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이 깨달은 법의 본질을 알게하는 삼처전심에 대해서
소승의 덧말을 해 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삼처전심은
불교의 조사선이 교외별전(敎外別傳)되었다는 근거가 되는 설이다.
삼처전심이라 함은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영산회상거염화(靈山會上擧拈花)·니련하반곽시쌍부(泥連河畔槨示雙趺)을 말한다.
多子塔前 分半座 (다자탑전 분반좌)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반으로 나누어 앉게 하다.
이 글은 『雜阿含經』에서 나온 것인데, 多子塔에 대해서는 『辟支論』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중본경>의 <대가섭품>있다.
선종에서는 이들 삼처전심을 교외별전의 유일한 근거라 하여 매우 중요시하였다. 우리 나라의 경우 보조국사는 경절문(徑截門)을 세웠지만 삼처전심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 말의 진정국사(眞靜國師)가 지었다는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에서는 염화미소 등을 내세웠다. 또 조선시대의 청허(淸虛)는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세존이 삼처전심한 것이 선지(禪旨)가 되고, 일대소설이 교문(敎門)이 되었다.”고 선언하였다.
또, 「교외별전곡(敎外別傳曲)」에는 ‘세존의 염화에 가섭이 미소’, ‘삼처전심이 제1구’라는 표현이 있고, 『선교석(禪敎釋)』에서는 ‘분반좌 거염화 시쌍부’ 등을 들었다. 그 뒤로 선의 표치를 내세우는 데는 반드시 삼처전심을 간판으로 내세우게 되었다. 조선 후기의 백파(白坡)는 『선문수경(禪門手鏡)』에서 삼처전심을 조사선과 격외선(格外禪)에 배당하였다.
법화경의 방편품에서 내지거일수(乃至擧一手) 손을 들거나 합장을 하거나 개이성불도(皆已成佛道)라 했다.
그렇듯이 삼처전심이 부처님이 설하였든 아니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삼처의 전심을 이야기 속에 진리의 뜻을 바로 세겨서 앎이 필요하다.
먼저 불교는 삼법인과 삼귀의 처인 3불사상이다.
다시 말해서 채상용의 이치로 불법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3처 전심도 그에 맞춰서 만들어 놓은 것이며
연기작용의 본질을 수행의 정도에 따라 나눠 놓은 것이다. .
물론 앞뒤의 순서는 별 의미가 없다. 불법 자체가 중도의 도리이기 떄문이다.
1, 실체(體)는 空을 알아차리는 지혜
영산회상거염화(靈山會上擧拈花)
영산회상에서 부처님이 꽃 한송이를 들어 보이고 가섭이 미소로 답을 하는 장면이다.
염화미소라고 하는데 부처와 가섭의 이심전심(以心傳心)법으로 주고 받는 깨달음이다.
이는 공의 이치를 깨달은 자만이 이 도리의 실상을 볼 수가 있다.
즉 반야의 이치를 깨달아야 색즉공이며 수상행식이 공함을 알아 법안의 안목이 열리는 것이다.
불법의 실체는 나에서 시작한다.
나라는 것은 큰 의미의 자성을 말하며 부처 혹은 법신을 말하며
그 법신인 실체는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지혜다.
다시 말해서 있는 그대로를 보기 위해서는 너와 내가 구분되지 않는 견성이 필요하다.
견성이란 것은 모든 말물은 연기되어 제행이 무상하다는 것을 아는것,
다시 말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한 순간도 정지됨이 없이 흘러가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공의 이치를 터득하는 것이다.
물론 지식으로 공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공의 실체를 체득하는것, 체험하여 공이 되어 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임을 일게 된다.
이 도리를 깨달은 자는 불법의 본체 즉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인 體를 보는 것이다. .
반야의 지혜를 증득한 것으로 색즉 공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다.
혜안이 열이면 볼 수 있는 법문이다.
용수와 천태대사의 3제원융에서 空에 속한다. 금강경의 無主이며 화엄경의 理法界이다.
수행의 初禪의 견처이고 사마타 수행의 지(止)의 과정이고 사념처에서는 心法처에 관한 肉眼의 견처이다
가섭은 그 이치를 깨달았기에 부처님이 가섭에게 법을
"여래에게는 깨달음의 눈(正法眼藏)과 열반의 미묘한 마음(涅槃妙心)과 모습 없는 참 모습인 묘한 진리(實相無相)가 있다. 이것은 문자로는 드러낼 수 없는 것으로 교 밖에 별도로 전한 것이니(不立文字 敎外別傳) 지혜가 있든 없든 인연이 되면 증득할 것이다. 오늘 이것을 마하가섭에게 부촉하니 미래세에 모든 부처의 수기를 받아 성불하게 될 것이다."
