 가지 변화의 영역에 가만히 부합하고
덕의 모습[相]은 깊고 현묘한 문에 드러났도다.
작용은 번다하게 일어나지만 항상 여여하고
지혜는 두루 비추지만 항상 고요하도다.
진(眞)과 망(妄)이 서로 사무치니 범부의 마음에 나아가서 부처의 마음을 보도다.
사(事)와 이(理)를 쌍으로 닦으니 근본지혜에 의지하여 부처의 지혜를 구하도다.
이(理)는 사(事)를 따라 변함이라 곧 하나와 많음이 연기함이 무변함이요
사(事)는 이(理)를 얻어서 원융함이라 곧 천 가지 차별에 들어가도 걸림이 없도다.
그러므로 열 가지 몸이 분명하고 또렷하나 서로서로 이루고, 여섯 가지 지위가 어지럽지 아니하나 새롭게 거두어 정리하였도다.
광대함은 곧 사이가 없는 데까지 들어가고, 먼지와 터럭은 밖이 없는 것까지 에워쌌도다.
환하게 함께 다 나타남은 마치 겨자씨를 담은 유리병과 같고
동시에 구족한 것은 바닷물의 물방울과 같도다.
하나와 많음이 걸림이 없는 것은 텅 빈 방에 천 개의 등불을 밝힘과 같도다.
숨고 나타남이 함께 성립됨은 가을 밤하늘의 반달과 같도다.
거듭거듭 서로 비춤은 제석천그물에 드리운 구슬과 같도다.
순간순간에도 원융함은 저녁 꿈에 지나가는 세월과 같도다.
법문이 중첩함은 드넓은 하늘에 구름이 일어나는 것과 같도다.
만 가지 수행을 아름답게 펼침은 비단 위에 꽃무늬를 새김과 같도다.
여천무비 대강백 화엄경 왕복서 특강
(2019년 6월 24일-26일 대구 동화사 국제선센타)
●第6門(제6문) 旨趣玄微(지취현미)
지취가 깊고 미묘하다
문제의 제6문(門) 지취현미(旨趣玄微)라.
지취가 깊고 미묘하다
화엄경에서 밝힌 법계의 이치는 어제 아주 법계에 대해서 중언부언 많이 말씀드렸는데, 화엄경은 결국 법계를 밝히는 내용입니다.
법계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거든요. 한두 마디로 끝낼 문제도 아니고.
*
법계라고 하면 말씀드렸듯이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먼지 그리고 큰 저 태양과 은하수의 그 많고 많은 은하계의 별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포함해서, 거기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시시비비들 이것까지도 다 포함해서 한마디로 요약하면 법계다.
법계는 뭡니까? 법은 진리라는 뜻이죠.
진리의 세계다.
그 무엇도 진리 아닌 것이 없다. 그것이 법계다 라고 일단 그렇게 하고.
그 법계를 가장 잘 설명한 것이 화엄경이다.
그중에서도 보통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아주 미묘한 내용들이 이 법계 또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에게까지도 지취가 깊고 미묘하다 라고 하는 이 십현문의 내용이 다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 그래요.
*
우리 사람의 몸으로부터 마음의 문제 그리고 이 산하대지 산천초목에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고 또다시 돌고 돌고 성주괴공하고 생로병사하고 생기입멸하고 춘하추동 하는 이런 이치들이 다 그 어떤 존재에도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래서 그 지취는 참으로 깊고 깊고 또 깊고 미묘하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1. 이사무애(理事無碍)
제일 먼저 이(理)와 사(事)가 걸림이 없다 그랬습니다.
이(理)가 뭐고 사(事)가 뭐냐?
우리 절에서 제일 잘 쓰는 말이 이판사판입니다.
또 사회에서 이사라고 하면 상당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죠.
이사라는 직책은 상당히 높죠? 난 자세히는 모르는데.
이게 다 불교에서 나간 말이예요.
두 가지 낱말로 표현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은 전부 이(理)와 사(事)로 구성되어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먼저 사람을 두고 이야기 하면 몸은 사(事)가 되고 마음은 이(理)가 되고.
지금 여름이 와서 산천초목이 봄보다는 훨씬 달리 변했습니다. 달리 변한 이런 모습 눈에 비치는 모습은 사(事)가 되고,
여름에 접어들었다고 하는 여름이라고 하는 본체는 이(理)가 됩니다.
우리 인체에서도 왼쪽은 이(理)가 되고 오른 쪽은 사(事)가 되고. 대개 오른 팔을 많이 쓰고 하니까.
그 무엇도 이(理)와 사(事)로 구성되어 있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한 가족을 두고 이야기하자면 남자는 사(事)가 되고 여자는 이(理)가 돼요
또 우리가 잘 아는 문수 보현으로 치면 문수보살은 지혜를 담당하고 있죠. 그분은 이(理)가 되고 이판이고 또 보현보살은 사판(事判)이 되고.
사찰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강원에서 공부를 하거나 염불원에서 하거나 선방에서 하거나 하는 사람들은 이판(理判)이 되고, 행정을 하거나 소임을 사는 사람들은 사판(事判)이 되고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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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사실은 걸림이 없어야 되고 또 깊이 들어가면 걸림이 없습니다.
만약에 한 가정에서 남자가 남자노릇한다고 돈 좀 벌어왔다 라고 하고 전등 하나 못갈고 못 하나 못 치고 한다면 그게 무슨 사판(事判)입니까. 그건 죽은 사판이야. 때로는 못도 칠 수 있어야 되고 등도 갈 줄 알아야 돼.
그리고 또 여자는 여자가 뭐예요? 한 가정에서 분위기 조성하는 사람이라. 분위기 메이커라 여자는.
분위기 메이커가 되어서 분위기를 잘 조성해야 남자가 나가서 돈을 잘 벌어 오지.
나갈 때 아주 씩씩하게 기분좋게 나가고 나가서 일하고도 빨리 돌아오고 싶고,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는 사람이 이판(理判)이야.
이걸 가지고 설명하기로 하면요 수천 년 설명해도 다 못한다. 해당 안 되는 곳이 없어.
그러니까 이게 걸림이 없어야 되는 거야.
서로 엇바꿔 가면서도 얼마든지 이판이 할 일을 사판이 할 줄 알아야 되고 사판이 할 일을 이판도 할 줄 알아야 되고.
*
그전에 음, 이 이야기 해도 되겠네 이제. 한 분은 돌아가셨고 하니까 또 한 분은 연세가 많아서 법문도 잘 안듣는 스님이니까.
예산에 향천사라고 있어. 아주 유수한 절이야. 상당히 알아주는 절이라. 선방도 있었는데.
거기에 우리 잘 아는 도반들이 두서넛 살았는데 한사람은 주지 살고 한사람은 말하자면 거기 본대중으로 살았어요.
그런데 주지가 그날 마침 재를 지내야 할 입장인데, 공부하면서 사는 대중은 절대 손가락 하나도 까딱 안하는 거야. 밥만 먹고 벽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라.
그날 마침 주지가 밖으로 나가야 할 일이 있어서 목탁을 쳐서 기재사 하나라도 지내줘야 할 판인데 사정사정 빌어가지고 부탁을 했는데, 평소에 도반이야. 그런데도 내 몰라라 하고 밖으로 나가버렸어.
그러니 그 주지가 두고두고 그 이야기를 하는 거야.
‘저 사람이 저렇게 꼭 맥힌 사람이라. 지가 염불을 할 줄 모르나 목탁을 칠 줄 모르나. 그거 한 번 주지 좀 도와주면 어떻다고’ 이러고 우리한테 이야기 하는거야.
그래 되면 여기 뭐야? 이와 사가 걸림이 없는 게 아니죠. 그런 꼭 맥힌 이판도 있고 그걸 가지고 두고두고 씹는 사판도 있고. 두고 두고 씹는 사판도 있어.
여기 어디 보면 내 이야기도 해 놨는데 몇 페이지죠? 책을 가졌으니까 읽으시면 될 것이고.
그래서 이(理)와 사(事)는 잘 만나야 돼.
사를 잘못 만난 이는 말하자면 거지의 부인도 될 수가 있고 또 왕의 부인도 될 수가 있고 큰 사장의 부인도 될 수가 있고 그게 모두 사를 만난 인연 때문에 그렇게 상황이 달라지는 거야.
사판도 마찬가지야.
남자도 마찬가지야. 여자 잘못 만나 놓으면 자기 있는 능력도 다 발휘도 못하고 하는 일마다 망조가 들고 그런 경우가 너무 많아.
*
절로 돌아와서 이야기를 하면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실력이 있는 이판이라 하더라도 주지가 그 사람을 알아주지 않고 써먹지를 아니하면 아무 쓸모 없는, 그 절안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는 인간이 되어버리는 거야. 그냥 평범한 대중일 뿐이야.
아무리 훌륭한 공부를 많이 했다 하더라도 주지가 그것을 알아주지 못하면 그래.
그런데 주지가 그것을 잘 알아주는 사람은 계속 추켜주고 활용하고 써먹고 하면 자기가 빛나는 거야
주지가 빛나는 거라. 이판을 잘 활용하면.
그래서 이와 사의 궁합이 잘 맞아야 돼, 궁합이 제대로 안맞으면 보물을 두고 써먹지를 못하고 그런 것을 써먹지를 못하니까 자기가 빛도 안나 형편이 없어.사격이 떨어져.
그런 사례들을 우리가 많이 겪으면서 삽니다.
그 사람을 사용하고 활용하면 자기가 낮아지는 줄 아는 거야. 자기가 높아지는 줄 모르고 자기가 낮아지는 줄 아는 거라. 그렇게 착각을 한다고요.
삼대(三大)를 보임
其爲旨也(기위지야)여 冥真體於萬化之域(명진체어만화지역)하고
그 종지(宗旨)가 됨이여, 참다운 본체는 만 가지 변화의 영역에 가만히 부합하고
기위지야(其為旨也)여 명진체어만화지역(冥真體於萬化之域)하고
법계를 설명한 화엄경의 뜻도 되지만, 법계 그 자체의 뜻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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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위지야(其為旨也) 그 종지가 되며 라고 하는 것은 물론 화엄경의 종지 그런 의미이면서 법계의 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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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운 본체는 만가지 변화의 영역에 가만히 부합하고. 미세 먼지에서부터 저기 은하계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일체 존재의 참다운 본체는 만 가지 변화의 영역에 가만히 부합하고.
얼마나 많은 변화를 일으킵니까? 미세먼지에서부터 당장에 우리 눈 앞에 펼쳐진 삼라만상, 산천초목 이런 것들도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변화무쌍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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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우리가 저 태양은 언제나 같은 태양인 것으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또 그렇게밖에 우리 눈에는 안보여요. 변함없는 태양이죠. 몇 백 년 전에도 그 태양이고 몇 십년 전에도 그 태양이고 오늘도 그 태양이고.
끊임없이 그렇게 우리 앞에 변함없이 나타나는 태양이지만 가장 변화가 심한 것이 태양입니다.
저렇게 빛을 발하는데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태워서 빛을 저렇게 발하는 거예요?
그래 그 빛이 우리에게까지 닿아서 이런 산천초목 일체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1초에 소모하는 에너지의 양이 우리 지구의 인간들이 아무리 에너지를 많이 사용한다 하지만 태양이 1초 동안에 뿜어내는 에너지 양은 우리나라, 우리나라 뿐만아니라 지구에서 수백년 사용하는 에너지보다도 더 많습니다.
