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빠사나와 사마타

상좌 대승 위빠사나에 대한 소고....김열권

통융 2018. 3. 10. 22:07

상좌․대승 위빠사나에 대한 소고

-마하시, 붓다다사, 원효 중심으로-

 

 

 

김열권 선생님(위빠사나 지도자)

 

 

 

불자라면 당연히 부처님이 걸어가셨던 길을 따라야 한다. 부처님의 법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변형되어 전승되어 왔지만 그 핵심 원리는 하나다.


 

맛지마니까야26에 의하면 부처님은 출가 후 그 당시 사문전통수행의 최고 경지인 사마타 8선정인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얻고도 깨달음을 실현하지 못하자 다시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중생의 나고 죽는 현상과 우주의 생성 소멸을 직시하시여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통찰하시고 12연기를 순관, 역관으로 꿰뚫어 보시고 생사 없는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구현하셨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4제 8정도로 체계화하여 중생들을 교화하기 시작하셨다. 이때 12연기를 순관(順觀). 역관(逆觀)하실 때 관(passami見,봄)과 지혜(janami知,慧,앎)를 이용하셨는데, 이것을 반야심경에서는 ‘ 오온을 반야로 조견(pasyati,照見)하여 공(空)을 실현 할 때 일체 고통이 소멸한다’ 고 하였고, 금강경에서는 ‘모든 상이 상아님을 보면 즉시 여래를 본다(若見諸相非常卽見如來) ’고 했다. 이것을 중국에서는 지견(知見)이라 번역 했다. 조견(pasyati), 즉견(drastavyam), 견성할 때의 견(見)이 지혜작용인 조견(觀)과 삿띠(마음챙김, 주시)의 중국식 표현인 것으로 본다.{*주)passami, pasyati, drastavyam의 어원이 √drs로 본다의 뜻이다.passami와 janami의 기능을 합한 것이 ‘있는 그대로 본다’, ‘통찰한다’등의 뜻이 내포된 vipassana라 할 수 있다. 대념처경에서는 sati, anupassi, sampajanna로 표현} 티벳 불교 역시 보리도 차제론 에서 12연기와 중관 유식중심으로 수행 체계를 세워가고 있다.


부처님이 생존해 계실 때를 초기불교라하고 그 당시 부처님의 육성이 담긴 팔리어 경전인 니까야와 산스크리트 경전인 아함경을 근본 불교의 교재로 정의한다. 불멸후 100-500년 사이 부파 불교가 18-20개로 나누어 졌으나, 현재는 남방의 상좌부 아비담마불교와 북방의 한국, 중국, 일본 그리고 티벳 등의 대승불교권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에서는 위빠싸나수행 위주로 설명하고 있으므로 다소 무리가 있지만 남방의 상좌 불교를 상좌 위빠싸나 , 용수이후의 인도불교와 북방 대승불교를 대승 위빠싸나로 정의한다.

필자는 간화선을 10년 하다가 1990년부터 위빠사나를 하게되었다. 미얀마에선 마하시 선사 방법을 주로 수행하면서 나중엔 태국의 붓다다사선사의 아나빠나삿띠도 겸수 했다. 다음에 이 두 수행법을 설명하고 향후 한국불교 수행 발전을 위해 원효선사의 대승위빠사나도 살펴 보았다.

 

 

 

1. 우 빤디따 선사의 위빠싸나

우 빤디따 선사(U Pandita sayadaw:1921~)는 근대 미얀마 위빠싸나 수행의 중흥조인 마하시 선사(1904~1982)의 수제자로, 이론과 수행을 겸비한, 현재 미얀마를 대표하는 위빠싸나 선사 중 한 분이다. 그는 1988년 방한, 승가사에서 국내 최초로 미얀마의 위빠싸나 수련 법회를 가졌다. 필자가 우 빤디따 선사로부터 본격적인 지도를 받은 것은 1990년 12월 말레이시아 페낭 섬에 있는 불교 명상원(MBMC)에서였다.

여기에서는 그의 법문 내용을 중심으로 필자의 설명을 덧붙여 위빠싸나 수행의 4가지 대상인 신(身), 수(受), 심(心), 법(法)의 사념처(四念處)에 대해 서술하고자 한다.

가. 신념처 (身念處, kayanupassana)

몸 (kaya)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집합으로 되어 있다. 이 4대의 상호 연관성과 그 생멸 원인을 무상@고@무아로 관찰하여 연기를 체험적으로 아는 것이다. 마하시 선사의 계열에서는 배의 움직임과 경행에서 4대 요소의 변화를 관찰하는 것이 그 수행상 특징이다.

나. 수념처(受念處, vedananupassana)

가). 괴로운 느낌 ; 부처님은 모든 느낌이 괴로움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고통의 참 성품을 알기 위하여 정진해야 한다. 수행을 하면 다리가 아프거나 몸이 가렵거나 고통스러운 감각 등이 일어난다. 고통이 일어나는 순간 즉각 관찰해야 한다.

