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수(龍樹 : Nagarjuna)보살은 인도대승불교의 한 학파인 중관파(中觀派)를 일으킨 시조입니다. 생존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대략 서기 150~250년으로 추정합니다. 용수보살은 <중론>을 비롯하여 <십이문론> <회쟁론> 등과 대품반야경의 주석서인 <대지도론> 그리고 기타 여러 저술을 남겼는데, 그 저술 대부분의 중점은 바로 공사상(空思想)의 천명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는 외도와 소승불교를 타파하고 대승불교를 크게 중흥시켰으므로 불교계에서는 용수보살을 부처님 이래로 제일이며 대승불교의 선구자요 최대의 공로자로 추앙합니다.
용수논사의 대표적인 저술인 <중론(中論)>에서 중도설(中道說)대하여 명확하게 언급하는 것으로, 초품에 등장하는 '팔불게(八不偈)'가 있습니다. 이것은 생멸(生滅) · 단상(斷常) · 일이(一異) · 내거(來去) 등의 여덟 구가 부정적으로 표시된 것으로 이 팔불(八不)에 의해 도출된 사상이 곧 '팔불중도(八不中道)'입니다. 이 팔불게(八不偈)는 제 24품에 나오는 삼제게(三諦偈)와 더불어 중관론의 중도사상을 표방하는 대표적 교리로서 예로부터 유명합니다.
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항상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으며,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去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
能說是因緣 善滅諸戱論 능히 이 인연을 설해서 모든 희론을 멸하니,
我稽首禮佛 諸說中第一 모든 설법자 중에서 제일이신 부처님께 머리 숙여 예배하나이다.-<중론 초품>
'불생불멸, 불상부단, 불일불이, 불래불거'라는 위의 게송은 열반(涅槃)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것인데, 열반은 원래 생(生)하는 것도 멸(滅)하는 것도 아니므로, 연기(緣起)하여 생(生)한 일체의 모든 법은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상주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는 것으로서 어떠한 자성(自性)이 있지 않은 공(空)임을 표명한 것입니다. 이 여덟 가지 부정, 즉 팔불(八不)은 중생들의 수많은 미혹된 견해를 대표하는 생(生)·멸(滅)·단(斷)·상(常)·일(一)·이(異)·래(來)·거(去)의 여덟 가지 견해를 부정한 것으로서 외도들의 사견(邪見)과 불교 내의 유부(有部) 등의 유견(有見)을 척파한 것입니다. 즉, 일체 존재가 저절로 생긴 것이라거나, 어떤 절대자로부터 파생된 것이라거나, 또는 미세한 물질들이 화합하여 생긴 것이라는 등, 중생들이 여러 삿된 견해에 빠져 바른 법을 보지 못하므로, 용수보살이 이러한 편견을 타파하기 위하여 팔불설(八不說)을 주로 한 <中論>을 지어 공사상(空思想)을 주장한 것입니다.
그가 주장한 공(空)은 단순히 모든 것을 부정하는 허무주의도 아니고, 도피와 체념에 사로잡힌 회의주의도 아니며, 결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는 무(無)도 아닙니다. 그의 공사상의 근저에는 어디까지나 연기(緣起)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곧 연기(緣起)하여 생겨나는 일체의 법은 고유한 본성 즉 자성(自性)이 없으며, 고정적인 자성이 없으므로 공(空)하다고 설한 것입니다. 그는 이와같이 공사상에 근거하여 그 당시의 잘못된 사상계를 비판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불교의 근본진리인 중도를 천명하였습니다.
衆因緣生法 我說卽是無 모든 인연으로 생기는 법을 나는 곧 무(無)라고 하고,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또한 가명(假名)이라고 하며, 중도(中道)의 뜻이라고 하느니라. -<중론 24품>
'모든 인연으로 생기는 법'이란 일체제법이 연기(緣起)하여 생함을 말합니다. 이 연기법은 그 본성이 무(無), 즉 공(空)한데 아주 아무 것도 없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연기(緣起)하고 있으므로 가(假)인 것입니다. 연기를 하면서 공하고, 공하면서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은, 공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며[非空非假] 동시에 공이고 거짓[亦空亦假]이며 이것이 중도(中道)입니다. 이 공(空) · 가(假) · 중(中)이라는 삼제(三諦)는 전부 원융(圓融)해 있습니다. 즉 모든 연기(緣起)의 내용은 공(空)이지만 가(假)와 중(中)이 모두 내포되어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中論>의 삼제게(三諦偈)는 중국에 와서 불교교리를 조직하는 데 있어서 간단하면서도 중요한 교의가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삼제게의 내용을 해석한 것으로 후대에 유명한 '삼제원융(三諦圓融)'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삼제원융이란 즉공(卽空)·즉가(卽假)·즉중(卽中)으로 즉(卽)은 공(空)과 가(假)와 중(中)이 한 곳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공과 가와 중은 서로 포용하므로 일체의 만법 자체가 그대로 공하고, 공한 그대로 연기하며, 연기한 그대로가 공도 아니고 가도 아니면서 또한 그대로 공이고 가라고 합니다. 이것이 곧 중도(中道)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명한 '삼제원융'이라는 삼제게의 의미인데, 후에 천태종의 교리를 조직하는 근본교의가 되었습니다. 여하튼 이 삼제게 사상에 입각하여 자세히 살펴보면 천태는 물론 화엄도 여기에 들어있고 대승의 일승원교(一乘圓敎)사상이 모두 다 여기에 들어가 있습니다.