그와 같이 변화무쌍한 것이 태양이예요.
우리는 보는 눈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까지 모르죠. 그건 전문가들 과학자들이나 아는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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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변화의 영역이 광범위한데 거기에 다 참다운 본체는 다 스며있다. 그런 이야기고. 또 화엄경의 설명이 또한 그와 같다. 이렇게도 볼 수가 있습니다.
顯德相於重玄之門(현덕상어중현지문)이로다
덕의 모습[相]은 깊고 현묘한 문에 드러났도다.
현덕상어중현지문(顯德相於重玄之門)이로다.
덕의 모습[相]은 깊고 현묘한 문에 드러났도다.
여기 ‘지취가 깊고 미묘하다’ 라고 제목도 그러하려니와 글 내용도 까다롭고 어렵습니다. 쉽게 드러나지가 않아요.
덕의 모습 속에 말하자면 어떤 이치가 잘 나타나 있는데 앞에는 체(體)를 이야기 하는 것이고 여기서는 상(相)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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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는 세가지 속성이 있어요.
그 가운데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체(體)가 있고, 상(相)이 있고 작용[用]이 있다. 여기는 본문에 벌써 진체(真體)이렇게 표현했고, 덕상(德相) 이렇게 표현했기 때문에 앞의 구절은 모든 존재의 체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여기는 나타난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
사람만 하더라도 우리가 잘못된 생각 때문에 자기처지가 어떻다, 자기 복이 어떻다, 자기 생긴 것이 어떻다, 자기 키가 어떻다. 전부 다른 것과 비교를 해서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해서 비하를 하거나 조금 낫게 평가를 하거나 그렇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알량한 평가 기준이고 순수하게 본래 그대로의 본체와 그런 덕상 이것을 가지고 본래의 입장에서 보면요 완전무결한 존재입니다.
설사 코가 삐뚤어졌다 라고 합시다.
그 한 가지 예를 가지고 이야기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안 삐뚫어졌는데 이 사람은 삐뚫어졌으니까 얼마나 특색이 있고 아름답고 미묘합니까? 사람 찾기도 좋고요.
긍정적으로 보고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그렇습니다.
그 모습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덕상이예요.
그것도 다 그냥 밖으로 단순하게 그렇게 우연히 코가 삐뚤어지게 태어난 게 아니예요.
다 그것도 소이가 있고 까닭이 있고 원인이 있고 그 속에는 이치가 담겨져 있어. 그런 걸 낱낱이 들어서 이야기 할 수는 없죠.
用繁興以恒如(용번흥이항여)하고
작용은 번다하게 일어나지만 항상 여여하고
용번흥이항여(用繁興以恒如) 여기 용(用)자가 있네요.
그러니까 체(體) 상(相) 용(用)이 다 드러났습니다.
기위지야(其爲旨也) 그 화엄경의 오묘한 뜻은 체로서는 그렇고 현상으로서는 그렇고 그다음 작용으로서는, 작용은 번다하게 일어나지만 항상 여여하고.
*
우리가 일상을 살면서 얼마나 천변만화합니까. 또 저 산천초목은 얼마나 천변만화 합니까. 그렇지만 그 작용은 항상 여여해. 작용은 번다하게 일어나지만 항상 여여하다. 그것도 역시 중도적인 입장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설명한 거죠.
사람이 그렇고 일체 산천초목이 그렇고 만물이 그렇고 저 미세먼지가 그렇고 저 태양이 그렇고 저 은하수가 그렇고 다 이런 이치에 포함되지 아니한 것은 없습니다.
智周鑑而常靜(지주감이상정)이로다
지혜는 두루 비추지만 항상 고요하도다.
지주감이상정(智周鑑而常靜)이로다
여긴 지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체와 상과 용 한마디로 법계의 뜻이 아주 심심미묘한데 그것을 이해하기 쉽도록 좀 헐어서 이야기하면 체와 상과 용이 있다. 체(體)와 상(相)과 용(用)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이해하는 입장은 지혜입니다.
지혜는 두루 비추지만 항상 고요하도다.
*
깨달은 사람의 지혜는 끊임없이 환하게 비춥니다.
그렇다고 무슨 눈에 보이는 뚜렷한 어떤 모습이 있는 건 아닙니다. 항상 고요한 입장에서.
이것도 우리가 지혜가 밝게 되려면 마음이 흔들리면 안됩니다. 조용해야 돼요.
우리가 왕복서를 공부하려는 자세도 그렇습니다.
일단 우리가 입정을 왜 합니까?
고요한 어떤 마음을 갖추었을 때 비로소 한구절 한마디의 말이 제대로 들어갑니다.
그것이 지혜와 선정의 관계입니다.
*
앞에는 지혜라고 쓰였고 뒤에 상정(常靜)이라고 하는 것은 선정의 입장을 이야기한다고 할 수가 있어요.
물이 고요해야 물의 모든 것들이 다 비치듯이.
고기가 노는 것도 비치고 하늘에 날아가는 새의 그림자도 비치고 그것이 그야말로 해인(海印) 아닙니까.
그러한 이치를 또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진(眞)과 망(妄)이 융합하다
眞妄交徹(진망교철)이라 卽凡心而見佛心(즉범심이견불심)이요
진(眞)과 망(妄)이 서로 사무치니 범부의 마음에 나아가서 부처의 마음을 보도다.
진과 망이 융합하다 해서 진망교철(眞妄交徹)이라 즉범심이견불심(卽凡心而見佛心)이요
참 좋은 구절입니다.
우리가 중생들의 어떤 마음씀씀이는 망상이라고 하고 망령된 생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의 입장, 본래의 마음, 참마음을 그대로 잘 간직하고 언제나 참마음 자리에서 생활해 나가는 입장을 성인들의 어떤 진의 경계다 이렇게 봅니다.
*
그래 진(眞)과 망(妄)을 늘 갈라놓고 이야기를 해요.
경전에는 진과 망에 대한 이야기가 무수히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서 이런 관계예요.
바다에 물이 있다. 물은 진에 해당돼요. 그런데 바람이 불어서 물결이 쳐요. 물결은 망이라고 하는 거야.
물결은 끊임없이 변해, 달라.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치느냐에 따라서 물결이 달라. 그건 물을 이야기하자고 하는 게 아니죠.
우리 마음 씀씀이를 이야기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
우리가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수승한 공부를 하고 있으니까 우리 마음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어요.
이 순간 우리 마음보다 더 좋을 수는 없어.
언제 우리가 이렇게 좋은 기분, 좋은 정신상태를 가졌던가 되돌아보면 별로 없어요.
그런 정도로 우리가 마음이 좋지만 그러나 그 역시 마음의 물결이라. 마음의 물결이라고요.
반대로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우리 이 정신상태의 반대의 현상이라 하더라도 그 또한 마음의 물결이야.
물결은 좋은 물결이든 안 좋은 물결이든 좋은 감정이든 좋지 아니한 감정이든 전부 망이야. 물결이라고, 마음의 물결이라.
그런데 어떻습니까?
물과 물결을 나눌 수 있나요?
물과 물결은 나누어지지가 않습니다. 그게 교철(交徹)이야.
진과 망이 서로 사무친다 그랬어요.
*
지금 여러분들은 잘 앉아 있습니다. 이것은 몸이 할 수 있는 가장 뭐라고 할까, 표본에 가까운 몸짓입니다. 우리가 걸음을 걸어도 그것도 몸짓이요 누워있어도 몸짓이요 좌선을 한다고 있어도 몸짓이고 운동을 해도 그건 하나의 몸짓입니다.
그런데 어떤 몸짓도 몸을 빼고 달리 몸짓은 없습니다.
몸이 그대로 몸짓입니다.
몸과 몸짓은 둘이 아니예요.
물과 물결은 둘이 아니야.
그런데 그 몸짓은 우리가 앉아서 좌선을 하나 경을 보나 누구하고 싸우거나 아니면 달리거나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 역시 몸짓이야. 몸을 떠나서 몸짓이 따로 없어요.
이런 문제는 우리가 무수히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
몸과 몸짓의 관계가 그렇고 물과 물결의 관계가 그렇고 금과 금불상의 관계가 그렇고 전단나무 향기가 그렇고, 전단나무를 가지고 예를 들어서 불상을 만들거나 코끼리를 만들거나 생선을 만들거나 무얼 만들어도 그것은 향나무 향기가 날 뿐이고 전단향기가 날 뿐입니다. 형상은 뭘 만들어도 아무 상관이 없어요.
전단나무를 가지고 비유를 하고 금을 가지고 비유를 하고 물을 가지고도 비유를 하고 여러 가지로 이것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려고 깨달으신 분들은 무수한 비유를 가지고 이야기 합니다.
그게 서로 사귀어져 있어요. 한덩어리야.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相共和)야. 상사와 열반이 하나라고. 진망교철(真妄交徹)이야.
*
그 다음 말이 중요합니다.
즉범심이견불심(即凡心而見佛心)이요
범부의 마음에 나아가서.
우리가 범부라고 합시다. 좀 미안하지만 우리는 모두 범부예요.
그런데 뭐라고? 부처의 마음을 보도다. 우리의 범부 의 마음에 나아가서 부처의 마음을 본다.
범부 마음 빼고 부처 없습니다.
물결 빼고 물이 없어요.
금으로 만든 비녀나 반지나 사람을 죽이는 칼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그 칼모양을 제외하고 금이 따로 없습니다.
정말 소중한 것은 중생의 마음인 거예요.
범심에서 불심을 본다.
범심 떠나서, 범부의 마음 떠나서 어디서 불심을 보겠어요? 아뢰야식은 위중생심이니 그랬습니다.
아뢰야식은 곧 중생심을 말하는 것이다.
중생심은 그대로 진심이예요. 뭉뚱그려서 이야기 하자면 결론적으로.
얼음이 그대로 물이요. 얼음의 본체는 물이라. 온도에 의해서 얼음으로 나타났을 뿐이지.
얼음 제거하고 물 없습니다.
즉범심이견불심(即凡心而見佛心)이요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아주 철두철미하게 인식해야 되고 설명할 수 있어야 되고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서 설명할 수 있어야 됩니다.
몸과 몸짓 얼마나 근사한 표현입니까.
몸짓 놔두고 그 사람이 누구를 때리든지 아니면 험한 욕을 하든지 무슨 짓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몸짓은 몸을 떠나서 있는 몸짓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행도 할 수가 있고 보살행도 할 수가 있고 악행도 할 수가 있고 그러니까 이 불심이라고 하는 것 여기 범부의 마음에서 불심을 본다고 하는 이 불심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진심이고 진여고 법성이고 자성이고 여러가지로 표현할 수가 있는데.
이건요 한순간도 우리가 떠나 있는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제도 말씀드렸듯이 0,001mm의 간격도 없이 이걸 내가 직접 사용하고 있으면서 따로 찾으려고 하는 것은 글쎄 우리는 찾고 났으니까 하는 소리인지는 모르지만 이걸 따로 찾으려고 하는 것은 절대 잘못된 것입니다.
견성 성품을 봐야되겠다. 불성을 봐야되겠다. 그 노력하고 그런 마음을 쓰고 하는 것이 곧 불성인데 물로 물을 씻는 이치와 같은 거예요.