전법하게 된다.
2, 실상(相)은 연기적 현상(假)을 보여주는 지혜
니련하반곽시쌍부(泥連河畔槨示雙趺)이다.
불법의 실상인 법을 깨닫는 조견의 단계이다. 실지실견에 실유불성이다.
여기서는 몸인 색이 공한 이치와 마음인 수상행식이 공한 이치를 동시에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색은 앞에서 있는 그대로의 실체를 말 했듯이 색은 다시말해 우리의 몸이다.
마음의 그릇인 몸이 공하게 되면 마음은 담길 곳을 잃게 되어 수상행식이 공하게 된다.
즉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면 수상행식이 역부여시라고 한다.
부처님이 관밖으로 두발을 내어 보인다는 말은 현실적으로 죽은 사람이 발을 내어 놓을 수가 없다.
다만 가설이라 해도 그 의미를 보자는 것이다.
두발은 부처님이 일생을 맨발로 걸어다니면서 불법을 전한 최고의 수단이며 가장 소중한 몸의 밀부다.
그래서 삼귀의를 할 때 귀의불 양족존이라는 말을 쓴다.
즉 부처님 발은 실지 실견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죽은 사람이 어떻게 발을 내 밀수 있는가,
실체가 없는 허상임을 간접적으로 암시한 것이다.
공의 실체는 생사가 둘이 아니다.
그래서 죽은 부처가 살아 있듯 두 발을 내어 보여 준다.
그것도 두타제일의 가섭제자에게....
불법의 실상은 연기작용으로 나타난 허상이지만 있는 그대로가 일체중생은 실유불성임을 바로 보고 깨달아라는 뜻이다.
불수오염이요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다.
법안이 열려야 알 수 있는 법문이다.
용수와 천태대사의 삼제원융에서 假에 속한다. 금강경의 無相이며 화엄경의 事法界이다.
3,실용( 用)은 자비 행인 중도이다.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나누어 앉다(多子塔前分半座)
불법은 중도실용에 있다. 지혜를 자각하여 있는 그대로의 쓰임이 중도이고 불교이다.
부처님은 자신의 자리를 반 쪽 내어주는 자비행을 통해 불교의 대의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연기법으로 보면 너와 내가 둘이 아니기 때문에 자비와 연민은 깨달은 자 모두의 행 그 자체가 중도이다.
부처와 가섭이 둘이 아님을 보여준다.
용수와 천태대사의 삼제원융에서 中에 속한다. 금강경의 無住相布施이며 화엄경의 理事無碍 法界이다
다음 내용은
<대한불교조계종교육원불학연구소 , 조계종 전국선원수좌회 , 조계종교육원 불학연구소>에서 기록되어 있는 삼처전심을 살펴보자.
부처님께서는 언어를 통한 가르침뿐만 아니라 언어를 떠난 가르침인 선법禪法을 통해 중생들의 본래면목인 부처님 마음을 전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세 곳에서 가섭 존자에게 마음에서 마음으로 법을 전하셨는데(以心傳心), 이것을 '삼처전심三處傳心' 이라 한다. 조사선과 간화선은 이 삼처전심에서 유래하고 있다.
삼처전심의 내용은 『선문염송禪門拈頌』을 비롯한 선어록에 자주 등장하는 가장 대표적인 화두이다. 그런데 이것이 후대의 기록인 선어록에 등장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이것을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선종에서 사상적 근거를 마련하고자 지어낸 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삼처전심의 말씀은 부처님의 경전에서도 볼 수 있다. 경전에 나타난 이러한 사실을 선종이 발달하면서 더욱 강조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는 경전과 조사어록에 근거하여 삼처전심을 살펴보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1.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다(靈山會上擧拈花)
영산회상이란 부처님께서 법을 펼치던 영축산靈鷲山의 법회장면을 일컫는 말이다. 이 첫 번째 기연은 "부처님께서 꽃을 들어보이시자 가섭 존자가 미소를 지었다"는 '염화미소拈華微笑' 라는 말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염화미소는 '범천이 부처님께 여쭈어 의심을 풀다'라는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에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이 때 대범천왕이 영산회상에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어 사십년이 넘는 동안 갖가지 법을 베푸셨습니다. 이 어찌 희유한 법이 아니겠습니까?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는 법이라 하겠습니까? 원컨대 세상의 모든 사람과 하늘 중생을 위하여 가르침을 주시옵소서"라고 말을 마치고 금색으로 된, 천 개의 잎이 달린 연꽃(바라화)을 부처님께 바쳤다. 그리고 물러나 몸으로 법상을 만들어 중생들에게 설법해 주실 것을 진실로 간절히 청하였다.