(1) 불생불멸(不生不滅); 생멸의 양극단을 부정, 모두를 인연법, 인연화합으로 관찰하였다.
(2) 불일불이(不一不異); 일체의 모든 법은 진리본체에서는 하나이지만 현상계로서는 다를
수밖에 없음을 관찰하였다. 즉
(3) 불상부단(不相部斷); 불상(不相)은 항상 할 수 없다는 가르침이요 부단(不斷)은 모든 것
이 단절되지 않는다는 가르침이다.
(4) 불거불래(不去不來); 모든 유정(有精)들은 윤회 중에 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온 것처럼 고집하는 것을 부정하며, 또한 본래의 고향, 진여 세계로 돌아감을 망각한 중생들을 깨우쳐 준다. 본래 진리의 당체는 오고감이 아닌데 임시로 오고 가는 것을 실제의 현상으로 집착함을 타파하는 가르침이다. 이 8불중도는 유(有)에 대한 고정관념을 타파하면서도 현상계의 유(있음)을 포용하므로 중도적 공(空)이라 한다.
1. 불생불멸
생한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멸_죽는 것도 아니다. 이런 말인데, 깊은 뜻은 또 후일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우리가 간단하게 보자면, 우리가 죽는다 하지만 어디로 가겠는가. 죽는다 하지만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닌 거죠. 불멸이 되는 거죠. 그리고 태어났다하지만 아무것도 없는데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불생이 되는 거죠. 그래서 불생불멸이라. 이 또한 마음의 도리도 그렇습니다. 마음 가운데에 생기는 것이 있다하지만, 생기는 것이 아니고, 마음 가운데 없어진다 해도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마음바탕은 늘 그 자리다. 이런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2. 불일불이
하나도 아니고 그리고 다른 것도 아니다. 이 말이 재미있죠? 너와 내가 하나도 아니고, 너와 내가 다른 것도 아니다. 불성자리에서 봤을 때는 너와 내가 다른 것도 아니다. 이 말이죠. 이것을 현실적으로 대입해서 생각해 보면, 부부라 하면 부부가 하나는 아니요, 그렇다고 해서 부부는 다른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 불일불이라.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 개체의 독립성, 연기성, 이것을 같이 나타내고 있는 말이다. 그래서 마음의 도리가 또한 이와 같다. 부처니 중생이니 하지만, 부처와 중생이 그러면 하나냐? 하나는 아니요, 그렇지만 잘 들여다보면 또 다른 것도 아닙니다. 부처가 바로 중생이지요. 중생이 바로 부처이고, 마음이 그러하다 그랬어요.
3. 불상부단
항상 하는 것도 아니고, 부단_단멸이라는 말은 완전히 끊어져 없어진다 이 말인데, 상 아니다. 그러니까 영원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이 육체적 삶은 영원한 것은 아니죠. 그렇다고 해서 그러면 죽어버리면 그만이냐? 부단이라 했어요. 단멸. 그래서 죽어버리면 그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부단이라. 그래서 요즘 더러 스스로 죽는 사람도 많은데 자살 문제 같은 것도 우리가 잘 생각해야 하는 것이 부단입니다. 절대로 거기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불상부단임을 우리가 중도적으로 잘 수용하면 여러 가지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어요. 이 마음의 문제도 불상부단입니다. 항상 하는 것도 아니고, 단멸 되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 말이고.
4. 불거불래.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절에 왔다. 지금 와 있죠. 조금 있으면 집에 간다. 집에 갔다. 우리는 왔다갔다라고 말하지만 좀 높은 차원에서 봤을 때는 그 자리가 그 자리입니다. 우리가 제자리곰배치기라는 말이 있거든요. 바로 그 자리에요. 그 자리. 가면 어디로 가고 오면 어디로 오느냐 이 말이죠. 늘 자리에 있는 거죠. 불거불래라. 우리 마음도 그러하더라.
그래서 우리는 이 8불중도, 8불중도적 삶을 살면 우리는 좀 마음이 넉넉해지고, 삶에 있어서 만족감을 느끼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 말입니다. 예. 이것은 아주 중요한 교리고 하니까 좀 어렵더라도 여러 번 읽어보시고 오래오래 좀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금강경은 8불중도를 가르치고 있는 경이다. 해도 틀림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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