이것 참 우리가 철저히 알아야 됩니다.
그런 이치를 제쳐놓고 따로 앉아가지고 그런 시간을 보낸다고 하는 것은 꼭 그러려고 앉아있는 건 아니지. 아닌 경우가 많아.
*
대체적으로 그것을 찾으려고 앉아있다고 치더라도 그거 아니예요.
이미 앉아있는 것이 뭐가 앉아있는데? 그거 불성이 앉아있는 거예요. 불성의 한 작용이라.
그런데도 그렇게 앉아가지고 어쩌자는 말이요? 기가 찬 일이 아니요? 그거 따지고 보면.
몸은 무슨 몸짓을 하더라도 몸이야.
*
몸과 몸짓은 도저히 나눌 수가 없어요. 누워있거나 앉아있거나 걸어다니거나 그 어떤 작용도 전부가 몸짓이야. 몸 떠나서 어떻게 몸짓이 있나요.
불성 떠나서 어찌 내가 있나요.
내가 무엇을 하든 싸움을 하든 도둑질을 하든 무엇을 하든간에 나야. 불성이라고. 불성의 작용이라고.
*
즉범심이견불심(即凡心而見佛心)이요
범부의 마음에 나아가서 불심을 본다. 다 봐버렸어. 다 활용하고 있어요.
그래 저의 강의를 들으면 견성 시켜 주는 것이 순간이라. 그저 몇 초 2, 3초면 견성시켜줘버려. 아 그렇게 되어 있잖아요.
내가 어디 엉뚱한 이야기 했나요?
이치에 안맞는 이야기 했나요?
이치에 안맞다면 이거 보십시오.
즉범심이견불심(即凡心而見佛心)이라고 했잖아.
몸짓 그대로가 몸이라.
몸짓은 누워서 잘 수도 있고 앉아있을 수도 있고 어디 산책을 할 수도 있고 그렇지.
그 무엇을 한다고 해서 그게 몸이 아닙니까?
우리가 범부로서 탐심도 좀 내고 어리석은 짓도 좀 하고 진심도 좀 내고 자기 잘못 감추려고 그렇게도 좀 하고 어떨 때는 또 마음이 열려가지고 그런 모든 것들을 다 화반탁출해서 발로참회(發露懺悔)할 수도 있고 여러가지 현상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
그게 꼭 착한 일 해야만 부처고 악한 일 하면 부처가 아니고 그런 차원이 아니예요.
대개 ‘아 그 사람은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다’ 착하고 선한 사람을 그렇게 표현하죠.
그거는 일부맞아요. 아주 선한일을 잘하고 보살행을 잘하고 하면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다. 일부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건 화엄경 차원하고 다르고 선불교 차원하고도 달라.
선불교나 소위 화엄경 차원에서 부처가 어떤 것이냐 라고 했을 때는 그건 이제 우리가 욕을 하면 누구를 향해서 욕을 한다 시기질투를 한다 ‘그거 부처가 아니고 어떻게 시기질투 할 수 있나요?’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부처가 아니고 어떻게 시기질투하고 남을 욕하고 남을 때릴 수 있는 능력이 있나요?’
선불교나 화엄경의 불교에서는 최소한도 부처를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시기질투하고 탐진치 삼독 팔만사천 번뇌를 부리고 거기에 꽉 차있는 것은 부처하고 거리가 멀다. 대개 일반불교에서는 그렇게 이야기 하죠. 번뇌가 다 사라져야 하고 자나깨나 좋은 일만 해야 되고, 자고있을 때 어떻게 좋은 일을 합니까? 자고 있을 때 자고 있을 뿐이지 어떻게 좋은 일을 합니까?
요거요 세밀하게 따지면 이 이치가 너무 지당한 말씀입니다.
달리 우리가 찾으려고 하는 것은.
그런 이야기 많잖아요. 선시같은 데도 보면 어떤 비구니 스님의 오도송이라고 하는 것 하루종일 봄을 찾아서 들로 산으로 헤매다가 집에 돌아오니까 뜨락에 매화가 피었는데 거기에 봄이 가득하더라.
이런 이야기 부지기수잖아요.
*
진과 망이 융합해있다.
그럼 결론은 어떻게 하란 말이냐?
보살행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치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이런 이치 가르쳐 주고 또 인과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인과의 이치를 몰라서 함부로 막살고 그 과보를 받느라고 지옥생활을 하고 하는 사람에게는 인과의 이치를 가르쳐주고 그도 저도 어떤 진리의 가르침이 아니면 의식주 문제라도 가지고 보살행을 하고.
의식주 문제가지고 보살행 많이 하죠.
요즘 우리 스님들도 참 그런 것 많이 합니다.
급식활동같은 것 참 많이 하잖아요.
내가 급식활동할 때 곡 부처님 법을 한마디라도 일러줘라. 법을 담아서 식사를 대접해라.
그런 권고를 많이 하는 입장입니다.
事理雙修(사리쌍수)라 依本智而求佛智(의본지이구불지)로다
사(事)와 이(理)를 쌍으로 닦으니 근본지혜에 의지하여 부처의 지혜를 구하도다.
사리쌍수(事理雙修)라 의본지이구불지(依本智而求佛智)로다
사(事)와 이(理)가 쌍으로 닦으니 근본지혜에 의지하여 부처의 지혜를 구하도다.
부처의 지혜를 따로 구하는 것은 후득지(後得智)라고도 말할 수가 있고, 본지는 근본지(根本智)라고 할 수도 있는데 본래 우리가 갖추고 있는 지혜입니다.
본래 성불되어 있다, 본래 열반되어 있다. 이런 말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본지(本智)에서 답을 찾아야지. 그 외는 답을 찾을 길이 없어요.
찾는다 하더라도 본지를 떠나서 따로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문수지혜 근본지혜 일체처문수사리보살 이런 표현들을 수없이 남발하고 있는데 그것이 전부 우리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그 지혜에서 부처의 지혜를 구한다.
사(事)와 이(理)가 나눠놓고 이야기 하면 그렇게 나누어서 설명이 되지만 또 미세하게 들어가면 같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쌍수라. 같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모든 것이.
사(事)를 제대로 알면 거기에 이(理)가 따라 오고 이(理)를 제대로 알면 사(事)가 따로 오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본지와 후득지 새로 얻어지는 지혜가 둘이 아닌 거예요.
2. 사사무애(事事無碍)
걸림이 없는 이유
理隨事變(이수사변)이라 則一多緣起之無邊(즉일다연기지무변)이요
이(理)는 사(事)를 따라 변함이라 곧 하나와 많음이 연기함이 무변함이요
사(事)와 사(事)가 걸림이 없다.
걸림이 없는 이유를 이야기 하는데 이수사변(理隨事變)이라 즉일다연기지무변(則一多緣起之無邊)이요.
이(理)라고 하는 것을 사(事)를 따라 변함이라 곧 하나와 많음이 연기함이 무변함이요 그랬습니다.
*
사(事)는 펼쳐놓고 보면 참 많죠.
이(理)는 하나입니다. 하나로 통일 되어 있고.
예를 들어서 몸으로써 별별 동작을 다하더라도 그건 많은 거죠.
하나의 몸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몸이 별별 동작을 하는 거예요.
걸어다니기도 하고 무슨 운동도 하고 무변하게 그 연기가 이(理)와 사(事)가 연기(緣起)하는 것, 하나와 많음이 연기하는 것이 끝도, 갓도 없습니다. 천변만화하는 거죠.
우리가 그렇게 살아오고 있고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이수사변(理隨事變)이라.
이(理)는 사(事)를 따라서 변한다.
일다연기지무변(一多緣起之無邊)이라. 요런 것도 아주 미세하게 설명하기로 하면 조금 골치가 아프니까 대충 이렇게 설명하고 넘어갑니다.
*
60쪽 요건 내가 이런 글을 내가 써야 되나 말아야 하나 앞에서도 잠깐 언급을 했는데 한 번 밑에서 네 번째 줄까지 같이 한 번 읽겠습니다. 여러분들 다 해당되는 내용이예요.
걸림이 없는 이유로서 이(理)가 사(事)를 따라 변한다는 것을 세상사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면 사찰에는 이판(理判)이 있고 사판(事判)이 있다.
사찰의 행정이나 살림살이를 맡아서 그 소임을 다하는 사람을 사판이라 하고 경전을 공부하거나 참선이나 염불을 위주로 하는 사람들을 이판이라 한다. 이판들은 사판을 만나서 그의 능력과 지위를 잘 활용하면 이판으로서의 부족한 면을 보완하여 자신을 마음껏 변화시킨다. 그래서 그의 삶이 윤택하고 이름도 빛난다. 그러나 사판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 이판은 아무리 능력이 있고 실력이 있다 하더라도 밖에서는 알아 줄지 몰라도 그의 삶은 언제나 곤고하다.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될 뿐이다.이것이 이(理)가 사(事)를 따라 변하는 도리이다.
남자와 여자의 이치도 그와 같다. 남자는 여자를 잘 만나면 여자의 내조에 의지하여 크게 성공할 수 있으며, 여자도 남자를 만나는 데 따라 왕비가 될 수도 있고 일개 시골 농부의 아내나 거지의 아내가 될 수도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참 기가 막힌 도리죠?
이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사입니다. 세상사예요.
事得理融(사득이융)이라 則千差涉入而無礙(즉천차섭입이무애)로다
사(事)는 이(理)를 얻어서 원융함이라 곧 천 가지 차별에 들어가도 걸림이 없도다.
사득이융(事得理融)이라 즉천차섭입이무애(則千差涉入而無碍)로다 이수사변도 그렇고 사득이융이라. 요게요.
글이 조직이 얼마나 잘 되었는지 이거를 한 천 번쯤 읽으면 알까, 제대로 들어올까. 자꾸 우리가 읽자고 하는게 우리가 공부 시작하기 전에 다같이 낭랑한 소리로 읽으니까 얼마나 근사해요.
뜻을 모르고 넘어가는 것은 모르고 넘어가고 또 그냥 싹 가슴에 스며드는 것은 또 가슴에 스며드는 그대로 그게 우리 마음을 정화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풀이를 제대로 하는지 못하는지 저도 모르겠어요. 이런 풀이를 듣고 마음에 감동을 받는 것, 이것도 물론 나쁘진 않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 이전에 읽으면서 감동을 받는 그런 순간이 더 우리 마음을 쉽게 정화한다는 뜻입니다.
*
사득이융(事得理融)이라 사(事)는 이(理)를 얻어서 원융해진다. 곧 천 가지 차별에 들어가도 걸림이 없도다.
그렇죠. 사는 아무리 많고 많은 차별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은 하나의 이치라.
몸은 별별 짓을 평생을 살아오면서 아니 하루의 몸동작만 하더라도 여러 수천 수만 가지의 동작을 자아냅니다.
그런데 뭐라고?
하나의 몸이다.
하나의 몸에서 별별 동작을 다 하는 거예요. 식당에도 가고 화장실에도 가고 별별 동작을 다하는 거예요.
천차섭입이무애(千差涉入而無碍)다. 그래도 아무런 걸림이 없어. 몸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 걸림이 없어.
또 도로 탁 이렇게 책상 앞에 앉아서 점잖게 공부하는 거예요. 참 신기한 이치 아니요.
