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빠사나와 사마타

사마타와 위빠사나1

통융 2018. 4. 15. 11:23

[사마타와 위빳사나는 부처님의 직설이다 ]

 

사마타(samatha)’위빳사나(vipassanā)’는 불교 수행을 대표하는 술어이며 특히 상좌부 불교(초기불교)의 수행 체계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핵심 술어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두 술어는 일찍이 중국에서 각각 지()와 관()으로 정착되었다.

그래서 지와 관을 고르게 닦을 것을 강조하여 지관겸수(止觀兼修,지관쌍수)로 정착되었고, 이것은 다시 선종에서 정혜쌍수(定慧雙修)로 계승되었다. 불교 2,600년사에서 내로라하는 논사들이나 수행자들이 이렇듯 지와 관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한 것을 본 때문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관심은 후대 논사들이나 수행자들의 견해가 아닌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이 직접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설명하신 것이 있는가? 부처님께서는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어떻게 정의하셨는가?’하는 것으로 기울게 되었다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적지 않은 초기경전에서 세존께서는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분명하게 정의하고 계신다.

먼저 언급해야할 경이 앙굿따라 니까야 [영지(靈知)의 일부 경](A2:3:10)이다. 이 경에서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사마타를 마음(citta)과 마음의 해탈(심해탈, ceto-vimutti) 즉 삼매[, samādhi]와 연결 지으시고, 위빳사나를 통찰지(pannā, 반야)

통찰지를 통한 해탈(혜해탈, pannā-vimutti) 즉 통찰지[, pannā]와 연결 지으신다. 그리고 삼매는 욕망을 극복하는 수행이고, 통찰지는 무명을 극복하는 수행이라고 밝히고 계신다.

 

그리고 삼매경 등 세 개의 경들은 사마타와 위빳사나에 대한 답변을 명확하게 제공하고 있다. 이 세 개의 경들에 나타나는 "마음의 사마타""통찰지라 불리는 법들에 대한 위빳사나"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사마타는 마음의 개발을 뜻하는 삼매와

동의어이고, 위빳사나는 통찰지와 동의어이다.

그래서삼매 경3(A4:94)에서는 사마타를 얻기 위해서는 사마타를 체득한 분을 찾아가서 '도반이여, 어떻게 마음을 고정시켜야 합니까? 어떻게 마음을 안정시켜야 합니까? 어떻게 마음을 하나가 되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마음이 삼매에 들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위빳사나를 얻기 위해서는 위빳사나에 통달한 분을 찾아가서 '도반이여, 형성된 것들[]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형성된 것들을 어떻게 명상해야 합니까? 형성된 것들을 어떻게 깊이 관찰해야 합니까?'라고 물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이처럼 사마타는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고정시키고 고요하게 하는 삼매를 개발하는 수행(삼매, , samādhi)이며,

위빳사나는 유위제법[]을 명상하고 관찰하여 무상··무아를 통찰하는 수행(통찰지, , pannā)이라고 부처님께서는

분명하게 밝히고 계신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사마타를 먼저 닦아야 하는가, 아니면 위빳사나를 먼저 닦아야 하는가, 아니면 둘 다를 동시에 닦아야 하는가이다. 이것도 사마타와 위빳사나에 관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토론거리가 되고 있다.

쌍 경(A4:170)은 여기에 대한 명확한 지침을 준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마타를 먼저 닦을 수도 있고, 위빳사나를 먼저 닦을 수도 있고,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함께 닦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각 개인의 문제이지 어느 것을 먼저 닦아야 하는가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처럼앙굿따라 니까야를 위시한 초기경전은 사마타와 위빳사나에 대한 중요한 언급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제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몇 가지 측면에서 비교해서 살펴보자. 

대상 - 개념과 법 

첫째, 사마타든 위빠사나든 중요한 것은 대상을 명확하게 설정하는 것이다. 사마타의 대상은 표상(nimitta)이라는 개념(pannatti)이고, 위빠사나의 대상은 법(dhamma)이다. 이것이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구분짓는 가장 중요한 잣대이다.

이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집중과 통찰 

둘째, 사마타는 대상(표상)에 대한 집중이고, 위빠사나는 대상()에 대한 통찰이다.

사마타(samatha)는 마음이 표상에 집중되어 마음의 떨림이나 동요가 그치고() 가라앉아 고요한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지()로 옮겼다. 위빠사나(vipassan)분리해서(vi) 보는 것(passana)’이라는 문자적인 뜻 그대로 대상을 나타난 모양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무상(無常, 변하여 고정됨이 없슴)하고, (, 괴로움)이고, 무아(無我)인 특성을 여실지견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관()으로 옮겼다.이처럼 사마타는 대상(표상)에 집중하는 삼매() 수행이고, 위빠사나는 대상()무상..무아(無常..無我)로 통찰하는 반야(통찰지. ) 수행이다.

   

닮은 표상과 삼특상 

셋째, 사마타의 키워드는 닮은 표상이고, 위빠사나의 키워드는 무상..무아이다.

청정도론은 사마타의 대상을 40가지 명상주제로 정리하고 있다. 이런 대상 가운데 하나에 마음을 집중하여 그 대상에서 익힌 표상을 만들고, 이것이 마침내 닮은 표상(相似影像. patibhaga-nimitta)으로 승화되어 흩어지지 않고 오롯하게 되어, 매순간의 마음들이 이 닮은 표상에 고도로 집중된 상태를 사마타라 한다. 위빠사나는 마음().마음부수(心所).물질()로 구분되는 71가지 구경법들 가운데 하나를 통찰하는 수행인데, 이처럼 법을 통찰해 들어가면 제법의 무상, , 무아 철견(徹見)하게 된다.

  

일시적인 해탈과 해탈 

 넷째, 사마타의 고요함만으로는 해탈.열반을 실현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사마타는 마음과 대상이 온전히 하나가 된 그런 밝고 맑고 고요함에 억눌려 탐..치가 잠복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사마타에서 나올 때는(出定) 다시 탐..치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상태를 경에서는 일시적인 해탈(samaya-vimutta, 앙굿따라 니까야 [일시적 해탈 경]1(A5:149) )이라 한다. 그러므로 무상..무아를 통찰하는 위빠사나의 힘으로 이들의 뿌리를 멸절시켜야 영원히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되며, 그래야 해탈.열반을 실현하게 된다. 그래서 무상..무아를 해탈의 세 가지 관문이라고 한다.

  

지관겸수(止觀兼修,止觀雙修)  

다섯째, 이처럼 위빠사나의 지혜(통찰지)가 없이는 해탈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고요함과 고도의 집중이라는 사마타의 힘이 아니면 위빠사나의 지혜가 생기기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초기경에서 사마타와 위빠사나라는 술어는 거의 대부분 함께 나타나며 부처님께서는 이 둘을 부지런히 닦을 것을 강조하셨다. 그래서 중국에서도 지관겸수(止觀兼修,지관쌍수))를 강조하였다

 

 

 

무엇을 먼저 닦을 것인가 

 

여섯째, 사마타를 먼저 닦을 것인가, 위빠사나를 먼저 닦을 것인가는 결국 인연 닿는 스승의 지도방법과 수행자 자신의 관심과 성향에 따라서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사마타를 반드시 먼저 닦아야 한다거나 ,위빠사나만을 닦아야 한다거나 하는 것은 독단적인 견해일 뿐이고, 이런 견해를 고집하면 진정한 수행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수행은 무상..무아를 통찰하는 위빠사나로 귀결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위빠사나는 무상..무아를 통찰하는 것그 자체이지 결코 특정한 수행기법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81

 

復次 精勤專心修學此三昧者 現世當得十種利益 云何爲十.