나). 즐거운 느낌; 몸과 마음에서 즐거운 감각〔樂〕이 일어나는데, 주로 위빠싸나 지혜 16단계 4번째 생멸지(生滅智, udayabbay ñana)에서 많이 나타난다.

이때 즐거운 감각을 즉각 알아차리지 못하면 욕망이 일어난다. 대부분 즐거운 감정에 집착하여 더욱 즐기려고 하기 쉽다. 그러나 일어나는 즉시 알아차리면 욕망은 사라져 무상을 알게 된다.

다).중립의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대상을 만나면(예:무생물) 중립의 감각이나 감정이 일어나는데, 초심자는 이를 관찰하기가 쉽지 않다.

11번째의 평등지(平等智, sankharupekka ñana)에서는 중립의 감각이 많이 관찰되고, 그 이전 단계인 사라짐의 지혜〔壞滅智〕에서 평등지 이전까지는 무상, 두려움, 혐오감 등의 괴로운 감정이 많이 관찰된다.

다. 심념처(心念處, cittanupassana)

주된 대상(호흡이나 경행)에서 주시가 미끄러져 이탈할 때, 마음이 방황하기 시작한다. 망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을 일어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관찰하면 즉각 사라져 청정한 마음 상태가 된다. 마음 관찰에서는 마음상태 위주로 관찰된다. 관찰이 깊어지면 12연기의 흐름이 포착되고 이때부터 법의 관찰이 시작된다.

라. 법념처(法念處, dhammanupassana)

6감각기관 관찰

6 근(눈, 귀, 코, 입, 몸, 생각)과 6경(빛, 소리, 냄새, 맛, 촉감, 생각 대상)과 여섯 가지 식(識)이 일어나는 곳에서 삼법인〔無常, 苦, 無我〕이 포착되면서 인과(因果)의 흐름이 각조(覺照)될 때, 법의 관찰이 시작된다. 삼법인이 관찰되지 않으면 번뇌(kilesa), 업(kamma), 업보(vipaka)의 흐름에 빠진다. 여기서는 주로 열 가지 결박의 번뇌위주로 관찰 한다.

① 아름다운 소리를 들으면 소리에 대한 집착이 일어나 좀더 들으려는 욕망으로 행위의 결과가 나타난다. 이 소리를 들을 때 귀〔耳〕, 소리〔聲〕, 이식(耳識) 중 하나에 주시하면 여기에서 무상@고@무아를 보아 욕망의 무지와 인과의 사슬은 끊어진다.

② 경행과 배의 관찰에서도 몸(身), 4대 요소의 부딪침〔觸〕, 촉의 느낌〔觸識〕이 일어나는데 이 셋 중에 하나를 예리하게 파고들면서 관찰하면, 무상@고@무아를 본다. 나머지 눈, 코, 입에서도 마찬가지이다.(나머지 5근에서도 마찬 가지이다.)

③ 의식 관찰에서는 의근(意根), 법(法), 의식(意識)의 세 가지가 작용한다.

의 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생명을 이어가는 의문인 바방가(bhavaoga citta)이고 다른 하나는 의근으로 심장기관을 말한다. 의(意)의 대상인 법에는 모든 종류의 심(心), 의(意), 식(識), 5감각기관, 물질, 심소(心所), 관념, 열반 등이 포함된다. 의식은 생각하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를 포함하는데, 이 의식이 관찰되지 않으면 실체가 없는 의식의 흐름을 생각의 주체, 즉 [나]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법념처 중 나머지 5장애, 오온 관찰과 7각지 사성제는 지면 관계상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2. 붓다다사선사의 아나빠나삿띠

붓다다사의 저서 붓다의 호흡법, 아나빠나삿띠(Anapanasati)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 분의 특징은 남방의 전통적인 아비담마나 청정도론보다는 니까야 경전 위주이다.

아나빠나사띠의 열여섯 단계중 첫 번째 호흡관찰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겠다.

(1) 길게 숨을 내쉴 때 “길게 숨을 내쉰다(들이쉰다).”라고 알아차린다.(2) 짧게 숨을 들이쉴 때 “짧게 숨을 내쉰다 (들이쉰다).”라고 알아차린다. (3) “온몸을 체험하면서 숨을 내쉰다(들이쉰다).”라고 자신을 다잡아 수행한다. (4) “몸의 형성을 고요하게 하면서 숨을 내쉰다(들이쉰다).”라고 자신을 다잡아 수행한다.