이(理)와 사(事)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전부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숨을 쉬고 사는 거야
우리가 어떤 짓을 했다, 어떤 말을 했다, 어떤 행동을 했다 하는 것이 그게 그대로 무공철추(無孔鐵槌)가 되어서 그대로 현상으로 남아있다면 그거 숨막혀서 어떻게 살아요. 걸림이 없어야지.
그게 걸림이 없어야 우리가 숨쉬고 사는 거예요. 또 걸림이 없고. 본래 걸림이 없고.
*
야, 1억짜리 재를 지내는데 우리도 여기서 동참을 하고 있습니다. 1억짜리 재. 근사하지요?
좋은 공부를 하다가 또 쓸데 없는 그런.
‘야 우리 절에는 한 천만원짜리 안들어오나. 일억은 고사하고 한 천만원짜리만 들어와도 좋겠다’
아, 참 우리가 좋은 인연입니다. 이런 것도.
그래 내가 오늘 총무가 왔길래 다시 1억을 더 버는 이치를 가르쳐 줬지.
방장스님이 말 못한다. 주지도 체면상 말 못한다. 총무가 얼굴에 철판을 깔고 말을 해라.
1억짜리 재에는 최소한도 5만원짜리 내지 10만원 정도를 보시를 해야 1억짜리 재에 오는 도리가 된다.
총무가 그 말 한마디만 딱 하라 말이야.
그러면 오늘 2천명이 오잖아? 2천명이 십만원 이상씩 놨다.
전부 그 회사의 간부들 그 회사와 연관되는 사장들
전부 간부들만 오는 거예요.
불교 역사상 최고 큰 재입니다 오늘.
아 진짜예요. 그런 사람들이 오는데 2천 명이 10만원씩 놓으면 얼마죠? 2억이지?
1억짜리 재에 2억을 벌 수 있는 코치를 내가 했다니까. 이거 편집하지 말고 그대로 올려.
방장스님도 말 못하고 주지스님도 체면상 말 못해. 그런데 총무는 할 수가 있어.
총무는 그 말 했다고 방장스님이 ‘야 망신시켰다’고 나가라면 나가면 되는거야. 동화사 2억 벌어주고 나가는데 뭐 상관있나요.
그런 이치가 있는 거예요.
함부로 시퍼런 거 만원짜리 들고 설치지 말란 말이야.
오늘은 그런 날이 아니다.
안그래요? 딱 이치가 맞잖아요.
이 좋은 황금같은 기회를 놓치면 안되지.
나도 일찍이 사판을 했으면 잘 할 뻔했는데
사판을 했으면.
걸림이 없는 모양
<1>모든 법이 상즉상입하며 자유자재한 이치
[諸法相卽自在門]
故得十身歷然而相作(고득십신역연이상작)하고 六位不亂而更收(육위불란이갱수)로다
그러므로 열 가지 몸이 분명하고 또렷하나 서로서로 이루고, 여섯 가지 지위가 어지럽지 아니하나 새롭게 거두어 정리하였도다.
걸림없는 모양 이게 제대로 나왔네.
이건 십현문(十玄門)이라고 해서 고십현 신십현 여러가지 복잡한 이야기가 있지만 그건 다 빼버리고 여기에 기재한 내용만 가지고 말씀드립니다.
모든 법이 상즉상입하며 자유자재한 이치, 문(門)자를 내가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
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
*
화엄경의 논서 내지 주석서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이 십현연기, 십현무애연기, 십현무애문, 십현문 여러가지 이름으로 하는데 오늘 여기서 부터가 그 십현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아주 까다롭고 최고로 어렵다고 하는 것을 청량스님은 얼마나 문장이 뛰어나고 얼마나 깨달음이 훤출하던지 전부 시어(詩語) 최고의 시어를 동원해서 아주 기분좋게 즐겁게 이해하도록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전부는 다 아니라 하더라도.
모든 법이 상즉상입하며 자유자재한 이치다.
모든 법이라고 하는 것은 일체 이치 아니겠습니까.
남자와 여자도 상즉상입하고
이판과 사판도 상즉상입하고
몸과 몸짓도 상즉상입하고
물과 물결도 상즉상입하고
금과 금불상도 상즉상입하고
전단나무와 전단나무로 조각한 불상 보살상도 상즉상입하고
일체 존재가 그렇게 이루어져 있습니다.
거기에 눈을 뜨지 못한 우리들은 늘 자기의 탐진치 삼독이 거기에 개재되면서 어그러지기 시작하는거야.
‘남자가 그래서’ 또 ‘여자가 그래서’ ‘주지가 그렇게 살아가지고’ 또 ‘객은, 학인은 왜 그렇게 학인답지 못하는가?’ 등등 그래서 주인이 보면 객 같은 객이 없고 객이 보면 주인 같은 주인이 없다. 이런 말이 나오는거 아닙니까? 그게 뭐예요?
전부 탐진치 삼독이 개재가 되어서 그래.
그것만 딱 빼버리고 거기에 있는 그대로 보면 전혀 문제 없어.
전부 객다운 객이고 주인다운 주인이야.
남자다운 남자이고 여자다운 여자야.
*
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
상즉되어 있고 상즉되어야 하고. 그래서 우리는 걸림없어야 한다. 자유자재 되어야 한다.
자유자재하게 살자 말이야.
이 소중한 인간의 몸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왜 그렇게 자유롭지 못하고 자유자재하지 못하고 여기에 걸리고 저기에 걸리고 하면서 사느냐.
너무 아깝지 않느냐
이 소중한 존재를 타고 났으면서.
*
고득십신역연이상작(故得十身歷然而相作)하고 육위불란이갱수(六位不亂而更收)로다
그러므로 열 가지 몸이 분명하고 또렷하나 서로서로 이루고, 상작(相作) 서로서로 이루고 허공신이 중생신이 되고 중생신이 보살신이 되고 보살신이 불신이 되고 불신이 지신이 되고 성문신이 되고 연각신이 되고.
저 앞에서 십신 나왔던 그 내용 그대로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십신이 따로 따로 존재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전단향 나무를 가지고 물고기를 조각했을 때는 물고기 모습 불상을 조각했을 때는 불상모습 보살상을 조각했을 때는 보살상모습, 코끼리를 조각했을 때는 코끼리 모습.
물이 바람결에 따라서 크게도 치고 작게도 치고 기온이 낮으면 얼기도 하고 기온이 높으면 끓기도 하고 그게 전부 십신이야. 그런 현상들이 전부 십신이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야.
*
육위불난이갱수(六位不亂而更收)하며
여섯 가지 지위가 어지럽지 아니하나 새롭게 거두어 정리하였도다. 갱수 정리했다. 그렇게 내가 표현했어요.
여기 신십현 고십현에 대해서 약간 언급했습니다.
육위라고 하는 것은 여기 십신도 다시 언급했어요. 넘기면 64쪽에 넘기면 열 가지 몸 이것이 저 앞에서 봤던 십신을 이루어서 시성정각했다 그랬죠.
십신초만에 시성정각하시니 앞에서 그랬습니다.
여기도 우리 모두가 이 십신을 다 갖추고 있어요.
때에 따라서 이러한 몸도 나타날 수 있고 업보의 몸을 제일 잘 나타내지, 중생심도 제일 잘 나타내고 업보심도 제일 잘 나타내.
그다음에 중간단락에 보면
육위란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등각 묘각 큰 것만 들어서 육위라고 표현을 합니다.
이 여섯가지의 보살 수행지위가 펼쳐 놓은 입장 항포문(行布門)이라 그러지요.
항포문 입장에서는 어지럽지 아니하여 각각 단계가 분명히 있어요. 십주가 있고 십행이 있고 십주 안에도 열 가지 단계가 있고 십행안에도 열가지 행이 있고 그런 게 분명히 있지만.
원융한 입장 원융문(圓融門), 항포문 원융문 본격적으로 공부하면자주 등장하는 낱말입니다. 항포문(行布門) 원융문(圓融門) 낱낱이 차별한, 통일된 또 원융해서 통일된 하나의 입장이 있는 거에요.
여기에서 우리가 여기 사부대중이 함께 있습니다.
항포문의 입장에서는 사부대중, 거기서도 또 이제 잘게 쪼개서 분별하면 절에 1년 다닌 사람, 2년 다닌 사람, 중된지 1년 된 사람, 2년 된 사람, 3년 된사람, 10년 된 사람, 여러 가지로 사미도 있을 수가 있고 비구도 있을 수가 있고 비구니도 있을 수가 있고 사미니도 있을 수가 있고 여러 가지로 쪼개고 분별할 수 있고 차별화할 수 있는 것을 항포문 그래요.
*
그다음에 뭡니까. 하나인 사람이야.
화엄경은 이런 이치라.
차별하면 차별한 사람만 괴로워, 하나인 사람이라고. 그게 원융한 입장이라.
한 사람이 여섯 가지 지위뿐만 아니라 52위 단계까지도 다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역시 모든 법은 상즉상입하여 걸림이 없는 이치다.
*
이러한 이치가 화엄경에서 존재의 실상을 제일 잘 밝힌 것이고 그 존재의 실상이라고 하는 것은 법계라고 하는 한마디 말로 뭉뚱그려서 이야기 하고 있죠.
법계라고 하는 것.
늘 대전제는 법계입니다.
화엄경 공부의 대전제는 법계(法界)예요.
그것을 가장 잘 설명한 것이 뭐라고? 대방광불화엄경이고 그것을 세세하게 부열현미(剖裂玄微)하고 소확심경(昭廓心境)했다고 했잖아요.
아주 현미하고 미묘한 미세한, 미세 미세 극미세한 입장까지 극미세한 이치까지도 다 분석하고 쪼개고 낱낱이 나열해서 설명한 것이 또한 화엄경이다.
*
우리 인간은 말할 것도 없고 산천초목 산하대지 전부가 그속에 표현되어 있다. 그것을 늘 잊어버리면 안돼요.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화엄경 만을 설명한 것이 아니라 화엄경을 통해서 모든 존재의 이치 미세먼지에서부터 저기 태양과 은하계까지 그런 거대한 별들의 이치까지 전부다 뭉뚱그려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화엄경이다
<2> 넓음과 좁음이 자유자재하여 걸림이 없는 이치
[廣狹自在無碍門]
廣大即入於無間(광대즉입어무간)이요 塵毛包納而無外(진모포납이무외)로다
광대함은 곧 사이가 없는 데까지 들어가고, 먼지와 터럭은 밖이 없는 것까지 에워쌌도다.
아침에도 말씀드렸지만 분명히 이 자리는 나란다 대학의 한 교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제가 확신합니다.
우리가 여기 지금 나란다 대학의 분교에 시공을 초월해서 화엄경은 늘 시공을 초월한 입장이니까.
뭐라고 했죠?
상설(常說) 변설(徧說) 항상 설법하고 있고 어디에서든지 설법하고 있다. 이게 상설변설.
아침에도 그런 걸 느꼈는데 지금 또 우리가 이렇게 왕복서를 합창 하니까 꼭 나란다 대학의 동화사 분교에 와 있는 것 같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틀림없는 사실이예요. 내가 듣기 좋아라고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64페이지 밑에.
*
넓음과 좁음이 자유자재하여 걸림이 없는 이치라.