 

一者 常爲十方諸佛菩薩之所護念.

二者 不爲諸魔惡鬼所能恐怖.

三者 不爲九十五種外道鬼神之所惑亂.

四者 遠離誹謗甚深之法 重罪業障漸漸微薄.

五者 滅一切疑諸惡覺觀.

六者 於如來境界信得增長.

七者 遠離憂悔 於生死中 勇猛不怯.

八者 其心柔和 捨於憍慢 不爲他人所惱.

九者 雖未得定 於一切時 一切境界處 則能減損煩惱 不樂世間.

十者 若得三昧 不爲外緣一切音聲之所驚動.

 

또 한마음으로 부지런히 이 삼매를 배우고 익힌 이는 지금 세상에서 열 가지 이익을 얻으니 무엇이 그 열 가지인가.

 

첫째, 언제나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보호를 받는다.

둘째, 모든 마구니와 악귀들이 겁을 주지 못한다.

셋째, 아흔다섯 가지 귀신들이 어지럽히지 못한다,

넷째, 깊고 오묘한 부처님의 법을 헐뜯지 않기에 무거운 죄가 차츰차츰 엷어진다.

다섯째, 모든 의심과 나쁜 견해가 사라진다.

여섯째, 여래의 경계에 있는 믿음이 크게 늘어난다.

일곱째, 근심과 회한을 벗어나 삶과 죽음의 문제에서 용맹스럽게 공부를 하며 겁을 내지 않는다.

여덟째, 그 마음이 부드럽고 온화하여 잘난체하는 마음을 버렸으므로 다른 사람이 괴롭히지 않는다,

아홉째, 비록 선정을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삶의 모든 경계에서 번뇌를 줄일 수 있고 세간의 삶을 즐기지 않는다.

열째, 삼매를 얻으면 바깥 인연의 모든 소리에 놀라지 않는다.

 

-82

 

復次若人唯修於止則心沈沒或起懈怠不樂衆善遠離大悲是故修觀

 

또 사람들이 지관(止觀)만 닦으면 마음이 가라앉거나 때로는 게을러져 좋은 일들을 즐기지 않고 자비로운 큰마음을 멀리하기 때문에 관관(觀觀)을 닦는다.

 

修習觀者當觀一切世間有爲之法無得久停須臾變壞一切心行念念生滅以是故苦應觀過去所念諸法恍惚如夢應觀現在所念諸法猶如電光應觀未來所念諸法猶如於雲忽爾而起

 

관관(觀觀)을 닦아 익히는 이는 모든 세간의 생멸하는 법은 오래 머물 수 없어 금방 변하고 사라지며, 모든 마음이 생각마다 생멸하므로 괴로움이라고 보아야 한다. 과거에 생각한 모든 법이 어슴푸레 형체가 없어 꿈과 같음을 보아야 한다. 현재 생각하는 모든 법이 번개와 같음을 보아야 한다. 미래에 생각할 모든 법이 구름이 문득 일어나는 것과 같다고 보아야 한다.

 

應觀世間一切有身悉皆不淨種種穢汚無一可樂如是當念一切衆生從無始世來皆因無明所熏習故令心生滅已受一切身心大苦現在卽有無量逼迫未來所苦亦無分齊難捨難離而不覺知衆生如是甚爲可愍

 

세간의 모든 몸뚱이가 깨끗하지 못하고 온갖 더러움으로 가득 차 하나도 즐거워 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보아야 한다. 모든 중생이 시작이 없는 때부터

모두 무명이 훈습한 것 때문에 마음이 생멸하게 되어이미 모든 몸과 마음의 큰 괴로움을 받았고, 현재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그침이 있으며, 미래에 받을 괴로움이 그 끝이 없어 버리고 떠나기가 어려운데도 이를 깨닫지 못하니 참으로 불쌍하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作此思惟卽應勇猛立大誓願願令我心離分別故遍於十方修行一切諸善功德盡其未來以無量方便救拔一切苦惱衆生令得涅槃第一義樂

 

이런 생각을 하고 곧 용맹스럽게바라옵건대 제 마음이 분별을 떠나 시방세계에 두루하고 착한 모든 공덕을 수행하며 미래가 다하도록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편으로 모든 중생들을 괴로움에서 건져 그들에게 열반의 즐거움을 얻게 하고자 합니다.”고 큰 서원을 세워야 한다.

 

以起如是願故於一切時一切處所有衆善隨已堪能不捨修學心無懈怠唯除坐時專念於止若餘一切悉當觀察應作不應作

 

이런 원력을 일으키므로 모든 삶이 있는 곳에서 좋은 모든 일들을 능력에 따라 처리하고, 배우고 익히는 일을 버리지 않아 마음에 게으름이 없어야 한다.

오직 앉을 때 지관에 전념하는 것만 빼놓고, 나머지 모든 것에서 해야 할 일인지 아닌지를 관찰해야 한다.

 

-83

 

若行若住若臥若起皆應止觀俱行

 

수행자는 오고 가며 앉고 눕는 삶 속의 모든 생활에서 모두 지()와 관()을 함께 수행해야 한다.

 

所謂雖念諸法自性不生而復卽念因緣和合善惡之業苦樂等報不失不壞雖念因緣善惡業報而亦卽念性不可得

 

이른바 모든 법의 자성이 생겨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지만 다시 인연화합을 통하여 선과 악으로 나타나는 괴로움과 즐거움 같은 과보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고, 비록 인연화합을 통하여 선과 악으로 나타나는 과보를 생각하지만 또한 그 자성은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若修止者對治凡夫住著世間能捨二乘怯弱之見若修觀者對治二乘不起大悲狹劣心過遠離凡夫不修善根

 

()를 닦는다면 세간에 대한 범부의 집착을 다스리고 오음에 대한 이승의 약하고 두려운 생각을 버릴 수 있으며, ()을 닦는다면 자비가 없는 이승의 좁은 마음을 다스리고 좋은 일을 하지 않는 범부의 마음을 떠날 수 있다.

 

以此義故是止觀二門共相助成不相捨離若止觀不具則無能入菩提之道

 

이 뜻으로 지()와 관()은 서로 돕고 떨어질 수 없다. ()와 관()을 함께 닦지 않는다면 깨달음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없다.