이 “첫 번째 네 단계”에서 명상 수행자는 “두 번째 네 단계”와 “세 번째 네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네 번째 통찰수행(vipassanā-bhāvanā)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그러면 몸 관찰 에서 제일 중요한 ‘어떻게 몸의 형성을 고요하게 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설명 하겠다. 이것은 집중 수행(Samatha)과 통찰 수행(vipassana)의 방법 중 한 가지를 통해서 가능하다. 수행자가 집중하면 할수록, 그의 호흡은 더욱더 미묘해진다. 또는 호흡이 올바른 방식으로 너무나 미세해져서 선명한 영상인 닮은 표상(patibhāga-nimitta,)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이 두 가지 현상들은 모두 집중에 의해 호흡을 고요히 한데서 오는 결과이다. 통찰 수행(vipassanā)은 4대 요소로부터 파생된 물질(Upādāya-rūpa), 즉 4대 요소보다 더 미세해진 다양한 성질들과 특성들을 정밀하게 관찰할 때, 호흡은 한층 더 고요해진다.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을 결정하는 “조건들(paccaya)”의 발생 형태와 원인을 명확히 꿰뚫어 볼만큼 정밀히 관찰할 때, 호흡은 더더욱 미세해진다. 그리고 마음과 물질(nāma-rūpa)에 있어서의 무상, 고, 무아를 알아차릴 때, 호흡은 한층 더 미세해지고 고요해진다.

아나빠나삿띠 16단계 중 두 번째, 감각관찰 네 단계의 수행 방법은 다음과 같다.

제5단계: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쉬면서 희열(삐띠)을 체험한다.

제6단계: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쉬면서 행복(수카)을 체험한다.

제7단계: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쉬면서 마음의 형성(心行)을 알아차린다.

제8단계: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쉬면서 마음의 형성(心行)을 고요하게 한다.

두 번째 네 단계(5단계~8단계)에서는 “느낌”이 명상주제가 된다.

가. 무명(無明)과 갈애(渴愛)와 업(kamma, 業)과 감각접촉(phassa, 觸) 등이 일어남에 의해서 또는 그러한 것들에 조건 지어져(因緣)서 느낌(vedanā, 受)이 일어난다. “무명(avijjā, 無明)”이란 실상을 알지 못하거나 잘못 알아 착각하는 것을 말한다. 이로 인해 생하는 느낌이 있는 것은 무명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느낌의 허망한 가치나 의미에 현혹되어, 환영(幻影)에 불과한 느낌이 영원한 실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집착하게 되는 것은 바로 무명(無明)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무명이 일어날 때, 그와 함께 느낌이 또한 일어 난다.”라는 말은 바로 이러한 것을 의미한다.

어떤 종류의 느낌을 경험하기를 갈망할 때, 우리는 찾거나 행동하여 바라는 갈애(taṇha, 渴愛)로부터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느낌이 업(業, kamma)에 의해 야기된다는 것은 업의 과보(果報, vipāka)에 의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촉은 느낌의 가장 가까운 원인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세 가지의 접촉, 즉 감각기관(六根), 감각대상(六境) 그리고 의식(六識)의 접촉이 느낌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고 있다. 느낌의 네 가지 원인인 무명, 갈애, 업, 감각접촉의 상호관계를 고찰하면, 느낌이라는 것이 그것들의 결합기능에서 일어나기 시작한다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 즉 무명은 느낌의 보편적 근원(根源)이고, 갈애는 느낌의 방향을 지시하는 동인(動因)이 되고, 업은 중간에서 느낌을 지탱시키는 원인(原因)이며, 감각접촉은 느낌의 가장 가까운 원인(近因)이 된다. 수행자가 “느낌이 분명히 일어나는 것”을 명확히 볼 때, 그는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동안 일어나는 느낌을 또렷하게 알아차리게 된다.

나. 수행자는 느낌이 여러 가지 인연에 의해 일시적으로 나타나 “현전(現前 upaṭṭhāna)”하는 것을 무상하고, 고통스럽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보게 된다. 즉 공(空)의 현전을 분명하고 직접적으로 알 때까지 계속하여 이러한 관찰을 계발해야 한다.

마음관찰 네 단계

제9단계: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쉬면서, 마음을 체험하기

제10단계: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쉬면서, 마음을 기쁘게 하기

제11단계: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쉬면서, 마음을 집중하기

제12단계: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쉬면서, 마음을 자유롭게 하기


제12단계 중심으로 설명해 보겠다

“ 마음을 자유롭게 하면서”라는 표현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 의미인, “마음을 자유롭게 하기 또는 마음에서 제거되어야 할 것을 제거하기”란, 초보 수준에서부터 완전한 몰입 수준에 이르기까지 집중(선정)을 계발하면서 마음을 장애(nīvaraṇa)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두 번째 의미, 즉 “무명(無明, avijjā)에서 유래하는 집착으로부터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란, 마음을 해탈하게 하는 것은 어떤 물질적(rūpa) 또는 비물질적(nāma) 현상들을 관찰대상으로 취하여 그것이 무상, 고, 무아라는 것을 내관하는 아나빠나삿띠 수행으로써 가능하다. 관찰대상에 대한 내관이 완전히 이루어질 때마다, 삼법인을 완전히 깨달을 수 있다.