모든 존재는 우리 육안으로 볼 때 넓은 것도 있고 좁은 것도 있는데 그것은 그냥 대충 보고 하는 말이고 보다 더 깊은 지혜의 안목을 가지고 보면 넓음과 좁음이 자유자재하여 걸림이 없다.
아주 좁은 곳에 넓은 것이 들어가기도 하고 아주 작은 것이 아주 넓은 것을 포함하기도 한다. 다 에워싸기도 한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
광대즉입어무간(廣大即入於無間)이요 진모포납이무외(塵毛包納而無外)로다
광대함은 얼마나 광대한가? 그 사이가 없는 데 까지 들어가고, 온 우주가 미세먼지 속에 들어간다 이 소리입니다.
저 드넓은 우주가 수십 억 광년을 달려도 거기에 이르지 못할 정도의 먼 공간, 먼 거리 그것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세먼지 그 작은 데까지도 들어간다.
또 진모(塵毛), 먼지와 터럭은 밖이 없는 데까지 에워쌌도다. 무외 제일 작은 것을 무외(無外)라고 합니다. 아무리 물질을 쪼개고 쪼개고 쪼개도 더 쪼갤 것이 있어요. 그것은 곧 바깥이 있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경지, 요즘 물질을 자꾸 쪼개는 기술이 발달해서 물질의 최소단위를 쿼크라고 표현하는데 그것보다도 더 작은, 밖이 없는 그것을 무외, 진모가 무외를 에워싼다는 뜻입니다. 바깥이 없는 것까지 에워싼다. 밖이 없는 것은 없어요.
광대한 입장에서는 무간에까지 다 들어가지만 반대로 미세먼지가 밖이 없는 것까지 다 에워싼다.
십억 광년, 천억 광년을 저 우주 바깥까지 달려간다 하더라도 거기에서 또 바깥이 있습니다. 또 바깥이 있어요. 바깥이 없을 리가 있습니까? 끊임없이 끊임없이 밖이 있습니다.
수십억 광년을 가고 거기서 또 같은 방향으로 동쪽이면 동쪽, 서쪽이면 서쪽, 한 방향으로 수십억 광년을 달려 간다 하더라도 거기에서 그쪽으로 또 그렇게 갈 곳이 있습니다.
그렇게 에워싼다. 이런 말인데 넓은 것과 좁은 것 이것이 사실은 깨어있는 안목으로 보면 걸림이 없고 자유자재 하게 오고가고 한다는 내용입니다.
이론은 그런데 이것이 우리가 실질적으로 우리 일상생활에서 어떤 예를 들어야 이게 우리 마음에 계합이 되는 사례가 될는지 그건 알 수가 없어요.
<3> 미세하게 서로서로 용납하면서 안립하는 이치
[微細相容安立門]
炳然齊現(병연제현)은 猶彼芥瓶(유피개병)이요
환하게 함께 다 나타남은 마치 겨자씨를 담은 유리병과 같고
미세상용안립문(微細相容安立門)
세 번째는 미세하게 서로서로 용납하면서 안립하는 이치라. 안립이라고 하는 말은 현재 있는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십현문을 가지고 이야기 하지만 모든 사물 하나하나에 이러한 이치가 포함되어 있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이것을 비유로 들자면
병연제현(炳然齊現)은 유피개병(猶彼芥瓶)이라.
환하게 함께 다 나타남은 마치 겨자씨를 담은 유리병과 같다 그랬어요.
*
관상 잘 보고 손금 잘 보는 사람은요 손금 딱 보고 그 사람 일생을 거의 알아맞춰요. 미래도 물론 알아맞춥니다. 그렇다고 내가 손금이나 관상보는 것을 장려하는 이야기는 아닌데, 그전에 아주 여러 해 전에 탄허스님 밑에 있을 때 백운도사라는 이가 가끔 찾아 왔어요.
탄허스님은 미래에 대해 관심이 있고, 관상이나 손금 주역 이런 데 상당히 관심이 있었어요.
세속에 있지만 주역을 탄허스님보다 훨씬 능가하게 잘 아는 백운도사라는 이는 탄허스님 도반이야. 그래 가끔 찾아오는데 항상 목이 쉬어 있었어요.
‘왜 저분은 목이 쉬었습니까?’라고 했더니 아들을 잃고 너무 오랫동안 통곡하고 통곡한 나머지 목이 가버렸다는 거야. 그래서 음성이 잘 안나는데 손금 잘 보고 관상 잘 보고 그래요.
손금 잘 보고 관상 잘 봐주는 값이 아주 싸.
소주 두 병이면 끝이고 더 이상 받지도 안해요. 과연 도인이야. 소주 한 두 병쯤 착 마시면 그만 기분이 좋아서 누구든지 봐줘요.
그 무렵 탄허스님 화엄경이 출판할 무렵이라 자주 오면 우리하고 이야기도 하고 그 분이 글을 잘 짓는데 글을 지어서 우리에게 보여주기도 하고 그랬어요.
같이 공부하면서 교정을 돕던 어떤 스님 중에 아주 아무리 봐도 훌륭한 청정비구가 있었는데 그 스님 손금을 이렇게 탁 보더니 본인이 깜짝 놀라면서 손을 탁 덮어 버리는 거야.
본인이 깜짝 놀라면서 손을 탁 덮어버려.
제일 훌륭한 청정비구로 알았는데 손금에 나타난 것은 그것이 아니었어.
야 나도 놀랬어요.
본인이 놀라는 거야 본인이. 너무나도 확실하게.
그래 그 사람의 일생이 그 손금 속에 다 들어 있는 거예요.
*
요즘은 과학자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고 하면 우리의 생명 속에 사람사람의 생명속에, 뿐만 아니고 만물의 생명 속에는 이 지구의 45억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이래요.
우리는 기껏해야 100년 미만의 역사를 가진 사람이라. 100년 미만의 역사를 가진 사람의 생명 속에 45억년 지구의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어요.
더 나아가서 요즘은 무슨 말을 하는고 하니 130억년의 우주의 역사가 한 사람의 생명 속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또 산이 무너지거나 언덕이 무너지면 그 단층의 흙, 작은 미세한 흙 한 덩어리를 가지고 그 언덕의 역사가 얼마가 됐는지를 알아요. 그런 세상이라.
그만치 발달했어요.
환하게 다 함께 나타나 있어.
뭐와 같이?
겨자씨를 담은 유리병과 같다.
깨끗한 유리병 안에 겨자씨, 아주 미세한 작은 씨, 작다고 할 때 우리는 겨자씨를 이야기 하죠.
겨자씨를 가득히 담아놓으면 그 겨자씨가 유리병을 통해서 환하게 비쳐.
초롱초롱하게 그 많은 숫자의 겨자씨가 유리병을 통해서 환하게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랬어요.
*
손금 속에 그 사람의 인생이 다 나타나 있고.
보이지 않는 우리의 생명속에 지구의 45억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다 나타나 있고 우주의 역사까지도 다 나타나 있다.
온갖 별들이 성주괴공 하는 역사까지도 우리의 100년 미만의 생명 속에 다 나타나 있다.
이게 그대로 화엄경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화엄경에서 보는 시간과 공간을 다 초월해서 다 그대로 원융무애하게 나타나 있는 거예요.
*
그런데 이러한 사실들을 지금 아주 고도로 발달한 과학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것을 2600년 전에 어떻게 이렇게 이야기를 했느냐고요.
그게 놀라운 일입니다.
오늘날 이렇게 과학이 발달해서 그런 것은 보통 상식화 되어 있는 정도지만 2600년 전에 어떻게 이런 이치를 알았느냐고.
아무리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이 뛰어나고 또 그 외 많은 불보살들의 깨달음이 출중하다손 치더라도 어떻게 그런 것을 알았느냐 이거예요. 사례를 들어서 예를 들어 흙 한 줌 속에 지구의 역사가 다 그 속에 있고 이렇게 구체적으로는 이야기 안했어도.
그거 낱낱이 이야기할 수가 없는 거죠.
*
병연제현(炳然齊現)은 유피개병(猶彼芥瓶)이라.
환하게 다 나타나 있다.
농부의 주름살, 이마에 있는 주름살 그 농부의 평생 지은 농사가 그 주름살 속에 다 나타나 있는 거예요.
아주 투박하고 거친 손바닥에 새겨져 있는 그 손금에는 그 농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어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손금 속에 다 나타나 있다. 이런 뜻입니다. 그거 어떻게 안 나타나 있겠어요? 다 나타나 있지.
그런 이치를 담고 있는 것을, 또 우주 법계의 모든 존재가 공히 그렇다고 하는 것을 이렇게 열 가지 이치로써 밝히는 것입니다.
<4> 동시에 구족하며 서로서로 상응하는 이치
[同時具足相應門]
具足同時(구족동시)는 方之海滴(방지해적)이로다
동시에 구족한 것은 바닷물의 물방울과 같도다.
네 번째는 동시에 구족하며 서로서로 상응하는 이치라 그랬어요.
동시에 다 갖추어져 있어. 한 순간에.
앞에서 이야기한 것 하고 거의 다르지 않은 내용인데.
동시에 구족해서 서로서로 상응하는 이치라.
이건 그 말만 떼어놓고 보면 무슨 말인지 모르죠.
모든 것이 동시에 다 갖추어져 있다 이 뜻입니다.
*
시간적으로, 아까 이야기 했듯이 사람의 생명, 그리고 기타 다른 모든 생명 속에 지구의 45억년의 역사가 갖추어져 있다.
마치 방지해적(方之海滴)이라.
바다의 한방울의 물과 같다.
바닷물 한 방울의 물에는 온 지구 위의 온갖 골짜기 동서남북 모든 산과 계곡의 골짜기 큰 개울 작은 개울 골짜기의 물들이 바닷물 한방울 속에 다 갖춰져 있다. 동시에. 동시에 다 갖추어져 있어요.
예를 들어서 무슨 낙동강 물이나 또 어느 다른 나라의 어떤 강의 양자강 물이나 황하강의 물이나 다 바닷물 하나 속에 갖춰져 있다.
얼마나 신기한 이야기입니까?
그 말이 신기한 것이 아니고.
그러한 이치가 신기하고 그러한 이치를 아는 것이 신기하고 알고 표현하는 것이 신기한 거죠.
*
청량스님이 그 옆에 구절에 보면
유피개병(猶彼芥瓶)
방지해적(方之海滴)
이건 전부 ‘같다’ 라고 하는 뜻입니다.
계속 글을 보면요 재미가 있어요.
병연제현(炳然齊現)은 유피개병(猶彼芥瓶)이요
구족동시(具足同時)는 방지해적(方之海滴)이라
바다의 한 방울 물과 같다.
겨자씨를 병에 담은 것과 같다.
전부 그렇게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공간도 시간도 다 원융무애하게 자유자재로 동시에 갖추고 있다.
*
이게 우리 생활에서 그러면 이걸 어떻게 이해하고 또 활용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것은 모든 존재의 실상은 이미 그렇게 갖추어져 있다. 그 무엇 하나도 이 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것들을 여기는 우주 137억 년의 역사와 정보를 모두 함유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다 썼네요.
<5> 하나와 많음이 서로 수용하면서 같지 아니한 이치
[一多相容不同門]
一多無礙(일다무애)는 等虛室之千燈(등허실지천등)이요
하나와 많음이 걸림이 없는 것은 텅 빈 방에 천 개의 등불을 밝힘과 같도다.