 

-84

 

復次衆生初學是法欲求正信其心怯弱以住於此娑婆世界自畏不能常値諸佛親承供養

 

또 중생들은 처음 이 법을 배우면서 바른 믿음을 갖고자 하지만 그 마음이 약하다. 그 까닭은 이 사바세계에서는 언제나 모든 부처님을 만나 친히 공양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懼謂信心難可成就意欲退者當知如來有勝方便攝護信心謂以專意念佛因緣隨願得生他方佛土常見於佛永離惡道

 

믿음은 이루기 어렵다고 걱정하며 공부에서 물러나려고 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여래께서뛰어난 방편이 있어 믿음을 거두고 보호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는 한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한 인연 때문에 부처님께 바라는 사람의 원대로 다른 부처님의 세계에 태어나 늘 부처님을 보고 영원히 나쁜 길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如修多羅說若人專念西方極樂世界阿彌陀佛所修善根迴向願求生彼世界卽得往生常見佛故終無有退若觀彼佛眞如法身常勤修習畢竟得生住正定故

 

이는 경에서만일 어떤 사람이 한마음으로 서방 극락세계에 계신 아미타불을 생각하고 그가 닦은 마음의 좋은 뿌리를 회향하여 부처님의 세계에 태어나기를 바란다면 곧 태어나 언제나 부처님을 보기 때문에 끝내 공부에서 물러날 일이 없다.”고 말한 내용과 같다. 부처님의 진여에 있는 법신을 보고 늘 부지런히 닦아 익히면 마침내 그 세계에 태어나서 바른 선정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마타 수행법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습니다.

염불, 자애관, 호흡관찰, 몸관찰, 느낌관찰......

불교 외에도 다양한 명상 수련 단체에서도 많은 수행법을 가르칩니다.

우주와 내가 하나되기, 자연과 내가 하나되기, 너와 내가 하나되기, 여러가지 심상수련 등등....

이 모든 것이 사마타 수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사마타인가?

그런 수행은 원인과 조건을 관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 마음은 왜 일어납니까?

어떻게 일어납니까?

누가 일으킵니까?

마음이 어떻게 소멸됩니까?

왜 소멸됩니까?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사마타 수행만으로는 여기에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일으키는 주체, 마음을 일어나는 원리, 마음의 뿌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고요해지는 것만을 추구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지혜를 키워야 합니다.

지혜가 일어나서 원인을 관찰하고 그 원인을 알고 이해해야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을 일시적으로 고요하게 할 수 있지만, 일시적으로 마음을 가라앉히면 마음이 영원히 고요하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다시 조건이 생기면 마음은 번뇌로 가득해집니다.

원인이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일으키는 주체, 일어나는 원리, 소멸하는 원리를 연구하는 것이 위빠사나입니다.

 

 

예를 들어 자애관을 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마음 속으로 이렇게 주문을 외웁니다.

"모든 중생들이 악의에서 벗어나고, 적의에서 벗어나고, 고통에서 벗어나고, 번민에서 벗어나기를. 그들이 행복하기를.'

그러면 마음에 고요함이 일어나 퍼져갑니다.

이렇게 고요함을 온몸에 퍼트리는 것이 사마타입니다.

이때 대상은 오직 자신의 몸과 마음입니다.

밖의 다른  대상을 떠올리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주문을 외워야 고요함과 동시에 마음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온몸에 고요함이 퍼져나가면 마음은 일시적으로 평화를 얻습니다.

 

아찬차 스님은 '붓도'를 계속 염송하라고 하셨는데, 이것도 같은 방법입니다.

'붓도'를 염하면서 내면을 들여다 보는 것입니다.

내면의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염하는 것입니다.

'붓도'를 염하는 것은 마음을 고요하게 합니다.

마음이 고요해지면 관찰이 훨씬 쉬워집니다.

'붓도'를 계속 염하는 것은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띠를 계속 유지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다른 하나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어떤 단어가 있다면, 그것이 그 단어를 사용하면 됩니다.

 

마음으로는 계속 자애관 주문을 외우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마음이 일어나는지, 어떻게 일어나는지, 누가 일으키는지 관찰합니다.

그러면 마음을 일으키는 주체, 마음이 일어나는 원리, 자아의식의 활동을 이해하게 됩니다.

'! 나에게 이런 욕망의 잠재성향이 있구나.'라고 이해가 일어납니다.

"! 마음이라는 것이 내가 일으키는 것이 아니구나.'라고 꿰뚫어 보게 됩니다.

'이것인 내가 아니고, 이것이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 나의 자아가 아디다.'라는 깨달음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사마타와 위빠사를 동시에 닦는 것이 지관쌍수입니다.

 

자애관을 하면서 위빠사나를, 호흡을 바라보면서 위빠사나를, 염불을 하면서 위빠사나를 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몸을 관찰하면서 위빠사나를, 느낌을 관찰하면서 위빠사나를, 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요리를 하면서 위빠사나를, 움직이면서 위빠사를 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무엇을 하든 거기에는 알아차림이 있고, 선정이 있고, 지혜가 있습니다.

 


*이제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의 차이점을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수행대상이 다릅니다.

두째 대상에 집중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세째 수행으로 얻는 결과가 다릅니다.

 

사마타 수행의 대상은 관념()입니다. 그리고 대상과 하나가 되는 깊은 집중을 합니다. 그래서 얻는 것이 마음의 안정. 심청정(心淸淨)입니다. 그리고 수행의 과보는 색계(色界)천상이나 무색계(無色界) 천상으로 윤회(輪廻)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은 현재의 오온(五蘊)입니다. 그리고 대상과 하나가 되지 않고 대상을 객관적으로 분리해서 보는 찰나 집중(集中)을 합니다. 그래서 얻는 것이 통찰(通察) 지혜(知慧)입니다. 그리고 수행의 과보는 윤회를 벗어나는 완전한 열반(涅槃)입니다.

 

사마타 수행은 멈춤(. 선정) 수행으로 무엇을 멈추는가하면, 감각적 쾌락, 악의, 혼침과 게으름, 들뜸과 회한, 회의적 의심이라는 다섯 장애에 휩쓸리는 것을 멈추고 마음에 번뇌가 없는 심청정을 얻는 수행입니다

 

일상생활이나 수행 중에 현재를 놓치게 하고 마음이 과거 미래로 달리면서 우리를 번뇌에 휩쓸리게 하는 것이 이 다섯 가지 장애입니다. 이들이 일어나면 우리는 번뇌에 휘둘리게 됩니다. 이 다섯 장애는 매 순간 여섯 감각기관이 촉하는 대상에 대하여 일어나는 내 자신 속의 탐진치의 마음의 작용입니다. 사마타 수행은 이 다섯 장애를 우선 멈추게 해서 마음에 번뇌가 없게 합니다.

 

사마타 수행은 불, , , 자비희사, 죽음에 대한 명상, 10가지 까씨나(원판), 몸의 부정(不淨)함 등등으로 40가지 사마타 수행의 대상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수행자가 한 가지 수행 주제를 스승으로부터 선택받아 오직 그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면 어떤 원리로 다섯 장애가 일어나지 않고 마음이 청정해질까요

 

그 기전은 한 순간에 마음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한 순간에 하나의 대상에 대하여만 아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선정수행의 주제인 한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고 있는 동안 번뇌가 일어날 틈이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자의 마음이 고요함, 안정, 평온, 집중 등의 상태에 도달하여 번뇌가 없는 행복을 느낍니다. 이것을 색계 1선정이라고 합니다. 색계 선정으로 마음에 번뇌가 없는 것을 심해탈(心解脫)이라고 합니다.결론은 사마타 수행은 마음의 안정, 고요함, 집중을 얻는 수행입니다.