이 때 부처님께서는 법상에 앉아 갑자기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자, 인천人天의 백만억 대중은 아무도 그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침묵하였다. 그러나 이 모임 중에 오직 한 존자 마하가섭만이 얼굴에 조용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을 하고 바로 서서 온화한 모습으로 침묵하였다.
이에 부처님게서는 마하가섭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여래에게는 깨달음의 눈(正法眼藏)과 열반의 미묘한 마음(涅槃妙心)과 모습 없는 참 모습인 묘한 진리(實相無相)가 있다. 이것은 문자로는 드러낼 수 없는 것으로 교 밖에 별도로 전한 것이니(不立文字 敎外別傳) 지혜가 있든 없든 인연이 되면 증득할 것이다. 오늘 이것을 마하가섭에게 부촉하니 미래세에 모든 부처의 수기를 받아 성불하게 될 것이다."
- 『大梵天王問佛決疑經』「拈花品」
선은 "부처님께서 꽃을 들어 보이시자 가섭 혼자만 빙그레 웃었다"라는 이 뜻 깊은 기연에서 시작된다. 부처님께서는 한 송이 연꽃을 말없이 들어보임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전했고, 가섭은 바로 그 자리에서 그 소식을 깨달아 말없이 미소를 지은 것이다. 바로 이심전심 염화미소이다.
예부터 많은 선지식들은 염화미소에 대한 자신의 안목을 드러내 이 기연이 갖는 선의 의미를 밝혀 왔다. 혜심慧諶 선사의 말을 살펴보자.
혜심慧諶 선사의 말을 살펴보자.
설령 부처님이 연꽃을 들어 보이고 가섭이 미소를 지으며,
달마가 면벽하고 혜가가 머리를 끄덕였다고 해도
이것은 철면피가 수치를 모르는 짓과 같다.
- 『眞覺國師語錄』「示空藏道者」
선종의 책에 보면 '염화미소를 불립문자의 종지를 드러내는 선종의 중요한 법문으로 보는 것이 세상의 일반적인 관점이다.
그러나 혜심 선사는 꽃을 드신 부처님과 미소를 짓는 가섭 존자를 함께 몽땅 '수치를 모르는 짓'이라 하여 염화미소에 대한 선사의 안목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모든 상대적 주관과 객관을 뛰어넘어 바로 종지를 보이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신 것이 부질없는 수고를 한 것이며, 가섭이 환하게 미소지은 것은 머리 위에 머리를 얹은 것과 같은 격이다'라고 했다.
*통평- 철벽이나 수치니 하지말게 꽃은 꽃이고 미소는 미소일 뿐 그냥 여래는 悉見悉知이요 卽見如來이다.
꽃 한송이 들어 보이고 ,, 빙그레 웃어 보게.....
2.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나누어 앉다(多子塔前分半座)
부처님께서 가섭 존자와 자리를 나누어 앉으셨다는 이른바 '분반좌分半座'에 대한 내용은 초기 경전인 본연부本緣部의 『불설중본기경佛說中本起經』에 실려 있다.
세존께서 사위성 기수급고독원에서 대중을 위하여 법을 말씀하실 때였다. 천룡귀신 사부대중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이 때 마하가섭이 남루한 모습으로 부처님께 다가왔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멀리서 보고 찬탄하시기를, "잘 왔구나. 가섭아" 하시고, 미리 법상의 반을 나누셨다가 앉으라고 명했다. 가섭이 물러나 무릎을 꿇고 아뢰었다.
"저는 바로 여래의 끝줄 제자인데 자리를 나누어 앉으라 하시니, 어찌 그 뜻을 받들 수 있겠습니까?"
여러 대중이 생각하였다.
'이 노장에게 무슨 기이한 덕이 있기에 세존께서 자리를 나누어 앉으라고 명하실까? 이 사람이 뛰어난 분일까? 오직 부처님만이 밝히시리라.'
이 때에 부처님은 대중들의 생각하는 바를 살피시고 의심하는 바를 해결하고자 "가섭의 큰 행이야말로 성인과 같음을 논하리라"고 하시며 또 말씀하셨다.
"나는 사선四禪의 선정을 닦아 마음을 쉬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손실된 것이 없는데, 가섭 비구 또한 사선이 있고 선정으로 인하여 정의定意를 얻었느니라." ‥‥(중략)‥‥
부처님께서 본생담을 말씀하시며 더욱 성스러운 덕을 나타내어 "비구 가섭이 일체 해탈하여 모두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의 뜻을 내었으며, 법의 가르침과 이름이 널리 퍼지니 즐거움을 받지 않겠는가"라고 하셨다.
