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융의 이야기

세심이란?

통융 2018. 1. 27. 05:44

세심(洗心)
 

금강산에 ‘마하연’이라는 참선하는 선방이 있었다.

금강산 아래에 온천이 하나 있었는데 그 주인장은 불심이 매우 깊어 스님들에게 목욕비를 받지 않았다.

스님은 목욕을 다 마치고 문밖으로 나가면서 주인장에게 인사라도 잘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말했다.
“주인장, 시원하게 목욕 한 번 잘했습니다. 몸을 씻으니 개운하군요.”
그 때 주인은 웃으며 스님에게
“스님! 몸은 물로 씻어서 깨끗한데 마음은 무엇으로 씻으셨습니까?”

몸은 물로 씻는데 마음은 어떻게 씻습니까?


'여러분들은 마음을 어떻게 세심(洗心= 마음을 닦는 것)하겠습니까?

당신이 마음을 보여주거나 나타내면 씻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마음을 어떻게 보여 줄 수 있습니까?

이미 세심이 되었습니다.'............ 달마와 혜가의 문답이다.


“수행자여 항상 경전을 가까이하여 마음속에 간직하라.

마치 옷에 때가 묻으면 잿물(비누)로 몇 번이고 빨아 깨끗이 하는 것처럼

마음에 때가 낄 때에는 경전의 말씀으로 마음의 때를 씻어야 할 것이니라.”<불반니항경>


1)

스님들과 차를 마시는데 한 스님이 목욕탕 주인장 처럼 질문을 했다.

- 스님 마음을 어떻게 씻습니까?

차를 한 잔 마셨다.


알아치리지 못한 스님이 다시 질문을 했다.

-스님 잡을 수도 볼 수도 없는 마음은 어떻게 세심한다고 하십니까? 


제가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 네.

마음은 있다고 생각 하십니까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 그야 마음을 일으키면 있고 일으키지 않으면 없지요.


마음을 내고 내지 않는 '마음을 분별하지 않는 것'이 세심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심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마음을 챙겨야 한다. 마음을 닦아야 한다 세심을 해야한다.

수 천 번을 이해 하고 설명해도 아무 쓸모없는 공염불입니다.

우리가 경전을 뜻만 달달 외우고 쓰는 경우도 이와 같습니다. 지식은 늘어서 설법은 잘 할지 모르지만 법행이 따르지 못합니다.

머리로 이해하는것과 몸으로 체득하는 깨달음은 은산철벽을 오르는 차이다. 


- 그러면 어떻게 세심을 깨닫습니까?

할!

알겠습니까?

( 마음의 본체성을 이해하고 깨닫는 것으로 세심의 공한 이치며 시작이다.)

만약 그 스님이

-할! 했다면

또 없습니까?  (질문을 할 것이다. 이는 마음을  보여주는 실상의 여여한 도리이다.)

- 찻잔은 둥글고 차 탁은 네모났습니다.


다음은요? ( 이 질문은 마음의 나타내 쓰임을 확실히 알고 있는지를 정검하는 것이다.)

스님이 차를 잔에 따뤄서

- 차나 한 잔 하시지요.

혹은 따뤄준 차를 말 없이 마신다.

------ 이렇게 문답처를 통해  마음이 오간다면 이는 세심하는 법을 아는 것이며 마음을 바로 알고 깨닫고 있는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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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렇지 못한 경우를 보자.

마음은 있다고 생각 하십니까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 그야 당연히 있지요. 혹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지오.라고 답 할 때

손가락을 하나 들어 올리며 이것은 무슨 마음입니까?
이것은 손이 합니까? ᆞ
마음이 합니까?


 - 손가락을 들어 올리면

그것이 세심입니다.

- 답을 못하고 설명을 늘어 놓을 때

이 손가락을 들어 보여주는 이치를 깨닫는 것이 세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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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그런데 왜 세심이라 하십니까?
그대처럼 마음을 어떻게 닦는지 궁금해 하기 때문입니다.

- 마음도 내지 않고 바보처럼 있는것이 세심입니까?

당신이 어떻게 바보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이야기 하십니까.

바보는 바보 마음이고 당신은 당신 마음입니다.

지금 당신이 질문하는 생각만 내려 놓으면 세심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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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세심을 어떻게 합니까?

- 마음을 보여주시면 닦아드리겠습니다ᆞ

이런 답을 한 사람이 있다면


손가락을 하나 들어 보인다. 

그대는 내 마음을 봤습니까?

내 마음을 보여드렸는데 그대는  어떻게 세심합니까?


- 손가락을 들어 올린다면

설명이 필요 없지요.

(아니면 1)의 문답처럼 체상용의 마음을 정검해 본다.)


만약 답을 못하고 머뭇거리거나 장황한 설명을 한다면

그대는 마음과 세심의 이치를 확실히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냥 지식으로 이해할 뿐입니다.


그 사람의 눈 높이에 맞는

 자비심으로 마음의 청정법을 안내 해 줘야 한다.

이것이 세심법이다.


세심법은 말로 설명하기위한 수단이지

세심법은 없다.

세심법이 있다.고 하는 순간에 세심은 천리만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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