다섯 번째는 하나와 많음이 서로 수용하면서 같지 아니한 이치.
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
*
하나하고 많은 것, 서로 상반되지요. 상반되는 것이 아니고 걸림이 없다. 같은 것이다. 어떻게 보면.
하나하고 많은 것하고 같은 것이다.
등허실지천등(等虛室之千燈)이라. 하나하고 많은 것이 어째서 같습니까? 어째서 걸림이 없습니까?
분명히 다르지요.
돈 많이 가진 사람하고 적게 가진 사람하고 분명히 다르지요. 그 다른 것에 우리는 늘 목을 매고 거기에 시달리면서 삽니다.
그런데 그 깊은 이치를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걸림이 없고 동등하다고 하는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여기에 비유를 등허실지천등(等虛室之千燈)이라.
텅 빈 방에 천 개의 등불을 밝힌 것과 같다.
천 개의 등불을 가진 것과 같다.
이건 잘 생각해 보면 우리가 많이 가진 사람과 적게 가진 사람이 어떻게 보면 걸림 없이 같은 이치라고 하는 사실을 어쩌면 알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특별한 실례를 들지 않더라도.
*
텅 빈 방에 천 개의 등불을 밝힌 것과 같다.
천 개의 등불을 밝히는데 한 개를 밝혀도 그 나름대로 그 방을 밝히고, 두 개의 등불을 밝히면 두 개를 밝힌 만치 밝고, 세 개를 밝히면 세 개를 밝힌 만치 밝고, 열 개 스무 개 백 개 천 개의 등불을 이 방에다 불을 켰다 라고 하면 그 나름대로 다 그 빛의 가치를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서로 방해를 하지 아니해요.
그게 일다무애라. 많은 것과 적은 것이 걸림없이 공존한다.
서로 융합하면서 공존한다.
많은 등불이 있지만 내 빛만 비추겠다 하는 그런 등불은 없습니다.
천 개의 등불을 동시에 밝혀도 다 뒤섞이고 조화를 이루고 융화하고 그래서 걸림이 없이 존재하고 있다.
*
이 세상의 우리는 늘 많이 가진 사람, 적게 가진 사람, 이것 가지고 갈등하죠.
이것 가지고 갈등하고 시시비비 하는데 이런 이치는 우리가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내용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개 쉬운 말로 이런 말을 하죠.
일등은 꼴찌가 만든 것이다.
일등은 꼴찌가 만든 거예요.
꼴찌가 없으면 일등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다 그렇게 구성되어 있어요.
너무 우리가 단편적으로 보고 눈 앞의 것만 보기 때문에 거기에 시시비비 하고 서로 시기질투 하고 그렇게 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6> 비밀하게 숨고 나타남이 함께 성립하는 이치
[秘密隱顯俱成門]
隱顯俱成(은현구성)은 似秋空之片月(사추공지편월)이로다
숨고 나타남이 함께 성립됨은 가을 밤하늘의 반달과 같도다.
비밀하게 숨고 나타남이 함께 성립하는 이치라.
십현문 가운데 비밀은현구성문(秘密隱顯俱成門)이라.
십현문 중에서도 제일 멋지게 감동을 주는 구절이 바로 이 구절입니다.
은현구성(隱顯俱成)은 사추공지편월(似秋空之片月)이로다
또 같을 사(似)자 나왔죠. 그 앞에는 같을 등(等)자가 나왔고 그 앞에는 같을 방(方)자, 같을 유(類)자가 나왔죠.
유(類), 방(方), 등(等), 그 다음에 같을 사(似)자 그 옆에 같을 약(若)자가 나옵니다.
전부 비유를 들었기 때문에 이러이러한 비유와 같다
그랬습니다.
*
은현구성(隱顯俱成)은 사추공지편월(似秋空之片月)이로다
이것은 무슨 말인고 하니 은(隱) 숨은 면, 현(顯) 드러난 면 그것이 동시에 다 갖추어져 있다. 구성(俱成)이다. 숨고 나타남이 함께 성립됨은 가을 밤하늘의 반달과 같다.
*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을 두고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우리가 육안으로 보고 또 서로 가까이 지내면서 알고 있는 면과 그렇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면 도저히 옆의 사람은 평생을 같이 살면서도 알지 못하는 면이 반반입니다.
아는 면과 모르는 면이.
아무리 잘 안다 하더라도 모르는 면 반, 아는 면 반이이예요.
사추공지편월(似秋空之片月)이로다 가을 하늘의 반달과 같도다.
반달이 그믐달이라 하더라도 아니 초승달이라 하더라도 그게 어디 초승달 눈에 보이는 것 그것 뿐입니까. 나머지는 다 숨어 있죠.
또 이제 반달이 되면 반은 숨어있고 반은 드러나 있고. 만월이 되었을 때 잠깐 만월 그건 다 드러난 경우이고.
대개 다른 어느 일부분이라도 일부분은 다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그래요.
*
그러니까 눈으로 보이는 것 일시적으로 보아서 판단하는 것을 그 사람의 전부다 라고 이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대하는 것은 그건 큰실수입니다. 아주 큰 실수예요.
그 사람에게 어떤 장점이 있고 어떤 선한 면이 있고 어떤 악한 면이 있는지 아무도 몰라요.
항상 잘 나타나 봐야 반 밖에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가 공히 다 그렇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고 모든 존재가 그렇고.
예를 들어서 이른 봄에 어떤 파란 새싹이 돋는다. 그게 분별이 잘 안가죠. 자기가 뜰에 심어 놓고 늘 키우던 어떤 식물 같으면 작은 새싹만 가지고도 저게 뭔지 알 수 있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면 잘 모릅니다.
그와 같이 모든 존재는 그런 이치를 다 함유하고 있다. 참 이런 것도 이왕이면 비유를 말이죠.
가을 하늘의 반달과 같다.
사람들이 내면에 숨기고 있는 것과 드러내고 있는 것의 문제를 추공지편월(秋空之片月)이라 얼마나 멋진 표현을 했습니까. 추공이니 편월이니 하는 것은 시어에 많이 사용되는 시의 표현입니다.
<7> 인다라 그물과 같은 경계의 이치
[因陀羅網境界門]
重重交映(중중교영)은 若帝網之垂珠(약제망지수주)요
거듭거듭 서로 비춤은 제석천그물에 드리운 구슬과 같도다.
인다라망. 인다라 그물과 같은 경계의 이치라 그랬어요. 인다라망경계문(因陀羅網境界門) 십현문으로서는 그렇게 표현하는데.
중중교영(重重交映)은 약제망지수주(若帝網之垂珠)요
화엄경에서는 모든 존재가 서로서로 연관 관계를 맺고 이렇게 인연을 맺고 저렇게 인연을 맺고 첩첩이 그렇게 서로서로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이 말하자면 인다라망경계문과 같다.
제망(帝網) 제석천 궁전을 덮고 있는 그물,
그 그물에는 아주 영롱한 아름다운 구슬로써 그물을 짜서 궁전을 장엄하기 위해서 궁전을 덮고 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물을 형성하고 있는 구슬들은 서로서로 이쪽 구슬은 저쪽 구슬을 저쪽 구슬은 이쪽 구슬을 전부가 동시에 다 서로 비추고 있는 거예요.
비추는 그 속에 보면 또 삼중 사중 오중 첩첩이 그 구슬이 비추고 있습니다.
*
여기 만불사 거기에 작은 법당 하나가 거울을 전부 장치해 놓은 법당이 있어요.
그것이 인다라망경계문을 표현한 것이다.
그 사람이 화엄경을 좋아하고 특히 법성게를 좋아해요. 그래서 법성의 이치를 표현하고.
제망지수주(帝網之垂珠) 거울에서 비추고 중중첩첩이 비추는 그런 모습 그것은 뭐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서로서로 그렇게 연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 속에 네가 있고 네 속에 내가 있고 사람 속에 식물이 있고 식물 속에 사람이 있어.
예를 들어서 여기서 우리는 지금 나무에서 내뿜고 있는 아주 청정한 기운을 잘 호흡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그동안 수용한 탁한 공기를 내뿜으면 저 푸른 소나무는 마시고 있어요.
언제부터인가 이미 그렇게 우리는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요.
그래 저는 차 탈때 낯선 사람 잘 안태워요.
그 사람이 내뿜는 그 호흡을 내가 마시기가 좀 그래.
그 사람도 마찬가지로 내가 내뿜는, 낯선 사람이 내뿜는 그 호흡을 어떻게 마시고 있노.
그걸 우리가 의식하지 안해서 그렇지 한자리에 앉자마자 저쪽에서 호흡하고 이쪽에서 호흡하고 그래서 서로 내뿜고 마시고 내뿜고 마시고 수십 수백번을 뿜고 마시는 거야. 택시 안에서만이 아닙니다. 이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을 열어 놨다고? 천만에.
저기 저 소나무에서 내뿜는 청정한 기운과 범벅을 해서 그것을 잘 섞고 비비고 말아서 같이 마시고 서로 주고 받고 하는 관계입니다 우리가. 호흡만 하더라도 그런 관계예요.
호흡보다 더 미세한 기(氣)는 더욱 말할 것 없는 거예요.
나는 향을 피울 때 향이 저게 도대체 어떻게 해서 향기가 내 코에까지 오는가? 향도 입자가 있답니다.
향도 입자가 있어요.
예를 들어서 우리가 화장실에 가서 냄새를 피웠다. 가득차죠, 화장실에.
그 냄새의 입자가 화장실에 가득차 있는 거예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모든 냄새는 전부 그 나름의 입자가 있어. 그 입자를 만약에 형상화 해 놓으면 가당치 않을 거예요.
예를 들어서 향을 푸른색으로 하고 무슨 방귀 냄새를 붉은 색으로 하고 이런 식으로 만약에 색깔을 칠해 놨다고 생각했을 때 가당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나름대로 모두가 입자가 있어서 서로 비비고 섞고 말고 하면서 같이 호흡하고 내뿜고 합니다.
*
그게 어찌 우리 한 몸이 아닙니까.
다 우리 한 몸이예요.
정신은 말할 것도 없고 육신을 형성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치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전부 한 몸이예요.
이미 우리는 호흡을 통해서 한 몸으로 섞은지 오래라.
제석천의 그물에 달려있는 구슬이 서로서로 비추고
거울과 거울이 마주 보게 해서 서로 비치게 하듯이
깨어있는 사람 눈에는 모든 존재가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법당안에다 거울을 수십개 장치를 해서 곳곳에서 서로서로 비추게 그런 법당을 만들지요.
제망찰해(帝網刹海)
우리가 예불할 때도 제망찰해라고 하는 말을 쓰지 않습니까.
그것 참 옛날에 아무리 도를 통했다 하더라도 어찌 그런 이치를 알았는지 참 우리는 서로서로 스며 있고 스며들고 서로 뒤섞여 있고 서로 반영하고 그래서 서로 호흡하고 그러면서 같이 살아가고.
그렇다면 우리가 서로 미워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할 일이 아니지요.
*
중중교영(重重交映)이라.
거듭거듭 서로 비루고 있는 거예요.