이 때 마음은 탐욕(rāga, 貪), 증오 또는 분노(dosa, 瞋), 어리석음(moha, 痴), 자만(māna,自慢), 그릇된 견해(diṭṭhi, 邪見), 의심(vicikicchā, 疑), 나태와 무기력(thīna-middha, 無氣力), 불안(uddhacca, 不安), 양심 없음(ahirika, 無慘), 수치심 없음(anottappa, 無愧) 등으로부터 해방된다. 이것은 또한 10가지 결박의 번뇌인 족쇄(saṁyojana)들에 속해있는 용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지혜의 하나인 명지(vijjā, 明知)의 힘에 의해 직접적으로 제거해야 한다.

네 번째 4단계인 법의 관찰 수행법은 다음과 같다.

제13단계: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쉴 때마다 무상(無常)을 관찰하기

제14단계: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쉴 때마다 탐욕이 사라져 감(離貪)을 관찰하기

제15단계: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쉴 때마다 소멸(滅)을 관찰하기

제16단계: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쉴 때마다 보내버림(出離)을 관찰하기

아 나빠나삿띠 수행에서 무상을 관찰할 때, 수행자는 고와 무아의 철견을 포함하는 깊고 분명하며 완전한 실상을 보게 되는 것이 핵심이다. “모든 조건지어진 것들은 무상하다.” 즉 5온(五蘊, pañca-khandhā), 12처(六根과 六境, ajjhattikāni-bāhira āyatanāni), 12연기(十二緣起) 등 모든 법들은 무상하다는 것이다.

① 5온(五蘊) 관찰 ; 선정을 수행할 때 일어나는 희열(기쁨)과 행복감, 또는 우리가 실제로 체험하는 기타 종류의 느낌을 관찰함에 의해 느낌(受)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다. 인식(想, saññā)이 느낌(受, vedanā) 다음에 일어남을 볼 수 있고, 느낌에 대한 인식, 지각, 평가 등이 어떻게 생멸변화 하는지 알아차림 할 수 있다. 마음의 형성(行, saṅkhāra)들을 꿰뚫어 보는 것도 인식의 경우와 동일한 방식이다. 식온(識薀, viññāṇa-kkhandha)을 꿰뚫어 보려면, 감각기관(六根)과 접촉한 감각대상(六境)을 분명하게 의식하는 데에 초점을 맞춰서, 왜 그리고 어떻게 의식이 일어나는지, 어떤 방식으로 의식이 현전하다가 사라지는지 등을 알아차림해야 한다. 외적 감각 대상, 즉 6경(六境)은 모두 5온(五蘊)에 포함되며, 접촉 대상으로서 실제적인 역할을 할 때, 이 또한 바로 그 자리에서 알아차림해야 한다.

② 6근(六根) 관찰 ; 각각의 감각 기관은 그에 상응하는 외적 대상을 알아차린다. 예를 들면, 눈(眼)이 시각적 대상(色)을 보고 그것을 의식할 때, 우리가 그 대상을 보기 이전에는 마치 눈이 존재하지 않는, 즉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시각적 대상이 눈과 접촉할 때, 눈은 의미를 갖게 된다. 이것이 “눈이 존재하게 됨”이 의미하는 것이다. 눈이 대상을 보는 기능을 완수하고 나면, 보아야 할 또 다른 대상이 다시 나타날 때까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된다. 수행자는 이와 같은 눈이라는 관념 또는 눈의 일어남, 일시적 지속, 그리고 사라짐을 관찰한다. 귀, 코, 혀, 몸, 마음(意)도 그 원리가 동일하다. 그 감각 기관의 무상함을 볼 수 있다. 무상하다는 것을 보아서,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이와 연관된 수・상・행・식(受・想・行・識)도 무상하다.

③ 12연기(十二緣起)의 관찰; 12연기의 각 양상들이 그 기능을 실행하는 매순간 정확하고 면밀히 알아차림 할 때, 그것의 무상함을 볼 수 있다. 간단히 말하면, 수행자는 눈(眼)이 형상(色)과 접촉할 때, 무명(無明)이 업의 형성(行), 의식(識), 정신과 몸의 과정(名色), 기능을 할 준비가 된 감각기관(六入), 각각의 총체적인 감각접촉(觸), 느낌(受), 느낌에 대한 욕망 또는 갈애(愛), 강하고 격렬한 집착(取), 생성 작용(有), 생겨나는 과정(生), 그리고 슬픔과 비탄 등의 고통과, 그 모든 것들이 부서지고 사라짐(老死) 등이 어떻게 상호의존적인 방식에 의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지 알아차림 해야 한다. 이런 모든 것을 “상호의존적인 12연기의 완전한 작용”이라고 부른다. 무명에서 시작하는 각각의 요소들은 연속적으로 계속 그 다음 요소들을 불러일으킨다.