 

우리가 염불을 할 때 염불삼매에 빠지면, 지금 관하는 부처님의 상(. 관념. 빤냐띠)이라는 대상에 오직 마음을 모아 깊은 집중(근본 삼매)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염불수행으로 얻는 것은 마음의 집중, 고요함, 평온입니다. 그러나 이 선정력은 일상생활로 돌아오면 깨집니다. 그럼 다시 번뇌가 일어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관(. 통찰. 지혜)수행입니다. 무엇을 관하는가 하면 현재의 몸과 마음(오온)입니다. 그래서 오온의 고유한 특성과 조건적 특성과 일반적 특성(무상, , 무아)을 통찰하는 수행입니다. , 수행자가 현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물질적 정신적 현상에 대하여 어떤 번뇌 없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림을 하여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수행입니다.

 

위빠사나 수행법으로 얻는 해탈은 모든 번뇌(탐진치)를 지혜로 해탈한다 해서 혜해탈(慧解脫)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수행자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 처음에는 오온의 고유한 특성과 조건적 특성을 알고, 더욱 발전하여 오온의 무상, , 무아를 체험하고,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열반을 얻는 데는 네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1) 먼저 사마타를 닦고 색계 선정상태에서 위빠사나로 넘어와서 열반에 이르는 방법 

2) 먼저 위빠사나 수행을 하다가 마지막에 깊은 집중으로 사마타 수행을 해서 열반에 이르는 방법

3) 먼저 사마타를 닦고, 위빠사나를 닦고, 다시 그 다음 단계의 사마타를 닦고, 그 다음 단계의 위빠사나를 닦는 방법으로, 두 수행법을 병행하여 열반에 이르는 방법.

4) 처음부터 사마타 수행 없이 위빠사나 수행으로 열반에 이르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순수 위빠사나라고 합니다.

 

1)3)의 경우는 사마타 수행으로 마음에 다섯 장애가 없는 사마디(집중. 선정) 상태에서는 현재의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가 쉽고 그래서 오온의 무상, , 무아를 통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마타 수행을 먼저 닦고 위빠사나 수행으로 넘어와 수행대상과 집중방법을 달리하여 그 결과로 정()에서  ()를 얻는 것입니다. 이런 수행방법으로 해탈에 이르신 분은 심해탈과 혜해탈을 다 구족하신 분으로 양면 해탈이라고 합니다.

 

4)의 수행법은 순수 위빠사나 수행으로, 사마타 수행단계가 없으므로 처음 수행을 할 때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다섯 장애들과 부딪칩니다. 그러면 이 다섯 장애를 다 알아차릴 대상인 법으로 받아들여 반응하지 않고 그들의 성품을 봅니다. 그들은 조건에 의해 일어났다가 알아차림이라는 조건에 의해 소멸한다는 법의 성질을 봅니다.

 

이렇게 다섯 장애를 친구삼아 스승삼아 알아차려가다 보면 알아차리는 힘이 쌓이고, 그래서 매사에 탐진치를 덜 일으키고, 그 결과로 마음의 안정과 오온의 생멸을 볼 수 있는 힘을 기릅니다.

 

위빠사나는 오직 현재의 대상과 그것을 아는 마음이 쌍으로 생멸하면서 이어지는 찰나 삼매(찰나집중)를 유지하여 다섯 장애를 극복합니다. 그런 뒤 오온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12처를 알아차리고, 7각지를 알아차리고 사성제를 알아차려 열반에 이릅니다이렇게 4)의 방법으로 열반에 이른 경우에는 혜해탈자라고 부릅니다.

 

사마타 수행이나 위빠사나 수행이나 처음에는 모두 다섯 장애가 일어나므로 그들을 극복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일단 극복을 하면 선정을 얻거나, 지혜를 얻는데, 우리나라에 들어온 마하시 방법은 사마타 수행 없이 처음부터 위빠사나 수행으로 시작하는 순수 위빠사나 방법으로 지도합니다.

 

이 방법이 현대 생활에 잘 접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상이 모두 알아차릴 대상이고, 법이며, 생활 속에서 번뇌에 휘둘리지 않는 힘을 키우는 수행법이 4)번의 순수 위빠사나라고 생각합니다.

 

사마타 수행으로 일정 수준의 선정력을 얻으려면 오직 자신의 수행 주제에 집중만 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데 이것은 출가 수행자를 의미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염불, 간경, , 100일 기도 등등은 모두 사마타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대상에 깊이 몰입하는 집중을 하여 마음의 안정을 얻는 수행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기도나 염불로 집중력이 있는 분들이 마음을 열고 위빠사나 수행을 하시면 쉽게 자신의 탐진치가 올라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고, 그래서 탐진치를 놓는 법을 알게 되며, 또 알아차림으로 몸과 마음의 무상, , 무아의 성품을 확인할 수 있어 위빠사나의 지혜가 더 빨리 나타날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 사마타 수행으로 얻은 마음의 고요는 일상에서 잘 깨지지만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얻은 지혜는 일상에서도 그 힘을 발휘하여 번뇌로부터 막아줍니다.

 

위빠사나의 지혜는 자기가 닦은 만큼의  항상 자기를 따라다니며 수행자를 번뇌로부터 보호합니다. 그래서 위빠사나의 통찰 지혜만이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에까야노막가)이라는 부처님의 대념처경 말씀을 이해하게 됩니다.

1. 마하시 수행법 - 배의 움직임 관찰 , 경행 2. 고엔카 수행법 - 코에 집중하는 사마타수행 , 전체적으로 몸의느낌 훑기 3. 아나빠나사티 - 호흡관찰 4. 파욱센터 수행법 - 사마타로 집중력을 높힌 후에 위빠사나로 전환 5. 염불 위빠사나 - 붓도를 염송하며 몸을 관찰6. 아비담마 분석법 - 몸에서 일어나는 물심의 현상을 아비담마의 법칙에 적용하여 관찰

 

이런 수행법들 중에 가장 아라한을 많이 배출한 수행법이 무엇인지? 또 가장 부작용이 많은 수행법 혹은 가장 안전한 수행법은 무엇인지?

 

 

불제자가 무명을 소멸할 통찰지(지혜, 반야, panna)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계 정 혜 3학을 닦아야 합니다.

 

부처님은 이 중에서 정은 사마타 혜는 위빠사나라고 하셨습니다.

정은 일반적으로 삼매, 참선과 유사합니다.

혜는 위빠사나로 법들의 무상//무아를 여실지견으로 철견하여 집착을 여의고 해탈하게 합니다.

 

아래에 간단히 부처님께서 사마타(일반 참선, 염불, 진언, 다라니, 화두 같은 수행법과)

위빠사나의 차이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보시면 오랜세월 이로울 것입니다.

 

참 아래의 경은 어떤 경의 일부분이 아니라 전문입니다. ^^

 

 

 

a2.32.사마타와위빳사나앙굿따라니까야 제1211페이지 사마타와위빳사나

 

 

1. "비구들이여, 두 가지 법은 영지(靈知)의 일부이다.