사람이 그렇고 사람과 식물이 그렇고 사람과 동물이 그렇고 모든 것이 다 그런 식으로 연관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그래서 법계연기 연기적 관계 또 화엄경에서 연기도 이렇게 깊이 있게 우리는 서로 인연해서 존재한다.
서로 내 숨을 그대가 마시고, 그대의 숨을 내가 마시고.
100명이 한 법당 안에 있다면 100명이 서로서로 주고 받는 호흡을 함께 하고 있으니 그것도 그야말로 동시구족이어서 그렇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뿐만 아니고 만물과도 똑같이 그렇게 한다.
그런 이치입니다.
*
어떻게 그렇게까지 보았는지 정말 그 지혜의 눈, 아주 투명한 밝은 지혜의 눈은 그러한 사실들이 환하게 드러납니다.
백운도사라고 하는 관상가가 어떤 스님의 손금을 보고 본인이 깜짝 놀라면서 손바닥을 탁 덮어버리는 그와같이 역력하게 모든 것은 드러나있고 깨어 있는 사람은 그렇게 알고 있다 하는 것입니다.
내가 또 이제 물었어요.
사주도 다 가르쳐주고 관상도 자주 보니까 그래 ‘관상 본 이야기를 한 마디 하세요’ 하고 그랬어 내가.
내가 소주를 안사줘서 그런가.
사무라이 사무라이
나보고 사무라이 사무라이
볼 때마다 사무라이 그 말만 들었어.
딱 그소리만 대답하는 거예요.
8> 십세가 나눠지고 다르게 성립하는 이치
[十世隔法異成門]
念念圓融(염념원융)은 類夕夢之經世(유석몽지경세)로다
순간순간에도 원융함은 저녁 꿈에 지나가는 세월과 같도다.
십세가 나눠지고 다르게 성립하는 이치라.
십세격법이성문(十世隔法異成門)
처음에 ‘법계는’하면서 지금까지 설명 해왔죠.
법계 안에 있는 모든 존재는 이렇게 이러한 이치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시간적인 문제인데 염념원융(念念圓融) 순간순간 원융하는 것은 저녁 꿈에 지나가는 세월과 같도다. 석몽(夕夢) 저녁 잠이 살풋 들었어. 꿈을 꾸었어.
그 꿈속에서 많은 세월이 지났어. 일생을 다 살았어.
그와 같다.
한 순간 단 1초의 짧은 한 순간에 수십년의 삶을 살았다. 그래서 내가 이 대목에 조신대사 이야기를 실어 놨어요.
73쪽 네째 줄부터
‘이러한 이치는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지만 우리나라에서 특히 유명한 꿈으로는 삼국유사에 조신(調信)스님의 이야기가 있다.’
이걸 삼국유사에는 불과 몇 줄 되지 아니한 내용을 가지고 이광수씨가 아주 재미있는 소설을 한 권 다 썼죠.
‘조신스님은 신라 스님으로서 세달사’
뒤에 흥교사라고 하는 이름으로 바뀌었는데
‘승려였다. 명주 날리군에 있는 농장을 관리하는 지장(知莊)’
지장이라고 하면 농장을 관리하는 사람이죠.
‘소임을 맡아 갔다가, 군수 김흔(金昕)의 딸을 보고 반하여 낙산사 대비상(大悲像)앞에 가서’
낙산사는 그때부터 관음상을 모셨어요. 대비상 앞에 가서
‘만나게 되기를 수년 동안 기도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이미 출가하여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된 것을 원망하며 불당 앞에서 울며 호소하다가 날이 저물고 지쳐서 잠깐 졸았다.’
어떤 일설에는 저녁예불을 드리다가 종을 땅- 이렇게 쳤는데 그 종소리가 끝나기 전에 이러한 삶을 살았다 이렇게 표현된 데도 있어요. 그 이야기가 훨씬 근사하죠.
‘뜻밖에 그녀가 와서
“스님을 뵙고 항상 그리워하였으나 부모의 명으로 할 수 없이 시집을 갔습니다. 하지만 이제 스님과 함께 살고자 왔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조신은 그녀를 데리고 고향으로 가서 40여 년을 살면서 다섯 남매를 낳았다. 살림이 구차하여져서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면서 10년 동안 걸식하다가 명주 해현령에서 15세 된 큰 아들이 굶어 죽자 길가에 묻고, 우곡현에 가서 큰길가에 오막집을 짓고 머물렀다.
이 부부가 늙고 병들어 걸식도 할 수 없어지자, 10세 되는 딸이 밥을 빌러 다니다가 개에게 물려 돌아와 앞에 쓰러져 운다. 부부도 함께 통곡하다가 마침내 아내가 눈물을 씻고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에는 나이는 젊고 얼굴도 아름다웠습니다. 50년 동안 고락을 같이 하였으나 이제는 늙고 병들어 빌어먹기도 어렵고 자식들은 헐벗고 굶주려 어찌할 수 없으니, 부부가 함께 다니면서 고생하는 것보다는 헤어져서 따로 살아 나갈 길을 찾는 것이 좋겠소.”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부부가 아이를 둘씩 나누어 데리고 남북으로 길을 떠나려 하다가, 문득 깨어 보니 한동안의 꿈이었다.’
저녁 예불 하려고 종을 땅- 쳤는데 그 종소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이와 같은 50년의 세월의 꿈을 다 꿨다 하는 것입니다.
종 그거 얼마 걸리겠어요. 종,
1분 안걸립니다. 몇 초밖에 안걸려요.
몇 초 사이에 50년 인생을 다 산 꿈을 꾸었다.
그 시간이라고 하는 게 사실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라. 그래서 그야말로 여기에 이야기 한대로 염념 한순간속에 수많은 시간이 그 속에 다 내포되기도 한다. 유석몽지경세(類夕夢之經世)라 꿈의 세월을 지내는 것과 같다. 그런 이야기 입니다.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세고 세상 생각이 허망하게 사라지자’
잠깐 동안에 꿈을 꾸었는데 머리가 새하얗게 세었다 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대비상(大悲像)앞에 나아가서 무수히 참회하고, 해현령에 묻은 아이를 파 보니 석미륵상(石彌勒像)이 나왔다. 근처의 절에 모시고,돌아가서는 지장(知莊)의 책임을 사퇴하고, 정토사를 짓고 정업(淨業)을 부지런히 닦았다고 한다.’
이게 유명한 이야기죠.
이걸 부연해서 이광수가 ‘꿈’이라고 하는 소설 참 재미있게 읽죠 모두.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시간이라고 하는 것도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라서 되게 급한 일을 당해서 무얼 기다릴 때 왜 그렇게 시간이 안갑니까? 차를 불렀다 하면 잠깐 차오는 시간이 불과 얼마 안되는데도 몇 시간이 지나가는 것 같죠. 시간도 사실은 어떤 실체로서 존재하고 고정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게 원융무애하다 라고 하는 시간성에 대한 화엄의 안목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9>사물에 기탁하여 법을 나타내고 이해를 내는 이치
[託事顯法生解門]
法門重疊(법문중첩)은 若雲起長空(약운기장공)이요
법문이 중첩함은 드넓은 하늘에 구름이 일어나는 것과 같도다.
사물에 기탁하여 법을 나타내고 이해를 내는 이치라.
탁사현법생해문(託事顯法生解門) 그랬어요.
사물에 기탁하여 법을 나타내고 이해를 내는 이치다.
이건 두두물물이 그대로 화엄의 진정한 이치를 설하고 있다. 그게 탁사현법(託事顯法)이야.
어떤 사물이든지 그 나름의 이치와 그 나름의 모습과 그 나름의 색깔과 그 나름의 향기를 다 표현하고 있는 것이 탁사현법입니다.
*
법문중첩(法門重疊)은 약운기장공(若雲起長空)이요.
이 화엄경에 있어서의 법문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물 하나하나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라도 그대로 그 모습의 이치와 그것의 어떤 모양과 그것의 체성과 그런 것을 다 나타내고 있어요.
그것을 화엄경은 속속들이 깨달아서 설명하는데 이미 어떤 사물이 법문으로써의 역할을 잘 하고 있고 또 화엄경에서는 그것을 설명하는데 한 번 설명을 했다 하면 반드시 열 보살이 나와서 비슷하게 반복해서 중중첩첩으로 설명을 합니다.
그리고 또 게송을 읊어도 꼭 열 보살이 나와서 한 사람이 열 개의 게송을 읊고 있어요. 전부 그런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화엄경은 이 세상의 어떤 가르침의 책보다도 가장 위대한 책이고, 문학적으로도 아니면 철학적으로도 화엄경과 같은 걸작품은 없다.
그것을 ‘인류가 남긴 최대의 걸작품이다’ 화엄경을 그렇게 이야기 하거든요.
왜인고 하니 화엄경에 담긴 이치는 단순하게 문학적으로 그렇게 써놨다기 보다는 그야말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미세먼지에서부터 거대한 저 우주까지도 낱낱이 파헤쳐서 그것의 실상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가르침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 많고 많은 법문이 이미 존재하는 어떤 사물 하나만 가지고 이야기 하더라도 그 사물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이치 그것의 내용을 다 표현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
한 사물이 가지고 있는 법문도 중중첩첩이고 또 그것을 설명하는 형식도 화엄경은 중중첩첩으로 되어 있어요.
예를 들어서 화엄경이 소나무 한 그루를 이야기 한다 하면 소나무 한 그루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도 그 법문이 중중첩첩이야. 세세생생 설명해도 다 설명하지 못해. 그런데 화엄경은 한껏 하노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설명하는데 아주 중중첩첩으로 그렇게 법문도 그렇게 했어요.
*
약운기장공(若雲起長空)이라.
마치 저기 드넓은 하늘에 구름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드넓은 하늘에 구름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여름에 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날 때 감당 못할 정도로 일어나죠.
특히 인도 같은 데서 우기에 구름이 일어날 때는 그야말로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야트막하게 구름이 아주 두껍게 밀려옵니다.
법화경에도 약초유품 같은 데서 그러한 모습을 잘 그리고 있고 또 이런 화엄경에서도 경전은 대개 인도에서 만들어진 경전이기 때문에 그런 모습들을 자주 접하니까 그런 내용들이 아주 많습니다.
하늘의 구름이 우기에 구름이 뭉게뭉게 끝도 없이 일어나듯이 또 비를 한바탕 쏟고 나면, 그게 뭡니까?
비를 한 바탕 쏟는다.
설법을 하고 나면 또는 화엄경을 통해서 글로 표현하고 나면 또 일어나요. 또 뒤따라서 구름이 또 일어나고 일어나고 합니다. 이 법문이라고 하는 것은 끝이 없는 거예요.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약운기장공(若雲起長空)이요
구름이 저 드넓은 하늘에서 끝도 없이 비를 쏟고 또 일어나고 비를 쏟고 또 일어나는 그러한 모습과 같다.
참 불교에는 웬 말이 그렇게 많은지 팔만대장경이 그렇잖아요. 그래서 불교공부는 벌써 그 양에 가르침의 양에 그만 질려버립니다.
이것은 작은 먼지에서부터 저기 태양과 드넓은 우주에 이르기 이러한 이치를 다 담고 있다. 그렇게 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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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페이지 제일 밑의 줄에 보면
‘운흥이백문(雲興二百問)에 병사이천답(甁瀉二千答)이라’
제가 화엄경 좋아하는 품이 이세간품인데 이세간품은 질문을 쉴새없이 200가지 질문을 해요.