전체적으로 말하면, 수행자는 연기의 각 양상들이 실제로 그 기능을 이행하며 동시에 연속적인 조건화를 실행할 때, 그것의 무상함을 밀밀성성하게 관찰해야 한다. 즉 우리는 미혹으로 인해 정신적 형성(行)을 일으키는 무명(無明)을 꿰뚫어보아야 한다. 우리는 또한 정신적 형성(行)이 의식(識)을 조건지을 때, 그것의 활성화 능력이 항상 창조적이며 실제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꿰뚫어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의식(識)이 정신과 몸의 과정(名色)을 조건 짓는 기능을 실행할 때만, 그 의식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볼 수 있다.

의 식은 그 성질에 따라 정신과 몸의 과정(名色)을 불러일으킨다. 의식 요소(viññāṇa-dhātu)의 힘에 의해 정신과 몸의 과정(名色)이 일어난다. 단지 의식 요소만 있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창조해 낼 수 없다. 그러나 의식(識)이 정신(受, 想, 意, 觸, 作意)과 몸의 과정(名色)과 접촉할 때, 의식의 힘은 현전한다. 마찬가지로, 정신과 몸의 과정도 의식과 관련되지 않는다면 생겨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식이 없다면 정신 또는 몸의 느낌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신과 몸(名色)이 감각기관들, 즉 눈, 귀, 코, 혀, 몸, 마음 등을 통하여 느낌으로 현전할 때만이 진정으로 정신과 몸의 과정(名色)을 알 수 있다. 정신과 몸의 과정(名色)을 연(緣)해서 이러한 감각기관들은 느낌이 일어나게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심지어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생성작용 혹은 존재(有), 노사(老死)와 같은 고(苦)에 있어서도 그 의미와 설명은 위와 동일하다.

수행자는 인연생기(因緣生起)를 관찰할 때 그 12가지의 모든 양상들이 무상함을 본 것처럼, 인연소멸(因緣消滅)을 관찰할 때도 그 12가지의 모든 양상들이 무상함을 상상이나 관념이 아닌 실제로 일어나는 대로 분명하게 관찰함으로써 완전한 각성에 도달한다.

이 아나빠나삿띠의 네 번째 부류의 수행들은 법의 관찰로 분류된다.

네 번째 부류의 첫 번째 단계(제13단계)는 무상, 고, 무아를 관찰하는 것인데 이 무상, 고, 무아는 공(空)으로 압축될 수 있다. 이 공(空)의 본질은 집착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만약 집착을 고집하면 고통의 결과를 가져온다.

네 번째 부류의 두 번째 단계(제14단계)는 집착을 놓아버리는 이탐(離貪)을 관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때는 집착으로부터 오는 두카(苦)인 재난과 위험을 보기 때문이다.

네 번째 부류의 세 번째 단계(제15단계)는 모든 것에는 어떠한 실체도 없는 소멸(滅)을 보는 것이다. 집착은 단 한 순간의 차갑고 뜨거움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집착은 어떠한 참 자아도 갖고 있지 않는 것이며 그러한 집착은 어떠한 종류의 자아도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것의 자아를 완전히 소멸시켜 버리는 방법으로 관찰해야 한다.

네 번째 부류의 마지막 단계(제16단계)는 일체 모든 것을 보내버려 참으로 비어있음(眞空)으로서, 회향하는 방식으로 주시하고 관찰한다. 그때의 마음은 닙바나(Nibbāna, 涅槃)를 실현했다고 말해진다. 마음은 공(空)안에서 더 이상 ‘나’라고 집착할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이 네 번째 부류를 수행하는 것은 담마의 네 측면(無常觀, 離貪觀, 寂滅觀, 出離觀)을 단도직입적으로 즉각 관찰하기 때문에 “법(Dhamma)의 관찰”이라 한다.

3. 원효선사의 대승위빠사나

원효선사의 대승위빠사나는 대승기신론과 금강삼매경론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금강삼매경론 위주로 고찰해 보겠다. 《금강 삼매경론》에는 여러 관법이 많이 등장하지만 가장 근본불교에 가까운 것은 무상관(無常觀)과 무생관(無生觀)이다. 이것을 금강 삼매경론과 일본의 사토 시게끼박사의 <<원효의 화쟁론>> 논문을 참조해서 살펴 보겠다.

① 무상관은 12연기를 관하는 것으로 두 가지 자기 집착을 제거한다. 행동하고 업을 짓는 자기가 있다는 집착과 자기는 항상 변하지 않는다는 집착이다. 12연기를 관하면 자신의 힘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무상이므로 그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도 없다. 또한 몸은 마음에 의지하므로 마음이 없다면 몸도 없다. 마음과 인과가 공(空)이므로 12지도 없다.