- 『佛說中本起經』卷下「大迦葉如來品 第十二」
위 경전에서는 부처님께서 가섭 존자와 자리를 나누어 앉으신 일을 중요한 일로 다루고 있다. 선어록에서는 이 일이 다자탑多子塔 앞에서 벌어졌다고 하여 '다자탑전분반좌'라고 일컫고 있다. 선어록에 실린 내용을 간추려 말하면 이렇다. 부처님께서 다자탑 앞에서 설법하고 계실 때 가섭 존자가 그 곳에 왔다. 법회장은 자리가 빈틈없이 꽉 차 있었고 아무도 가섭 존자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가섭 존자를 부르시어 자리를 나누어 함께 앉으셨다. 대중들은 그 뜻을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가섭 존자는 홀로 그 뜻을 알아차렸다.
정혜 초신定慧超信 선사는 이 기연을 이렇게 평하고 있다.
자리를 나누어 앉아 은밀하게 주고받음이여!
얼굴에 바로 침을 뱉어 줌이 마땅하도다.
이렇게 하지 않고 그냥 버려 두었으니
자손들이 두고두고 재앙을 면할 수 없게 되었네.
『禪門拈頌』第4則
*통평- 무슨 헛소리가 많은가, 그냥 자리를 내어주고 반 쯤 앉아보면 될 것을.....
3. 사라쌍수 아래에서 두 발을 관 밖으로 내보이시다(沙羅雙樹槨示雙趺)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보이신 일'을 곽시쌍부槨示雙趺라 한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발제하'라는 강가 언덕에는 두 그루의 사라沙羅나무가 있었다. 부처님은 이 두 그루의 사라나무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부처님은 열반하신 뒤 이 사라쌍수 아래에서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미셨는데, 이 일을 일컬어 '사라쌍수하 곽시쌍부'라 한다. 이 일에 대하여 초기 경전인 『대반열반경후분大般涅槃經後分』에는 이렇게 실려 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자 뒤늦게 도착한) 가섭 존자가 더욱 슬퍼하면서 제자들과 더불어 오른쪽으로 일곱 번 돌고, 눈물을 글썽이며 장궤 합장하고 게송으로 슬프게 탄식하였다.
"괴롭고 괴롭습니다. 대성인 존자이시여! 저는 지금 가슴을 도려내는 듯 고통스럽습니다. 세존이시여, 멸도滅度하심이 어찌하여 이렇게 빠르십니까? 대비하신데도 저를 잠깐 기다리지 못하셨습니까? ‥‥중략‥‥
가섭이 목메어 슬피 울며 이 게송을 끝내자, 부처님께서 큰 자비로 두 발을 천 개의 살이 달린 바퀴 모양으로 나타내어 관 밖으로 내보이시고, 그것을 돌려가며 가섭에게 보여 주셨다. 천 개의 살이 달린 바퀴에서 천 가닥의 빛이 나와 사방의 일체 세계를 두루 비췄다. 이 때에 가섭과 모든 제자들이 부처님의 발을 보고, 일시에 천 개의 살이 달린 바퀴 모양의 발에 예배하였다.
- 『大般涅槃經後分(二卷本)』卷下
부처님께서 가섭 존자에게 꽃을 들어 보이신 일과 마찬가지로 자리를 나누어 앉으시고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보이신 이 일은 부처님께서 말없이 존자에게 본래 마음을 전한 소식이다.
설봉 요종雪峰了宗 선사는 이 기연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 일을 알면 곧 쉬리라!" 다시 "가섭이 재빠르게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면 심하게 속임을 당할 뻔했다. 부처님의 의중을 알고자 하는가?"라 한 뒤, 선상을 치고는 말했다. "산산조각이 났다!"
『禪門拈頌』第37則
*통평- 선상을 치는 순간 방망이 날아 드는구만.... 뒷 말로 비단 치마에 똥을 싸는가.
그냥 오롯이 두 발을 뻣어 보이면 될 것을............
이와 같이 부처님의 삼처전심은 조사선문에 와서는 모두 화두의 원형이 되고 있다. 영축산에서 가섭 존자에게 마음을 전하신 '염화미소'가 화두인 셈이다. 물론 화두는 본래 한결같은 부처 자리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처음이니 끝이니 하는 수식어를 붙일 수 없다. 다만 역사적인 전거를 들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위에서 각 선사들이 言舌한 내용은 <대한불교조계종교육원불학연구소 , 조계종 전국선원수좌회 , 조계종교육원 불학연구소 간하선>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글이다. 이 선사들의 言舌에 통평(通評)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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