무엇이 둘인가? 사마타와 위빳사나이다.32. “Dve me, bhikkhave, dhammā vijjābhāgiyā.

 Katame dve? Samatho ca vipassanā ca.

 

* 계정혜의 를 사마타와위빠사나로 말씀하십니다.

 

 

비구들이여, 사마타를 닦으면 어떤 이로움을 경험하는가?

마음이 개발된다.

마음이 개발되면 어떤 이로움을 경험하는가?

욕망이 제거된다.Samatho, bhikkhave, bhāvito kamattha manubhoti?

Cittaṃ bhāvīyati.

Cittaṃ bhāvitaṃ kamatthamanubhoti?

Yo rāgo so pahīyati.

 

* 삼매의 방법으로 염불 진언 다라니 등 어떤 대상에 몰입하여 집중하는 수행법을 사마타라고 합니다. 이런 사마타수행법은 마음의 산란함을 잠재우고 마음의 집중을 이루어 냅니다. 사마타 명상주제는 경에서도 40여가지이고 후대의 여러 불교전통에서 닦는 방편까지 합하면 매우 많습니다. ^^ 사마타의 수행단계 즉 마음집중의 단계는 초선 234선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4선까지 닦고 그 마음집중의 힘으로 위빠사나를 닦아 오온의 무상//무아를 철견하셨습니다. 이후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초기승단에서는 초선에서 출정하여 위빠사나를 닦기도 하고, 또는 지금 우리가 배우는 것들처럼 일상생활에서 바로 위빠사나를 닦을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여하튼 불제자가 닦는 삼매는 행복한 것으로 마음을 개발하고 탐진치에 대한 욕망을 눌러줍니다. 그리고 삼매로 닦은 선정력은 위빠사나를 닦는 큰 힘이 됩니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염불 진언 다라니같은 삼매수행법을 닦은 우리 불제자들은 원래 부처님이 가르쳐주셨던 위빠사나를 닦을 큰 힘을 이미 많이 닦아두었다고 볼수도 있을 것입니다. ^^

 

비구들이여, 위빳사나를 닦으면 어떤 이로움을 경험하는가?

통찰지가 개발된다.

통찰지가 개발되면 어떤 이로움을 경험하는가?

무명이 제거된다."Vipassanā, bhikkhave, bhāvitā kamatthamanubhoti?

Paññā bhāvīyati.

Paññā bhāvitā kamatthamanubhoti?

Yā avijjā sā pahīyati.

 

* 통찰지란 오온의 무상//무아의 철견, 무명과 갈애의 완전한 소멸, 사성제에 대한 증득, 연기법에 대한 꿰뚫음, 팔정도의 완성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반야지혜는 우리가 어떤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는 수행을 하여 얻을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반야지혜는 일체법들이 무상//무아임을 꿰뚫어보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염불 진언 다라니 화두같은 것은 마음을 집중하기 좋은 방편이지만 법의 무상//무아를 꿰뚫어 보아 연기법을 보고 사성제를 증득하고 무명과 갈애가 완전하게 소멸하게 하는 수행법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사마타는 마음이 개발되고 위빠사나로 무명이 제거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부처님 말씀을 바르게 받아 삼매를 닦는 불제자들은 삼매에만 멈추지 말고 꼭 부처님이 보리수아래에서 닦으신 위빠사나 수행법을 닦아 무명을 제거해야 할것입니다.

 

 

2. "탐욕에 오염된 마음은 해탈하지 못하고, 무명에 오염된 통찰지는 개발되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탐욕이 제거되어 마음의 해탈[心解脫]이 있고,

무명이 제거되어 통찰지를 통한 해탈[ 慧解脫]이 있다."Rāgupakkiliṭṭhaṃ vā, bhikkhave, cittaṃ na vimuccati, avijjupakkiliṭṭhā vā paññā bhāvīyati. Iti kho, bhikkhave, rāgavirāgā cetovimutti, avijjāvirāgā paññāvimuttī”ti.

 

* 이렇게 쉽게 말하면 사마타나 삼매로 얻는 행복은 마음이 집중되어 마음이 고요한 것입니다.

즉 염불 진언 다라니 같은 삼매수행법으로 불제자들이 얻는 행복을 부처님께서는 심해탈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엄밀한 심해탈은 훨씬 높은 단계이겠지만 여하튼 불제자들이 염불 진언 다라니로 얻는 행복은 마음의 개발로 인한 심해탈과 근접한 것으로 행복을 줍니다.

 

*불교의 목적은 혜해탈입니다. 즉 지혜로 해탈하는 것입니다.

avijjāvirāgā(무명이 제거되어

paññā(반야)vimuttī(해탈)”ti. 입니다.

 

 

이렇게 부처님은 부처님의 궁극적인 가르침인 무명과 갈애의 완전한 소멸을 통한 해탈열반은

위빠사나를 통한 혜해탈(반야해탈, pannavimutti)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위빠사나를 통한 반야해탈을 돕는 것으로 사마타를 설하셨습니다.

그리고 물론 이러한 사마타와위빠사나를 돕는 것은 계를 구족함입니다.

 

이렇게 부처님은 이경에서 불제자들이 닦아야 할 3

[], (사마타), (위빠사나)를 설하셨습니다.

 

 

1. 주요쟁점

 

최근에 수행론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초기불교의 위빠사나와 북방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론인 간화선과의 비교가 자연스럽게 논의되곤 한다. 하지만 이것은 남방과 북방 불교의 문화적인 배경과 함께 광범위한 영역을 포함한 관계로 적절한 접근을 어렵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문화적인 차이나 역사적인 결과에서 오는 어떤 편견이 가로놓여 있다.

남방 불교의 입장을 강조하는 이들은 북방불교를 부처님의 직설이 아니라는 이유로 부인하는가 하면, 반대로 북방 불교적 배경을 가진 이들은 남방불교를 소승불교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논쟁은 부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해방 이후 급격하게 양적으로 팽창된 불교의 문화적인 관심과 더불어서, 불교 수행론의 올바른 정립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본다.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비교에 대한 논의는 2000년 이후에 일반 논문1)이나 신문2) 등에서 몇 차례에 다루어졌다. 이들의 논의는 동질성을 찾고자 하거나, 아니면 양 수행론의 차이점에 초점을 둔 경향, 혹은 양자를 보완적으로 설명하는 경우 등 3가지 경향으로 정리가 된다.

간화선이든지 위빠사나든지, 명상수행이란 마음을 관찰하여 그 본질을 통찰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이때 관찰하는 대상과 방법은 학파나 수행체계에 따라서 달라질 수가 있다. 먼저 관찰하는 대상에 따라서 간화선과 위빠사나를 비교하여 볼 수가 있다. 남방불교의 위빠사나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서 법(, Dhamma)를 중시한다면, 북방불교의 간화선에서는 견성성불(見性成佛)에서 보듯이 성()을 중시한다. 이것은 간화선과 위빠사나를 비교하는 중요한 쟁점이다

다음 문제는 대상을 접근하는 방법이다. 남방불교의 명상수행을 대표하는 중심용어가 관(, Vipassanā)이라면, 북방불교 명상수행의 대표적인 방식은 간화선(看話禪)에서 말하는 의심(疑心)이다. 이들은 동일한 의미인가? 차이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이것 역시 매우 중요한 쟁점이다. 대상이 다름으로 인하여 그 접근 방식이 서로 다르다.  