② 무생관에서도 5식은 5근(目, 耳, 鼻, 舌, 身)과 5경(色, 聲, 香, 味, 觸)에 의지하고 식, 근, 경에 의지해 물질(色)이 있으므로 인연 따라 생멸하는 것이지 얻을 수 있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5식의 성립에는 6, 7, 8식이 있지만 여기에는 색법이 없으므로(空) 그 실체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심상(心相,8식)을 본래 무생(無生)으로 볼 수 있다면 보는 관(觀)도 적멸에 들어 일심이 된다. 즉, 여덟 가지 식이 적멸하여 귀일심원(歸一心源)이 되며 이것이 지혜로 발현 될 때 전식득지 된다. 유식삼성 역시 망상의 경계인 변계소집성(變界所執性)은 주․객이 파해지고, 의타기성(依他起性)의 본체로서의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주․객이 하나인 무이(無二)로 철견 되어 귀일심원(歸一心源)이 실현되는 것이다. 이를 금감삼매에 의해 얻어진 불지(佛智)라 한다. 식(識)을 떠난 법(法)이 진공(眞空)이다. 37조도품 역시 이와 같은 정관(正觀)으로 볼 때 절대공(絶對空)인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무이이불수일(無二而不守一)의 귀일심원(歸一心源), 요익중생(饒益衆生)이 되는 것이며 화엄경의 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이를 달리 설명하면 모든 심상(心相)을 무생(無生)으로 볼 수 있다면 보는 마음(能觀心)도 불생(不生)이므로 공적(空寂)에 들어간다(이는 유식관에서 대상인 소취를 무(空)로 보면 주관인 능취 역시 무(空)로 되어 아공법공을 실현한다와 유사한 상태다*주참조). 이 본공심이 귀일심원이 되어 아공법공으로 여래장일미지원(如來藏一味之源)이며 무이이불수일(無二而不守一)로 일체중생을 자비로 제도하는 요익중생의 실천이 발현된다. 즉, 무생행(無生行)으로 아공법공이 되었을 때는 진여공과 지혜와 자비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초심자도 아공법공의 상태가 어느 정도 이해되고 체험되면 직심(直心), 심심(深心), 자비심에 의한 절대 신심의 대발심이 일어나므로 대 원력에 의해 성불(成佛)로 가는 대 보리심을 일으킬 수 있다. 이를 실천 하는 것이 6바라밀이다. 이것이 남방의 위빠사나와 다른 원효의 지혜, 진여(空), 자비가 하나로 되는 대승위빠싸나이다.

*주) 유식관은 카말라실라의 수습차제론(임 승택 석사논문에서 발췌)중심으로 살펴 보겠다.

처음에 수행자는 다른 사람들이 외계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물질적인 것을 관(觀)한다. 그것은 식과 다른 것인가. 혹은 꿈속에서의 경우처럼 식이 현현된 것인가. (원자의 실재성을)보지 못한 수행자는 (이 세계의)모든 것은 마음뿐이며 외계의 사물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관(觀)하게 된다. 유식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수행자는 주관이 대상과의 관계에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상이 없을 때에는 주관도 없으며 따라서 마음은 주‧객을 떠나므로 무이 (無二, advaya)라고 관( 觀)해야 한다. 이처럼 진여를 대상으로 하고 무이성(無二性)으로 특징지워지는 관(觀)에 머물면서 수행자는 ‘유식(=有相唯識)’이라고 하는 사실도 초월해야 한다. 이와 같은 유식(=유상유식)을 초월한 후에 수행자는 두가지 구분(=능취‧소취의 구분)이 없는 식(=無相唯識)마저 초월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수행자는 사물이 자신에 의해서도 다른 것에 의해서도 생겨나지 않으며 주관적인 능취‧객관적인소취가 비실재라면 그 양자와 다른 것이 아닌 무이의 식마저 진실로 있을 수 없다고 관해야한다. 즉 무이지 마저 나타나지 않는 지혜에 머물러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할 때에 수행자는 비로소 일체의 모든 사물은 본성을 갖지 않는다고 하는 수습에 설 수 있게 되며 여기에 머물면서 개념지가 섞이지 않는 무분별삼매에 들어간다. 수행자가 무이지 마저 현현하지 않는 (무분별)지에 머물 때 그는 최고의 지위에 서게 되며 대승의 진리를 보게 된다.

수행자가 지혜관에 의해서 모든 분별은 유와 무의 두 가지 분별에 의해서 포괄되는데 (실제로는 이 두 가지를) 포괄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포괄되는 것도 없다고 보는 것이 무분별의 수행이다. 그것을 수행하는 수행자는 모든 분별을 멸하기 때문에 번뇌장과 소지장을 바르게 단멸한다. *주) 능가경 3권 집일체 불법품에서는 인무아(我空)와 법무아(法空)의 구체적 관찰법이 나온다. “오온과 18계와 6입에서 ‘나’, ‘내것’이 떠나고… 마음의 분별, 애착을 떠나는 것…”을 인무아의 지혜라 했고, “오온, 18계, 6입에서 모든 상(相)과 분별을 떠나 서로 의지하는 인연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심(8식), 의(7식), 식(6식)과 5법(相, 名, 分別, 眞如, 正智)의 체상을 모두 여읜 것으로 보며, 모든 인연의 실체는 없는 것으로 관찰하는 것이 법무아의 지혜이다….”고 했다. 아공인 인무아는 자신의 내부의 분별심을 떠나 무아로 보는 것이라면 법공인 법무아는 만물의 자체성품까지도 공(空)함을 보는 것이다.