이백가지 질문 양이 얼마나 많습니까. 쉴새없이 이백가지 질문을 하는데 한가지 질문에 열 가지씩 하니까 이천 답이요. 이천 가지 답이 쏟아져요.
한 가지 질문마다 전부 열 가지씩 열 가지씩 하니까 이천 답이 쏟아집니다.
운흥이백문(雲興二百問)에 구름이 일어나듯이 200가지 질문을 했는데 병사이천답(甁瀉二千答)이라. 병에서 물을 쏟아붓듯이 2천가지의 답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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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 법문 형식은 정말 법문으로서 대단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니까 어지간한 사람들은 질릴 수 밖에 없죠.
그래서 우리가 자주 공부하는 글들 중에 기신론은 아주 조직적으로 이론이, 논리가 잘 짜여있어서 ‘깐깐기신’ 그렇게 말하고 능엄경은 하도 글이 축약이 심해서 ‘차돌능엄’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해요. 차돌과 같다.
화엄경은 ‘장대화엄이다’ 그래요.
대나무 장대처럼 쭉쭉 뻗어 있는 거예요. 쭉쭉 뻗어있으면서도 사이사이에 매듭이 하나씩 하나씩 있어. 그게 한 게송이야.
그런 것이 옛날 조사스님들이 표현한 내용인데 그런 표현속에서도 화엄경의 그 어떤 됨됨이가 잘 표현되어 있죠.
장대화엄이다.
요즘은 장대 보기가 힘들지만 옛날에는 집집 마다 장대가 두 세개씩은 다 있었습니다.
화엄경의 경의 됨됨이는 그와 같다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법문이 그런 형식을 취하고 있죠.
<10> 모든 법이 순수하고 뒤섞이며 덕을 갖춘 이치
[諸藏純雜具德門]
萬行芬披(만행분피)는 比華開錦上(비화개금상)이로다
만 가지 수행을 아름답게 펼침은 비단 위에 꽃무늬를 새김과 같도다.
모든 법이 순수하고 뒤섞이며 덕을 갖춘 이치라.
제장순잡구덕문(諸藏純雜具德門)
장(藏)이라는 말은 법문이라는 뜻입니다.
순잡구덕문이라. 순수하고 뒤섞였다. 잡되다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되어 있다. 순(純)은 순수하게 되어 있다. 그러면서 덕을 갖춘 이치다. 이런 해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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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행분피(萬行芬披)는 비화개금상(比華開錦上)이다.
화엄경이 닦음이 없이 닦고, 닦되 닦음이 없는 그런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온갖 만행을 닦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만행은 저 앞에서 보았듯이 말하자면 항포문이예요.
펼쳐 놓을 때는 만 가지 행이 있습니다.
어찌 만 가지 행뿐이겠습니까? 우리가 닦아야 할 행은 십만 가지, 백만 가지 행도 더 돼요.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 이런 표현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원융문의 입장에서 아주 모든 것이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하나속에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다. 이러한 안목에서 보면 정말 만 가지 수행을 아름답게 펼침은 비단 위에 꽃무늬를 새김과 같다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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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융문의 입장에서 보면 그 많고 많은 삼천위의와 팔만세행이 그저 아름답기만 한 것입니다.
아름답기만 한 것이 만 가지 행, 만 가지 수행이예요.
그렇게 우리가 수행을 봤을 때 닦고 닦지 않는 것
‘무수이수(無修而修)수이무수(修而無修) 닦되 닦음이 없고 닦음이 없이 닦는다’ 라고 하는 화엄의 이치로써 표현한 이것이 그저 아름답기만 한거예요.
그것이 고생스럽고 예를 들어서 5계 10계 48계 이런 것을 한 조목 한 조목 우리가 지켜 나가는 것이 힘들고 괴롭고 한 것이 아니고 그럴 수 없이 아름다운 행위다. 왜냐? 지키되 지킴이 없이 지키고, 지킴이 없이 지키면서 또 열심히 지키고, 그것이 중도적인 수행입니다.
언제나 중도적인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그렇게 했을 때 그야말로 비화개금상(比華開錦上)이라.
꽃이 비단 위에 펼쳐져 있는 것과 같다.
이건 ‘수를 놓았다’라고도 이야기 합니다.
꽃무늬를 새김과 같다 이렇게 했잖아요.
비단 위에 꽃무늬를 새김과 같다.
순수한 비단도 좋은데 거기에다가 꽃을 잘 수놓은 모습과 같다. 사실은 우리 수행이 그렇게 돼야 해요.
그래 돼야 힘들지 않고 즐겁고 무엇을 하든지 기도를 하든지 경을 보든지 화개금상이 되어야지, 하나하나가 아주 힘들고 괴롭고 꼭 외워야 되고 기억해야 되고 이런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피곤하게 하고 힘들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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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이치를 알면 슬렁슬렁,
저는 선천적으로 그렇게 무위(無爲) 무수이수(無修而修) 그런 말을 좋아해서 닦음이 없이 닦고, 또 닦되 닦음이 없고 그런 말이 참 마음에 들어요.
그래서 경을 보다가 글자 어려운 것 나오고 몇 번 새겨봐도 잘 안 새겨지고 그러면 그냥 넘어가버립니다. 그냥 넘어가 버리지 일일이 알려고 안해요.
일일이 알려고 안하고 내가 이해 되고 내가 해석이 되고 하는 것만 해도 부지기수로 많은데 뭘 해석이 안되는 것 까지 그래 머리싸매고 해석할 필요가 있나? 그런 주의예요.
그렇게 해서 넘겨 놓고 보면 나중에 보면 그게 술술 풀려요. 해석이 안되던 것이 저절로 해석이 다 돼 있어.
그렇게 하는 것이 그야말로 공부가 화개금상 비단 위에 아름다운 꽃무늬를 새긴 것과 같이 그렇게 내 마음에 환희심이 나고 신심이 나는 일이지.
골치 싸매고 억지로 안외워 지는 것, 둔한 머리에 안외워지는 걸 외우려고 하고 견강부회 억지로 갖다 붙이고 갖다 해석하고 하는 것은 크게 좋은 것이 아니예요.
우리가 시험문제 답을 잘써서 합격해서 자격증 따자고 하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합니까?
중노릇도 마찬가지입니다.
글 하나를 우리가 이해하고 내 것으로 만드는 것도 그렇고 중노릇도 역시 즐거워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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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워야 무슨 계를 지키던지 가서 절을 하든지 해도 아주 신심나고 환희심이 나고 기도를 해도 그러한 어떤 상태가 되어야지.
그게 만행분피(萬行芬披)가 되는 거예요.
만 가지 수행이 아름답게 펼쳐져야지. 꽃다운 모습으로 펼쳐져야 그것이 우리에게 덕이 되고 남이 보기에도 신심을 자아내게 하는 수행이 되고 그렇습니다.
그럼 뭐 지금 오늘부터 하기 싫은 것은 하지말라는 의미같기도 하지만, 사실은 하기 싫으면 안 해야죠. 누가 뭐 알뜰히 부처님이 니 중노릇 안한다고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절 안 지어 준다고 부처님이 뭐라고 하지도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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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전에 어떤 신도에게 그런 말을 들었는데.
어떤 작은 법당 하나를 중수를 하는데 내가 고심고심 하고있으니까 ‘아이고 스님 그거 뭐 법당지어야 합니까?부처님이 법당 지어달라 합디까?’ 이래.
아주 큰 법문을 들었어요.
부처님은 법당 지어달라고 한 적이 없어.
그저 자기 편하게 살려고 보다 더 많이 가지려고 거기에서 그 욕심에서 법당 짓는 거예요.
불사도 다 그런 관점에서 시작된 거죠.
정말 부처님은 한 번도 중생들에게 그런 부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 수행이 됐든 불사가 됐든 기도가 됐든 공부가 됐든 만행분피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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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고있는 수행이니 기도니 공부니 참선이니 하는 것은 만행이야. 그게 아름다와야 돼.
억지로 되어가지곤 본인에게도 덕이 안되고 누가 관세음보살이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부처님이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불사 또한 마찬가지다 이런 말입니다.
그래 비화개금상(比華開錦上)이라. 근사하잖아요.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수행 모든 수행은 화개금상이 돼야 합니다.
아름다운 비단 위에 꽃무늬를 새긴 것과 같이.
그게 금상첨화.
비단위에다가 꽃을 새긴 것과 같다.
그렇게 되어야 이게 서로 덕이 되고 수행이 되고 불교가 이 세상에 있으면서 중생들에게 위안을 주고 편안함을 주고 그렇게 해서 불교를 공부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평화롭고 행복하고 편안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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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편안해야 돼요.
절 누가 그거 세 번 하라고 시켜요?
한 번만 해도 되고 정 한 번 마저도 하기 힘들면 손만 한번 끄덕 들어도 돼. 이렇게 부처님 앞에 ‘부처님 저왔습니다’ 하고.
법화경에 그런 이야기 있잖아요.
부처님 앞에서 손 한 번 드는 것도 개이성불도(皆已成佛道)라. 손 한 번 드는 데서 다 이미 불도를 이루어 마쳤다.
손을 들 줄 아는 그게 뭔데? 무엇의 작용인데?
불성의 작용 아닙니까.
이미 거기에서 표현이 다 되어 있는거야.
그러한 법화경의 그런 표현들을 가지고 영리한 선사들은 얼른 갖다 도용하는 거야. 손가락을 딱 들어보이는 거야.
야 아주 멋지잖아요. 도용도 아주 멋지게 손가락 딱 들어보이는 거야.
법화경에서 손 한 번 탁 이렇게 들어 보이거나 꽃 한 송이를 올리거나 손톱이나 나무 꼬챙이를 가지고 불상을 그려보거나 나무 꼬챙이를 가지고 불상을 그리면 얼마나 그리겠어요. 손톱을 가지고 그리면 뭐가 그려지겠어요.
그런 동작 하나에도 낱낱이 전 우주가 동원이 되어서, 전우주의 마음 부처가 동원이 되어서 그런 표현이 가능하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 표현이 나온 거예요.
선문(禪門)에서는 그런 표현이 아주 너무 잘 융합이 되는 거야. 손가락 하나 탁 들어보이는 것이나 말하자면 부처님 앞에서 손 한 번 딱 드는 것이나.
불교는 정말 융통자재 하고 그런 이치를 가만히 보면 너무 어떻게 보면 기준이 없는 것 같고 그렇지만 기준이 없는 가운데 그것이 다 기준에 해당 돼요.
아주 철두철미한 훌륭한 기준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내용을 알고 보면요.
내용을 알고보면 야 근사하다. 아주 불성을 아주 근사하게 멋지게 표현을 했구나.
굳이 무거운 주장자 들어보이고 할 건 아니야.
무거운 주장자 아니라도 돼.
죽비 하나라도 좋고 손가락 하나라도 좋고 손바닥 하나도 좋고 꽃 한송이도 좋고. 그 어떤 행위도 다 그 속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게 다 만행분피예요. 그런 이치를 볼 줄 아는 안목.
요는 그것이 문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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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안목만 갖춰져 있으면 그런 모든 행위들이 다 만행분피야.
만가지 수행이 아름답게 펼쳐지는 모습이고 그것은 그야말로 금상첨화의
어떤 모습이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