 

  인식론/인식대상 - ()과 성()

  실천론/명상방법 - ()과 의심(疑心)

 

위와 같이, 남방불교의 명상수행으로 알려진 Vipassanā는 초기불교의 법()을 분석적으로 관찰하고, 북방불교의 간화선은 대승불교의 성()에 철학적인 기반을 두고, 본성을 관찰하기보다는 그것이 무엇인지 의심을 하고 그것을 타파하는 깨달음에 초점을 둔다.

남북전의 수행론에 관한 차이점에 대한 쟁론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초기불교의 위빠사나 수행론은 선종을 대변하는 달마(達摩) 이전에 이미 동북아시아에 수용되었고, 그것은 기초수행으로써 북방불교의 깊은 심층에 도사린 무의식처럼 존재해온 것이다. 송대 선종에서도 대혜에 의해서 오늘날 위빠사나와 같은 계열의 묵조선(黙照禪)의 문제가 제기된 적이 있었다. 이들은 바로 마음과 성품을 어떻게 이해하고 인식할 것인지 하는 심성론과 여기에 기초한 실천적인 방법을 다루는 실천론의 두 관점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본장에서는 묵조선과 간화선을 비교하는데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오히려 현재 제기되고 있는 위빠사나와 간화선을 비교 검토하여 그차이점을 드러내는데 주안점을 두고자 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수행론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함으로써 서로간의 한계와 그 실용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런데 비교하기 전에 교통정리하고 넘어갈 문제가 있다. 먼저 초기불교와 간화선의 영역에 대한 정의이다. 현재 남방에서 실천되고 있는 위빠사나 수행법은 부처님 당시의 불교3)를 계승하여 발전시킨 형태이며, 또한 현재 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간화선은 송대 당시의 간화선을 그대로 역시 계승한다고 전제한다는 점이다. 여기서는 각각의 수행 실천이론을 현실적인 측면에서 일단 그 자체로 인정하고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여기서는 각각의 수행론의 변천을 다루는 역사적인 연구나 현재 실천되고 있는 수행현장을 연구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유용한 수행론으로 현실적 성격을 인정하고서, 양자를 비교하는 철학적인 접근방식을 취한다는 점이다.

        

2. 인식론의 입장

 

 

1) 위빠사나의 인식론

  

먼저 Vipassanā란 용어는 분리(off), 혹은 떠남(away)을 의미하는 접두어 vi와 보다(to see) 혹은 인식하다(to recognize)를 의미하는 passati가 결합된 낱말이다.4) 여기에 준거하여 보면 Vipassanā란 낱말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서 본다>는 의미가 된다. 이때 떨어져서 본다고 할 때, 그 대상은 바로 법(, dhamma)이다. 초기불교에서 법은 넓은 의미로는 붓다의 가르침, 윤리적인 원칙, 혹은 세계의 존재를 의미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심리적인 현상을 가리킨다.5) 우리는 자신의 내적인 심리현상에 대해서 인식 자체가 어떤 가치나 편견에 물들어져 있는 관계로, 그것을 존재하는 그대로 보지를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위빠사나 명상수행의 가치는 심리치료적인 함축한다. 일단 심리현상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그대로(yathābhūtaṃ) 바라봄이 가능하다면, 그 만큼 건강을 회복한 것으로 판단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바라봄의 대상이 되는 사물이란 바로 인식의 대상이 되는 심리적인 상태로서 현상, 곧 법을 의미한다. 이것은 인식의 한계를 벗어난 본질, 실체, 근본을 전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초기불교에서 법이란 용어의 사용은 현상의 배후에 변하지 않는 형이상학적인 개념으로서 자아의 개념을 배제하기 위함이다. 법이란 단순하게 바로 현상만(唯法)을 의미하며, 그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어떠한 기체(基體)도 전제하지 않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그만큼 초기불교에서 사용된 현상()에 대한 분석과 해석은, 변하지 않는 자아의 존재를 주장하는 인도의 전통 철학적 입장을 비판하면서, 제시하는 대안적인 의미가 강하다. 일단 이렇게 Vipassanā의 의미 <그대로 거리를 두고 현상으로서 법을 본다>고 정의할 때, 그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입장을 내포한다.

첫째, Vipassanā는 철학에서 자주 거론되는 현상과 본질이란 이원론적인 관점을 염두에 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현상을 본다고 하는 것은 아주 단순하고 소박하게, 현상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현상학적 관점을 견지한다.6) 현상의 배후에 어떤 실체를 전제한 바라봄은 오히려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볼 때는 다만 보기만 하고, 들을 땐 다만 듣기만 할뿐이지, 그 현상의 건너편에 어떤 배후의 자아나 실체를 가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오히려 이것은 현상 자체만을 있는 그대로 바라봄(Vipassanā)으로서 자아나 형이상학적인 실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을 제시한 것이다. 이런 실천적인 입장은 나중에 청정도론에서 <행위는 존재하나 행위 하는 자는 없다>7)는 언구로 정형화되었다.

둘째는 심리학적인 관점으로 곧 Vipassanā는 동일시(identity)로부터의 초월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온(五蘊)을 나 혹은 나의 것으로 동일시한다.8) 자기의 몸을 곧 그대로 자기로 동일시하고, 어떤 느낌, 감정, 생각 혹은 충동이 일어나면, 그것을 나 혹은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여 동일시한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현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종류의 동일시는 물들어진 심리적인 상태로서의 고통[]이다. 위빠사나는 내적인 현상에 대해서, 멀리 떠남(away) 혹은 거리를 둔다(off)는 사실로서 탈()동일시를 의미한다. 심리학적인 용어로는 자아를 벗어나는 무아의 체험으로서 자아초월(transpersonal)9)의 경험이라고 할 수가 있다. 자아란 역시 일종의 심리적인 동일시로서 고정되고 독립적인 자아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음을 말하고 있기에, 무아는 자아를 초월한 체험으로 이해할 수가 있다

셋째는 사회적인 관점으로, Vipassanā는 사회적 신분의 차별이나 문화적인 상대성에서 평등을 의미한다. 객관적으로 현상을 바라보는 태도란, 결국은 문화적인 차별성을 그대로 수용하여, 하나의 동질성을 확보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바로 사회를 변모시키는 출발점이 된다. 존재 그대로를 허용하는 일은 보수적인 기득권을 옹호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지식은 그 자체로 사회적인 권력을 함축하고 있기에, 그가 어떤 종성(種姓)으로 태어났든지, 사회적인 신분이나 편견을 벗고서, 사물 그 자체로서 객관성을 확보하자는 것이 붓다의 취지이다. 종성의 문제는 오늘날 인종차별과 같은 종류로서 붓다 시대에 매우 심각한 사회적인 이슈였다. 인도의 전통적인 사성제나 카스트의 문제는 바로 이런 종성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당시 사회적인 편견과 차별에 대한 인습에 대한 극복은 새로운 신흥종교로서의 불교의 당면과제였다. 이 문제는 명상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회적인 자아의 문제를 설정하는 일이다.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은 어리석어 스스로를 알지를 못하니 마치 금수와도 같다. 스스로 바라문이 종성 가운데 제일이고, 현세나 미래에 청정하다고 스스로 말하는 것(自稱)은 허구이고 가짜이다. 오늘 나의 위없는 바른 도에는 이런 종성이 없다. 다른 사람은 악하고 하류라고 하나, 나의 법에서는 그렇지가 않다.10)

   

이것은 붓다가 당신의 인종차별에서 어떻게 평등을 주장하는지 보여주는 매우 절박하고 통렬한 설법이다. 인종차별이란 허구이고 가짜이며 법 앞에서 만민은 평등하다고 말한다.