 

 

 

4. 상좌,대승 위빠싸나의 만남

마하시수행은 몸 위주로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현상이전의 들고 남을 반복하면서 10가지 결박의 번뇌들을 제거해 나간다. 붓다다사의 수행은 오온 12연기 중심으로 관찰해 나가고 원효의 대승관법 역시 12 연기와 유식 위주의 수행이다. 굳이 차이점을 지적 하자면 남방은 현상위주의 수평관이라면 북방은 본성으로 바로 들어가는 회광반조 위주의 입체관이다. 그러나 양자 모두 니까야의 4과에 대한 검증법(10가지 결박의 번뇌:유신견, 계금취견, 의심, 성냄, 감각적 욕망, 색계, 무색계에 대한 욕망, 불안, 아만, 무명)에 따라 미세하게 철저히 반복해 가면 언제 가는 번뇌가 다한 열반에 이를 수 있다. 자신의 성향에 맞는 수행법과 발심, 노력, 스승의 지도력이 관건이라고 본다.

1). 불법의 핵심은 사념처, 사제, 12연기

불법수행의 핵심은 사념처 중심으로 요약할 수 있다. 중국의 영명연수선사도 종경록에서 사념처를 떠나서 불법을 논할 수 없다고 했다. 즉 사념처에서 근본무명을 제거하여 부처와 아라한과를 이룰 때 상좌․대승 불법의 만남은 이심전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핵심 내용은 사성제 12연기라 할 수 있다.

반 야경, 금강경, 능가경, 열반경등은 물론이고 화엄경 10지품에서도 사념처의 핵심인 4제 12연기 중심의 수행이고, 법화경 안락품에서도 인연을 공(空)한 것으로 관한다. 대승경전은 사념처를 공(空)의 관점에서 설명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사념처의 핵심인 사성제를 생멸사제로 보느냐 무생․무량․무작사제로 보느냐 12연기도 생멸연기로 보느냐 진여연기로 보느냐 역시 공관(空觀)의 문제이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마음을 생멸 중심(오온, 18계, 12연기)으로 보지만 때로는 대중부에서 처럼 절대 의식으로 보는 대목도 찾을 수 있다. *맛지마니까야49에서 ‘...한계가 없고, 특징이 없는 무한히 빛나는 의식이 있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 ‘이 마음은 빛나는 것이다. 그 마음이 다가오는 번뇌로 오염 된다.’, 앙굿따라니까야 11권 등에서 절대의 마음상태를 설한 내용을 발견 할 수 있다.[주*전재성 주해에 의하면 나까무라 하지메는 이 부분을 절대의식이라 했다. 주** 전재성 주해에 의하면 이 부분을 여래장의 근거를 제공하는 부분으로 설명 했다.]

2)상좌,대승위빠싸나는 경전에 근거한 체험 기준으로

완전히 깨친 부처님이나 아라한을 만나지 못했으면 근본경전에 따라 체험으로 증명해야 한다. 깔라마경에서도 말씀하셨듯이 불법은 맹목적인 믿음이나 논쟁이 아니고 체험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상반된 주장은 실제 수행으로 증명해야 할 절호의 좋은 기회이다. 쌍윳따니까야 케마카경에서도 보면 아나함과에서 아라한이 될 때 오온에서 12연기를 관하고, 4권 54 종자품과 2권 자양분을 보면 5온 각각에서 12연기가 작용하고 또한 12연기 각 지분이 5온의 흐름이다. 그러므로 5온과 12연기에서 무상, 고, 무아를 계속 관찰하면서 근본무명을 근절할 때 생사 없는 열반은 실현되는 것이다. 쌍윳따 니까야2권에서도 “삼세제불이 모두 12연기로 성불 하셨고, 수다원과에서 12연기 순관 역관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물론 완벽한12연기관은 아라한, 부처에서 가능 할 것이다. 이것이 남․북방 불자 모두가 밀륭카의 독화살을 뽑고 따라야 할 이정표이다.

 

 

 

5. 향후 한국불교의 과제

불법도 시대와 환경에 따라 그 원리는 하나로 같지만 각기 다른 특성을 보이면서 변천해 왔다. 어떤 수행법이든, 남방이든 북방이든 나의 수행법이 최고라는 편견에서 벗어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지리적, 문화적 환경을 이해하고 그 수행법의 특성과 장단점을 함께 체험으로 파악하여 우리에게 맞는 수행법을 계발해 나가야 한다. 그래서 현재 한국 불교가 당면한 올바른 수행법의 고민에 대한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싶다.