이상으로 자아의 개념은 철학적, 심리적, 사회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세 관점은 위빠사나에 의해서 정화되어야할 세 측면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결국 정화란 무아에 대한 통찰이 다름 아니다. 위빠사나는 다만 현상만이 존재할 뿐, 그곳엔 자아가 존재하지 않음을 통찰하는 통로, 수단, 도구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위빠사나는 어떻게 실천되는가? 이점은 ?念處經?에서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하고 있다

 

비구여, 비구는 아란냐로 가고, 또는 나무 아래로 가고, 또는 텅 빈 장소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몸을 똑바로 세워 앉아서 면전(parimukhaṃ)에 주의집중()을 확립한다. 그는 주의를 집중하여() 숨을 마시고, 주의를 집중하여 숨을 내신다. 길게 숨을 마실 때는 길게 마신다고 알고(), 길게 숨을 내실 때는 길게 내신다고 안다.11)

 

여기에 의하면 위빠사나는 가부좌를 틀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앉아서 먼저 면전에 주의집중()을 확립하고 그런 다음에 분명한 앎[]을 이룬다. 여기서 호흡은 인식의 대상이고, 주의집중과 분명한 앎은 호흡에 지향된 인식의 주체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호흡과 그곳에서 확립된 알아차림을 제외한 어떤 다른 존재도 발견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이곳은 사회적인 차별이나, 형이상학적인 전제나 심리적인 동일시로서의 자아가 끊어진 자리(無我)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Vipassanā의 의미를 <현상을 본다>고 할 때, 중요한 점은 대상으로서의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사물보다는 그 사물을 보는 행위가 중요한 요점이다. 다시 말하면 호흡(呼吸)이나, (), (), (), ()에 관한 대상관찰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 양식, 태도가 더 중요하다. 결국 Vipassanā는 일상에서 말하는 선택과 버림이 있는 대상인식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를 들면 ānāpānasati[호흡법]에서 호흡[āna, apāna]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바로 sati[]가 중요하다. 대상이 되는 호흡의 상태, 그것의 거침이나 빠름이 중요한 관점이 아니다. 세계는 그렇게 거기에 놓여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의 방식으로서, 집중된 알아차림[sati]이 핵심된 관건이다.

이와 같이 대상을 해석하기 전에, 먼저 바라봄 그 자체가, 어떤 견해에도 물들지 않고 순박하게 정화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세계 혹은 현상이란 결국은 자아의 구성, 투사가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에 대한 해석이 중요한 과제가 아니라, 언제나 세계를 존재하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철학 및 심리학적인 중요한쟁점사항이 숨겨져 있다. 먼저 철학적으로는 <과연 대상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고서도, 바라보는 행위는 성립될 수 있을까>하는 점이다. ?念處經����에서 보이는 인식론의 입장을 볼 때, 초기불교는 바라봄 혹은 알아챔(sati)의 대상으로서 신()()()(), 그 현상 자체로서 존재한다[法有]는 입장을 결코 부인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뿐만 아니라, 이런 존재론적인 입장은 현대 남방 상좌부 수행전통에 의해서 충실하게 계승 발전시켜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신체의 움직임을 중시하는 마하시 수행체계12)나 신체에서 발생하는 느낌을 보다 중요한 관찰대상으로 간주하는 고엔카 수행체계에서도 ?念處經?을 근거하여13) 대상에 대한 집중된 알아챔을 강조한 점에서도, 이점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둘째의 쟁점사항은 심리학적인 측면으로서 심리적인 현상을 존재하는 그대로 관찰함에 있어서 어느 정도 가능할까의 문제이다. 외적인 사물을 관찰하는 일은 어느 정도 용이하지만, 내적인 자기 문제를 존재하는 그대로 관찰하는 일은 결코 쉽지가 않다. 대체로 억압하거나 아니면 회피하거나 합리화시키는 또 다른 심리적인 장애, 방어기제를 만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점에 대한 충분한 해명이 요청된다.    

 

2. 인식론의 입장

 

 

1) 위빠사나의 인식론

  

먼저 Vipassanā란 용어는 분리(off), 혹은 떠남(away)을 의미하는 접두어 vi와 보다(to see) 혹은 인식하다(to recognize)를 의미하는 passati가 결합된 낱말이다.1) 여기에 준거하여 보면 Vipassanā란 낱말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서 본다>는 의미가 된다. 이때 떨어져서 본다고 할 때, 그 대상은 바로 법(, dhamma)이다. 초기불교에서 법은 넓은 의미로는 붓다의 가르침, 윤리적인 원칙, 혹은 세계의 존재를 의미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심리적인 현상을 가리킨다.2) 우리는 자신의 내적인 심리현상에 대해서 인식 자체가 어떤 가치나 편견에 물들어져 있는 관계로, 그것을 존재하는 그대로 보지를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위빠사나 명상수행의 가치는 심리치료적인 함축한다. 일단 심리현상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그대로(yathābhūtaṃ) 바라봄이 가능하다면, 그 만큼 건강을 회복한 것으로 판단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바라봄의 대상이 되는 사물이란 바로 인식의 대상이 되는 심리적인 상태로서 현상, 곧 법을 의미한다. 이것은 인식의 한계를 벗어난 본질, 실체, 근본을 전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초기불교에서 법이란 용어의 사용은 현상의 배후에 변하지 않는 형이상학적인 개념으로서 자아의 개념을 배제하기 위함이다. 법이란 단순하게 바로 현상만(唯法)을 의미하며, 그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어떠한 기체(基體)도 전제하지 않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그만큼 초기불교에서 사용된 현상()에 대한 분석과 해석은, 변하지 않는 자아의 존재를 주장하는 인도의 전통 철학적 입장을 비판하면서, 제시하는 대안적인 의미가 강하다. 일단 이렇게 Vipassanā의 의미 <그대로 거리를 두고 현상으로서 법을 본다>고 정의할 때, 그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입장을 내포한다.

첫째, Vipassanā는 철학에서 자주 거론되는 현상과 본질이란 이원론적인 관점을 염두에 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현상을 본다고 하는 것은 아주 단순하고 소박하게, 현상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현상학적 관점을 견지한다.3) 현상의 배후에 어떤 실체를 전제한 바라봄은 오히려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볼 때는 다만 보기만 하고, 들을 땐 다만 듣기만 할뿐이지, 그 현상의 건너편에 어떤 배후의 자아나 실체를 가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오히려 이것은 현상 자체만을 있는 그대로 바라봄(Vipassanā)으로서 자아나 형이상학적인 실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을 제시한 것이다. 이런 실천적인 입장은 나중에 청정도론에서 <행위는 존재하나 행위 하는 자는 없다>4)는 언구로 정형화되었다.

둘째는 심리학적인 관점으로 곧 Vipassanā는 동일시(identity)로부터의 초월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온(五蘊)을 나 혹은 나의 것으로 동일시한다.5) 자기의 몸을 곧 그대로 자기로 동일시하고, 어떤 느낌, 감정, 생각 혹은 충동이 일어나면, 그것을 나 혹은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여 동일시한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현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종류의 동일시는 물들어진 심리적인 상태로서의 고통[]이다. 위빠사나는 내적인 현상에 대해서, 멀리 떠남(away) 혹은 거리를 둔다(off)는 사실로서 탈()동일시를 의미한다. 심리학적인 용어로는 자아를 벗어나는 무아의 체험으로서 자아초월(transpersonal)6)의 경험이라고 할 수가 있다. 자아란 역시 일종의 심리적인 동일시로서 고정되고 독립적인 자아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음을 말하고 있기에, 무아는 자아를 초월한 체험으로 이해할 수가 있다

셋째는 사회적인 관점으로, Vipassanā는 사회적 신분의 차별이나 문화적인 상대성에서 평등을 의미한다. 객관적으로 현상을 바라보는 태도란, 결국은 문화적인 차별성을 그대로 수용하여, 하나의 동질성을 확보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바로 사회를 변모시키는 출발점이 된다. 존재 그대로를 허용하는 일은 보수적인 기득권을 옹호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지식은 그 자체로 사회적인 권력을 함축하고 있기에, 그가 어떤 종성(種姓)으로 태어났든지, 사회적인 신분이나 편견을 벗고서, 사물 그 자체로서 객관성을 확보하자는 것이 붓다의 취지이다. 종성의 문제는 오늘날 인종차별과 같은 종류로서 붓다 시대에 매우 심각한 사회적인 이슈였다. 인도의 전통적인 사성제나 카스트의 문제는 바로 이런 종성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당시 사회적인 편견과 차별에 대한 인습에 대한 극복은 새로운 신흥종교로서의 불교의 당면과제였다. 이 문제는 명상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회적인 자아의 문제를 설정하는 일이다.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은 어리석어 스스로를 알지를 못하니 마치 금수와도 같다. 스스로 바라문이 종성 가운데 제일이고, 현세나 미래에 청정하다고 스스로 말하는 것(自稱)은 허구이고 가짜이다. 오늘 나의 위없는 바른 도에는 이런 종성이 없다. 다른 사람은 악하고 하류라고 하나, 나의 법에서는 그렇지가 않다.7)

   

이것은 붓다가 당신의 인종차별에서 어떻게 평등을 주장하는지 보여주는 매우 절박하고 통렬한 설법이다. 인종차별이란 허구이고 가짜이며 법 앞에서 만민은 평등하다고 말한다.

이상으로 자아의 개념은 철학적, 심리적, 사회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세 관점은 위빠사나에 의해서 정화되어야할 세 측면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결국 정화란 무아에 대한 통찰이 다름 아니다. 위빠사나는 다만 현상만이 존재할 뿐, 그곳엔 자아가 존재하지 않음을 통찰하는 통로, 수단, 도구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위빠사나는 어떻게 실천되는가? 이점은 ������念處經������에서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하고 있다

 

비구여, 비구는 아란냐로 가고, 또는 나무 아래로 가고, 또는 텅 빈 장소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몸을 똑바로 세워 앉아서 면전(parimukhaṃ)에 주의집중()을 확립한다. 그는 주의를 집중하여() 숨을 마시고, 주의를 집중하여 숨을 내신다. 길게 숨을 마실 때는 길게 마신다고 알고(), 길게 숨을 내실 때는 길게 내신다고 안다.8)

 

여기에 의하면 위빠사나는 가부좌를 틀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앉아서 먼저 면전에 주의집중()을 확립하고 그런 다음에 분명한 앎[]을 이룬다. 여기서 호흡은 인식의 대상이고, 주의집중과 분명한 앎은 호흡에 지향된 인식의 주체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호흡과 그곳에서 확립된 알아차림을 제외한 어떤 다른 존재도 발견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이곳은 사회적인 차별이나, 형이상학적인 전제나 심리적인 동일시로서의 자아가 끊어진 자리(無我)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Vipassanā의 의미를 <현상을 본다>고 할 때, 중요한 점은 대상으로서의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사물보다는 그 사물을 보는 행위가 중요한 요점이다. 다시 말하면 호흡(呼吸)이나, (), (), (), ()에 관한 대상관찰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 양식, 태도가 더 중요하다. 결국 Vipassanā는 일상에서 말하는 선택과 버림이 있는 대상인식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를 들면 ānāpānasati[호흡법]에서 호흡[āna, apāna]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바로 sati[]가 중요하다. 대상이 되는 호흡의 상태, 그것의 거침이나 빠름이 중요한 관점이 아니다. 세계는 그렇게 거기에 놓여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의 방식으로서, 집중된 알아차림[sati]이 핵심된 관건이다.

이와 같이 대상을 해석하기 전에, 먼저 바라봄 그 자체가, 어떤 견해에도 물들지 않고 순박하게 정화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세계 혹은 현상이란 결국은 자아의 구성, 투사가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에 대한 해석이 중요한 과제가 아니라, 언제나 세계를 존재하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철학 및 심리학적인 중요한쟁점사항이 숨겨져 있다. 먼저 철학적으로는 <과연 대상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고서도, 바라보는 행위는 성립될 수 있을까>하는 점이다. ������念處經������에서 보이는 인식론의 입장을 볼 때, 초기불교는 바라봄 혹은 알아챔(sati)의 대상으로서 신()()()(), 그 현상 자체로서 존재한다[法有]는 입장을 결코 부인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뿐만 아니라, 이런 존재론적인 입장은 현대 남방 상좌부 수행전통에 의해서 충실하게 계승 발전시켜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신체의 움직임을 중시하는 마하시 수행체계9)나 신체에서 발생하는 느낌을 보다 중요한 관찰대상으로 간주하는 고엔카 수행체계에서도 ������念處經������을 근거하여10) 대상에 대한 집중된 알아챔을 강조한 점에서도, 이점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둘째의 쟁점사항은 심리학적인 측면으로서 심리적인 현상을 존재하는 그대로 관찰함에 있어서 어느 정도 가능할까의 문제이다. 외적인 사물을 관찰하는 일은 어느 정도 용이하지만, 내적인 자기 문제를 존재하는 그대로 관찰하는 일은 결코 쉽지가 않다. 대체로 억압하거나 아니면 회피하거나 합리화시키는 또 다른 심리적인 장애, 방어기제를 만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점에 대한 충분한 해명이 요청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