첫 째, 부처님 근본경전인 니까야와 아함경에서 불법의 핵심인 정견(正見)을 확립하고 근본경전을 기준으로 모든 수행법을 받아들여야한다. 남방 위빠싸나의 장점은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항상 부처님 원전인 니까야를 참조해서 수행하며 수행법이 체계적이고 다양하다. 남방위빠사나가 현상위주의 수평적 관찰이지만 정밀하게 세분화되어있고 검증법(열가지 결박의 번뇌)이 철저하게 시설되어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번뇌가 다한 구경각의 아라한의 경지에 간다.

현재 우리나라는 미얀마의 마하시 선사가 체계화한 위빠싸나를 받아들이다가 최근에는 쉐우민, 파욱선사 등의 수행법도 받아들이고 있다. 남방에는 많은 수행법들이 있다. 특히 태국의 붓다다사의 정통 아나빠아나삿띠(호흡관찰법), 아짠문의 염불 위빠싸나와 12연기관 등 사마타수행까지 폭넓게 수용해서 우리나라 불법수행 발전에 이바지하도록 해야 한다.

둘 째, 현재 북방의 대승 위빠싸나 수행법은 단절된 것이나 다름없다. 남방 상좌위빠싸나를 잘 소화하여 대승 논서나 경전에 맞는 위빠싸나를 복구해서 근본적인 부처님 수행법 확립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 중관파의 현상과 공을 함께 수행 하는 법, 유가행유식파의 4력과 10지, 중관유식파의 공성에 바탕을 둔 대비관 등은 남방아비담마중심의 수행에 보완이 될 수 있다. 그리고 티벳의 수행법도 과감히 받아들여야한다. 특히 티벳의 기존수행법인 자비관, 죽음관, 인과관, 만트라 등의 사마타 수행은 모든 수행법의 기본이 될 수 있다.

셋 째, 중국에서 위빠싸나가 수용될 때는 초기에는 근본 사념처를 수행했으나 중국문화적인 특성과 천태지자의 5시교판의 영향으로 근본경전인 아함경을 소승경전으로 폄하했다. 이로 인하여 불법의 핵심인 사성제, 12연기, 유식관이 정착되지 못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화두수행법(서장에서 유식 부분도 찾을 수는 있지만)은 능엄경이나 화엄경, 열반경 등에 바탕한 불성(佛性)이나 성기(性起)사상 중심이다. 12연기와 유식을 보완하면 부처님의 수행법과 일치 한다고 본다. 종경록 2권에 보면 돈오후 보림법으로 12연기관과 유식관이 나온다. 현재 조사어록에만 의존하고 있는 법거량에 병행해서 부처님 경전에 입각한 검증법 즉 니까야나 아함경의 4과를 검증하는 열가지 결박의 번뇌와 능엄경의 50마를 점검법으로 채택하여 화두타파 후 보림 수행법을 보완하면 보다 완벽한 수행법이 될 것이다. 현재 남방불교는 아비담마의 현상적인 관찰 위주이고, 한국불교의 화두수행은 본성(本性), 공(空)의 체득위주이다. 남방의 현상관과 한국 화두선의 본성관이 상호 보완될 때 보다 완벽한 근본불법의 수행법이 복구되리라 본다.

넷 째, 원효의 기신론의 본성관과 금강삼매경론의 12연기관, 유식관을 바탕으로 한 대승 위빠싸나의 복구와 염불수행도 함께 체계화하여 모든 수행자들의 개성과 근기에 맞는 지금 여기에서 12연기를 바로 관찰하는 효과적인 수행법들을 계발해 나가야한다.

다 섯째, 현대인들에게 효과적으로 포교하기위해 현대 학문 특히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부처님 경전에 바탕을 둔 다양한 해석과 시각을 제시하여 이들의 한계성 극복을 돕는 한편, 담마의 특성을 정확히 이해하여 담마 고유의 역할을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특히 심리학은 수행자 자신의 발심과 성찰을 위해 반드시 공부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남방 상좌위빠싸나와 티벳불교를 받아 들이고 있다. 남방상좌위빠싸, 티벳수행, 화두는 여러 많은 불법수행방법 중 하나이다. 표면적인 수행방법론 보다 정견에 바탕을 둔 그 심오한 법칙과 근본원리에 대한 통찰이 매우 중요하다. 확고한 정견만 갖추면 수행법은 다양 할수록 효과적으로 수행 할 수 있다고 본다. 불법은 역사적으로 5세기를 주기로 큰 전환점이 있어 왔다고 한다. 남방은 아비담마중심이고, 티벳은 나로 6법과 보리차제론 중심이고, 중국은 중국고유의 선종 중심이고, 일본은 종파불교 중심이다. 법에 있어선 한국이 가장 열려있는 나라이다. 국수주의의 관점에서 봐서는 안 되겠지만 한국이 근본불교가 복구되어 정착하기에 가장 훌륭한 토양을 갖고 있다. 다함께 경전에 의거 체험으로 확인하면서 근본 불법을 확립할 때 도덕력과 법력으로 우리자신과 이웃사회 국가들을 법(Damma)으로 선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